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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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재조명

목은(牧隱)·포은(圃隱)과 함께 삼은(三隱)에 포함, 두 가지 설 통용
증조 이백년(李百年)은 종2품 밀직사사(密直司事), 이조년(李兆年)의 맏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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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은 선생 영정

 

2. 청휘당 전경(성주군 수륜면 신파1길 28-5).JPG

청휘당 전경(성주군 수륜면 신파1길 2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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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성주군 용암면 본리3길 184

 

고려 후기 문인이며 학자인 이숭인(李崇仁, 1347~1392)은 경상북도 성주(星州) 출신으로 휘(諱)는 숭인(崇仁), 자는 자안(子安), 호는 도은(陶隱), 시(諡)는 문충(文忠), 관(貫)은 성주(星州)다. 아버지는 성산군(星山君) 이원구(李元具)이며, 어머니는 언양김씨(彦陽金氏) 사이의 2남3녀 가운데 맏아들로 태어났다.
도은(陶隱)의 증조 이백년(李百年)은 종2품 밀직사사(密直司事)에 오른 인물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지낸 이조년(李兆年)의 맏형이다. 조부 이인기(李麟起)는 평양부윤(平壤府尹)을 지냈으며, 부친 이원구(李元具)는 공민왕(恭愍王)으로부터 공신 칭호를 받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다.
도은의 모친은 세족 가문이었던 언양김씨(彦陽金氏)로 판소부시사(判少府寺事) 김경덕(金敬德)의 딸이다. 부친 이원구(李元具)와 모친 언양김씨 사이에는 도은 외에도 아들 이숭문(李崇文)과 세 딸이 있는데, 이숭문은 뒤에 판서(判書)를 지냈으며, 딸들은 모두 명문세족들에게 시집을 갔다.
이처럼 도은의 부친 대에 이르러 그의 가문은 세족으로서의 위치를 굳히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이조년이 절조로서 이름을 떨친 후 그의 손자인 이인복(李仁復), 이인임(李仁任)이 고위 관료로 입신하게 되자 도은의 가문은 명문가로서의 위세를 떨치게 됐다.
도은은 1347년(충목왕3)에 성산부(星山府) 용산리(龍山里)에서 태어났다. 도은이 ‘자송(自訟)’에서 “나는 강보(襁褓)에서 벗어난 뒤로 경적(經籍)을 공부하는 일에 급급했다.”라고 회고했듯이 그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매진했다. 그가 학업에 열중하게 된 것은 어머니의 자상하면서도 엄격한 가르침이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는 그에게 음식과 의복의 사치를 금하고 학문에 힘쓰도록 권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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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은 기념관(성주군 수륜면 신파1길 28-5)

 

* 어머니의 자상하면서도 엄격한 가르침이 큰 영향 끼쳐


이후 그는 뛰어난 천품과 탁월한 재능을 십분 발휘해 14세에 국자감시(國子監試)에 합격했고, 16세에는 당시 최연소로 문과에 급제했다. 이때 과거를 주관했던 시관(試官)은 사류(士類)들 사이에 신망이 높았던 홍언박(洪彦博)과 유숙(柳淑)이었다. 이색의 ‘도은재기(陶隱齋記)’에 의하면, 같이 합격한 동료들이 그가 어리기 때문에 경시했다가 그의 학문과 문장이 날로 진보하는 것을 보고 그에게 질정받기를 원했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도은의 10대는 학문적 역량이 축적되고 문장력이 비약적으로 신장됐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20대에 들어 도은은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들어서게 된다. 특히 그는 21세 되던 해에 성균관 교관(敎官)으로 임명돼 사대부 계층에 성리 학풍을 확장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때 이색은 성균관 대사성으로 정몽주는 박사(博士)로 제수됐으며, 도은과 문익점(文益漸), 박상충(朴尙衷), 김구용(金九容) 등은 교관으로 임명됐다.
그들은 매일 경전을 나눠 수업하고 정주(程朱)의 글을 강론했는데 학생들이 날로 늘어나 강당이 이들을 다 수용하지 못할 정도였다. 23세에는 이색과 함께 지공거(知貢擧)가 돼 유백유(柳伯濡) 등 33인을 뽑았다.
24세에는 명나라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향시(鄕試)에서 수석으로 뽑혔으나 나이가 어리고 공민왕이 그를 아껴 명나라 과거에 응시하지 못했다. 27세에는 공민왕이 도은에게 왕자의 학문을 가르치도록 청했다가 대비(大妃)의 저지로 무산된 일이 있었다.

