우리마을(쌍림면) 곳곳에 숨어있는 재미있는 지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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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우리마을(쌍림면) 곳곳에 숨어있는 재미있는 지명은?

쌍림면(雙林面)-1
우리들의 선조들은 조상의 핏줄을 밝히고 보존하기 위해 족보를 만들고, 후손들은 족보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그것을 이어가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살고 있는 고장의 구석구석 내력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고령군 8개 읍·면 각 마을의 재미있는 지명 유래 중 이번호부터는 쌍림면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고령군 8개 읍면 증 하나다. 1914년 군·면 폐합 시 상동면(上洞面)의 하거(下車), 구고(九皐), 덕곡(德谷), 산주(山州), 석사(石寺), 부례(扶禮), 어동(漁洞), 송정(松亭), 백산(栢山), 신촌(新村)의 10개 동과 또 하동면(下洞面)의 귀원(貴院), 송림(松林), 매촌(梅村), 상가(上伽), 하가(下伽), 산당(山塘), 초곡(草谷)의 9개 동을 합해 쌍동면(雙洞面)이라 해서 하거, 산주, 신촌, 백산, 귀원, 송림, 매촌, 합가, 산당 9개 동으로 개편 관할했다.
유천면(鍮泉面)의 평지(平地), 안화(安和), 가부(加副), 박곡(朴谷)의 4개 동과 안림면(安林面)의 안림(安林), 동부(東部), 서부(西部)의 3개 동과 고곡면(高谷面)의 월막(月幕), 용동(龍洞), 산막(山幕), 국전(菊田), 반룡(盤龍), 고곡(高谷), 죽성(竹城), 칠동(七洞), 신촌(新村)의 9개 동을 합해 임천면(林泉面)이라 했다.
평지, 안화, 박곡, 안림, 월막, 용동, 고곡의 7개 동으로 개편 관할했다.
1930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쌍동면과 임천면이 병합해 쌍동면의 雙자와 임동면의 林자를 따서 쌍림면이라 하고 현재에 이른다. 지형이 세모로 돼있어 동은 대가야읍과 우곡면, 남쪽은 경남 합천군 덕곡면과 쌍책면, 율곡면, 서쪽은 합천군 묘산면, 야로면 북쪽은 대가야읍과 경계를 이룬다.

 

■ 고곡리(高谷里)
 

고곡1리 마을전경.JPG

 

