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최씨(永川崔氏) 부사공파(府使公派), 사정공파(司正公派), 사직공파(司直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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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영천최씨(永川崔氏) 부사공파(府使公派), 사정공파(司正公派), 사직공파(司直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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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암서원, 법산 입향조 최항경 삼부자를 불천위로 모신 서원(성주군 수륜면 참별로 1번지)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시조(始祖) 최한(崔漢)
① 시조 최한(崔漢)은 전주최씨(全州崔氏)의 시조 최균(崔均)의 10세손으로 고려 의종과 명종 때에 삼중대광 신호위 상장군(三重大匡 神號衛 上將軍)을 지냈고 공을 세워 연산부원군(燃山府院君)에 봉해졌음으로 후손들이 전주최씨(全州崔氏)에서 분적(分籍)하여 최한(崔漢)을 시조로 하고 옛 지명인 연산(燃山)이 영천으로 변경됨에 따라 영천(永川)으로 본관으로 삼았다.
② 영천최씨(永川崔氏)도 신라 사량부(沙梁部) 촌장 소벌도리대인(蘇伐都利大人)를 원조(元祖)로 하고 있다.
(2) 문무겸전(文武兼全) 잠영세족(簪纓世族)이며 충절(忠節)의 가문(家門)
고려 말 최초로 화약을 발명해 이를 사용하여 진포(鎭浦)에서 왜선 500척을 전멸시킨 최무선(崔茂宣)을 비롯해 조선 초 안평대군과 필명(筆名)에서 쌍벽을 이루었던 최흥효(崔興孝) 등 훌륭한 인물들을 배출한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잠영세족(簪纓世族)이다. 또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 창의기병(倡義起兵)하여 국가의 위난(危難)을 극복하는데 앞장선 충절(忠節)의 가문이다.
(3) 분파(分派)
총제공파(摠制公派), 판서공파(判書公派), 군수공파(郡守公派), 정헌공파(正憲公派), 목사공파(牧使公派), 부사공파(府使公派), 사정공파(司正公派), 사직공파(司直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찬성공파(贊成公派), 영성부원군파(永城府院君派) 등으로 분파(分派)되었다,
(4) 영천최씨(永川崔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고령군 관내에 의하면 영천최씨(永川崔氏)는 40가구 12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부사공파 최자섭(崔自涉)의 후손은 운수면 법리 잣밭골에, 사정공파 최후(崔后)의 후손은 덕곡면 가륜1리에, 사직공파 최공여(崔公閭)의 후손은 성산면 어곡리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최완(崔玩)
시조 최한(崔漢)의 아들로 태어났다.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후 상찰사(上察使)를 지내고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와 조의대부(朝議大夫)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를 증직받았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② 최승주(崔承澍)
생진(生進) 최상의(崔尙義)의 아들로 태어났다. 봉순대부(奉順大夫) 전호위상호군(典護衛上護軍)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③ 최윤기(崔允琪)
봉순대부(奉順大夫) 전호위상호군(典護衛上護軍)을 지낸 최승주(崔承澍)와 예빈정(禮賓正)을 지낸 황보(皇甫) 구(球)의 따님 황보(皇甫)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와 좌우위보승랑(左右衛保勝郞)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④ 최영(崔英)
최소(崔佋)의 아들로 태어나 시중(侍中)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⑤ 최흡(崔洽)
재종형(再從兄) 최원도(崔元道)의 차남 일(壹)을 입양했다. 최흡(崔洽)은 성주이씨(星州李氏) 농서군공 이장경(李長庚)의 외손(外孫)이라 처음으로 성주에 천거(遷居)하였다. 관직은 삼사좌윤(三司左尹) 벼슬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⑥ 최일(崔壹)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지낸 최흡(崔泣)의 아들로 태어났다.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를 지냈다.
