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우곡면) 곳곳에 숨어있는 재미있는 지명은?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특집

우리마을(우곡면) 곳곳에 숨어있는 재미있는 지명은?

▣ 도진리(挑津里)

 

1. 도진리회관.JPG

 

⑴ 연혁(沿革)
본래 고령군 하미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도진동이라 하고 우곡면에 편입됐다. 고령박씨의 발상지며 현재 우곡면 소재지다. 1988년 5월 1일 동이 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⑵ 지명 유래(地名 由來)
* 주진동(朱津洞), 도원(挑源), 도진동(挑津洞) : 1180년경 주씨(朱氏)가 이 마을을 처음 개척해 주진(朱津)이라 했다. 그 이후 고려 때 병조참의를 지낸 박경(朴景)이 마을 앞 강가에 복숭아밭이 우거져 봄이면 복숭아꽃이 만발하니 도진(挑津)이라 부르다 경치가 너무 아름다워 무릉도원에 비길만 해서 도원(挑源) 또는 도진동(挑津洞)이라고 한다. 고령 박씨 집성촌이며 마을 바로 앞 회천강을 건너 한실, 속리, 사전으로 건너는 나루가 있어 나루진(津)자를 붙였으며 현재 우곡면 소재지이다.
* 새마, 신촌(新村) : 도진동 남쪽에 위치한 조그마한 마을로 새로 생긴 마을이라 새마 또는 신촌이라 한다. 그 남쪽에는 청룡사(靑龍寺)가 있다.
⑶ 기타
* 경매정(景梅亭) : 1668년 창건. 고령인 박창선(朴昌先, 호 景梅)을 위해 지은 건물이다.
* 낙락당(樂樂堂) : 1536년 창건. 명종 22년에 건립된 건물로서 중년에 소실된 것을 다시 중수 창건했다. 1521년(중종 16년)에 태어난 낙락선생이 이곳에서 수학하던 곳이라 하며, 후손들이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재실이다.
* 남고정(南皐亭) : 효종조에 창건. 고령인 박학암, 정번(廷番)의 손자 응형(應衡)이 문맹을 타파하기 위해 학문을 가르치며 연구하던 조부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세운 건물이다.
* 돋을-양지 : 부칫골 옆에 있는 산. 아침 해가 솟으면 가장 먼저 빛이 든다.
* 딧-골 : 딧매에 있는 골짜기다.
* 딧-매 : 도진 뒤에 있는 산이다.
* 마상방우(마상암) : 도진 앞에 있는 큰길가의 바위로 말을 이 바위 옆에 세워 두고 바위에 올라 말을 탔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문연재(文淵齋) : 1580년 박죽연, 박낙락, 박학암, 윤월오, 최매헌 등 다섯 사람이 학문연구 목적으로 문연서원을 건립했으나 1868년 서원 철폐령에 따라 철거된 것을 다시 건립했고, 부근 본 자리에 문연서원 비가 있다.
* 백마등(白馬嶝) : 도진 남쪽에 있는 등성이로 흰 말같이 생겨 붙여진 이름
* 부례-골 : 도진 남쪽에 있는 골짜기다.
* 부칫-골 : 도진 뒤에 있는 골짜기로 부처가 있었다.
* 빗-골 : 비곡이라고도 한다. 도진 뒤에 비(碑)가 있어 붙여진 골짜기다.
* 새-곡 : 도진 남쪽 청룡산에 있는 고개이다.
* 대장상 성터 : 도진 북쪽 대장산성터로 홍의장군 곽재우(郭再佑)가 쌓았다고 전해진다.
* 주 : 송암 김면 장군이 쌓았다고도 한다.
* 시멋-골 : 도진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학암(鶴岩) 박정번(朴廷番)이 삼년 시묘를 했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학암 선생이 세운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 앞-들 : 도진 앞 회천강가에 있는 들이다.
* 의병성지(義兵城址) : 조선 임란 당시 고령의 관문인 개포진(開浦津)이 있던 곳으로 당시 의병들에 의해 선조25년(1592년)에 축조, 왜병에 대항하던 곳이다. 왜병이 낙동강으로 진격해 와서 우리나라의 보물과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가는 것을 성 아래 잠복해 왜선 두 척을 야습했다. 불태워버리고 적 50명을 사살하고 보물을 조정에 반환하니 그 공으로 많은 보물이 김면(金沔) 진중에 하사됐다하나 현재 전하는 것은 없다. 당시 이 성에서 왜병과 수차 접전했으나 패전해 합천 노장태산으로 후퇴했다 하며 일명 대장산성(大壯山城)이라고 부른다. 원래 동·남동쪽은 석축으로 서·북서쪽은 토성으로 이뤄진 축성으로 현재는 동문 및 봉수대지의 흔적만 남아 있다. 
* 문연서원-유허비 : 문연서원터에 문연서원의 사적을 기록한 비다.
* 문연서원-터 : 도진동 모듬내 가에 있는 서원터로 숙종 21년 1696년에 창건해 낙락당 박택(樂樂堂 朴澤), 학암 박정번(鶴岩 朴廷番), 월오 윤규(月塢 尹奎), 죽연 박윤(竹淵 朴潤), 매헌 최여설(梅軒 崔汝偰)을 추배했다. 고종 5년 1868년에 헐리고 뒤에 문연서원 유허비를 세웠다.
* 문연-재 : 도진에 있는 재실로 문연서원을 위해 세웠다.
* 죽연-정 : 1540년 창건. 고령인 박윤(朴潤)은 관직에는 뜻을 두지 않고 학문탐구에만 힘썼다. 특히 그의 효행이 뛰어나 후손들이 그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세운 재실로 중년에 허물어진 것을 자손들이 중수했고 남명 조식 선생의 詩가 있다.
* 첫개울-골 : 도진 남동쪽에 있는 첫째 개울
* 청룡사 : 도진동 산 55번지 청룡산 허리에 있는 절이다.
* 학암등 : 도진 뒤에 있는 등성이로 학암 박정번이 세운 정자가 있었다고 한다.
* 화짓대-만댕이 : 마상바우 옆에 있는 산으로 예전에 화짓대(솟대)가 서 있었다고 한다.

