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재조명(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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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재조명(4)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2. 관물루.jpg

청휘당 관물루

3. 시비.JPG

시비

4. 상량문(글 李大錫).jpg

청휘당 상량문(글 李大錫)
 
도은문집 선(陶隱文集 選)
봉사록(奉使錄)
오호도재동명중(嗚呼島在東溟中) 오호도! 동쪽 바다 속에 있는 섬
창파묘연일점벽(滄波渺然一點碧) 푸른 물결 아득히 푸른 점 하나로 떠 있네
부하사아쌍체령(夫何使我雙涕零) 무엇이 나의 두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는고
지위애차전횡객(祗爲哀此田橫客) 그것은 단지 전횡의 객들이 애처로워서 이네
전횡기개횡소추(田橫氣槪橫素秋) 전횡의 기개 가을 하늘에 뻗쳐나니
의사귀심실오백(義士歸心實五百) 마음으로 귀의한 의사가 실로 오백이었다네
함양융준진천인(咸陽隆準眞天人) 함양의 융준은 참으로 하늘이 낸 인물
수주천황세진학(手注天潢洗秦虐) 손으로 은하수 기울여진의 학정 씻었는데
횡하위재불귀래(橫何爲哉不歸來) 전횡은 어찌하여 그에게 귀부하지 않고
원혈자오연화악(怨血自汚蓮花鍔) 스스로 원한 어린 피로 보검을 물들였나
객수문지쟁내하(客雖聞之爭奈何) 문객들 이 소식 들었지만 어떻게 할 수 있었으랴
비조의의무처탁(飛鳥依依無處托) 나는 새들 둥지 잃고 허전하게 선회하듯 하였어라
령종지하공추수(寧從地下共追隨) 차라리 지하에 들어가서 뒤따라 노닐지언정
구명여사안족석(軀命如絲安足惜) 경각에 달린 이 목숨 아낄 것이 뭐 있으리
동장일문기고서(同將一刎奇孤嶼) 외로운 이 섬에서 똑같이 한 칼로 자결하였나니
산애포사일색부(山哀浦思日色簿) 산도 포구도 슬피 울고 태양도 빛을 잃었어라
오호천추여만고(嗚呼千秋與萬古) 아! 앞으로 천 년 만 년이 지나도록
차심원결수능식(此心菀結誰能識) 한 맺힌 이 마음을 그 누가 알아주랴
불위굉정유소설(不爲轟霆有所洩) 뇌정이 되어 이 한을 풀지 않는다면
정작장홍사천적(定作長虹射天赤) 김 무지개 되어 하늘에다 붉게 쏘리라
군불견고금다소경부아(君不見古今多少輕簿兒) 그대는 보지 못하는가 고금의 수많은 경박아들이
조위동포모구적(朝爲同袍暮仇敵) 아침엔 동포였다가 저녁엔 원수가 되는 것을
서문·발문(序文·跋文)
진맥도지(診脈圖誌)
의서(醫書)는 읽기 쉽지 않고, 의술은 능하기 쉽지 않다. 내가 이런 지론을 펴 온 것이 오래되었다. 그런데 세상의 의원들 중에는 의서의 구두를 떼지도 못하면서 의술에 능하다고 말하는 자들이 있다. 내가 이런 자들을 병통으로 여긴 것이 또한 오래되었다.
국가에서 십학(十學)의 과정을 개설해 인재를 기르고 있는데, 의학(醫學)도 그중의 하나이다. 제조관(提調官)인 삼봉(三峯) 정예문(鄭藝文)이 “의원은 맥을 차질 없이 짚어야 한다. 그런 뒤에야 처방이 유효하다.”라고 하고는 제가(諸家)의 설을 참고한 뒤에 도해(圖解)를 만들어 범례(凡例)를 해설하고 요결(要訣)을 만들어 곡진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그 제목을 ‘진맥도(診脈圖)’라고 하고는 나에게 그 밑에다 한마디 적어 넣게 했다.
나도 의학에 대해서는 꽤나 팔을 부러뜨려 본 경험이 있다. 지금 이 책을 보건대 자세하면서도 번거롭지 않고 간략하면서도 소략하지 않으니, 학자가 살펴보면 복잡하고 난해한 부분도 명쾌하게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로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어떤 의서도 읽지 않은 것이 없게 되고 어떤 의술도 능하지 못한 것이 없게 되는 것은 각자 노력하기에 달려 있으니, 힘쓰고 힘쓸지어다.
홍무(洪武) 기사년(1389, 창왕2) 7월 16일에 도은 도인(陶隱道人) 이숭인 적다.
정달가가 사명을 받들고 일본에 가는 것을 전송한 시의 서문
(送鄭達可奉使日本詩序)
금상 전하 즉위 4년째 되는 해(1377, 우왕3)의 가을 7월에 경상도의 수신(帥臣)이 역전(驛傳)으로 보고하기를 “일본국 패가대(霸家臺)의 사자가 와서 ‘먼 나라에서 찾아왔으니 조정에 주달해 주면 좋겠다.’라고 했습니다. 신이 봉강(封疆)을 맡고 있기에 이 사실을 감히 보고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조신(朝臣)이 안에 들어가서 아뢰니, 전하가 이르기를 “패가대는 일본의 거진(巨鎭)이다. 사자가 어찌 공연히 왔겠는가.