(2) 조선시대
① 최흥효(崔興孝)
자는 백원(百源), 호는 월곡(月谷)으로 초명은 효흥(孝興)이었으나 흥효(興孝)로 개명하였다. 판군기시사(判軍器寺事)를 지낸 최일(崔壹)과 영인(令人) 김해송씨(金海宋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종 11년(1411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1414년 승문원 (承文院) 부교리(副校理)로 있을 때 명(明)에 보내는 자문(咨文)을 잘못 작성하여 파직당하였다. 이후 관직에 복귀하여 인녕부판관(仁寧府判官)을 지냈으나 세종 2년(1420년) 상주문(上奏文)에 날짜를 넣지 않은 것이 또 문제가 되어 익산에 귀양 갔다가 그 해 말에 복직되었다. 이후 사간원(司諫院) 우헌납(右獻納), 병조정랑(兵曹正郎)을 거쳐 예문관(藝文館) 직제학(直提學)으로 치사(致仕)했다. 공은 대외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주로 담당하는 한편, 필사와 관련된 국가의 업무도 병행하였다. 초서(草書)와 예서(隸書)를 잘 썻다. 태종이 죽자 세종 6년(1424년) 세종의 명으로 왕실의 발원을 위해《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사경(寫經)했다. 문종 2년(1452년) 노인(老人)의 자격으로서 가요(歌謠)를 바치니,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의 벼슬을 제수하였다. 그의 필적으로는 『근묵(槿墨)』에 초서로 쓴 「두목시 염석유(杜牧詩 念昔遊)」가 유일한 진적(眞蹟)으로 전한다.『해동명적(海東名蹟)』·『동국명필(東國名筆) 등의 법첩에도 초서 필적이 모각(模刻)되어 전한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② 촤자섭(崔自涉)
초휘는 자척(自滌)이고 호는 의재(義齋)이다. 부사(府使) 최계성(崔繼性)과 참판(參判) 오숙사(吳淑史)의 따님 숙부인(淑夫人) 밀양오씨(密陽吳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선현감(旌善縣監)을 지냈다. 족보상에는 세조 때 장인 순흥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과 사위 최자섭(崔自涉)이 동시에 순절(殉節)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조선왕조실록을 참고하면 단종복위를 도모하다가 실패로 끝나자 사육신(死六臣) 관련 연루자(連類者) 70여명이 처형되었을 때 그도 세조 1년(1455년) 11월 9일 교수형에 처해지고 가산이 적몰(籍沒)되었던 반면 순흥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은 금성대군(錦城大君) 이유(李瑜)가 함께한 단종복위운동이 사전에 발각되어 처형된 것은 세조 3년(1457년)이다. 정조 15년(1791년) 2월 21일 신원(伸冤)이 이루어져 영월 단종 장릉 배식단(配食壇)의 별단(別壇)에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매년 한식날에 향사를 지낸다. 후손들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기리기 위하여 고령군 운수면 법리 잣밭골에「정선현감(旌善縣監) 최공(崔公) 순절기적비(殉節記蹟碑)」를 세웠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③ 최자(崔滋)
사정(司正)을 지낸 최계손(崔繼孫)과 이승종(李承宗)의 따님 영인(令人) 성산이씨(星山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통정대부(通政大夫) 벽동군수(碧潼郡守)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④ 최하(崔河)
사정(司正)을 지낸 최계손(崔繼孫)과 이승종(李承宗)의 따님 영인(令人) 성산이씨(星山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사직(司直)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⑤ 최희호(崔希浩)
벽동군수(碧潼郡守)를 지낸 최자(崔滋)와 김숭례(金崇禮)의 따님 숙부인(淑夫人) 해평김씨(海平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령현감(高靈縣監)을 지냈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동서지간(同壻之間)이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⑥ 최사철(崔師哲)
자는 명보(明保)이며 참봉(參奉) 최유(崔裕)와 통훈대부(通訓大夫)를 지낸 성세신(成世臣)의 따님 영인(令人) 창녕성씨(昌寧成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추천으로 장령(掌令)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⑦ 최항경(崔恒慶)
자는 덕구(德久)이고 호는 죽헌(竹軒)이다. 처사 최정(崔淨)과 연창군(延昌君) 이학수(李鶴壽)의 따님 완산이씨(完山李氏) 사이에서 명종 15년(1560년)에 태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조 38년(1605년) 생원시에 입격했다. 벼슬에는 뜻이 없었다. 오암정사(鰲巖精舍)를 짓고 위기지학(爲己之學)과 궁행실천(躬行實踐)에 힘썼으며, 이때에 스스로를 경계하는「자경잠(自警箴)」을 지었다. 병자호란 때 두 아들 최은(崔), 최린(崔轔)을 고령(高靈) 창의진(倡義陣)에 내보냈으나, 왕이 이미 항복하였다는 소식에 분격하는 원한시를 지었다. 학행(學行)으로 명망이 높아 두 아들과 ‘수하삼현(水下三賢)’으로 불리어졌다. 두 증손 최위(崔瑋)와 최호(崔琥)가 무과에 급제한 후 춘천도호부사(春川都護府使) 겸(兼) 강원도병마방어사(江原道兵馬防禦使), 여산도호부사(礪山都護府使)에 제수됨으로 귀(貴)하게 되어 제용감정(濟用監正)에 증직되었다. 성주 수륜 법산(法山) 입향조이며,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을 배향한 회연서원(檜淵書院) 초대 원장을 역임했다. 죽헌(竹軒) 삼부자를 오암서원(鰲巖書院)에 제향되었다.『죽헌선생문집(竹軒先生文集)』이 전한다. 인조 16년(1638년) 졸(卒)하였다.
<註釋> 수하삼현(水下三賢) 정구(鄭逑)는 가천(伽川)의 상류에 살았고 최항경(崔恒慶)은 그 아래 법산(法山) 마을에 살았기 때문에 수하(水下)라 하였다 한다.
