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허씨(金海許氏) 생원공파(生員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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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김해허씨(金海許氏) 생원공파(生員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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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곡재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시조(始祖)
① 그 연원을 멀리 가락국(駕洛國) 김수로왕(金首露王)의 비(妃) 허황옥(許黃玉)에게 둔다. 허황후(許皇后)는 본래 인도의 아유타국(阿踰陀國)의 공주(公主)로서, 배를 타고 지금의 경상남도 창원시 진해구 용원동에 있는 부인당(夫人唐)으로 들어와 정박(碇泊)을 했는데 수로왕이 의장(儀仗)을 갖추어 영접한 후 그의 아내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허황후는 아들 10명을 낳았는데, 맏아들 등(登)은 김씨(金氏)로 정통을 잇게 하고, 두 아들은 황후의 뜻을 살려 허씨로 사성(賜姓)하였으며, 나머지 일곱 아들은 불가(佛家)에 귀의하여 하동칠불(河東七佛)로 성불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김해김씨는 부성(父姓), 허씨는 모성(母姓)을 각각 계승했다. 가락국(駕洛國)이 망한 뒤에도 허씨(許氏) 자손들이 옛땅인 김해(金海)에 눌러 살았기에 김해(金海)로 관적(貫籍)을 삼았다.
② 허황옥(許黃玉)의 후손으로 수로왕(首露王)의 30세손으로 공암현(孔暗縣)에서 부농(富農)으로 세거했던 허선문(許宣文)의 후손은 공암(孔巖 : 현재 서울 양천), 허사문(許士文)의 후손은 태인(泰仁), 수로왕의 33세손 허강안(許康安)의 후손은 하양(河陽), 수로왕의 35세손 허염(許琰)의 후손은 김해(金海)로 분관(分貫)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고 한다.
③ 인천이씨(仁川李氏)의 선계(先系)는 가야계(伽耶系)의 허씨(許氏)로 알려져 있다. 신라 경덕왕 15년(756년)에 아찬(阿飡) 벼슬을 한 허기(許奇)(허황후의 23세손)가 신라 사신으로 당(唐)나라에 갔을 때 안록산(安祿山)의 난이 발생하여 당나라 현종(玄宗)을 촉(蜀)나라로 호종(扈從)하였던 공로로 황제의 성(姓)인 이씨(李氏)을 사성(賜姓) 받아 이로서 허씨(許氏)에서 이씨(李氏)가 되었다. 따라서 김해김씨에서 허씨가, 허씨에서 인천이씨가 갈려 나왔다는 것으로, 이들 3성은 오늘날 가락종친회(駕洛宗親會)를 중심으로 혈족으로서의 유대를 긴밀히 맺고 있다.
④ 김해허씨(金海許氏)는 허황옥(許黃玉)이후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을 지내고 가락군(駕洛君)에 봉해진 허염(許琰)을 시조로 한다.
(2) 최초로 모계성씨(母系姓氏)를 사성(賜姓)받은 문중
수로왕비(首露王妃) 허황옥(許黃玉)은 수로왕(首露王)이 부계(父系)인 김씨(金 氏)에서 모계(母系)인 허씨(許氏)로 성(姓)을 내린 최초의 문중이며 국적이 서로 다른사람끼리 하는 결혼이므로 최초의 국제결혼(國際結婚)이며 서로 다른 국적이나 인종, 문화를 지닌 사람들로 구성된 가족이므로 다문화가족(多文化家族)이다.
