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통해 새 시대 준비한 백농 최규동 선생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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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교육 통해 새 시대 준비한 백농 최규동 선생 재조명

인물평전
백농 최규동(前 서울대학교 초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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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동(崔奎東, 1882~1950, 성주 출생) 선생의 호는 백농(白儂, 이하 백농), 본관은 영천(永川, 월주공파)이다.
백농은 1882년 12월 30일 고종 19년 성주군 가천면 창천동에서 아버지 영한(永漢)과 모친 이씨(李氏) 사이의 4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헌신적 교육자이자 민족계몽의 선구자로 평생을 청빈하게 육영에 전념하며 독립을 위해 민족교육의 선두에 섰던 인물이다.
신·구 지식을 탐구하기에 부단히 정진한 백농은 과학기술의 발달이 곧 국가발전의 원동력이라는 것을 깨닫고 조선전기공업중학교를 설립해 과학기술교육에도 공헌했다. 이에 따라 나라의 광복과 민족의 발전은 오직 과학교육에 있다고 생각해 그의 생애 전반은 나라를 잃지 않으려고 싸웠고, 후반은 도로 찾으려고 싸웠으며, 입교(立敎), 구국(救國), 제민(濟民) 정신이 중심사상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1949년 1월 초대 국립서울대학교 총장에 취임했다. 서울대학교는 우리나라의 최초, 최대의 국립종합대학교로서 지도자급 인재 배출을 위한 영재교육의 전당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기반을 닦았다.
백농(중동학교 교장)이 총장으로 선임한 근거로 첫째 당시 자타가 인정하는 최고의 깡패학교인 중동학교 교장이었기 때문이다. 왜놈들에게 순종했던 모범학교에 대비된 깡패학교의 대표 교장이 백농이었다. 당시에 왜놈들이 말하는 깡패학교를 독립군학교라고 간주했기에 서울대학교 총장으로서 더욱 적격자였던 것이다.
백농은 당시에 전국에서 독립운동에 연루돼 퇴학을 당한 학생들은 모두 중등학교에 받아들였다. 왜놈들이 가장 두려워하던 교육자가 백농이었다. 그래서 중동학교를 깡패학교라고 한 것이다.
둘째로 백농은 최악의 일제탄압 공포체제에서도 최후의 순간까지 일본말을 쓰지 않은 유일한 교장이었다. 당시는 일제가 마지막 발악을 하며 거의 악마같이 날뛰던 때였고, 백농은 특히 요주의 교장으로 특급 감시 대상이었다. 하지만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대표적 교장이었고, 평생토록 일본어를 쓰지 않았음은 물론 배우려고도 하지 않았다. 특히 학교가 폐교 직전에 이르렀고 일본 순사가 임석해 감시하는 살벌한 상태에서 비록 짧은 시간의 훈화를 할지언정 한 번도 일본말을 쓰지 않았다. 그것은 전국적으로 매우 유명한 일이어서 이에 대해 이의제기를 할 사람이 있을 수 없었다.
세 번 째는 최고의 수학자로서, 성실한 교육자로서, 뛰어난 인격자로서 흠을 잡을 곳이 없었다. 백농이 가르친 수많은 중동학교 졸업생 중에는 이병철이 있다. 이병철이 만든 삼성그룹은 오늘날 세계 10위권을 달리는 대한민국의 상징적인 기업이다. 민족의 자랑인 삼성그룹은 결코 우연히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백농은 오늘날의 빛나는 나라를 만든, 문자 그대로 스승의 표상이었다. 중동학교 유명 제자가 또 있다. 김광섭 시인을 비롯해 계용묵 소설가, 안호상 초대 문교부장관 등이 그들이다. 이처럼 항일애국자였고, 훌륭한 민족교육자였기에 서울대학교 초대총장 선임의 최적격 자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약 2년간 재직 중 불행하게도 백농이 6.25 전쟁의 희생자가 됐다. 1950년 전쟁이 일어나고 그가 곧 북으로 납치돼 평양의 서평양인민학교에 수용됐다. 그곳에는 소설가 이광수, 한국학의 정인보도 함께 수감돼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에 따르면, 그해 8월 10일 평양에 도착한 이들 가운데 정인보 등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고, 10월 16일 밤 심하게 내리는 빗속에 내무서원들의 집중 총탄세례에 최규동과 이광수는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이 때 백농은 향년 69세였다.

