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재조명(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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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재조명(3)

4. 도은선생 유묵.jpg

도은선생 유묵
 
 
▣ 도은집(陶隱集)〉의 내용과 문헌학적 가치
1) 도은집의 구성
먼저 이 책의 저본(底本)이 된 〈도은집〉의 체재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도록 한다. 본 문집은 변계량이 저자의 자편고(自編稿)를 바탕으로 만든 1406년의 목판 초간본을 임란 이전에 다시 목판으로 간행한 중간본(重刊本)이다. 이 판본은 시집 3권과 문집2권, 도합 5권 2책으로 구성돼 있으며 총 195판이다.
권수(卷首)에는 이색·장부(張溥)·고손지(高巽志)의 발문과 주탁(周倬)·정도전·권근의 서문이 붙어 있다. 서문과 발문 가운데 초간본에 실려 있는 권근의 서문을 제외하고는 모두 도은이 생전에 당대 명사로부터 받은 글이다.
그 뒤에 놓인 권1~3은 시집으로 시체별(詩體別)로 시를 배열했다. 권1에는 사(辭) 1편, 고시(古詩) 30제, 권2에는 율시(律詩) 154제, 권3에는 절구(絶句) 151제가 배열돼 있어 총 440여 수의 시 작품이 실려 있다.
이 시들은 창작 시기가 분명하지 않은 작품들이 많고 또 앞서 창작된 작품이 뒤에 창작된 작품보다 후면에 배치돼 있는 경우도 많아, 작품 배열에 있어 창작 시기는 그다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전송(傳誦)돼 왔던 시들을 수록해 제목 없이 실은 경우도 있는데, 이런 경우에는 제목을 써야 할 행(行)을 비워 두었다. 그의 시 가운데는 송별시나 지인들에게 준 시, 스님의 시권(詩卷)에 부친 시가 많은 편이고, 두 차례 명나라에 오가면서 지은 사행시도 상당하다.
권4와 권5는 도원의 산문을 모아 놓은 문집이다. 권4에는 기(記) 7편, 서(序) 12편, 지(誌) 1편 등 총 20편이 실려 있고, 권 5에는 저9傳) 2편, 제후(題後3편), 의(議) 1편, 행장 1편, 찬(讚) 1편 자설(字設) 1편과 표(表)17편, 전(箋) 5편 등 총 31편이 실려 있다. 권 4에는 송서(送序)와 시서(詩序)가 많이 실려 있다.
권5에는 경산(京山)의 열녀에 대한 배열부전(裵烈婦傳)과 어머니의 삶을 기록한 〈선대부인의 행장(선대부인행장)〉, 그리고 명나라 조정에 보낸 표전(表箋)들이 이채롭다. 특히 명나라에 보낸 표전들은 고려 조정의 외교를 성공적으로 이끈 중요한 문건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 문집의 내용과 문헌학적 가치
이색과 하륜, 그리고 명나라 고손지(高巽志)의 언급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도은 이숭인은 생존 당시에 이미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와 함께 여말(麗末)의 대표적인 지식인으로 존경받고 있었다. 따라서 〈도음집〉은 여말의 사상사, 예술사, 지식인들의 풍모와 동향을 이해하는 데에 매우 긴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문집이다. 먼저 〈도음집〉에 드러난 도은의 사상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한다.
앞에서 도은의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서술하면서 그의 견결한 인생 태도를 살펴본 바 있다. 도은이 자신의 초상화에 부친 글은 이러한 인생 태도의 소종래(所從來)에 대해 설명한다.
장모비유(狀貌卑柔) 생김새는 유순해서
부인지주(婦人之儔) 부인네 영락없고
장구조각(章句雕刻) 장구나 아로새기니
동자지학(童子之學) 아이들의 유치한 공부로다
약의제달가지탁월(若擬諸達可之卓越) 나를 달가(達可  정몽주)의 탁월함과
자허지진밀(子虛之縝密) 자허(子虛 박의중)의 치밀함과
천민지정민(天民之精敏) 천민(天民 설장수)의 정민함과
중림지준일(仲臨之俊逸) 중림(仲臨 하륜)의 준일함과
가원지온아(可遠之溫雅) 가원(可遠 권근)의 온아함과
종지지해박(宗之之諧博) 종지(宗之 정도전)의 해박함과 견준다면
소위무부지여미옥야(所謂碔砆之與美玉也)
이른바 반질반질한 돌이 아름다운 옥들과 섞여 있는 경우라 하리라
수연탁적어동국(雖然托迹於東國) 비록 그렇지만 동국에 붙어살면서도
희담어중원(喜談於中原) 중국에 대해 담론하기를 좋아하고
혹빈장해지빈(或擯瘴海之濱) 병마가 우글거리는 바닷가에 쫓겨나도
이무소가척(而無所加慼) 슬퍼하지 않고
혹유암랑지상(或遊岩廊之上) 혹 조정에서 노닐게 되더라도
이무소가흔(而無所加欣) 기뻐하지 않는다
유기척연이자수(惟其惕然而自修) 이는 내가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닦아
서기불기어심군호(庶幾不欺於心君乎) 거의 마음을 속이지 않기 때문이리라
▣ 향승 지암이 나의 초상화를 그렸기에 찬을 짓다(鄕僧止菴寫余陋眞因作讚)
