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조씨(昌寧曺氏) 태복경공파(太僕卿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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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창녕조씨(昌寧曺氏) 태복경공파(太僕卿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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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송재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시조(始祖) 조계룡(曺繼龍)
① 신라 진평왕의 사위로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해지고 벼슬이 보국대장군 상주국대도독 총지휘제군사(輔國大將軍 上柱國大都督 總指揮諸軍事) 금자광록대부 태자태사(金紫光祿大夫 太子太師)에 이르렀다.
② 시조(始祖) 탄생(誕生) 설화(說話)
신라 한림학사(翰林學士) 이광옥(李光玉)의 딸 예향(禮香)이 복병(腹病)을 앓고 있는 터에 창녕 화왕산(火旺山) 용지(龍池)에 가서 목욕재계하고 기도를 올리면 낫는다는 세언(世言)이 있는지라 택일(擇日)하여 이행하던 중 구름과 안개가 덮어와 방향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얼마 후 구름과 안개가 걷혀 못가운데에서 솟아나와 보니 복병(腹病)은 나았으나 태아(胎兒)를 갖게 되어 아들을 낳게되었고 겨드랑이 밑에 조(曺) 자가 씌여져 있었다. 그런데 산모(産母)의 꿈에 장부(丈夫)가 나타나 이르기를 그대는 이 아이의 부친을 알겠오? 내가 이 아이의 부친인데 옥결(玉玦)이라 하오. 그대는 이 아이를 잘 기르오. 잘하면 공후(公侯: 공작과 후작)가 될 것이며 적어도 경상(卿相 : 재상)은 되어 자손만대에 끊기지 않을 것이오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이광옥(李光玉)으로부터 전해들은 왕은 조계룡(曺繼龍)으로 사성명(賜姓名)하고 성장한 후 진평왕의 여서(女婿)로 삼아 창성부원군(昌城府院君)에 봉하니 이 분이 곧 창녕조씨(昌寧曺氏)의 시조(始祖)이다.
③ 조계룡(曺繼龍) 이후 세계(世繼)는 실전(失傳)되어 전해지지 않고 신라 말 아간시중(阿干侍中)을 지낸 조흠(曺欽)의 아들 조겸(曺謙)이 고려 태조와 신덕왕후의 딸 덕공공주(德恭公主)와 혼인하였으며 태악서승(太樂署丞)이란 벼슬을 지낸 기록이 있어 조겸(曺謙)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고 있다고 한다.
(2) 고려시대 8대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조선시대 남명(南冥) 조식(曺植)를 배출한 명문가
① 고려시대 조겸(曺謙)의 손자 조연우(曺延祐)로부터 조자기(曺自奇)에 이르기까지 8대에 걸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를 지냈고 다시 6대 뒤에 조송무(曺松茂)·조송군(曺松君)·조송학(曺松鶴)의 3형제를 위시하여 6대에 걸쳐 소감(少監)을 배출하여 문중이 크게 일어났다.
② 조선시대 ‘경(敬)으로서 나를 밝히고 의(義)로서 나를 던지고’ 경상우도 사림(士林)의 영수(領袖)로서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함께 16세기 영남학파(嶺南學派)의 거봉(巨峰)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배출하였다.
(3) 분파(分派) 
감사공파(監司公派), 낭장공파(郎將公派), 대사헌공파(大司憲公派), 대호군공파(大護軍公派), 만호공파(萬戶公派), 문익공파(文翊公派), 문장공파(文莊公派), 문정공파(文貞公派), 문간공파(文簡公派), 밀직사공파(密直使公派), 병조참의공파(兵曹參議公派), 부사직공파(副司直公派), 부위공파(副尉公派), 부제학공파(副提學公派), 병사공파(兵使公派), 부사공파(府使公派), 상호군공파(上護軍公派), 시직공파(侍直公派), 승지공파(承旨公派), 사의공파(司議公派), 사성공파(司成公派), 사정공파(司正公派), 사직공파(司直公派), 송학공파(松鶴公派), 수찬공파(修撰公派), 시랑공파(侍郞公派), 시중공파(侍中公派), 양평공파(襄平公派), 지평공파(持平公派), 직장공파(直長公派), 장양공파(壯襄公派), 좌시중공파(左侍中公派), 중추공파(中樞公派), 지중추공파(知中樞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찬성공파(贊成公派), 청구당공파(靑邱堂公派), 창산군파(昌山君派), 참의공파(參議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충간공파(忠簡公派), 충순위공파(忠順衛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 충정공파(忠貞公派), 충익공파(忠翼公派), 취원당파(聚遠堂派),
태복경공파(太僕卿公派), 태학사공파(太學士公派), 판윤공파(判尹公派), 헌납공파(獻納公派), 현감공파(縣監公派), 희천공파(熙川公派), 효강공파(孝康公派) 등 49개파로 나누어져 있다.