 

▣ 사전리(沙田里)

 

사전리마을전경.JPG


⑴ 연혁(沿革)
본래 고령군 하미면 지역이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사부동과 저전동을 병합해 사부동이라 하고 우곡면에 편입됐다. 1917년 사부와 저전의 이름을 따서 사전동이라 하고 1988년 5월 1일 동이 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⑵ 지명 유래(地名 由來)
* 사붓골, 사부리(沙鳧里) : 풍수지리설에 따라 마을 뒷산의 형태가 오리가 앉아 있는 모습과 같다고 오리부(鳧)자를 쓰고, 이 마을 개울에는 다른 곳 보다 모래가 많아 사붓골, 사부리라 불렀다.
* 딱발골, 저전동(楮田洞) : 이 마을 주변에는 닥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으로 딱발골, 저전동이라 했으며, 지금은 닥도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가옥도 8가구 정도만 남아있다.
⑶ 기타
* 구싯-골 : 사붓골(대가야읍 내곡리와 쌍림면 평리로 넘어간다)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다.
* 구싯-재 : 구싯골 뒤에 있는 고개다.
* 농바랑만 : 산 이름으로 딱발골 뒤에 있으며, 높이가 299m나 된다.
* 목골(지곡) : 사붓골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못이 있다.
* 사곡(寺谷) : 절골인데 사붓골 뒤에 있다.
* 안-산 : 딱밭골 앞에 있는 산이다.
* 이밥-나무 : 사붓골 앞에 있는 이팝나무로 둘레가 두 아름이나 되며, 잎과 꽃이 번성하면 그해에 풍년이 들고 번성하지 못하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 진골 : 딱밭골 동북쪽에 있는 긴 골짜기다.

 

▣ 사촌리(沙村里)

 