도은이 40대 정치적 격랑 속에서 창작한 이 작품에서 우리는 그의 겸손한 자세와 변하지 않는 마음에 재한 자부를 읽을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견결한 인생 태도가 자신의 마음을 속이지 않으려는 마음 수양에서 비롯됐다고 언급했다는 점이다. 그의 삶을 지탱했던 중심축이 성리학의 인격 수양에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도은이 성리학에 침잠했다는 사실은 〈秋夜 感懷(추야감회)〉 10수를 통해서 보다 분명히 간취할 수 있다. 그는 이 시에서 이단 배척, 주희존승, 명덕(明德) 발현 등의 주제를 제시했다. 성리학자로서의 관점이 시를 통해 잘 드러나 있는 것이다. 성리학에 대한 논리적인 사색은 산문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특히 주역의 복괘(復卦)를 천지(天地)의복(復), 성인(聖人)의 복, 중인(衆人)의 복 세 가지로 나누고 인심(人心)의 수양을 강조한 〈복재기(復齋記)〉, 호연지기(浩然之氣)는 원래 천지의기(기)가 사람이 태어날 때 몸에 들어온 것으로, 이를 잘 기르면 심광체반(心廣體胖)의 상태에 이르고 어떤 것도 꺾을 수 없는 대장부(大丈夫)의 정신을 갖게 된다고 설명한 〈이호연이 합포의 막료로 부임하는 것을전송한 서문(送李浩然赴合浦幕序)〉, 그리고 의(義)와 이(利)를 변별하면서 남헌 장씨(남헌장씨)의 설을 부각시킨 〈충원 판관 이군 급의 자설(忠原判官李君及字說)〉과 사대부의 묘제(廟制)를 서술하며 자신의 창견을 제시한 〈大夫士廟祭議(대부사묘제의)〉 등은 그가 성리학을 정밀하게 연찬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작품들이다.
목은이 도은의 학문과 문장에 대해 “공자·주공의 사상과 감정이 층층이 드러나고 겹겹이 나온다.”라고 칭찬한 것이나 권근이 “학문이 정심(精深)하되 염락성리(廉洛性理)의 설에 근본을 뒀다.”라고 규정한 것은 도은의 학문에 대한 올바른 지적인 셈이다. 결국 〈陶隱集〉은 이색의 〈牧隱集〉, 정몽주의 〈圃隱集〉, 정도전의 〈삼봉집〉과 함께 여말 지식인들의 성리학 연구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시금석이다.
도은의 학문은 성리학에 근원을 두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불교를 철저하게 배척한 것은 아니다. 물론 그도 젊은 시절 성리학에 몰두할 때에는 불교를 이단시하며 그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전투적인 자세를 드러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도은집〉을 통해 유추해 볼 때 그는 불가 사상에 대해 비교적 포용적인 입장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그는 “학문에 사우 연원(師友淵源)의 바름이 있다면 전할 만한 것이니, 불가도 그러하다.”라고 했다. “지혜로운 임금이나 충의)의 신하가 사찰을 지어 불가의 가르침을 확장하는 것은 대개 나라와 가정을 위해 복리(福利)를 구하는 일이니 이 역시 군자가 마음을 두텁게 쓰는 것이다.”라고 했다. 또 도은의 시 가운데는 불가의 사상을 끌어들여 초월의 순간을 노래한 시도 있다. 이러한 관점은 불가 사상에 대해 탄력적인 태도를 취했던 목은의 시각과 유사하고 강력한 배부론(拜佛論)을 폈던 정도전의 시각과는 다르다.
▣ 표문(表文)
중국 조정이 운남을 평정하고 양왕의 가속을 옮겨 제주에 안치한 것을 축하한 표문 하조정평정운남발유양왕가속안치제주표(賀朝廷平定雲南發遺梁王家屬安置濟州表)
〈춘추(春秋)〉의 대일통(大一統)을 달성해 중국의 운세를 크게 열고나서 뇌정(雷霆)과 같은 육사(六師)를 정비해 남극에 위업을 가했습니다. 이에 승첩의 보고가 멀리 전파되매 희기(喜氣)가 온 누리에 비등하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데, 〈우서(虞書)〉에 유묘(有苗)를 정벌한 기록이 실려 있고 한사(漢史)에 교지(交趾)를 격파한 내용이 기록돼 있는데, 이는 대개 그들이 미혹에 사로잡혀 법을 범했기 때문에 그 죄를 성토해 복주(伏誅)한 것이다.
조무래기 운남(雲南)이 바닷가에 몸을 담고서, 망녕되게 생각하기를 멀고 험해서 믿을 수 있다고 하고는, 감히 제멋대로 날뛰며 불손하게 굴었습니다. 이에 슬기로운 계책을 내어 위걸 차게 만전의 거사(擧事)를 거행하고, 야만의 풍속을 평정하며 혁연(赫然)히 한 번 노해 안정시켰으니, 군마를 쉬게 하고 무기를 던지게 한 이 일이야말로 현대에도 없었고 고대에도 없었던 일입니다.
이는 대개 중화(重華 舜임금)의 덕과 합치되고 광무제(光武帝)의 일과 부합된다고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성공을 고해 온 세상의 수레와 문자를 통일하고 이 추악한 무리들을 굴복시켜 바다의 섬에 포로들을 안치했으니, 이제 당연히 요기(妖氣)가 소멸됨은 물론이요 귀신과 사람의 소망을 더욱 위로하게 됐다고 하겠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이 다행히 밝은 시대를 만난 덕분에 개선의 노래를 기쁘게 듣게 됐는데, 정사를 임시로 맡아 동방을 다스리는 처지라서 조정의 반열에 얼른 달려갈 수는 없습니다만, 황상을 찬미하는 시를 지어서 애오라지 축하하는 정성을 펴는 바입니다.
▣ 등극을 축하한 표문(賀登極表)
하늘의 뜻을 이어받아 법칙을 세웠나니 (繼天立極) DELSMS 바로 역수(曆數)가 돌아옴에 응한 것이요, 자리를 지키기를 인으로서 하나니(守位曰仁)  이는 참으로 귀신과 사람의 소망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폐하는 익대(翊戴)하는 처음부터 구가(謳歌)하는 것이 모두 똑같았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폐하의 도(道)는 천지를 경륜하는 데에 부합되고, 공(功)은 천하를 안정시킨 데에 있습니다.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으시매 제업(帝業이 다시 일어나고, 멀리 명조(明詔)를 반포하시매 황유(皇猷)가 더욱 빛을 발하니, 이에 누조(累朝)의 부탁에 부응하면서 마침내 만화(萬化)의 경장(更張)을 보게 됐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은 외람되게 봉지를 세습해 하나의 지방을 분담해 다스리는 책임을 맡고 있는 까닭에 풍운제회(風雲際會)의 이 시대에 유감스럽게도 대래(代來)에 참석하지 못하게 됐습니다만 천지구장(天地久長)을 항상 올리기를 소원합니다.
 

