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개진면) 곳곳에 숨어있는 재미있는 지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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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우리마을(개진면) 곳곳에 숨어있는 재미있는 지명은?

우리들의 선조들은 조상의 핏줄을 밝히고 보존하기 위해 족보를 만들고, 후손들은 족보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그것을 이어가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살고 있는 고장의 구석구석 내력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고령군 8개 읍·면 각 마을의 재미있는 지명 유래 중 이번호에는 네 번째 마지막회로 개진면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개진면(開津面)<4>

 

▣ 옥산리(玉山里)

 

1-2 옥산1리 마을전경.JPG

⑴ 연혁(沿革)

본래 현풍군 진촌면 지역이다. 고종 광무 10년(1906)에 고령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백산동, 적산동, 옥동을 병합해 옥동과 백산의 이름을 따서 옥산동이라 하고 개진면에 편입됐다. 1988년 5월 1일 동이 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⑵ 지명 유래(地名 由來)

* 잠미, 잣뫼, 옥산, 백산(栢山) : 옛날 벼슬아치들이 귀양살이 하던 옥섬(玉島)과 잣나무가 많았던 잣나무산(좌뫼栢山)이 있어 옥섬의 ‘옥’자와 잣뫼 한문 표기인 栢山의 ‘산’을 따서 옥산(玉山)으로 했다고 한다. ‘잠미’는 ‘잣뫼’의 어음 변화인 듯하다.

* 적산(笛山), 죽산(竹山) : 옥산마을 서쪽 골짜기에 있다. 옛날 성명 미상의 초립동이 피리를 구슬프게 불며 이 마을을 지나갔기 때문에 적산이라 하며, 또 대나무 숲이 있어 죽산이라 했다.

* 옥섬, 옥심, 옥도(玉島) : 이 마을은 3면이 낙동강물이 휘감아 돌아 흐르기 때문에 마치 섬처럼 고립된 곳으로 조선 중엽 역모를 한 죄인의 귀양지로 지정한 곳이므로 옥섬, 옥심, 옥도라 했다.

* 장장골, 장자골, 장장곡(將長谷), 장자곡(長者谷) : 이 마을 옆에 장수배기 산이 있어 이 산과 관련돼 붙여진 이름이다. 부자(長者)가 살았다고 장자곡이라 한다.

⑶ 기타

* 달맞이-산 : 잠미 뒤에 있는 산으로 매년 대보름날밤 이곳에서 달맞이를 했다.

* 도른-젓들 :옥동 앞의 들

* 돌집-만당 : 잠미 뒤에 있는 산으로 돌집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백봉재(白俸齋) : 1956년 창건, 일선인 김횡을 위한 재실이다.

* 빈돗-골 : 옥동과 잠미 사이에 있는 들

* 성짓-골 : 적산 뒤에 있는 골짜기

* 옥산-나루(옥산진) : 옥도 앞 낙동강에 있는 나루터, 달성군 현풍면 자모리로 건너감

* 옥새미골 : 익골 옆에 있는 골짜기로 맑고 찬 샘이 있어서 옥샘이라 하고 그 아래 들을 옥새밋-들이라 한다.

* 익-골 : 성짓골 옆에 있는 들

* 추모재(追慕齋) : 1915년 창건, 청도인 김인만(金仁萬)의 묘각이다.

* 추원재(追遠齋) : 강화인 적은 노지도(笛隱 魯至道)는 김면 장군의 척숙(戚叔)으로 임진란에 부자가 장렬히 전사함을 추모해 후손들이 재실을 건립했다가 최근에 중수했다.

* 진촌-들 : 옥산동 동쪽에 있는 들, 진촌동 앞이다.

* 칠성-바우(칠성암) : 옥동 동쪽에 있는 바위로 일곱 개의 바위가 북두칠성처럼 놓여있다.

* 홀개-나무(홀포진) : 옥동 동남쪽 낙동강가에 있는 나루터다. 달성군 현풍면 오산동 홀개로 건너가는데 그곳 지명을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 인안리(仁安里)


인안1리 회관과 마을전경.JPG

 

⑴ 연혁(沿革)

본래 현풍군 진촌면 지역으로 인안이라 했다. 고종 광무 10년(1906)에 고령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치산동을 편입해 인안동이라 해서 개진면에 편입됐다. 1988년 동이 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⑵ 지명 유래(地名 由來)

* 꽁미, 꼬미, 꼬뫼, 치산(稚山) : 낙동강변 마을이다. 마을 뒷산 모양이 마치 꿩(稚)이 매를 피해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 稚山(꿩치, 뫼산)이 꿩뫼, 꽁뫼, 꼬미로 바뀌어 왔다.

* 이란(二卵), 인안(仁安) : 마을 동북쪽 산줄기에 2개의 봉우리가 솟아 있는데 꼬미의 꿩이 두 개의 알을 품고 있다 해서 이란으로 부르다 인안으로 바꿨다.

⑶ 기타

* 갱분-들 : 굼 동쪽에 있는 낙동강가의 들

* 굼 : 치산 동쪽에 있는 들이다.

