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조씨(平壤趙氏) 별좌공파(別坐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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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평양조씨(平壤趙氏) 별좌공파(別坐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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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재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시조(始祖)
시조 조춘(趙椿)은 고려의 상장군(上將軍)으로 수군(水軍)을 이끌고 남송(南宋)을 도와 금(金)나라를 정벌하는데 세운 공로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錄大夫)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의 관직을 받은 것으로 계묘보(癸卯譜)에 기록되어 있다.
그후 조춘(趙椿)의 거주지는 평안도 평양 부근의 식달(息達)이었으나 4대손까지 내려오다 4세 휘 영(瑩)의 부인 토산군부인(土山郡夫人)이 해를 몸 안에 품은 꿈을 꾸고 임신하여 아들 정숙공(貞肅公) 조인규(趙仁規)을 낳았기 때문에 상서로움이 있다 하여 식달(息達)을 상원(祥原)으로 변경하였고 5세손인 조인규(趙仁規)의 딸이 충숙왕의 비가 되자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에 봉(封)해진다. 이로 인하여 후손들은 평양(平壤)으로 본관(本貫)을 바꾸고 조춘(趙椿)을 시조로 삼아 세계를 이이오고 있다.

(2) 평양조씨 삼세삼충(三世三忠)

⓵ 조선개국공신(朝鮮開國功臣) 조준(趙浚)의 동생 조견(趙狷)으로 고려에 대한 절의를 지키기 위하여 두류산(頭流山), 청계산(淸溪山) 등에 은거하다가 양주(楊州) 송산(松山)으로 옮겨 여생을 보내었다. 호를 송산으로 한 것은 개성의 송악산(松岳山)을 잊지 않는다는 뜻이다.
⓶ 조견(趙狷)의 둘째 아들 석실공(石室公) 조철산(趙鐵山)과 손자 조청로(趙淸老)가 단종 복위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충절을 중시하는 가문의 가풍이 있었기 때문이다.

(3) 분파(分派)派),
제주목사공파(濟州牧使公派), 병사공파(兵使公派), 정랑공파(正郞公派), 부정공파(副正公派), 감사공파(監司公派), 진안공파(鎭安公派), 판서공파(判書公派), 첨추공파(僉樞公派), 소윤공파(少尹公派), 판관공파(判官公派), 현령공파(縣令公派), 현령공파(縣令公派), 별좌공파(別坐公派), 승지공파(承旨公派), 현감공파(縣監公派),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 교리공파(校理公派) 등 18파로 분파되었다.