(4) 창녕조씨(昌寧曺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창녕조씨(昌寧曺氏)는 402가구 1,344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태복경공파(太僕卿公派) 후손은 다산면 송곡리, 나정리 등에. 시중공파(侍中公派) 후손은 개진면 양전리, 대가야읍 일원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신라시대
① 조흠(曺欽)
신라말기에 아간시중(阿干侍中)의 벼슬을 지냈으나 신라가 망한 것을 슬퍼하여  벼슬을 버리고 토함산(吐含山)에 들어가 시를 짓기를, “천년의 왕업이 일조에 먼지 되니(千年王業一朝塵), 백수의 외로운 신하 수건엔 눈물 가득(白首孤臣淚滿巾). 묻노니 수양산은 그 어디 있는 건가(借問首陽何處是). 토함산의 밝은 달만 가까이하고 있네(吐含明月自相親)”라고 시문(詩文)을 남기고 신라에 대한 절의(節義)를 지켰다.

(2) 고려시대
① 조겸(曺謙)
아간시중(阿干侍中) 조흠(曺欽)의 아들이다. 고려 태조와 제2비 신덕왕후의 딸과 결혼하여 부마(附馬)가 되었으며 대악서승(大樂暑丞)의 벼슬을 지냈다.
② 조자기(曺自奇)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조의문(曺義文)의 아들이다. 현종 1년(1010년) 거란의 성종(聖宗)이 침입하여 서경을 공격할 때 분대어사(分臺御史)로서 그 방어에 종사하였다. 이 때 동북면을 지키던 지채문(智蔡文)이 서경을 구원하러 왔으나 서경부유수 원종석(元宗奭) 등이 적에게 항복하려고 성문을 닫고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것을, 성문을 열어 지채문을 들어오게 하여 서경을 지켰다. 이듬해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고, 1012년 동여진(東女眞)이 청하현(淸河縣 : 지금의 경상북도 영일군 청하면)·영일현(迎日縣)·장기현(長鬐縣: 지금의 경상북도 영일군 장기면)에 침입하자 도부서(都部署)가 되어 강민첨(姜民瞻)·문연(文演)·이인택(李仁澤) 등과 함께 주군(州郡)의 군사를 독려하여 격퇴하였다. 현종 7년(1016년)에는 시어사헌(侍御司憲)에 임명되었다.
③ 조용기(曺用奇)
자는 방언(邦言)이며 호는 강세선(降世仙)이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조의문(曺義文)의 아들이다. 이부시랑(吏部侍郞)을 거쳐 평장사(平章事)를 지냈다. 현종 2년(1018년) 거란족이 기회를 보아서 느닷없이 함부로 우리 국경을 침범하자. 모든 벼슬아치들이 강을 건너 강화도로 피신하자 앞장 서 큰 깃대를 지고 앞서 달려가 매우 큰 공이 있었다고 여사(麗史)에 기록되어 있다.
④ 조흥(曺興)
밀직사사(密直司事) 조한우(曺旱雨)의 아들이다. 중훈대부(中訓大夫) 태복경(太僕卿)을 지낸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증손의 비문에는 사복경(司僕卿)으로 되어 있다. 이 분이 태복경공파(太僕卿公派) 파조(派祖)가 되신다.