고곡1리경로당.JPG


⑴ 연혁(沿革)
본래 고령군 지역으로 지형이 북처럼 생겨 고실(高室) 또는 고곡(高谷)이라 했다. 조선조 때 고곡면이 됐으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죽성동, 칠동, 신촌동을 병합해 고곡동이라 하고 임천면에 편입됐다가 1930년 임천면과 쌍동면이 쌍림면에 병합되고 1988년 5월 1일 동이 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⑵ 지명 유래(地名 由來)
* 얘맹이, 야망이, 야망(野望), 야좌동(野坐洞) : 조선초 이야망(李野望)이란 사람이 마을 개척 당시 식수용으로 샘을 팠는데, 찬물이 나서 그 사람의 이름을 따서 야망이라 했으며, 음이 변해서 야마이 얘맹이라고도 불린다.
또 마을 앞에는 넓은 들이 전개돼 달이 뜨면 앉아서도 달을 제일 먼저 볼 수가 있어 들야(野) 바라볼 망(望) 또 앉을 좌(坐)를 써서 야망(野望) 또는 야좌동(野坐洞)이라 한다.
* 죽성리(竹城里), 대곡(大谷), 대고개 : 국도변에서 약 200M 떨어진 서쪽에 위치한 아담한 마을로서 옛날부터 이곳에는 대나무가 무성해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 죽성리(竹城里)라 불렀다. 또 대나무골이라 해서 대(竹) 곡(谷)이 한문 표기 잘못으로 대곡(大谷)이 된듯하다. 또 이 마을에서 얘맹이로 넘어가는 조그마한 고개가 대밭 샛길로 가는데 대나무고개를 줄여 대고개라 불렀으며, 이것이 마을 이름으로 된 것 같다. 현재 30여 농가가 살고 있다.
* 칠등(七嶝) : 대가야읍 지산3리 큰골에서 쌍림 월막까지 일곱 개의 산등성이가 있고 그 밑에 위치한 마을이라 칠등이라 한다.
* 새땀, 새마, 신촌(新村) : 야망에서 갈라져 새로 생긴 마을이라 새마을, 새마, 새땀, 신촌이라 했으며, 20여 농가가 살고 있다. 월성이씨(月城李氏)들이 주로 살며 국도변에서 서쪽 산비탈에 위치한다.
* 어순금, 어순권, 고실, 고곡, 어성(於城), 능성인(綾城人) : 구대희(具大喜)라는 사람이 의성(義城 )에서 이곳으로 이주해 살면서 그 사람의 고향 이름을 따서 의성이라 했다. 한자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소리 나는 대로 기록 어성(於城)이 된 것이다. 또 의성을 잘못 표현 소리 나는 대로 부르고 편리한대로 우리말로 불리니 어순금, 어순권이 된 듯하며 마을이 북처럼 생겨 고실(鼓室 큰 골짜기 위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으로 고곡(高谷)이라 한다. 또 대가야국 때 국왕이 이곳에 왔다고 어순금이라고도 한다.
* 삼거리(三距里) : 이 마을은 국도변에 위치해 대가야읍 안림 방면 또 해인사 방면의 세 갈래의 갈림길에 모여진 마을이라 삼거리라 했다. 지금은 88올림픽 고속도로 IC가 있다. 그곳에 있던 집들은 IC 신설로 북쪽 대가야읍쪽 50M 지점에 새로운 마을이 형성됐다.
⑶ 기타
* 고곡리 고분군(高谷里 古墳群) : 가야시대 고분으로 추측되며 일정 때와 그 후에 도굴돼 현재는 형태만 남아 있다.
* 고실골못 : 고실못, 고곡지, 고소지로도 불린다. 고실에 있는 못이다.
* 김덕령장군묘(金德齡將軍墓) : 절골에 있는 큰 묘다. 이 지방 사람들은 임진란 때 큰 공을 세운 김덕령 장군의 묘라고 하지만, 김덕령 장군의 묘는 전라남도 광주광역시 무등산 아래에 있다. 김덕령 장군묘라고 구전되는 이 묘가 누구의 묘인지 확인이 필요하다.
* 도암서원(道岩書院) : 칠등 뒤에 있는 서원이다. 처음에는 현종 8년(1667년) 대가야읍 연조리에 세워 김면(金沔), 이기춘(李起春)을 배향했다가 그 다음해에 현 위치로 옮겼다. 정면 3간의 목조와가이다.
* 독짓골 : 삼박골 넘어 골짜기로 옹기를 만들던 곳이 있었다.
* 동정지골 : 어성동 옆에 있는 골짜기로 오동나무 정자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등자티(등자고개) : 새땀 북쪽에 있는 조그마한 고개로 말안장의 등자처럼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 목개울골 : 고실못골 오른쪽 골짜기다.
* 삼박골 : 김덕령 장군묘 왼쪽골짜기로 옛날 이곳에 삼을 많이 심어 붙여진 이름이다.
* 성줏골 : 김덕령 장군묘 오른쪽에 있는 골짜기다.
* 썩은덤 : 삼거리 동북쪽 국도변 벼랑으로 대가야읍과 경계되는 지점이다. 이 벼랑의 돌들이 마치 오래돼 썩은 것 같이 보여 붙여진 이름이다. 바로 가까이에 새로 생긴 음식점 몇 집과 간이 휴식처로 많은 사람들이 쉬어간다.
* 아랫삼거리 : 삼거리 아래에 있는 삼거리로 대가야읍과 쌍림면 월막으로 가는 세 갈래 길이 있어 붙여진 마을이다. 지금 쌍림농공공단이 있어 많은 상가들이 들어서 새마을을 이루고 있다. 애맹이 앞 마을이다.