군현(郡縣)으로 하여금 숙식과 거마 등을 잘 대접해서 올려보내도록 하라.“라고 명했다.
사자가 도성에 도착하자 예빈시(禮賓寺)가 인도해 궁정의 각문(閣門)에 나아가서 진현케 했다. 전하가 우악(優渥)하게 위로하니, 사자가 국서와 예물을 바치고 나서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섬 오랑캐가 도발해 남의 가옥을 불태우고 남의 자식과 부인을 고아와 과부로 만드는가 하면 심지어는 근기(近畿)의 지역까지 침범했다는 말을 우리 주장(主將)이 듣고는 한편으로는 부끄럽게 여긴 나머지 마침내 이 자들을 섬멸하려고 결심하고서 미천한 이 사신을 보내 군사 작전 시기를 얼려 드리게 했습니다.”라고 했다. 전하가 그 말을 듣자 더욱 가상하게 여기고서, 유사(有司)에게 하명해 사자의 숙소와 음식 등을 등급을 올려 특별히 대우하게 했다.
사자가 한 달 남짓 머물다가 돌아가겠다고 아뢰니, 전하가 재상을 불러서 이르기를 “보빙(報聘)을 하는 것이 예법에 맞는 일이다. 더군다나 지금 이웃 나라와 친선을 도모하고 왜구를 없앨 수 있는 기회인 데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보빙사(報聘使)를 신중하게 가리도록 하라.”라고 했다. 이에 성균 대사성(成均大司成) 정달가(鄭達可)가 사신으로 가게 됐는데, 그와 교유하는 벗들이 모두 노래와 시를 지어 증정하면서 나에게 서문을 쓰라고 청했다.
내가 생각건대, 일본이라는 나라는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왔다. 한(漢)나라와 위(魏)나라 때부터 대대로 중화와 통했는데, 그 의관과 제도가 찬란해 볼 만한 점이 있다. 지금 패가대 주장은 영웅호걸로서 용감하고 씩씩해 일방(一方)의 울타리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데, 그가 포악한 난리를 진압해 양국의 우호를 도모하려고 생각하니, 그 마음 씀씀이가 가상하기만 하다.
달가는 학식이 넓어서 고금을 통달했으며 기품이 순후하고 방정함은 물론 말씨가 온화하면서 조리 정연하다. 일찍이 오초(吳楚) 지방을 유력하고 제로(齊魯)의 유적을 답사하는 등 사마자장(司馬子長)의 풍도를 지녔으니, 사명(使命)을 받들고 가서 전대(專對)하는 것쯤이야 그로서는 식은 죽 먹기일 것이다.
비록 그렇긴 하지만, 자기 집 문지방을 나서서 이웃 동네에 가는 것 조차 난색을 표하는 사람도 있는 판인데, 달가의 경우는 명을 듣자마자 그날부터 환호작약하며 곧장 자기의 임무로 여기고는 검푸른 바다 보기를 평탄한 육지 보듯 할 뿐만이 아니니, 보빙사로 적임자를 얻었다고 말 할만하다. 그러니 이웃 나라와 친선을 도모하고 왜구를 없애는 일을 발을 들고서 기다려도 좋을 것이다.
뒷날 태사씨(太史氏)가 간책(簡冊)에 ‘일본에 사명을 받들고 간 정몽주(日本奉使鄭夢周)’라고 대서특필할 것이니, 이 어찌 위대한 일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대의(大議)를 건의하고 대정(大政)을 시행한다면, 한두 번으로 그치지 않고 누차 대서특필할 일이 생길 것이니, 달가는 이 말을 잘 기억해 둘지어다.
도은집 서문(陶隱集 序文)
주탁(周倬)
삼백편(三百篇) 이후로 시(詩)의 체(體)가 변해서 소(騷)가되었다. 그 뒤 이릉(李陵 )과 소무(蘇武) 등의 시대에 와서 오언(五言)의 시편이 등장하였는데, 그 음향(音響)과 절주(節奏)가 또 부조(浮藻)를 일삼으며 성운(聲韻)이나 배열하는 자들이 끼일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성당(盛唐) 시대에 두보(杜甫)와 이백(李白)이 출현하여 성률(聲律)의 시를 창도(倡導)하였는데, 특히 오언과 칠언(七言)의 고시(古詩)에 능하였다.
그들은 제가(諸家)의 시 작법을 오한비한 위에 아송(雅頌)의 유풍(遺風)을 체득하여, 그야말로 소인(騷人)과 운사(韻士)의 종사(宗師)가 되었다. 아! 그들은 참으로 시의 화신(化身)이라고 이를 만 했다.
고려의 전(前) 진사(進士) 이군 자안(李君子安 : 李崇仁)은 명경과(明經科)에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급제하여 재보(宰輔 )의 지위에 올랐다. 그는 부귀에 대한  생각을 마음에 두지 않고서 언제나 공무를 마친 여가에는 손에서 책을 놓지 않은 채 性情)을 함양하여 노래했다. 그리하여 이를 시편(詩篇)으로 발표했는데, 오언과 칠언의 율시(律詩 및 고시, 혹은 악부(樂府)와 절구(絶句)의 형식을 취한 것이 쌓여서 약간 수를 이루었다.