(4) 평양조씨(平壤趙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평양조씨(平壤趙氏)는 도시화 및 산업화로 인한 이촌향도(離村向都) 현상으로 몇 가구가 세거(世居)하고 있다.
⓶ 별좌공파(別坐公派) 조진태(趙鎭泰)의 후손은 개진면 인안2리 속칭 꼬미, 혹은 치산리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⓵ 조영(趙瑩)
금오위(金吾衛) 별장(別將)을 시작으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거쳐 이부상서(吏部尙書)와 상장군(上將軍)을 역임하였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⓶ 조인규(趙仁規)
자는 거진(去塵)이다. 금오위(金吾衛) 별장(別將) 조영(趙瑩)과 내원승(內圓丞) 이유분(李有芬)의 따님 토산군부인(土山郡夫人) 사이에서 고종 24년(1237년) 태어났다. 1269년(원종 10년) 세자 왕심(王諶)이 원나라에 입조할 때 수행해 충렬왕과 친분 관계를 두터이 하였다. 1274년에 세자가 원나라 세조(世祖)의 딸인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와 혼인하고 귀국해 즉위하자 공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충렬왕이 즉위하던 때 장군(將軍)에 오른 뒤 1278년에 대장군(大將軍)으로 궁궐에서 기무를 맡아보는 필도치(必闍赤)에 임명되고, 곧이어 승지(承旨)가 되어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였다. 특히 탁월한 몽고어 구사력으로 원나라 세조에게 인정과 신임을 받게 되면서 원나라의 관직인 선무장군(宣撫將軍)·왕경단사관 겸 탈탈화손(王京斷事官兼脫脫禾孫)에 임명되었다. 1290년에는 고려가 원나라로부터 동녕부(東寧府)를 되찾기 위한 교섭에서 공을 세웠다. 충렬왕 18년(1292년)에 딸이 세자비(충선왕비)로 간택되면서 국구(國舅)가 되었다. 조인규의 가문도 충선왕이 복위하여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가문인 ‘재상지종(宰相之宗)’에 포함되었다. 조인규는 1298년 세자인 충선왕이 즉위하자 사도 시중 참지광정원사(司徒侍中參知光政院事)로서 왕의 개혁 정책을 크게 뒷받침해 주었다. 그러나 충선왕 비인 계국대장공주(薊國大長公主)의 조비(趙妃)에 대한 질투로 일어난 조비무고사건(趙妃誣告事件)으로 조인규도 연루되이원나라의 안서(安西)로 장류(杖流)되었다. 1305년에 방면되어 원나라 황제의 명령으로 판도첨의사사(判都僉議司事)에 임명되었다. 1307년 원나라 무종(武宗) 옹립의 공으로 충선왕이 조인규를 자의 도첨의사사 평양군(咨議都僉議司事平壤君)에 봉했다. 충렬왕 34년(1308년) 졸(卒)했다. 시호는 정숙(貞肅)이다.
⓷ 조서(趙瑞)
자의 도첨의사사(咨議都僉議司事)를 지낸 조인규(趙仁規)와 사재경(司宰卿) 조온여(趙溫呂)의 따님인 흥양군부인(興陽郡夫人) 한산조씨(漢山趙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충렬왕 초에 과거에 급제하여 직보문서(直寶文署)에 임용된 후에 충렬왕 23년(1297년) 우승지(右承旨)에 이르고, 이듬해 충선왕이 잠시 즉위한 동안 광정승지(光政承旨)·전객경(典客卿)이 되었다. 조인규가 방환(放還)되자 귀국하여 1307년 좌승지(左承旨)에 복직되고, 이듬해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어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으로 원나라에 다녀왔다. 1308년 동지밀직(同知密直)으로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신이 되어 원나라에 파견되었는데, 이듬해 귀국하면서 원나라로부터 회원대장군 고려국부원수(懷遠大將軍高麗國副元帥)의 직을 받았다. 귀국한 뒤 대사헌검교찬성사(大司憲檢校贊成事)에 제수되고 평양군(平壤君)에 봉해졌으며,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거쳐 삼사사(三司事)에 올랐다. 1313년 졸(卒)하였다. 시호는 장민(蔣敏)이다.
⓸ 조연(趙璉)
조연(趙璉)은 자(字)가 온중(溫仲)이고, 자의(咨議)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를 지낸 조인규(趙仁規)의 아들로서 고종 46년(1259년)에 태어났다. 아버지의 음덕(蔭德)으로 관직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거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올랐다. 충숙왕(忠肅王) 때 첨의평리(僉議評理)에 임명되었으며 찬성사(贊成事)로 옮겼다. 조연(趙璉)은 원의 명령을 받아 고려왕부 단사관(高麗王府 斷事官)이 되어 삼주호부(三珠虎符)를 차게 되었다. 왕이 일찍이 원에 있을 때 조연(趙璉)이 임시로 행성(行省)의 일을 맡아본 것이 5년이었는데, 원의 사신이 끊임없이 왕래하며 거느리고 다니는 무리가 기분에 따라 행패(行悖)를 부렸으나, 조연이 좋은 말로 달래며 응대하자 분노가 문득 풀렸다. 충숙왕 9년(1322년) 죽자 백성이 모두 울었다. 시호(謚號)는 충숙(忠肅)이다. 아들은 조덕유(趙德裕)이다.
⓹ 조덕유(趙德裕)
고려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도첨의찬성사(都僉議贊成事) 조련(趙璉)의 아들로 충숙왕 1년(1314년) 태어났다. 조덕유(趙德裕)도 또한 부친을 이어 왕부단사관(王父斷事官)이 되었다. 공은 청백(淸白)을 스스로 지키고 남의 충고를 듣지 아니하며, 영리(榮利)를 생각지 않아서 친척이나 사귄 지 오랜친라도 국사(國事)에 당해서는 일체 단절하고 서로 왕래도 하지 않았다. 벼슬이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이르러 공민왕 1년(1352년) 졸(卒)하였다.
⓺ 조견(趙狷)
초명은 조윤(趙胤)이고 자는 종견(從犬)이고 호는 송산(松山)이다.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조덕유(趙德裕)와 첨의평리(僉議評理) 오의(吳懿)의 따님 변한국부인(卞韓國夫人) 고창오씨(高敞吳氏) 사이에서 충정왕 3년(1351년) 태어났다. 영의정부사(領議政府使) 조준(趙浚)의 동생이다. 여러 절의 주지를 역임하다가 30세가 넘어 환속하였다. 승직(僧職) 경력으로 인하여 좌윤(左尹)에 서용(敍用)되었으며, 고려 말에는 안렴사(按廉使)를 지냈다. 태조 1년(1392년) 상장군(上將軍)으로 이성계(李成桂) 추대에 참여하고 개국공신2등(開國功臣二等)에 책록(策錄)되었다. 1394년 경상도절제사(慶尙道節制使), 1397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1400년 삼사우복야(三司右僕射)를 거쳐 1402년 도총제(都摠制) 재직 중에 사은사(謝恩使)의 명을 받았으나 칭병(稱病)을 이유로 사퇴하여 직첩을 몰수당한 뒤 축산도(丑山島)에 유배되었다. 1407년 충청도절제사(忠淸道都節制使) 겸 수군도절제사(水軍都節制使)를 거쳐, 이듬해 딸의 입명(入明)를 저지한 일로 개령(開寧)에 부처(付處)되었다. 곧 사면되어 청성군(昌城君)에 봉해졌다. 1419년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에 보임되고, 1421년 평성부원군(平城府院君)에 진봉(進封)하였다. 세종 7년(1425년) 졸(卒)했다. 양주의 정절사(旌節祠)와 송산사(松山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평간(平簡)이다.
 
