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파락호 행세한 독립운동가 김용환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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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거짓 파락호 행세한 독립운동가 김용환 선생

인물평전- 독립운동가 김용환 선생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으로
빼돌린 것 사후(死後)에 밝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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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운동가 김용환 선생

 

▣ 파락호(破落戶)
권력이나 재산이 있는 집안의 자손이긴 하지만 집안의 재산을 엉뚱한 짓으로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가리키는 말을 파락호(破落戶)라 한다.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도박판을 전전하면서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위해 파락호를 자처한 사람이 안동의 의성김씨 학봉 김성일 종가의 종손 김용환(金龍煥, 1887~1646) 선생이다. 그는 명문가 후손으로서 생전에는 망나니 행세로 문중에 먹칠을 했다고 욕을 많이 먹었지만, 오로지 나라의 독립만을 위한 그의 집념, 그리고 거짓 파락호 행적이 오롯이 그의 사후(死後)에야 모두 밝혀졌다.
 
▣ 안동은 ‘한국독립운동의 성지’
김용환은 경북 안동에서 파락호의 대명사로 불리면서 안동지역의 노름판을 쥐고 흔드는 사람이었다.
안동은 전국 시·도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해 ‘한국 독립운동의 성지’라 불린다. 2021년 8월 13일 독립유공자 13명을 추가 발굴해 전국 최다인 383명의 독립유공자를 배출한 지역이 안동이다. 안동의 의성김씨의 독립운동 유공자만 해도 26명에 이를 정도로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했다.
조선말기 경북 안동에는 전국에서 알아주는 명문 양반가문이 있었다. 그 가문이 바로 퇴계 이황의 대제자 영남학파의 거두 학봉 김성일 의성김씨의 종가로 그의 손자 김용환(金龍煥)은 13대 종손이다.
김용환은 조선 3대 파락호 중 한 명으로 비밀리에 수행한 독립운동 자금 조달을 위해 일본 경찰의 감시망을 피하려고 도박판을 전전하며 거짓 파락호 행세를 했다. 그러한 사실은 그의 사후(死後)에야 모든 것이 밝혀졌다.
안동 출신의 저술가 ‘양반동네 소동기’, ‘나의 양반문화 답사기’ 등의 저자인 윤학준 교수는 ‘조선 3대 파락호’로 흥선 대원군 이하응을 비롯해 1930년대 형평사 운동의 주역인 김남수와 함께 김용환을 꼽았다.
 
▣ 김용환은 파락호 행세를 하며 독립군 군자금 조달
막대한 문중 재산도 모두 군자금으로 보내고 최고의 명문가 자손이라는 명예도 버렸으며, 주위 사람들과 일가친척, 가족들에게 개망나니 파락호라는 욕을 들었다. 더구나 하나뿐인 딸에게도 미움과 원망을 받으면서도 죽는 순간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기 스스로를 버려가며 헌신한 김용환 독립운동가는 파락호 망나니가 아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현재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위대한 인물이다.
이 가문에서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전국에서 최초로 을미의병단을 만든 ‘김충락’이라는 사람이 있는 안동에서 제일가는 명문가였다. 이런 명문가에서 1887년 2월 ‘김용환’이라는 파락호가 태어났다.
김용환은 할아버지 김흥락의 영향을 받아 1908년 의병장 이강년의 진에 참가했으며, 1911년에는 김상태 의병부대에 참가하는 등 영남, 충청지역 의병활동의 중심에 함께 했다.
3·1운동 이후에는 만주 망명길에 올랐으나 신의주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돼 결국 안동으로 돌아왔다.
주로 경상도 지역을 무대로 활동한 의용단에 가담해 안동을 비롯해 영천, 군위, 영일과 경남 창녕 등지의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친일 부호들의 외면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1922년 12월 28일 김용환은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돼 큰 고초를 겪었다.
 