(3) 조선시대
① 조순(曺珣)
성균생원(成均生員) 조명수(曺命壽)와 군수(郡守) 유인몽(柳仁蒙)의 따님 증(贈) 숙부인(淑夫人) 진주유씨(晋州柳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사직(副司直)을 거쳐 증(贈)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내고 창천군(昌川軍)에 봉해졌다. 창녕조씨 상주(尙州) 입향조(入鄕祖)가 되신다.
② 조계형(曺繼衡)
자는 평보(平甫)이고 호는 퇴우당(退憂堂)이다. 부사직(副司直) 조순(曺珣)과 서천군사(舒川郡事)의 따님 정부인(貞夫人) 안동권씨(安東權氏) 사이에서 성종 6년(1470년) 태어났다. 연산군 1년(1495년)에 진사시에 입격한 후에 연산군 7년(1501년)에 식년시 문과애 급제하였다. 지제교(知制詁)·호조참의(戶曹參議)·동부승지(同副承旨) 등에 이르렀다. 창성군(昌城君)에 봉해졌다. 중종 13년(1518)에 졸(卒)하였다.
③ 조언홍(曺彦弘)
자는 사의(士毅)이다. 동부승지(同副承旨) 조계형(曺繼衡)과 승지(承旨) 정양(貞陽)의 따님 정부인(貞夫人) 익산이씨(益山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사과(副司果)를 거쳐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증직(贈職)받았다. 생졸년 미상이다.
④ 조몽길(曺夢吉)
자는 상경(尙卿)이다. 부사과(副司果) 조언홍(曺彦弘)과 참봉(參奉) 광정(光廷)의 따님 증(贈) 숙부인(淑夫人) 영월신씨(寧越辛氏) 사이에서 중종 16년(1521년) 태어났다. 아들 조응인(曺應仁)이 정운원종공신(定運願從功臣)에 책록(策錄)되어 귀하게 되어 상주목사(尙州牧使)를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承政院) 좌승지(左承生) 겸 경연참찬관자(經筵參贊官者)에 증직(贈職)되었다. 생졸년 미상이다.
⑤ 조정생(曺挺生)
자는 이녕(以寧)이며 호는 도계(陶溪)이다. 대구도호부사(大邱都護府使) 조응인(曺全義李氏)과 군자감정(軍資監正) 이득분(李得賁)의 따님인 숙부인(淑夫人) 전의이씨(全義李氏) 사이에서 선조 18년(1585년) 태어나 백부 조명인(曺明仁)에게 출계하였다. 광해군 5년(1613년) 증광시 문과에 급제한 후 광해군 5년(1613년) 7월 정언으로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일 것을 청한 정조(鄭造)·정호관(丁好寬) 등의 문제로 사직을 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이듬해 승문원의 신래간택(新來揀擇)에 홍득일(洪得一)과 함께 뽑혔으며, 1615년 의정부의 한림취재(翰林取才)에 유약(柳瀹)과 함께 선발되었다. 그 뒤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예조좌랑(禮曹佐郞) 등을 역임하였고, 1618년 예조좌랑(禮曹佐郞)으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서궁유폐에 관한 정청(庭請)에 참여하였의며, 1628년(인조 6) 이조에서 지제교를 감하(減下)할 때 신광립(申光立)·신용(申涌) 등과 함께 이에 포함되었다. 군기시정(軍器寺正)¸창원부사(昌原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인조 23년(1645년) 졸(卒)하였다.
⑥ 조시일(曺時逸)
자는 일휴(日休)이고 호는 형계(陽溪)이다. 창원부사(昌原府使) 조정생(曺挺生)과 승지(承旨) 박정번(朴廷璠)의 따님인 숙부인(淑夫人) 고령박씨(高靈朴氏) 사이에서 선조 40년(1607년) 태어났다. 인조 8년(1630년) 교서관(校書館) 부정자(副正字)로 벼슬을 시작하여 예조좌랑(刑·禮曹佐郞)·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해미현감(海美縣監) 등을 지냈다. 인조 22년(1644년) 졸(卒)하였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영조 4년(1728년) 일어난 무신의 난(일명 이인좌의 난)의 가담한 합천의 조성좌(曺聖佐)의 후손은 역적의 누명을 쓰고 가문은 멸문지화의 화를 피하여 심산유곡에 은거하였다.