▣ 어린 신동이 신학문에 눈 떠
 
백농은 고향 성주에서 어릴 때부터 한학을 익혀 여덟 살에 석류나무를 보고 한시를 짓고, 열 살에 사서백가를 다 외우니 고을의 신동이라 불릴 만큼 그 명성이 자자했다.
일화에 의하며, 그는 아침에 서당에서 공부하고, 마치면 한약방에 가서 한약처방을 암기하고, 저녁에는 다시 서당에 나가 아침에 배운 것을 복습했다고 한다. 신동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당시 성주 군수가 그를 불러 70줄의 글을 한 번 보여준 후 말하게 했다고 한다. 그가 한 번 보고는 거침없이 암송하니 군수가 매우 놀라 “과연 듣던 대로구나” 했다고 한다.
백농은 1901년 고향인 성주를 떠나 신지식 갈증을 채우고자 상경을 감행했다. 이 시기는 전통적 지식 구조를 토대로 한 외세항거가 그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국가적 차원의 생존을 위해서도 지식 혁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한 후 신문학을 배우기 위해 상경, 광신상업학교(廣信商業學校)를 졸업했다. 그의 진지한 연구 태도와 뛰어난 수학적 두뇌가 차차 세상에 알려져 수학분야 재능이 남보다 뛰어남을 인정받아 수학연구학교인 사립 정리사(精理舍) 수학연구과에 들어가 졸업했다.
그 후 전공과목인 수학은 물론이고 물리, 화학, 지질학에 이르기까지 연구를 계속했다. 이처럼 그는 열정적으로 지식에 관한 자기 혁신을 성취해 나갔다.
그의 나이 23세 때인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울분을 참지 못해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 인재를 배양하는 것이 장차 이 나라를 다시 찾을 수 있다는 민족적 신념으로 평양에 대성학교에서 안창호, 조정환과 함께 교편을 잡았다. 이때가 1908년 9월이다.
1909년 5월 휘문의숙, 기호학교, 9월 융희학교, 1911년 1월 중앙학교에 취임해 교원생활을 했다. 수학의 거두라 해서 불린 별칭 최대수(崔代數)가 장안에 널리 알려진 시기다.
 
▣ 민족정신과 민족의식 고취에는 ‘교육만이 희망이다’
 
백농의 사상 즉, 무서운 것은 가난이 아니고 무지라고 생각했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젊은 새싹을 힘 있게 키워야 하고, 비운의 내 나라 내 강토를 구하기 위해서는 우선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교육적 철학이었다.
그러자면 중요한 것은 신학문 교육이었다.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고 인재를 배양하는 것이 빼앗긴 나라를 다시 찾을 원동력이 된다고 굳게 믿었다.
중동학교 교사시절, 1915년 학교가 조선총독부의 교사(校舍) 부지 몰수와 재정 부족으로 폐교위기에 처하게 되자, 1918년 5월 야간학교이던 중동학교를 인수함으로써 대사회적 혁신 사업은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했다. 혁신적 교육 사상을 실천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확보했기 때문이다.
초대 교장으로 그는 학생들의 민족정신과 민족의식을 고취시켰고, 민족의 앞날을 위한 인재를 양성할 수 있었다.
1919년 2월 백농은 우리나라 최초의 중등교육 수학 신교과서를 지어 수리교육의 새로운 기원을 마련했으며, 세계적으로 알려진 육서심원을 편찬·간행하는 데에도 큰 힘을 기울였다.
1945년 해방이 되자 많은 인사들이 정치에 대한 야망이 부풀어 교육계를 떠났지만 백농은 꿋꿋하게 교육계를 지키며 미군정 학무국장 자문기관인 한국교육위원회 조직에 일반 교육 분야 대표위원으로서 어려운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공헌했다.
1947년 조선교육연합회가 결성되자 백농이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고 정기간행물 ‘새교육’을 발간해 전국의 교육자들이 새로운 교육사조의 이해와 폭넓은 지식 습득으로 산교육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2015년 교육부와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이달의 스승’ 12명을 선정한바 있다. 올바른 스승상 구현 및 스승을 존경하는 풍토를 조성하기 위함이다. 교육부는 백농을 두고 ‘헌신적인 교육자의 표상이자 민족운동가로서 대성 및 중동학교 등에서 수학교사와 교장으로 후세 교육에 헌신했다’는 이유로 3월의 스승으로 선정한바 있다.
▣ 친일인사로 매도, 당시 시대상 배려 없는 처사
당시 일부 언론은 백농 선생이 1942년에 쓴 것으로 보이는 징병제 옹호 글 한 편과 중일전쟁 기원제 발기인, 임전보국단 평의원, 징병제 축하연(2015년 3월 7일 오마이뉴스 보도) 등을 거론하며 친일 인사로 낙인찍으려는 언동이 있었다.
1942년은 일제가 최후의 발악을 하던 시기로, 그 당시 어떤 지식인도 그 강압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한 인물의 인생 궤적을 살펴보면,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어떤 행동이 자의에 의해서 적극적으로 한 것인지, 어쩔 수 없는 강압에 의해 마지못해 한 것인지 분명히 구별할 필요가 있다. 그때까지 백농의 행적을 미루어 볼 때 결코 자의가 아님은 누구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930년대 중반 이후 파시즘 교육체재 하에서 사립학교의 사적 영역은 완전히 부정했던 시기다. 백농이 학교 경영에서 물러나지 않는 한 이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학교의 존속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문교·조선’에 실은 징병제 찬양 글 한 편 외에는 더 이상 사회적 망언을 하지 않는다. 학교에서도 학생 앞에서 거의 침묵을 지켰다.
당시 적지 않은 숫자의 학교 경영자들이 ‘학교를 지키기 위해서’ 노골적인 친일의 길로 나가는 가운데 한학을 공부해 ‘대의’와 ‘의지’를 중요시했던 한 교육지식인의 대응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해 당시 엄혹한 정황과 백농의 불가피한 선택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각종 모임에 이름을 올린 것은 당시 일제의 극악한 종용과 강압에 의해 부득이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실제 참석 여부나 자의적인 참여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만약 이런 잣대로 당대 지식인들을 평가한다면, 단 한 사람도 친일의 멍에를 벗을 수 없을 것이다. 그만큼 그 시절은 엄혹했던 때이다.
이러한 당시의 정황을 고려하지도 않고 드러난 한두 가지 정황만으로 백농을 친일로 몰아붙이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 만약 백농이 개인적인 영달과 이익을 위해 이런 행위를 했다면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런 행위가 단지 학교 폐쇄라는 극단적인 상황을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일제가 교사들에게 국방색 국민복 착용을 강요했을 때 일부 교사들은 반발했으나, 백농은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한다. 폐교 당하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고 입었다고 한다. ‘文敎·朝鮮’의 글도 이와 같은 성격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징병제를 옹호한 글을 썼다고 해서 백농은 강연을 다닌 적도 없고, 한 번도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수업 시간 중에 눈물을 흘리며 민족의 장래에 대해 말해 학생들을 감화시켰다. 수많은 제자들이 당시 백농의 가르침으로 민족의식을 키웠노라고 회고하고 있다.
일본식 교육과정을 받아드리지 않기 위해 갖은 모함을 받으면서도 ‘고등보통학교’로의 변경을 거부했다. 특히 “우리 자제는 우리 손으로 교육시키자”며 일본인 교사도 총독부에서 정한 최소 인원으로 했으며, 채용 조건도 가장 무능한 사람으로 했다. 1919년 3월1일 독립운동이 일어난 그 날, 민족을 상징하는 무궁화와 독립을 상징하는 떠오르는 태양으로 교표를 만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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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가천면 광봉산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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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가(가천면 가천로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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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가천면 광봉산 소재)
 