(3) 분파(分派)
가락군파(駕洛君派), 호은공파(湖隱公派), 중승공파(中承公派), 전직공파(典直公派), 증성군파(甑城君派), 판서공파(判書公派), 상서공파(尙書公派) 등 7개파로 분파(分派)되었다,
(4) 김해허씨(金海許氏) 관내 세거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김해허씨(金海許氏)는 74가구 216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고령지역에 세거하고 있는 김해허씨(金海許氏) 후손은 대체로 생원공파 후손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개진면 구곡1리, 양전1리 등에 산거(散居)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허유전(許有全)
충주사록(忠州司錄)을 거쳐 밀직사사(密直司事)에 올랐던 허연(許)의 아들로 고종 30년(1243년)에 태어났다. 원종(元宗) 말에 과거에 급제하였으며, 충렬왕(忠烈王) 때 감찰시사(監察侍史)가 되었다. 왕이 총애하는 자의 참소(讒訴)를 믿고 그를 순마소(巡馬所)에 가둔 후 장차 저자거리에서 장(杖)을 치려고 하였으나 감히 구해줄 사람이 없었다. 순마지유(巡馬指諭) 고종수(高宗秀)가 왕의 총애를 받아 왕의 침실까지 출입하고 있었는데 왕에게 아뢰기를, “감찰(監察)은 왕의 이목(耳目)이 되어 백관(百官)들을 살피고 탄핵하는 자리입니다. 지금 소인배의 참소 때문에 그를 매질한다면 사람들이 주상을 어떤 군주라고 하겠습니까?”라고 하면서 두 번 세 번 비유를 써서 납득시켰으므로 형벌을 면할 수 있었다. 〈뒤에〉 국학사예 전조시랑(國學司藝 銓曹侍郞)으로 옮겼다가 여러 번 전임(轉任)하여 도첨의참리 지밀직사사(都僉議叅理 知密直司事)가 되었다. 충숙왕(忠肅王) 초에 가락군(駕洛君)으로 봉하고 단성수절공신(端誠守節功臣)의 호를 하사하였으며 수첨의찬성사(守僉議贊成事)로 올려서 치사(致仕)하게 하였다. 그 후에 정승(政丞)으로 임명하고 다시 가락군(駕洛君)으로 봉하였다. 충선왕(忠宣王)이 토번(吐蕃)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을 때 허유전이 민지(閔漬) 등과 함께 원(元)으로 가서 왕의 소환을 청하려고 하였다. 허유전은 원에 도착하여 반 년 동안 머물렀으나 심왕(瀋王) 일당이 저지하는 바람에 끝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충숙왕 10년(1323년)에 졸(卒)하였다. 시호는 충목(忠穆)아다.
② 허기(許麒)
 호는 호은(湖隱)이고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총랑(摠郞) 허영(許榮)의 아들로 태어났다. 익척장군(翊戚將軍) 보승중랑장(保勝中郎將)을 지냈다. 공민왕 10년(1360년) 홍건적의 2차 침입하자 수도인 송도가 함락되자 공민왕은 목은(牧隱) 이색(李穡, 석탄(石灘) 이존오(李存吾) 등과 함께 안동으로 몽진(蒙塵)할 때 공(公)도 호종(扈從)하였다. 홍건적의 난이 평정되자 공민왕 11년(1362년) 9월 환도(還都)할 때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다. 공민왕 15년(1366년) 신돈(辛旽)의 폭정(暴政)에 대하여 탄핵하는 상소(上疏)를 올리자 공민왕은 크게 노하여 상소를 태워버리라고 명하고 이존오를 불러 면전에서 꾸짖었다. 왕이 더욱 노하여 순군옥(巡軍獄)에 가두고 찬성사(贊成事) 이춘부(李春富) 등에게 명령하여 그를 국문하게 하였다. 이에 허기(許麒)가 직간(直諫)하자 경남 고성 죽도에 귀양을 보냈다. 신돈이 처형당하고 귀양에서 풀렸으나 송도로 돌아가지 않고 고성 마암 장산에 은둔하였다. 고려의 사직(社稷)이 망하자 망복(罔僕)의 의리를지키고 두문동72현(杜門洞七十二賢)에 들어 숭의전(崇義殿). 도연서원(道淵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김해허씨 호은공파(湖隱公派) 파조(派祖)이다.