(2) 도촌(陶村) 조응인(曺應仁)의 막내 손자 조시민(曺時閔)이 합천에서 이거(移居)하여 다산면 송곡으로 칩거(蟄居)하였다.
(3) 그 후 무신의 난(戊申의 亂)이 평정되자 조성좌(曺聖佐)의 아들 형제 조명상(曺明相), 조명협(曺明莢)이 달성군 가창면 정대리에서 송곡으로 입향하였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조상(曺塽)
자는 문보(文甫)이고 호는 봉강(鳳岡)이다. 처사 조정환(曺珽煥)과 처사 장무헌(張武憲)의 따님 옥산장씨(玉山張氏) 사이에서 고종 13년(1876년) 태이났다. 서찬규(徐贊奎)와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하생이 되어 경(敬)을 바탕으로 하는 “의리(義理), 실천(實踐), 극기(克己), 함양(涵養)”에 관한 사조훈(四條訓)을 받아 실천하는데 전력하였다. 부모가 낳으시고 임금이 먹이시고 스승이 가르치시니 한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는 ‘생삼사일(生三事一)’을 강조하였다. 또한 ‘경천애인설(敬天愛人說)’을 지어 하늘을 높이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유학의 이념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시서예락(詩書禮樂)의 공부인 사교(四敎)를 네 계절에 분속(分屬)시켜 해야 한다는 ‘사교론(四敎論)’을 강조하였다. 항일 유학자 시임(是菴) 이직현(李直鉉), 미강(渼江) 박승동(朴昇東) 등 선현(先賢)을 따르고 당대의 명유(名儒)이었던 덕천(悳泉) 성기운(成璣運),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 등 간재(艮齋) 전우(田愚)의 문인(門人)과 교유하였다. 생시(生時)에 제자들이 “삼일계”를 모아 강학소(講學所)인 후송재(後松齋)를 건축하여 매년 정읍례(庭揖禮)를 행하였다. 1945년 졸(卒)하였다.
② 조을환(曺乙煥)
자는 성문(聖文)이고 호는 학산(學山)이다. 처사 조병현(曺秉現) 장남이다. 봉강(鳳岡) 조상(曺塽), 미강(渼江) 박승동(朴昇東) 양문하에서 한학(漢學)을 수학하였다. 송곡(松谷)에서 출발하여 다산면 나정(羅亭) 덕양서당(德陽書堂)에서 형편이 어려운 원근의 청소년들에게 30여 년 동안 사물의 이치와 사람의 도리를 가르쳐서 깨우치게 한 학생 수백 명에 달했다. 만년에 대구로 이거하여  대구시 유림회장(儒林會長)을 지냈다. 후학들이 스승의 학문과 덕행(德行)을 추모하기 위하여 ‘유몽회(牗蒙會 : 어리석음을 깨우친 모임)’를 결성하고 후송재(後松齋)옆에 ‘학산(學山) 창녕조공(昌寧曺公) 추모비(追慕碑)’를 세웠다.
(2) 근·현대인물
① 조일환 : 4선 국회의원
② 조희관 : 국회의원 비서관
③ 조재환 : 종로경찰서장
④ 조희석 : 고등학교 교장
⑤ 조정필 : 육군 대령
⑥ 조희완 : 감사원 국장
⑦ 조수호 : 법무사
⑧ 조기현 : 공군 대위
⑨ 조희열 : 공군 대위
⑩ 조경구 : 대구시 건설국장
⑪ 조순철 : 검찰청 사무관
⑫ 조동석 : 다산면장
⑬ 조희칙 : 다산면장
⑭ 조근동 : 다산면장
⑮ 조규택 : 대구시 사무관
⑯ 조정원 : 박사
⑰ 조태훈 : 박사
⑱ 조태섭 : 박사
⑲ 조철수 : 박사
⑳ 조영곤 : 박사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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