 

* 20대부터 고려의 외교문서 도맡아 작성


이처럼 그가 20대 초반에 사류를 육성하는 지위에 올랐던 것으로 보아 젊은 날부터 학문과 문장으로 주목받는 인사가 됐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도은이 문장가로서 인정받았다는 점을 더욱 확연하게 보여 주는 것은 그가 20대 초반부터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작성했다는 사실이다. 23세에 그는 명 태조의 등극을 축하하는 표문을 작성해 황제로부터 글이 진실 되고 간절하다는 칭찬을 받았다.
이후 26세에는 명나라가 촉(蜀)을 평정한 일을 하례하는 표문을 지었고, 29세에는 공민왕을 이어 우왕(禑王)이 왕위를 잇도록 허락해 주기를 요구하는 ‘청승습표(請承襲表)’를 지었다. 이처럼 도은은 20대부터 고려의 외교문서를 도맡아 작성했던 것이다.
도은이 26세에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에 임명됐다는 사실은 그가 일찍부터 문장으로 명성을 떨쳤음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유력한 단서이다. 여말 선초에 예문관 응교 직책은 뒷날 문형(文衡)이 될 만한 젊은 인재에게 제수하는 직책이었기 때문이다.
공민왕 대에 해당하는 도은의 20대는 그의 10대와는 질적으로 구분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는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벼슬길에 들어서서 공민왕의 지우를 받았고, 유숙과 이색을 비롯해 정몽주, 전녹생(田祿生), 김구용, 박상충, 정도전(鄭道傳), 문익점 등과 같은 많은 사우(師友)들과 교제하며 연찬했다.
특히 당대 명문가 출신인 그가 신흥 사대부들과 우의를 다지며 성리학을 깊이 연구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개혁적인 세적 일부와 신흥 사대부들이 연대해 정계의 개혁에 분투했던 당대의 정황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단서이다.
그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문장과 학문으로 조정 신료들에게 크게 인정을 받아 조정에서 주목받는 인물로 부상하고 있었다. 도은이 ‘송악에 오르다(登松獄)’에서 “소년의 다리 힘에 진실로 의지할 만하니, 위태로운 산꼭대기를 일순간에 날아오른다.”라고 읊조렸던 것은 이러한 상황속에서의 그의 자신감을 여실히 보여준다.

 