(2) 조선시대
① 허유신(許惟新)
보승중랑장(保勝中郎將) 허기(許麒)의 아들로 태어났다.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영산현감(靈山縣監)을 지냈다, 학문이 넓고 도를 밝혀 사문(斯文)의 본보기가 되었으나 불행하게도 일찍 돌아가셨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② 허여(許旅)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영산현감(靈山縣監)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적순부위사정(迪順副尉司正)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3. 고령 입향
 
영산현감(靈山縣監)을 지낸 허유신(許惟新)의 둘째 아들인 허시(許施)가 세종 재위기간 중(1419년∼1450년)에 고성, 영산, 현풍을 거쳐 개진면 구곡1리에 입향하였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허필(許佖)
자는 위보(威甫)이고 호는 행정(杏亭)이다. 처사 허명신(許命申)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통덕랑(通德郞)을 지넀다. 생졸년(生卒年)은 미상(未詳)이다.
② 허이곤(許以坤)
자는 여모(汝母)이며 처사 허예(許禮)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용(司勇)의 벼슬을
하였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③ 허영린(許永璘)
자는 운서(雲瑞)이며 사용(司勇)을 지낸 허이곤(許以坤)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④ 허홍(許弘)
자는 종대(宗大)이며 어모장군(禦侮將軍)을 지낸 허영린(許永璘)의 아들로 태어났다. 기자전참봉(箕子殿參奉)을 지냈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상(喪)을 전후해서는 죽만 먹고 여묘살이를 하였는데 향리에서 모두 칭찬하였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⑤ 허명신(許命申)
자는 군익(君益)이며 호는 치제(癡齋)이다. 기자전참봉(箕子殿參奉)을 지낸 허홍(許弘)과 원종공신(原從功臣) 참봉(參奉) 신징(申澄)의 따님 고령신씨(高靈申氏) 사이에서 선조 2년(1569년) 태어났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송암(松菴) 김면(金沔)에게 글을 배워 학문 연마에 힘쓰는 한편, 부모에게 효도하고 친족과 화목하였다. 공의 학문은 여러 종류를 배워 그 명성이 일찍이 세상에 알려졌고 향시(鄕試)에는 여러 번 합격하였으나 결국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다. 만년에 양산훈도(梁山訓導)의 직첩(職牒)을 받아 발탁(拔擢)되었으나 부모님이 안 계시고 받은 벼슬이라 ‘면훈도장(免訓導狀)’ 즉 훈도(訓導)를 사직(辭職)함을 장계(狀啓)로 올려 곧 사직(辭職)하였으니 의리(義理)를 소중히 한 처사(處事)이었다. 낙동재(洛東齋)를 지어 고령현감(高靈縣監) 허교(許喬)의 아들 미수(眉叟) 허목(許穆)과 운계(雲溪) 정홍석(鄭弘錫) 등을 가르치며 후학양성에 매진하였다. 죽포(竹圃) 이현룡(李見龍), 태허정(太虛亭) 곽홍지(郭弘址), 우암(愚庵) 최산립(崔山立) 등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나누었다. 인조 15년(1637년) 4월 9일 임종(臨終)하던 날 가정의 일은 언급하지 않고 숭정(崇禎)이란 말을 세 번하고는 집에서 세상을 마치니 향년 69세이었다. 유고로『치재문집(癡齋文集)』과『치제일록(癡齊日錄)』이 전한다. 2001에 구곡문중에서『국역 치제문집전(國譯 癡齊文集全)』5권을 합본 간행하였다.
⑥ 허항(許伉)
자는 여보(儷甫)이다. 처사 허명신(許命申)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이웃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어머니가 병이 들어 꿩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자 꿩이 홀연히 부엌으로 날아들었고, 물고기를 먹고 싶다고 하자 얼음이 덮인 못 위로 고기가 뛰어올랐다.  여묘살이를 할 때 죽만 먹었다. 마을 사람들은 왕상(王祥)의 효(孝)라고 칭찬하였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註釋) 왕상(王祥)의 효(孝)
사자소학 제1장 효행편 46번째 성어로 “剖氷得鯉(부빙득리)는 王祥之孝(왕상지효)니라” 즉 얼음을 깨고서 잉어를 잡음은 왕상의 효도니라.