▣ “교단에서 쓰러 질 때까지가 나의 생명이다” 수업 강행
 
천식의 병환 속에서도 일주일에 58시간 수업을 했으며, 매일 새벽 폐경련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교단에서 쓰러질 때까지가 나의 생명이다”라고 했다. 이런 모습에 감동해 ‘조선의 페스탈로치’(동아일보 1940)라는 극찬을 받게 됐다. 그리고 한 때는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해외로 나가 독립운동을 하려고 일부러 서울에서 프랑스 선교사가 있던 평양 기명학교 교사로 자원해서 가기도 했다.
만약 백농께서 부정할 수 없는 친일 행각이 있었다면 1994년부터 2009년까지 장장 15년 간 철저하게 조사 간행한 친일인명사전에 왜 등재가 되지 않았는지 생각해볼 일이다. 한평생 민족교육에 바친 헌신적인 삶은 살펴보려고도 하지 않고, 오직 1942년 일제가 패망기에 들어선 엄혹한 시절 백농이 썼는지 조차 불투명한, 혹은 강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썼을 것으로 추정되는 글 한 편으로 친일로 매도했던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와 관련해 중동고등학교 총동문회는 2015년 5월 한국프레스센터에서 백농의 친일 논란과 관련, 문제 제기를 했던 일부 역사학자와 언론인을 초대한 가운데 김형목 박사(독립기념관 독립운동사연구소 선임 연구원)의 ‘백농 최규동 선생의 생애와 민족교육운동’의 발제를 시작으로 올바른 역사적 사실을 규명하기 위한 학술토론의 장을 마련했다.
 
2016년 5월 5일 서울 중동고등학교 총동창회가 주최하고 백농중동마라톤동호회가 주관하는 중동학교 개교 110주년 기념 백농 선생을 기리는 국토종단 마라톤대회가 열렸다. 성주군 가천면 백농 생가에서 두 명의 선수가 출발해 다음 도착지에서 바톤을 인계하는 이어달리기 릴레이 마라톤으로 서울 중동학교까지 385km를 5박6일 동안 교대로 뛰는 행사다.
당시 곽길영 성주군의회 의장은 “백농 선생께서 향토 출신이라는 것이 무한한 자랑꺼리”라며, “그 명성에 걸맞은 생가를 비롯한 산소의 성역화 사업이 필요하다.”라고 했다. 곽 의장은 “이러한 성역화 사업은 영천최씨 문중과 지방자치단체, 중동중고등학교 총동창회 등 모두가 관심 갖고 나설 때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평생을 청빈하게 육영사업에 전념하면서 단 하나 민족의 독립을 위해 민족교육의 선두에 섰던 선생에게 1968년 2월 정부에서는 문화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고 독립운동자로서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됐으며, 민족의 인재양성에 앞장선 선생의 뜻을 후세에 기리고 있다.
 
<주간고령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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