▣ 딸 시댁에서 장롱 사라고 준 돈마저 노름으로 탕진
파락호 김용환은 도박을 하며 가산을 탕진하기 시작했다. 당시 안동 일대 노름판에는 안 낀 곳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의성김씨 문중에서는 ‘집안을 말아먹을 종손이 나왔다’며 욕을 하면서도 종가가 망하면 문중이 망한다며 김용환이 도박으로 팔아먹은 문중 땅을 십시일반 모금으로 다시 사주곤 했다.
그리고 김용환이 더 개망나니 짓을 한 일이 있다.
그가 워낙 난봉꾼이라 집안 재산을 거덜 내자 외동딸을 시집 보낼 혼수 비용도 남아있지 않게 됐다. 딸의 시댁에서 장농을 사라고 준 돈마저 딸 몰래 가져가서 도박으로 탕진해서 결국 딸은 친정 큰어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들고 펑펑 울면서 시집을 갔다.
그리고 딸이 시집가던 날 조차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고, 훗날 딸이 결혼한 지 3년이 돼도 임신 소식이 없자 시댁에서는 헌 장롱을 ‘귀신들린 장롱’이라며 부수어 태워버리기도 했다.
명문가인 학봉 종가의 여식이 이런 수모를 당하고 있는데도 도박에만 빠져있던 김용환을 문중 사람들이 엄청 욕했지만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학봉’과 ‘난봉’이라는 두 봉황이 나왔으니 그만하면 충분한 것 아니냐”라며 욕하는 문중 사람들에게 오히려 큰소리쳤다. 그만큼 가정에 무관심했고 가문에도 신경을 안 썼으며 도박만 하던 난봉꾼이었다.
김용환은 초저녁부터 시작해서 밤새도록 노름을 했는데, 새벽녘이 됐을 때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다 걸고 마지막 배팅을 하는 게 특기였다.
이 때 노름에서 따면 괜찮았는데 잃었을 때는 “새벽 몽둥이야”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면 도박장 주변에 숨어있던 부하들이 몽둥이를 들고 들어와 도박하던 사람들을 두들겨 패고 모든 돈을 다 쓸어 담아 유유히 사라졌다.
종가가 망하는 것ㅁ을 볼 수 없었던 일가친척들이 다시 사 준 집과 논밭도 매번 또 다시 팔아버리고 노름판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노름을 하다가 종갓집도 남의 손에 넘어가고 아내가 아이를 낳는 줄도 모른 채, 수백 년 동안 종가 재산으로 내려 온 전답 18만여 평(현재 가치로 200~300억 원 상당)도 다 팔아먹고 아내 손을 잡으며 “미안하오, 깊이 뉘우쳤소, 이제 달라지겠소.”라는 약속도 잠시, 다시금 남은 땅 문서를 들고 노름판을 찾았다.
 
▣ 도박으로 생긴 돈 흔적 없이 사라져
하지만 이상한 일이 있었다.
그는 도박에서 돈을 딸 때도 많았는데 돈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새벽 몽둥이를 외치고 난 후 쓸어 담은 돈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그렇다면 재산이 늘었어야 마땅한데, 항시 그는 그 많은 돈을 도박에서 다 잃었다고만 했다. 그럼 그 많은 돈은 도대체 어디로 갔을까? 사실 그 많은 돈들은 만주의 독립군에게 보내지고 있었다.
약 300억 원이나 되던 재산이 아무 일도 없는데 그냥 사라지게 되면 독립군 자금으로 보내졌다고 일본군이 의심하고 결국에는 밝혀질 것이라고 우려한 김용환이 스스로 파락호 쓰레기를 자처하며 가족과 문중, 그리고 많은 사람들과 일본군까지 모두를 속이며 독립군 군자금을 댄 것이다.
그가 어릴 적 의병활동을 하던 의성김씨 일족의 김회락은 전투에서 패전해서 학봉 종가 종택에서 은신했지만 결국 일본군에게 잡혔고, 김회락·김흥락·김승락 등은 일본군에게 포박당해 집 마당에 꿇어앉게 됐고 집안이 일본군에게 약탈당하는 등 쑥대밭이 됐다.
김용환은 이 때 할아버지 김회락이 총살당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고 항일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가담하기 시작했다.
김용환은 주로 영남, 충청지역에서 의병활동을 했는데, 삼일운동 이후에는 만주 길림의 서로군정서와 독립운동단체 ‘의용단’에서 활동했다. 그는 독립군 군자금 모금과 친일 매국노들, 친일 부자들에게 사형 선고장‘을 보내는 등 여러 활동을 하다 1922년 결국 일본제국 경찰에게 체포됐고, 이후 풀려난 뒤 독립군 군자금을 의심 받지 않고 조달을 생각하다 도박으로 잃은 척 하자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러다 일제가 만주 독립군 군자금을 추적하다 그 중 일부가 ‘안동의 김용환에게서 나왔다.’는 증언으로 치밀하게 군자금을 댔지만 결국 일제의 주요 감시인물로 지목됐다.
그리고 딸이 시집가는 날 행방이 묘연했던 이유도 도박에 빠진 것이 아니라 군자금 관련 혐의로 일본 경찰에 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1945년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나라의 독립을 했지만, 1년 후인 1946년 7월 임종을 맞게 됐다.
 
