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재조명(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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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재조명(2)

인물평전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2. 도은 이숭인 선생 영정.JPG

도은 선생 영정

 

 

* 고려충절 도은 이숭인 유허지 청휘당(晴暉堂) 중건

성주군 수륜면 신파리에 위치한 청휘당(晴暉堂)은 1375년(고려 우왕1) 도은 이숭인이 북원(北元)의 사신을 물리치는 상소를 올렸다가 후환을 입어 성주에 유배됐을 때 창건한 사당이다. 이후 600여 년 내려오면서 퇴락해 여러 차례 중건·중수했다.
이번 중건 사업은 이숭인선생숭모사업추진위원회(위원장 이시웅, 前 성주문화원장)와 성주군, 그리고 후손들이 중심이 돼 총사업비 40여억 원을 투입해 4년여 공사 끝에 2018년 6월 15일 준공식을 가졌다.
이시웅 추진위원장은 “앞으로 청휘당은 도은 이숭인의 유허지로서 머물 것이 아니라 그의 충절을 재조명하고, 선생의 뜻을 계승할 수 있는 역사문화체험과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登伽琊山(등가야산)
作鎭星州界(작진성주계)
流形陜郡東(유형합군동)
蒼根蟠厚地(창근반후지)
翠色滿晴空(취색만청공)
猿鶴經年別(원학경년별)
煙霞自昔同(연하자석동)
我來登絶頂(아래등절정)
第一望夫崧(제일망부숭)
가야산에 올라
성주 한 고을을 진 치듯 둘러싸고
합천 고을 동쪽으로 흘러내린 산
푸른 뫼 뿌리는 두터운 대지에 서려 있고
비취색 산 빛은 하늘에 가득해라.
잔나비와 학 떠난 지 몇 년이던가
안개와 노을은 예와 같아라.
나 여기 와서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맨 먼저 바라본 것은 바로 저 숭산이로다.
* 도은집(陶隱集) 발문(跋文)에서
 
 

1. 메인- 청휘당 전경.JPG

청휘당 전경(성주군 수륜면 신파1길 28-5)
 