⑦허의(許儀)
자는 덕보(德甫)이고 처사 허창신(許昌申)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찰방(察訪)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⑧ 허호(許箎)
초휘는 택(擇)이며 자는 자화(子和)이고 호는 다와(茶窩)이다. 처사 허유(許遺)와 통덕랑(通德郞) 이정표(李廷標)의 따님 성산이씨(星山李氏) 사이에서 숙종 19년(1693년) 태어났다. 종조부 효자 히항(許伉)의 봉사손(奉祀孫)으로 입양(入養)되었다.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조부가 병중에 있을 때 손가락에 피를 내어 드시게 하였고, 변의 맛을 보아 병세를 살폈으며, 예제(禮制)대로 집상(執喪)을 극진하게 하였다. 고향 사람들이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 즉 효자인 할아버지 허항(許伉)에 그 손자 허호(許箎)라고 칭찬했다. 영조 31년(1755년) 졸(卒)하였다.
⑨ 허철(許徹)
자는 명숙(明叔)이고 효자 허호(許箎)와 진사(進士) 정홍일(鄭弘鎰)의 따님 동래정씨(東萊鄭氏) 사이에서 영조 10년(1734년)에 태어났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사복시정(司僕司正)을 증직(贈職)받았다. 정조 2년(1778년) 졸(卒)하였다.
⑩ 허경동(許景東)
 자는 익진(益振)이고 사복시정(司僕司正)을 증직(贈職)받은 허철(許徹)과 석중규(石重圭)의 따님 (贈) 숙부인(淑夫人) 충주석씨(忠州石氏) 사이에서 영조 43년(1767년) 태어났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兼)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증직(贈職)받았다. 순조 13년(1813년) 졸(卒)하였다.
⑩ 허건(許鍵)
 자는 형중(衡重)이고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旨) 겸(兼)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을 증직(贈職)받았던 허경동(許景東)과 박지홍(朴之洪)의 따님 증(贈) 숙부인(淑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순조 4년(1804년) 태어났다.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겸(兼) 동지의금부도사(同知義禁府都事)를 증직(贈職)받았다. 고종 19년(1882년) 졸(卒)하였다.
⑪ 허린(許潾)
 자는 석여(碩汝)이고 호는 암계(岩溪)이다. 호조참판(戶曹參判) 겸(兼) 동지의금부도사(同知義禁府都事)를 증직(贈職)받았던 허건(許鍵)과 배순덕(裵順德)의 따님 증(贈) 정부인(貞夫人) 성산배씨(星山裵氏) 사이에서 고종 6년(1869년)에 태어났다. 선략장군(宣略將軍) 행(行) 용양위(龍驤衛) 부사과(副司果)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지냈다. 1928년 졸(卒)하였다.
⑫ 허일(許馹)
 자는 덕일(德一)이며 호는 은암(隱岩)이다, 처사 허학(許鶴)의 아들로 헌종 8년(1842년) 태어났다. 정릉참봉(貞陵參奉)을 거쳐 6품 서임관(敍任官)과 3품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지냈다. 1917년 졸(卒)하였다.

(2) 근∙현대 인물
① 허정갑(許正甲) : ㈜ 건화 대표이사, 사장
② 허동량(許東亮) : 법무고시 합격, 법원서기관, 고령문화원장, 법무사
③ 허종구(許宗九) : 허종구세무사무소 세무사, 조세심판원 원장
④ 허만우(許萬宇) : 경북산업대 교수
⑤ 허증수(許增秀) : 공학박사, 경북대 교수, 에너지관리공단 이사장
⑥ 허만재(許萬在) : 총경, 성주경찰서장
⑦ 허  판(許  坂) : 총경, 대구남부경찰서장
⑧ 허문길(許文吉) : 대구시 북구청 국장, 행정 서기관
⑨ 허만우(許萬雨) : 부산 영도구 동장, 행정 사무관
⑩ 허임량(許壬亮) : 행정 사무관, 개진면장
⑪ 허  장(許  場) : 초등학교 교장
⑫ 허용출(許龍出) : 고령농고 교장
⑬ 허수철(許守哲) : 순천중등학교 교장
⑭ 허영도(許永道) : 고령초등학교 교장
⑮ 허세영(許世永) : 장학사
⑯ 허두영(許斗寧) : 초등학교 교장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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