* 야은(冶隱) 대신 도은(陶隱)을 삼은(三隱)에 포함한 연유


여말(麗末) 삼은(三隱)이란 영예로운 칭호가 있으니 목은(牧隱) 이색(李穡),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를 일컫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근년에는 길재 대신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을 포함시키기도 한다.
삼은은 여말에 경술(經術, 道學), 문장(文章), 수사(修史), 충절(忠節), 경세(經世)에 있어서 당대뿐만 아니라 백세(百世)에 사표(師表)임을 말한다.
종래 이색·정몽주·길재를 삼은이라 부른 것이 언제부터이며, 그 근거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 아마도 수백 년 동안 관습적으로 구전돼 온 듯하다. 그 기록이 보이는 것은 충청남도 공주에 있는 동학사(東鶴寺) 경내의 ‘삼은각비문(三隱閣碑文)’이다.
비문에 따르면, 1394년(태조2) 길재가 동학사 경내에 들어가서 단(壇)을 모아 고려 국왕과 정몽주의 혼을 초혼(招魂)해 제사했다고 한다. 그 뒤 1399년(정종1)에는 유방택(柳方澤)이 또한 이곳을 찾아와 이색과 길재를 추배(追配)해 제사를 지낸 것으로 돼 있다. 물론 이때까지만 해도 제단을 설치한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 이듬해 이정간(李貞幹)이 공주의 지주사(知州事)로 도임하면서 그 제단에 삼은각을 창건하고 삼은을 제사했다. 이 사실이 전주 유림(儒林)에 알려져 삼은이란 칭호가 생기게 되고, 이색·정몽주·길재를 삼은으로 일컫게 됐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소 무리가 있다고 지적되는 대목은 삼은각이 창건된 1399년 당시 아직 야은이 생존해 있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 비문의 제작 연대가 20세기 초로서 김영환(金甯漢)이 짓고 윤용구(尹用求)가 쓴 것으로 보아, 이전에 확실한 문헌도 없이 내려오던 전설에 의지해 기록한 비문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료적 근거야 어떻든 길재를 삼은으로 불러 온 지 오래됐고, 여기에 아무런 이의도 제기돼지 않았다. 그러다가 삼은에 관해 문제가 제기된 것은 1954년 이병도(李丙燾)가 ‘국사대관(國史大觀)’을 내놓으면서 부터였다.
이병도는 여기에서 길재 대신 이숭인을 삼은의 한 사람으로 내세웠다. 즉, ‘국사대관’에는 고려말 성리학(性理學)의 전래(傳來)와 성행(盛行)에 관해 이런 언급이 실려 있다. 그 뒤 여말의 삼은, 즉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도은 이숭인과 같은 이학(理學)의 태두(泰斗)를 냈던 것이다.
이병도는 한 신문에다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자신의 주장을 해명했다. 고려 말에 이숭인은 문장(文章)경술(經術)로써 이색·정몽주와 함께 이름을 날렸다. 그리고 당시 태학(太學)에서 경학(經學)을 강론해 대성황을 이뤘다.
또한 이색·정몽주와 함께 수사사업에도 참여해, 삼은이야말로 당시 학계에서 경술문장사가(史家)를 겸한 삼거벽(三巨擘)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를 뒷받침하는 여러 가지 사료도 상세히 소개했다.
한편, 길재에 대해서는 고려말의 한 유자(儒者)이지만, 고려 말보다는 조선 초에 더 유명했다고 한다. 길재는 이색·정몽주·권근을 사사해 유학연원(儒學淵源)을 이은 인물이었다.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不事二君).’고 해 새 왕조에서 벼슬하지 않고 경상도 구미의 금오산(金烏山) 아래에서 자제를 교육했다.
이로써 조선시대 사학의 대연원을 일으킨 업적이 컸는데, 후세에서 그의 절의와 교육의 공적을 높이 산 결과, 길재·정몽주와 더불어 흔히 삼은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려 말에는 그의 존재가 이숭인과 같이 그리 크지 못했다는 게 이병도의 주장이다. 이숭인을 삼은으로 보는 견해는 이미 문일평(文一平)의 주장에서도 발견된 바 있었다. 이러한 문제는 무엇이 정설이라고 판명하기 어려운 일이어서 아직 학계에서는 두 가지 설이 다 통용되고 있다.
출처-한글민족문화대백과사전

 

과회음유감표모사(過淮陰有感漂母事)
‘회음의 묘를 지나며 표모의 일을 생각한다’ 도은 이숭인 漢詩를 소개한다.