청휘당(晴暉堂)
청휘당은 고려말의 충신이자 학자인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선생이 고향에 유배 중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창건한 재사이다. 1375년 재사를 창건한 이후 600여 년을 이어오고 있으며, 세월의 흐름에 따라 퇴락되기도 했으나 여러 차례 중건·중수했다. 특히 근래에 역사와 문화의 정체성 확보를 위한 역사충절 현창사업으로 중창을 추진하여 현재의 무습을 갖추게 되었다.
청휘당을 창건한 도은 이숭인 선생(1347~1392)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킨 충신이자, 외교문서 작성에 능하여 중국에서도 높은 명성을 얻은 문장가였으며, 성리학의 정착에 노력한 학자로서 고려 말 절의를 지킨 세 학자를 일컬어 붙인 ‘삼은(三隱)’의 한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선생은 불위(不韙)에 맞서다가 유배되어 이곳에 머무는 동안 학문연구와 시문(詩文) 창작에 몰두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향 후학들에 대한 강학에도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
중창사업을 통하여 면모를 일신한 청휘당은 사당인 문충사(文忠祠)를 비롯해 강당인 ‘도은재(陶隱齋)’, 동재인 ‘거경재(居敬齋)’, 서재인 ‘명의재(明義齋)’, 누각인 ‘관물루(觀物樓)’, 선생에 대한 여러 자료와 유물을 전시한 ‘도은기념관’ 등 10동의 건물로 구성되었으며, 단순히 유허지 뿐만 아니라 충절을 재조명하고, 그 뜻을 계승할 수 있는 역사·문화체험과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수 있는 전통·체험시설 등을 갖추고 있다.
청휘당중건 추진기념비 전문을 소개한다.
가야산 정기(精氣) 뿌리내려 영글고 동류수(東流水) 대가천(大伽川) 쉼 없이 흘러 이곳에 자리잡은 고려말 삼은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선생의 유허지(遺墟址) 청휘당은 우왕(禑王) 원년 내조한 북원의 사신들을 돌려보낼 것을 도당(都堂)에 주청하다 그 당시 실권자들에 의해 선생께서 유배 온 곳이다.
그 후에도 이곳은 선생께서 불위(不韙)에 맞서 여러 차례에 걸쳐서 다시 이곳으로 유배(流配)되는 고난 속에서도 선생을 찾아오는 문도(文徒)들을 지도하는 한편 선생시문의 백미(白眉)라 할 수 있는 주옥(珠玉)같은 작품들을 남긴 시문의 산실(産室)이기도 하였다.
오백년 고려사직의 명운(命運)이 쇠하여 무너지게 되면서 선생 또한 순국(殉國)하셨으나, 육백년의 성상(星霜)이 지나는 가운데서도 후손들의 계술(繼述)과 유림(儒林)들의 존속으로 영위(影位)전에 올리는 향화(香火)의 예(禮)는 끊어지지 않았으니 어찌 신명(神命)의 가호(加護)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선생의 유허지가 실로 위명(偉名)에 미치지 못하여 수차례에 걸쳐서 중수(重修)와 개수(改修)를 이어오는 가운데서도 오랜 세월의 풍상(風霜) 속에서 퇴락(頹落)하기를 거듭하니 이를 슬퍼하고 안타까워하는 후손들과 현자(賢者)들의 회한(悔恨)이 어떠하였으리요.
이에 전통과 정신문화 함양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온 김관용(金寬容) 경북도지사님과 김항곤(金恒坤) 성주군수님의 열(熱)과 성(誠)을 다한 노력으로 국비와 지방비 사십억원의 지원금이 책정되면서 제도에 맞게 선생의 사우(祠宇)인 문충사(文忠祠)와 본당인 청휘당(晴暉堂), 동·서재, 외삼문, 관물루(觀物樓), 선생기념관과 부대시설 일체의 공사를, 그리고 후손들이 답지해온 성효금 삼억 오천만 원은 부지매입비와 제반 설치물 비용과 실기편찬 및 준공기념 비용으로 용처(用處)되어 변모일신(變貌一新)하니 이는 만시지탄(晩時之歎)이나 선생 유덕이 천양(闡揚)됨이 아니겠는가!
2014년 8월부터 시작된 중건기(重建期)에는 성주군이 성주역사 충절관광기념사업의 일환(一環)으로 공사 전반을 주도하는 가운데 2018년 6월에 제반의 공사를 완공하여 선생의 청덕(淸德)을 추원(追遠)하는 공간이자 전통과 미래가 함께하는 화각(華閣)의 장(場)으로 전승(傳承)되게 되었다.