홍무(洪武) 을축년(1385, 우왕11) 9월에 내가 명을 받들고 고려에 사신으로 가서 자안을 접견할 수 있었는데, 서로 해후할 즈음에 손을 잡고 마음을 논하면서 마치 평생토록 사귄 것처럼 하였으며, 단지 서로를 늦게 일게 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그동안 지은 시를 꺼내어 나에게 부여주기에 읽어보았더니 가슴속이 시원하게 트이는 것 같았다. 그 문사(文辭)는 모두가 화려하면서도 촌스랍지 않았으며, 화평(和平)한 가운데서 기려(奇麗)함을 발하고 엄정(嚴整)함 외에 우유(優柔)함을 담고 있었다. 그리고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며 스승을 높이고 친우를 친애하는 뜻이 언외(言外)에 흘러넘치고 있었다.
아! 삼한(三韓)은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인데, 자안의 학문과 성정이 이와 같을 수가 있단 말인가. 사문(斯文)을 떨쳐 일으키고 방본(邦本)을 붙들어 세우는 일을 자안 말고 또 누가 해낼 수 있겠는가. 전(傳)에 이르기를, “높은 데에 올라가면 시를 읊을 줄 알아야 대부의 자격이 있다.” 하였는데, 나는 이를 자안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록 그렇지만 자안이 어찌 꼭 이 일시적인 작품만을 가지고 당데에 이름을 드로내려고야 하겠는가. 자안은 부디 삼백편에 나오는 부(賦)·비(比)·흥(興)의 성정을 서로 조화시키고, 한(漢)·위(魏)·진(晉)·송(宋)의 여러 작자들의 경지를 한데 모아야 할 것이요, 여기에 다시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의 법도를 충분히 익혀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장차 자안이 지은 시가 위로는 황명(皇命)의 성덕(聖德)을 찬양하기에 족하고, 아래로는 고려의 성대한 전장(典章)과 문물(文物)을 읊기에 족하여, 백세 뒤에까지 무궁히 전해질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우리 자안에게 나는 이렇게 되기를 마음속 깊이 바라는 바이다.
이달 29일(洪武 18년 乙丑 : 1385)에 동진사(同進事)를 내려 받은 예장(豫章)의 주탁(周倬) 서문을 쓰다.
도은집 발문(陶隱集 跋文)
이 색(李穡)
정사년(1377. 우왕3) 동짓달 그믐 전 3일 되는 날에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은 다음에 향을 피우고 단정히 앉아서 도은의 시 서너편을 익어보았더니, 마치 옥구슬이 소반 위를 구르는 것과 같고, 골짜기에서 나온 얼음 덩어리가 옥병 속에 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니 황견 유부(黃絹幼婦)의 문사(文辭)나 길일 계사(吉日癸巳)의 각석(刻石)만이 그 아름다움을 독점할 수 있겠는가. 도은의 시 역시 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후세에 길이 전해질 것이다.
나는 어려서부터 시를 읽어 오면서도 참다운 시의 맛을 느껴보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유독 부자(夫子)께서 일러주신 ‘사무사(思無邪)라는 한마디 말씀과 방불(髣髴)하게 되어야 하리라고 혼자 상상하면서 노년에 이르도록 그 말씀을 잊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도은의 시어(詩語)를 보니, 한 점 티끌도 없이 쇄락(灑落)한 느낌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추구하는 방향도 오직 거기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에게 성정(性情)의 바름을 느끼게 하여 삿됨이 없는 경지로 인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내가 너무도 기쁜 나머지 그의 시고 뒤에 이렇게 써서 돌려주게 되었다.
(참고문헌-청휘당실기)  〈주간고령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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