일반왕손감개다(一飯王孫感慨多)


부수저해경여하(不須菹醢竟如何)
고분천재정령재(孤墳千載精靈在)
소살고황맹사가(笑煞高皇猛士歌)

왕손에게 한 끼 밥을 주어 감개 많긴 하였으나
처형될 줄 모른 것까지야 어찌하리
외로운 무덤 천 년 뒤에도 정령은 있을 테니
한 고조의 ‘맹사가’를 비웃으리

이 시는 한 고조에 의해 토사구팽을 당한 한신의 처지를 슬퍼하면서 한 고조를 비판하는 내용이다. 표모(漂母:빨래하는 노파)가 한신의 인물됨을 알고 한 끼 밥을 줬으나 처형당할 것까지야 어떻게 알았겠는가. 그러나 맹사(猛士)를 얻어 나라를 세우고 맹사로 하여금 나라를 지키게 하겠다고 호언한 고조가 오히려 맹사를 버렸으니 일개 표모일망정 혼령이라도 남아서 유방을 비웃을 것이다. 처음부터 한신을 버린 항우나, 써먹고 버린 유방이나 모두 이 표모보다 못하다. 표모가 설마 잘됐을 때의 대가를 생각하고 한 끼 밥을 줬겠는가.

도은은 1360년(공민왕9) 14세의 나이로 국자감시에 합격해 이색의 문하에 있었으며, 16세 때 등과해 숙옹부승을 제수 받고 후에 장흥고사가 됐다. 21세 때 성균관의 생원이 되면서 이색 문하에서 정몽주·김구용·박상충·정도전·권근 등과 깊이 사귀었다. 24세에 중국의 과거에 응시할 인재를 뽑는 시험에서 수석을 차지했으나 연령 미달로 가지 못했다. 그 후 성균직강·예문응교·전리총랑을 지냈다.
우왕 즉위년에는 친명파라고 해서 대구현에 유배됐다가, 4년 뒤 소환돼 성균사성·전리판서·밀직제학을 역임했으며, 1386년 하정사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이인임의 인족(姻族)이라 해서 유배되기도 했다. 1388년(창왕 즉위) 최영 일파의 참소로 통주에 유배됐으나, 최영의 몰락으로 다시 소환돼 지밀직사사가 됐다.
1392년(공양왕 4) 이방원에게 정몽주가 피살되자 그 일파로 몰려 순천에 유배됐다가 조선 개국에 앞서 정도전의 심복인 황거정에 의해 그도 피살됐다. 그 후 태종이 그의 죽음이 무고함을 밝히고 1406년 이조판서를 증직하고 문충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숭인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고 문사로서 국내외에 이름을 떨쳤고, 문재로서 고려의 국익을 위해 기여했으며, 시는 후대에 많은 극찬을 받았다. 또한 이색으로부터 성리학을 전수받아 유풍을 새롭게 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이색은 “이 사람의 문장은 중국에서 구할지라도 많이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칭찬했고, 명나라 태조도 일찍이 이숭인이 찬한 표문(表文)을 보고 “표의 문사가 참으로 절실하다.”라고 평가했고, 중국의 사대부들도 그 저술을 보고 탄복했다.
그의 문학관을 살펴보면, 첫째 경전 위주의 문학관으로 사장 위주의 문예보다는 도학적인 면에 힘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둘째, 시는 성정의 정(情)에 근본해야 한다고 해서 학문이 사무사의 경지에 들어가서 성정의 정을 얻은 후면 시는 저절로 된다고 했다. 셋째, 시의 효용을 교화 위주에 뒀으며 넷째, 자연발로의 문학관으로 시는 억지로 생각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심한 가운데 저절로 이뤄진다고 했다.
그의 시는 정연하고 고아하다는 평을 들었는데, 대표적인 작품에는 ‘제승사(題僧舍)’·‘오호조(嗚呼鳥)’ 등이 있다. 산문은 표문이 많은데, 이는 그가 대외관계에 필요한 많은 문을 썼기 때문이다. 고려 후기의 문학을 대변하는 문인으로 그의 도학적인 문학관은 조선의 변계량·권근에게로 이어졌다. 저서로는 ‘도은집’ 5권이 전한다. 그 서문에 의하면 생존시에 ‘관광집(觀光集)’, ‘봉사록(奉使錄)’ ‘도은재음고(陶隱齋吟藁)’ 등을 지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참고문헌-청휘당실기, 한글민족문화대백과사전 外 참고자료)
〈주간고령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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