(2) 조선시대
⓵ 조철산(趙鐵山)
호는 석실(石室)이다. 판우군도총제부사(判右軍都摠制府事) 조견(趙狷)과 진사(進士) 윤승열(尹承烈)의 따님 정선택주(貞善宅主) 파평윤씨(坡平尹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한 후 예빈시소윤(禮賓寺少尹)을 지냈으며 조선 개국 후에는 호조정랑(戶曹正郞)과 전농시소윤(典農寺少尹)을 거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이르렀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조견(趙狷)의 벼슬하지 말라는 유언때문에 조선조에 크게 사환(仕宦)하지 않았다. 1,468년에 졸(卒)했다.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에 증직되었다.
⓶ 조청로(趙淸老)
소윤(少尹)을 지낸 조석산(趙石山)과 한성윤(漢城尹) 한임(韓任)의 따님 정경부인(貞敬夫人) 청주한씨(淸州韓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중훈대부(中訓大夫) 사복시(司僕寺) 소윤(少尹)의 벼슬을 내렸으나 할아버지 송산공(松山公)의 유훈(遺訓)에 따라 받지 않았다. 장남 조영서(趙榮緖) 함께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하여 발각되어 처형당하였다. 단종의 이모부가 되신다. 세조 1년(1456년) 졸(卒)하였다. 영월 장능(莊陵) 충신단(忠臣壇)에서 매년 한식날에 배향하고 있다.
⓷ 조인(趙軔)
예빈시소윤(禮賓寺少尹)을 지낸 조철산(趙鐵山)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음관(蔭官)으로 봉정대부(奉正大夫) 전연사별좌(典涓司別坐)를 지냈다. 조상의 가르침에 따라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별좌공파(別坐公派)의 파조(派祖)가 되신다.
⓸ 조시웅(趙時雄)
처사 조수상(趙秀相)과 박민희(朴旼希) 사이에서 성종 7년(1476년) 태어났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를 지냈다. 유훈에 따라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졸년(卒年) 미상(未詳)이다.
⓹ 조유(趙瑜)
자는 공근(公瑾)이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를 지낸 조시웅(趙時雄)과 영상(領相) 수강(守疆)의 따님 숙인(淑人) 장연노씨(長淵盧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보공장군(保功將軍) 행(行) 충좌위부사용(忠佐衛副司勇)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⓺ 조응정(趙應禎)
자는 원숙(元叔)이다. 보공장군(保功將軍) 행(行) 충좌위부사용(忠佐衛副司勇)을 지낸 조유(趙瑜)와 판서(判書) 정린(鄭麟)의 따님인 의인(宜人) 개령정씨(開寜鄭氏) 사이에서 중종 32년(1537년) 태어났다. 어모장군(禦侮將軍) 행(行) 충좌위부사맹(忠佐衛副司猛)을 지냈다. 졸년(卒年) 미상(未詳)이다.
⓻ 조흡(趙洽)
자는 군협(君浹)이다. 어모장군(禦侮將軍) 행(行) 충좌위부사맹(忠佐衛副司猛)을 지낸 조응정(趙應禎)과 진사(進士) 신대사(愼大司)의 따님인 숙인(淑人) 거창신씨(居昌愼氏) 사이에서 명종 39년(1560년) 태어났다. 호는 인계(仁溪)이다. 명곡(鳴谷) 이산보(李山甫),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어우당(於于堂) 유몽인(柳夢寅) 친한 벗 사이였다. 왜적을 미리 근심하여 여러 번 말하였는데 임진년에 이르러 과연 징험하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탄복하였다. 김천일(金千鎰)과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였다. 몸소 학문을 닦아 『가례(家禮)』 초본을 만들었고 여러 번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소정(小亭)에 제하기를 “띠풀 엮어 집을 지어 베개를 삼으니, 저 훌륭한 벗들 품평 거치는 게 부끄럽네. 반평생 산수에서 그윽이 살며 동서로 다니는 길손의 모습 웃으며 보네. 품계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인조 18년(1640년)에 졸(卒)하였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9세 조진태(趙鎭泰)가 선향지 논산군 가야곡을 떠나 합천 초계로 이거(移居)하였다가 정조 때에 개진면 인안2리로 입향하여 9대째 세거하고 있다.
 