▣ 임종 전 독립군 동지에게 끝내 함구 당부
 
임종 전 독립군 동지이던 하중환이 병석을 찾아와서 “병이 이렇게 깊은데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을 감으실 건가? 그 동안의 독립운동 내용을 가족에게는 말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물었다.
김용환은 단호하게 “안돼네! 내가 지금 지난 일을 말하면 남들이 믿지 않을걸 세. 새삼 그럴 필요 없네. 이제는 독립도 됐고…, 말하지 말게… 끝까지 비밀로….”
김용환은 선비의 후손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굳이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며 끝까지 함구를 당부했다. 그리고 다시 자리에 누운 지 이틀 후 끝내 세상을 떠났다.
이후 그의 조국에 대한 헌신은 3년상이 끝나던 1948년 하중환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됐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로를 기려 1995년 외동딸 김후웅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현재 안동 독립기념관에는 ‘김용환’의 일대기가 전시돼 있다.
일제 36년 치하에서 이완용처럼 친일로 부를 쌓고 하사금으로 대대로 영화를 누린 군상(群像)이 즐비했고, 3대(三代)가 망하는 독립운동이었지만 다른 삶을 산 사람들도 많았다. 가산을 팔아 군자금을 내놓고 국권회복의 가시밭길을 걸었던 애국지사가 숱했기에 오늘날 우리는 꿈에 그리던 ‘선진국 진입’의 문턱을 넘을 수 있었다.
그런 삶 속에 파락호도 있었다. 말뜻처럼 집안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으로 살았던 사람도 있었다. 그가 바로 안동의 독립운동가 김용환이다.
독립군 자금으로 보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노름과 도박으로 세월을 보내는 척 하며 거짓 파락호 행세를 하면서 그 많던 문중 재산을 탕진한 인물로 자칫 묻힐 뻔 했지만 사후에라도 밝혀져서 그나마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외동딸 김후웅은 훗날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회한을 담은 詩를 발표했다. 이 시의 제목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여서 아래 소개한다.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그럭저럭 나이가 차서 16세에 시집가니
청송 마평서씨 문에 혼인을 하였으나
신행날 받았어도 갈 수 없는 딱한 사정
신행 때 농 사오라고 시가에서 맡긴 돈
그 돈마저 가져가서 어디에 쓰셨는지
우리 아배 기다리며 신행 날 늦추다가
큰 어매 쓰던 헌 농 신행발에 싣고 가니
주위에서 쑥덕쑥덕
그로부터 시집살이 주눅 들어 안절부절
끝내는 귀신 붙여왔다 하여
강변 모래밭에 꺼내다가 부수어 불태우니
오동나무 삼층장이 불길은 왜 그리도 높던지
새색시 오만간장 그 광경 어떠할꼬!
이 모든 것 우리 아배 원망하며
별난 시집 사느라고 오만 간장 녹였더니
오늘에야 알고 보니 이 모든 것 저 모든 것
독립자금 위해 그 많던 천석 재산
다 바쳐도 모자라서
하나뿐인 외동딸 시가에서 보낸 농 값
그것마저 바쳤구나.
그러면 그렇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내 생각 한데로
절대 남들이 말하는 파락호 아닐진대
우리 아배 참봉 나으리
* 이 詩는 딸이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슬픔이 묻어 있는 시다.
막대한 재산도 모두 군자금으로 보내고 최고의 명문가 자손이라는 명예도 버렸으며 주위 사람들과 일가친척, 가족들에게 개망나니 파락호라는 욕을 들어먹고 하나뿐인 딸에게도 미움과 원망을 받으면서도 죽는 순간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기 스스로를 버려가며 헌신한 김용환 독립운동가는 파락호 망나니가 아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현재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위대한 인물이다. 끝 
 
 <주간고령 기획팀>
참고문헌
형사사건부, 고등경찰요사, 회문 김현동 선생 약사, 일제침략하한국 36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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