한편 선생 후손들과 위선(爲先)단체인 도은 이숭인 숭모사업추진위원회는 다액(多額)의 성효금을 헌성(獻誠)하면서도 오년여의 숭조위선 기간 동안 불고가사(不顧家事)하고 온갖 정성과 노고를 다하기도 했다.
이제 문장의 훈업(勳業)과 학문의 온축(蘊蓄)된 경륜으로 수공입절(殊功立節)한 선생의 위명(偉名)이 성대하게 드러나니, 진실로 뜻있고 아름다운 정성과 노력의 유산을 덕자(德者)들에게 알리는 계기로 삼으면서 후손들의 귀감(龜鑑)이 되기를 바라며 삼가 새기노니
높아라 가야산아 흘러라 낙동강아 청휘(晴暉) 따라 맑아라 충절로 빛이 나라.
별가야 옛 터전에 우뚝 서라 그 자취 후인들의 향연 속에 천만년을 이어가리.
2018년 6월 도은 이숭인 선생 숭모사업추진위원장 이시웅
청휘당감흥(晴暉堂感興 4首)
十載邯鄲夢裹身(십재감단몽과신)
歸來喜見故山春(귀래희고견산춘)
松醪酒熟無人過(송료주숙무인과)
醉向花陰脫却巾(취향화음탈각건)
십 년 동안 한단의 꿈속을 헤매던 몸이
돌아와 고향의 봄을 맞으니 기쁘기도 하여라
송화주 익었건만 찾아오는 사람 없어
꽃그늘 아래 각건도 벗어라
水聲松韻有誰爭(수성송음유수쟁)
占斷他時更野情(점단타시야경정)
大地烘爐人自苦(대지홍로인자고)
山中盡日嫩凉生(산중진일눈량생)
물소리 소나무 음율 소리 겨눌 이 뉘 있으리오
온통 차지하여두었다가 다른 날 다시 즐기리라
대지는 불타는 화로 같아 사람들 절로 괴로워하는데
산중이라 온종일 서늘하여 새싹 돋아나네
小溪東畔兩三家(소계동반량삼가)
梨栗今秋結轉加(이율금추결전가)
收拾不拘山遠近(수습불구산원근)
日斜歸路伴林鴉(일사귀로반림아)
작은 시내 동쪽 기슭 두서너집
배와 밤이 올가을엔 소담히도 열렸다네
먼 산 가까운 산 가리지 않고 거두어들여
해 저물어 돌아오는 길 숲속 갈가마귀 벗하였네
爐紅氈暖睡方濃(로홍선난수방농)
不省紛紛雪滿峯(불성분분설만봉)
淸興曉來開戶出(청흥효래개호출)
玉壺銀界沒人蹤(옥호은계몰인종)
화롯불 붉게 달아 장막안 뜨거워 졸음이 밀려오니
눈이 펑펑 봉우리를 덮는 줄도 몰라라
새벽녘 맑은 흥취일어 문 열고 나서니
옥호의 은세계 속에 사람의 발자취 묻혔어라
청휘당 중건기(晴暉堂 重建記)
이병동(李柄東)
성주읍 서쪽 소건방(所件坊) 신당리에 동산 숲이 맑고 깨끗하며 자연의 울타리가 아늑한 곳에 청휘당(晴暉堂)이라는 옛터가 있으니, 고을지(京山志)에 상고하기를 선조 도은 문충공께서 관직에서 물러나 쉬었던(流配地) 곳이라 했다.
시(詩)에 이르기를 “10년 동안 헤맸던 한단의 꿈속신세 돌아오니 기쁘게 보리로다. 고향산천의 봄을 솔잎술 익었어도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 없어 꽃그늘 밑에 나가 취해 각건(却巾) 벗었도다.” 라는 구(句)가 있어 가히 선생의 나아가고 물러나신 용사행장(用舍行藏)의 뜻을 보니 모범(模範:師表)으로는 더 이상 없었던 일일 것이다.
문물이 바뀌고 세월이 흘러 창해가 여러 번 상전(桑田)으로 변해 청휘당도 황폐해져서 무성해진 풀들이 몸을 굽혀 절을 한지 상하 수백 년 동안 막연하게 보았을 따름이다. 산(山:陶隱公)이 높아서 물(後孫)이 맑았도다.
신유(辛酉:1921)년 봄에 후손들이 나서서 개연히 탄식하며 그것을 새로 짓기로 도모해 재물을 모아 건축한지 일주년이 되도록 힘을 드려 완공했음을 고유했다. 대청과 방실(房室)의 질서가 정연하게 위치하고 있으므로 이당(晴暉堂)에 들어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후손들끼리 만나서 정담을 이야기하면서 선생의 도를 강론케 하리니, 모두 조상의 유업을 받드는 일에 뒤처지지 않으려는 것이 본래의 뜻인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특별히 수고가 많았던 사람은 현로(賢勞)며 이름을 밑에 적기로 해서 나도 그 일을 탐문하는 데에 참여했었다. 청휘당 곁에 돌을 마련해 비(碑)를 세우니 이는 선생께서 베푼 덕을 들어내어 사대부들이 왕래하며 보고 쫓도록 권하기 위함이다.
(참고문헌-청휘당실기)  〈주간고령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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