⑧ 최은(崔)
자는 사행(士行)이고 호는 관봉(鸛峰)이다. 제용감정(濟用監正)을 증직받은 최항경(崔恒慶)과 참봉(參奉) 류경준(柳景濬)의 따님 증(贈) 숙인(淑人) 풍산류씨 (豐山柳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선조 16년(1583년) 태어났다.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인조 11년(1633년)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병자호란 때 동생 매와(梅窩) 최린(崔轔)과 아들 최진화(崔震華)와 함께 고령(高靈) 의병진(義兵陳)에 달려갔으나 남한산성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시를 짓고 나광자(懶狂子)로 자호(自號)하고 문을 닫고 세상일에 관심을 끊었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장예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에 증직되었으며 오암서원(鰲巖書院)에 제향되었다. 효종 7년(1656년) 졸(卒)하였다.
⑨ 최린(崔轔)
 자는 사발(士發)이며 호는 매와(梅窩)이다. 제용감정(濟用監正)을 증직받은 최항경(崔恒慶)과 참봉(參奉) 류경준(柳景濬)의 따님 증(贈) 숙인(淑人) 풍산류씨 (豐山柳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선조 30년(1597년) 태어났다.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인조 11년(1633년) 생원시에 형제가 동방입격(同榜入格)하였다. 병자호란 때 죽포(竹圃) 이현룡(李見龍)∙고령현감 이현보(李顯輔)와 함께 의병(疑兵)을 일으켜 문경에 도착하자 강화(講和)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분개하여 시를 짓고 자호(自號)를 치광자(癡狂子)라고 하였으며 종신토록 청나라 달력을 쓰지 않았다, 오암서원(鰲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술로는 『가례의절집해(家禮疑節集解)』,『대학인의(大學引義) 등이 있다. 인조 22년(1644년) 졸(卒)하였다.
⑩ 최진화(崔震華)
자는 진숙(鎭叔)이고 호는 월주(月洲)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장예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에 증직(贈職)된 최은(崔)과 현감(縣監) 권양(權瀁)의 따님인 증(贈) 숙부인(淑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 사이에서 광해군 3년(1611년)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가정의 교훈(敎訓)을 받들어 문장(文章)과 행의(行義)가 세상에 알려졌으며 원근의 사우(士友)들이 모두 본받았다. 병자호란 때 초군유사(招軍有司)로서 의진(義陳)으로 달려가다가 남한산성의 항복소식을 듣고 돌아와 분개하는 시를 지었다. 『심경(心經)』과『근사록(近思錄)』 등의 오묘한 이치를 탐구하고 천문, 지리, 율려(律呂 : 음악)까지 통달하였다. 숙종 12년(1686년) 졸(卒)하였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부사공파(府使公派)는 단종복위운동으로 최자섭(崔自涉)이 순절(殉節)하자 그의 아들 최환(崔漶)이 순천박씨(順天朴氏) 승사랑(承仕郞) 박인손(朴仁孫)의 둘째 사위가 되어 처향(妻鄕) 가까운 곳 운수면 법리 잣밭골로 피신하여 그 후손들이 세거하게 되었다.
(2) 사정공파(司正公派)는 숙종 때 생원시에 입격한 최후(崔垕)가 성주 법산에서 덕곡면 가륜리로 입향한 것으로 추정된다.
(3) 사직공파(司直公派)는 인조 때 법산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 최공여(崔公閭)가 성산면 안어실에 입향하였다가 성산면 어곡리로 이거한 것으로 추정된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최후(崔垕)
자는 흥보(興甫)이다. 처사 최증(崔璔)과 월담(月潭) 여효사(呂孝思)의 따님 성산여씨(星山呂氏) 사이에서 현종 13년(1672년)에 태어났다. 영조 9년(1733년) 생원시에 동생 최후현(崔后賢)과 동방입격(同榜入格)하였다. 영조 19년(1743년) 졸(卒)하였다.
② 최서(崔瑞)
자는 중첨(重瞻)이다. 성균생원(成均生員) 최후(崔垕)의 아들로 숙종 36년(1710년) 태어났다. 영조 23년(1747년) 생원시에 입격하였다. 영조 52년(1775년)에 졸(卒)하였다.
③ 최흥대(崔興大)
자는 성종(聖宗)이다.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증직 받은 최한수(崔汗守)의 장남으로 영조 23년(1747년) 태어났다.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정조 21년(1797년)에 졸(卒)하였다.
④ 최준룡(崔俊龍)
 자는 군칠(君七)이다. 처사 최우양(崔祐陽)과 경주이씨(慶州李氏) 사이에서 순조 20년(1820년) 태어났다. 가선대부(嘉善大夫) 중추부사(中樞府事)를 지냈다.
광무 8년(1904년) 졸(卒)하였다.
(2) 근∙현대 인물
① 최석증 : 우곡면장, 18대 대종회 회장
② 최웅학 : 영천최씨 대종회 회장(20대)
③ 최봉수 : 고령군 산림조합장
④ 최성수 : 세계사격선수권대회 우승, 체육기념훈장수상자 
⑤ 최성달 : 부산시청 부이사관
⑥ 최정일 ; 사업가
⑦ 최득만 : K.T 임원
⑧ 최득호(崔得浩) : 법원사무관, 법무사
⑨ 최용규 ; 군법무관
⓾ 최성선 : 제일문화(주) 대표이사
⑪ 최성백 : ㈜금택사 대표이사
⑫ 최정곤 : 한성공업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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