사촌리마을전경.JPG


⑴ 연혁(沿革)
본래 고령군 우곡면 지역으로 모듬냇가 양지바른 곳에 위치한 모래가 많은 강가의 마을로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황성동을 병합해 서촌동이라 해서 우곡면에 편입됐다. 1988년 5월 1일 동이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⑵ 지명 유래(地名 由來)
* 모개실, 모가곡(募柯谷) : 조선조 단종 때 정언 신평(正言 申枰)은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에 유배되자 벼슬을 내어놓고 이곳에 와서 은거하면서 그의 고향인 전라남도 곡성군 옥과현(玉果縣) 가실(柯室)을 사모하는 뜻으로 모가정(募柯亭)을 짓고 마을 이름도 모가곡 또는 모개실로 불렀다고 한다.
* 서원골, 서재촌(書齋村) : 조선 숙종 때 영연서원(靈淵書院)을 세웠는데, 처음에는 운수면 구음동(九音洞)에 운천서원(雲川書院)을 세우고 순은(醇隱) 신덕인(申德隣), 읍취헌(邑翠軒) 박은(朴誾), 화포(花浦) 홍익한(洪翼漢)을 봉사했다. 숙종 37년(1711년) 이곳으로 옮겨 영연서원이라 하고 월담(月潭) 정사현(鄭師賢), 기재(棄齋) 김수옹(金守雍)을 추배해 오다가 고종 5년 1868년에 헐리고 묘전비만 남아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서원이 있는 골짜기라 해서 서원곡(書院谷) 또는 서원골이라 불린다.
* 서재마, 서재촌(書齋村) : 이 마을에는 서재가 있어 학문을 익히고 연구해 훌륭한 인재가 나왔다 해서 서재마을, 서재촌으로 불린다.
* 지성골, 진골, 지성곡(智聖谷) : 마을 뒷산의 산세가 힘차게 뻗어 골짜기가 길다 해서 진골이라 해서 지성골, 지성곡(智聖谷)으로 불린다.
* 웃골, 상곡(上谷) : 모가곡 위쪽 마을로 이 마을이 가장 먼저 생겼다. 으뜸가는 마을이며, 위치상 맨 위에 있다고 웃골, 또는 상곡으로 불린다.
* 황성(黃城) : 서원골 북서쪽 모듬내 건너에 있는 마을이다. 마을 뒷산에 황고산성(黃姑山城)이 있어 황성이라 부르는데 ‘황싱이’라고도 한다.
⑶ 기타
* 강가-밭 : 행굼 아래 모듬내 가에 있는 들이다.
* 고령신씨 양공효행비(高靈申氏 兩公 孝行碑) : 고령신씨 효행비, 신급(申汲) 신정제(申正濟)의 효행비다.
* 굴등-말랭이 : 깃대말랭이 위쪽 산인데 굴뚝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 굴이 있어 굴등말랭이라 한다.
* 깃대-말랭이 : 웃골 동남쪽 산인데 높이가 196m이고 상봉에 측량 깃대가 꽂혀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노고성(老姑城, 할미성) : 황성 뒤에 있는 산에 망우당 곽재우 장군이 쌓은 옛 산성이 있다. 산이 활(弓)처럼 생겨 활성이라 한다.(주:임란 때 망우당이 이곳까지 온 기록은 없으며 다만 송암 김면 장군이 쌓았다고도 하는데 고증이 필요하다.)
* 덤 말랭이 : 덤밑 위쪽에 있는 산이다.
* 덤밑-길 : 서원골 북쪽 모듬내 가에 있는 절벽 밑의 길이다.
* 모가정(慕柯亭) : 1908년 창건. 고령인 신평(申枰), 신환(申還) 양대조를 위한 재실이다.
* 배나뭇-골(이목곡) : 절골 아래 있는 골짜기로 배나무가 많아 붙여진 이름
* 사업골(사업곡, 四業谷) : 서원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옛 선지가 지나가다 마을의 번창함을 보고 네 번 절했다 해서 사업골이라 한다.
* 사읍-지(사업못) : 서원골 서북쪽에 있는 못으로 1952년에 팠다.
* 사촌지(沙村池) : 징골못이다.
* 솔통-산 : 고령신씨의 여러대 묘소가 있는데, 효행비 뒤에 있는 산이다.
* 언덕밑-들 : 아랫마을 앞에 있는 들로 언덕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영연서원묘정비(廟庭碑) : 1711년(숙종37년)에 건립해 신덕린, 박언, 정사현 3현을 향사(享祀)했다. 운수면 운산리(구음리)의 운천서원 역시동시에 건립한 건물로 홍익한을 봉사(奉事)하다 서원의 유지가 어려워 위판(位版)만 영연서원으로 이봉(移奉)함과 동시에 기재 김수옹을 추향하게 됐다. 1868년(고종 5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고 현재는 묘정비(廟庭碑)만 남아있다. 비석에는 영조 갑인년에 이조판서를 지낸 서유방(徐有防)의 글이 새겨져 있다.
* 웃골-골짝 : 웃골 뒤에 있는 골짜기
* 절골 : 사곡이라고도 하는데 할미성 아래 골짜기로 옛날에 절이 있었다.
* 징골-골짜기 : 징골 뒤에 있는 골짜기다.
* 징골-못(지성기, 사촌지) : 징골에 있는 못인데 1947년에 팠다.
* 행굼-들 : 언덕밑 아래 있는 들이다.


<다음호에 계속>
고령문화원 발행 고령문화 제7집 ‘高靈地方의 마을史’에서 발췌

구독 후원 하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