* 꽃밭-등 : 꼬미 남쪽에 있는 산으로 꽃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 꽃밭등-골 : 꽃밭등 밑에 있는 골짜기

* 너북신들 : 인안 동북쪽에 있는 들이다.

* 늪가-들 : 소늪 가에 있는 들

* 뚱건-산 : 꼬미 북쪽에 있는 산

* 말뱅이들 : 치산 북쪽에 있는 들

* 범무-재 : 꼬미에서 생동으로 넘어가는 재

* 부뭇-골 : 인안 뒤에 있는 골짜기로 부처가 있었다.

* 생골 : 치산 서쪽 골짜기로 생동쪽이다.

* 소늪 : 치산 앞에 있는 늪, 옛날 이 늪가에 소를 메어 뒀는데, 이무기가 소를 몰고 갔다고 한다.

* 속산-들 : 인안 남쪽에 있는 들

* 시-늪 : 소늪 위의 늪

* 아릿벌-들 : 소늪 아래쪽 들

* 안산1 : 인안 앞의 산

* 안산2 : 치산(꼬미) 앞의 산

* 인안재(仁安齋) : 1967년 창건, 일선인 김우경(金禹卿)을 위한 재실이다.

* 탯골 : 치산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옛 터가 있다.


▣ 직리(直里)

 

직1리 마을회관.JPG

 

⑴ 연혁

본래 고령군 송천면 지역으로 곧은 마을이라 직동이라 했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송천리, 사례리, 조산리, 개산리를 병합해 직동이라 하고 개진면에 편입됐다. 1988년 5월 1일 동이 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⑵ 지명 유래(地名 由來)

* 열미, 열뫼, 개산(開山) : 마을 북쪽 산의 모양이 칼로 잘라 벌려 놓은 것 같아 산이 열려 있다고 열뫼, 열미라 하고 한문으로 표기하니 열 개(開), 뫼산(山) 개산이라 했다.

* 사례(舍禮), 세리 : 조선 문신 김문기(金文起)의 후손 금녕김씨들이 임진왜란 후 이곳에 정착해 예를 지키며 사는 집들이라고 사례 또는 세리라고 한다. 

* 송촌(松村), 송천(松泉) : 옛날 마정(馬丁) 송씨가 말을 실어다 대가야읍 중화리 마방(馬坊)에 공급하다 정착해 안촌(安村)이라 하다가 뒷산에 소나무가 우거져 송촌으로 부르고 그 곳에 맑고 좋은 물이 있으므로 송천(松泉)이라 불렀다.

* 조산터, 조산동(造山洞) :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마을 입구에 돌을 쌓아 마을을 보호했다 해서 돌무더기가 산처럼 보였다고 조산터, 조산동이라 불렀다. 그 후로도 지나는 사람들이 재앙을 막기 위해 돌을 던졌다고 하나 지금은 마을이 형성돼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 직동(直洞), 직동도가 : 고려시대 강화도에서 가져온 팔만대장경판이 개포에서 해인사로 옮겨질 때 이 마을로 바로 갔다고 직통(直通)이라 한 것이 직동으로 변했다. 또 이곳에 양조장이 있어 직동도가라고도 불렸다.

⑶ 기타

* 개-정지 : 송천 입구에 있는 느티나무

* 덕골 : 직동 서쪽에 있는 골짜기

* 턱주-골 : 살뭇등 막바지에 있는 골짜기

* 모개-울 : 직동 뒤에 있는 골짜기

* 묵전-골 : 큰골 옆에 있는 골짜기

* 빗집-거리 : 열미 서쪽에 있는 골짜기, 강효자 비가 있다.

* 살뭇굴-들 : 송천 서쪽에 있는 들

* 살뭇-등 : 송천 북쪽에 있는 산

* 새릿-골 : 새리 뒤에 있는 골짜기

* 송천굼들 : 송천 앞 남쪽에 있는 굼논

* 송천면터 : 직동장터에 있는 前 송천면사무소 터로 송천, 신촌, 반운, 양전, 직동, 내동, 사례, 개산의 9개리를 관할하다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개진면에 편입됐다.

* 쌀-등 : 송천 북쪽에 있는 등성이

* 어분-골 : 쌀등 맞은편에 있는 골짜기

* 열미재 : 열미 동쪽에 있는 개포로 넘어가는 고개다.

* 용담-소 : 열미 남쪽에 있는 소, 동쪽에 있는 산 모양이 용이 물을 먹으로 오는 형상이라 한다.

* 용담-굼 : 용당 서쪽에 있는 굼논

* 이남재(尼南齋) : 1934년 창건, 고령인 박규(朴奎)를 위해 세운 재실

* 절골 : 송천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절이 있었다.

* 지산-달 : 송천 서북쪽에 있는 산

* 직동-장 : 개진면의 장터로 송천면소가 있었다.

* 쩐묵-등 : 송천 서북쪽의 산

* 큰-골 : 덕주골 북쪽에 있는 큰 골짜기

* 탑걸 : 절골 아래 있는 논으로 탑이 있었다.

* 효자 강변관 기적비 : 빗집거리에 있는 효자 강변관 기적비  <끝>


* 고령문화원 발행 고령문화 제7집

 ‘高靈地方의 마을史’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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