* 애맹이들 : 애맹이 앞에 있는 들이다.
* 안산 : 애맹이 앞에 있는 산이다.
* 안산밑들 : 애맹이 앞에 있는 안산 밑에 있는 들이다.
* 오래밭-모퉁이들 : 칠등 입구의 들로 오래밭(올벼밭?)의 모퉁이가 돼 붙여진 이름이다.
* 원들, 원평(院平) : 새땀 앞에 있는 들로 이조 때 안림역에 딸린 안성원(安性院)이 있었다.
* 재실골 : 도암서원 쪽 재실이 있는 골짜기다.
* 절골 : 재실골 너머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 이곳에 절이 있었다.
* 칠등고개 : 칠등현이라고도 한다. 애맹이에서 대가야읍 지산리로 넘어가는 고개로 일곱 등성이가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파군들 : 파군평이라고도 한다. 썩은덤 앞의 들로 대가야국 때 신라군을 크게 파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송암 김면 장군 묘(松岩金沔將軍墓)
김면 장군은 1541년 조선 중종 36년 지금의 고령군 개진면 양전리에서 태어나 호를 송암(松岩)이라 하고 선조 때 공조좌랑에 임명됐으나 관직에 뜻이 없어 사퇴하고 성리학에 몰두해 후학을 양성했다. 1592년 선조 25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해 5월 11일 고향인 개진면 양전리에서 관군이 패하자 “나라가 위급한데 목숨을 바치지 않겠느냐, 성인이 국가의 존망이 어려운데 글만 읽고 있으란 말인가”라고 창의하니 삽시간에 그를 존경하는 많은 백성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송암은 모여든 의병들에게 “의병은 오직 의(義)로서 기병(起兵)했으니 마땅히 관군의 통솔을 받아야 하고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민폐를 끼치지 말고 오직 의로움으로 행동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의병 된 목적이 어디에 있겠느냐”라고 했으니 그의 인품을 충분히 알 수가 있었다.
송암은 고령, 거창 두 고을의 군졸을 거느렸는데, 참모는 곽준위(郭逡緯)였다. 모여든 사람들은 대개가 농민들이라 싸움에 경험이 없는 자들이지만 장군의 명령에 따라 거창, 지례, 금산, 개녕에서 적을 막으니 규율이 엄숙하고 군용은 장했다.
임진년 6월 합천군수로 제수됐고, 그해 11월 26일에는 나라에서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으로 임명돼 군사 4천여 명을 이끌고 대장산성(大丈山城:현 고령군 우곡면 도진동)과 무계산성(茂溪山城:현 고령군 성산면 무계동)을 중심으로 집결시켰다.
그러던 중 왜선 두 척이 낙동강을 따라 내려오는 것을 알게 된 송암은 전선 두 척을 불사르고 왜병 1600여 명을 사살하고 우리 궁중에서 사용하던 물건들을 다시 빼앗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에게 보낸 유명한 무계대첩이다.
또 창원에 거점을 두고 중부 경남 일대를 둔 왜장 고하야가와 다가가게(小早川降累)는 1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금릉 지례에서 거창으로 남하하는 정보를 입수한 송암은 전멸을 시켰는데, 바로 우척현대첩(牛脊峴大捷)이다.
그 외 개산포, 두곡(현 쌍림 고곡) 사랑암대첩(沙郞岩大捷) 진주원병 등 대승을 이끌었다.
1593년 선조 26년 선산의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금릉군 하리 진중에서 병상에 눕게 돼 그해 3월 11일 지지유국 부지유신(只知有國 不知有身)이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 “오직 나라 있는 줄 알고 내 몸 있는 줄은 몰랐다”라고 했다.
금릉군 하리에서 거창 곰냄이(能陽)까지 들것으로 운구해 이곳에 안장했다. 1593년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임명됐다. 이곳 칠등 묘소에는 선생의 서원이 복원됐다.
* 쌍림농공단지 : 현 쌍림면 고곡리에 조성된 공업단지인데 1988년 12월 26일 착공해 89년 10월 31일 완공했으며, 공사비 59억 1천만 원으로 7만1천485평의 면적에 36개 업체가 입주했다.
<다음호에 계속>
고령문화원 발행 고령문화 제7집 ‘高靈地方의 마을史’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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