4. 평양조공 효자비명 병서
 
인간의 도리에 더할 수 없을 만큼 큰 것이 오륜인데, 오륜 중에도 효도와 절개가 더욱 중요하다. 그런 까닭에 선대의 왕들이 이로써 다스림의 근본을 삼아 인륜의 밝힘이 마치 아름다운 하늘의 해와 같음이라. 후대로 오며 다른 믿음과 사악한 설들이 세상에 가득하니 효자와 열녀로 칭할 자를 찾기가 기린의 뿔이나 봉황의 깃털 처럼 희귀하여 많이 볼 수 없이 되었다. 그런 즉 이에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쓰려한다. 낙동강 강가 치산리의 선비 조희송은 자(字)는 용팔, 호(號)는 송정으로 그의 선조는 평양인이다. 논산으로부터 이 고을로 옮겨 이제는 여러 세대가 되었는데 공은 여기에서 태어났다. 거동이 수려하고 의기가 당당하고, 어려서부터 놀고 즐기는 걸 좋아하지 않고 의롭지 않은 것은 가까이 하지 않았다. 가문에서 학문을 재촉하고 감독하기 전에 스스로 부지런히 공부해서 대중들 앞에 설 나이가 되었을 때에는 이미 오경과 역사에 달통하고 시문을 짓기에 이르렀다. 먼 곳과 가까운 곳의 사정을 보고 들으니 큰 뜻을 지니고 나아갈 이전의 인생의 도정을 기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살아갈 길과 어지러운 나라 형편을 돌아보게 되자, 마침내 세상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수신제가를 평생의 으뜸 목표로 삼았다. 그리하여 양친 봉양에 추위와 더위를 막아드리고 마음과 힘을 기울여 좋은 음식만 마련하였다. 부친이 즐기는 술을 마시고 종종 취해서 귀가할 때면 반드시 길목 가까이에서 지키다가 업고 집으로 돌아왔다. 외출해 고기 먹을 일이 있으면 자신이 먹지 않고 갖고 돌아와 양친에게 드렸다. 후에 부친이 마비로 동작이 불편하고 언어가 불가능하게 되자 공은 잠시도 떨어지지 않고 목욕재계하며 하늘에 기도하였다. 약을 달이는 일과 대소변을 치우는 일은 반드시 자신이 하고 다른 사람을 대신 시키지 않았다. 상을 당하자 시신을 부여잡고 가슴을 치며 부르짖으며 우는 것이 숨이 끊어질 듯 하다가 소생하였다. 법제를 지키며 상을 치렀는데 상주 자리를 떠나지 않았고 반드시 매일 성묘하고 무릎 꿇고 흐느껴 우니 대부분 사람들은 따라하지 못 한 바다. 삼년상을 마치니 비석으로 교체해 예의를 갖추고 길에서 호위하니 예로부터 죽음과 삶에 섭섭한 마음이 없다는 말이 어찌 이것이 아니겠는가. 공의 효심은 이같이 지극하였다. 그러니 어찌 왕이 내리는 교서나 관리의 인증 후에야 비로소 효자라 일컫기 시작하겠는가. 고향 인근의 눈과 귀가 분분히 탄복하여 칭송하니 관청에 효자로 추천해 표창하여 높이고 세상에서 효자 표창을 위해 정문을 세워 주던 나라의 특전을 얻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지금 그의 대를 잇는 아들 인현 군이 장차 마을에 비석을 세워 아름다운 자취를 드러내려 하는데, 나는 비석에 새기는 글을 잘 쓰지 못하니 감히 받아들여 감당함이 마땅치 않다고 번뇌하였으나 굳이 사양하지 못하고 드디어 그 행적을 오른쪽에 서술하였다.
서기 1991년 신미년 3월 동래 정순권 짓다. 문화 유강 삼가 쓰다.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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