3. 청휘당 실기.jpg

청휘당 실기

 

▣ 하정표(賀正表)
1월에 책력을 반포해 〈춘추(春秋)〉 대일통(大一統)의 뜻을 선포하시고, 궁정에 의장(儀仗)이 도열한 가운데 사방의 조공을 향유하시니, 귀신과 사람이 즐거워하고 종묘와 사직이 편안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폐하께서는 강건하고 수정(粹精)하시며 총명하고 예지로우십니다. 인민 애물(人民愛物)하는 제왕의 은택이 회유(懷柔)하는 가운데 흡족하고 의례 고문(議禮考文)하는 천자의 마음이 모훈(謨訓) 속에 드러나 있으니, 명절이 바야흐로 돌아오매 만복이 이를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은 외람되게 유충(幼沖)한 자질로 영광되게 훌륭하는 운세를 만나 초반(椒盤0의노래를 바치는 성대한 의식에는 참석하지 못하지만, 해옥(海屋)에 산가지를 더하며 감히 장수를 축원하는 마음은 항상 지니고 있습니다.
▣ 팔관표(八關表)
병록(丙鹿)이 천 년에 한 번 있을 대명(大命)을 받아 나라는 비록 오래됐으나 다시 새롭게 됐고, 의봉(儀鳳)에서 팔사(八邪)를 금하는 조정의 전장(典章)은 지금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예로부터 전해 오는 것입니다. 보좌에 높이 앉아 수공(垂拱)하시매 여정(輿情)이 누구나 희열하고 있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성대한 덕성을 몸에 지니고서 지극한 인덕(仁德)으로 만물을 기르고 계십니다. 넓고도 커서 커서(廣矣大矣) 실로 〈주역(周易)〉에서 말하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의 덕을 완전히 구비하시고, 예와 악으로 말하더라도 (禮云樂云) 옥백(玉帛)과 종고(鐘鼓)만을 갖추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귀신과 사람이 서로 통하는 가운데 온갖 복록이 와서 쌓일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신은 외람되게 영렬한 자질로 빛나는 시대를 만나 호산(湖山)의 땅이 멀리 떨어져 있는 관계로 숙목(肅穆)의 반열에 참여하지는 못합니다마는, 구름이 열린 상위(象魏 대궐)의 하늘을 향해 강녕(康寧)의 축원을 올리고자 합니다.
(참고문헌-청휘당 실기)   〈주간고령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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