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거야성거야 인자 가마 언제 오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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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성거야성거야 인자 가마 언제 오노”

万 折(문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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万 折(문필가) 

 

조선시대에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이 국가의 계층 기본 질서였다. 양반과 상인(常人)과의 중간인 중인(中人)도 있었는데, 이들은 과거를 보고 문무반(文武班)의 벼슬은 할 수 없으나 내의원(內醫院), 사역원(司驛院) 등의 직원은 될 수 있었으며 관아의 아전 따위의 잡역만 할 수 있었다.

오늘이 선호하는 사(士)의 관념은 지난 봉건시대의 백성들 여러 계층의 최상층 개념이었다. 어느 가문이나 조상 얘기할 때면 먼저 ‘士[벼슬]’를 일컬어 후손으로서의 자존감을 가졌으며, 후대에 이르러서도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 게다가 선조가 삼공육경(三公六卿·3정승6판서)의 반열에 올랐다면 그 명가의 품격은 비할 데가 없을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때의 삼공육경을 지금의 ‘큰 선거들’과 연결시켜도 큰 오류는 없을 것이라는 내 단견(短見)이다. 

대선 국면이 시동은 걸렸지만 한마디로 점입가경이다. 열띤 경쟁을 하다가 탈락한 후보가 지명된 후보를 향해 ‘당선되면 국가적 손해’라 하고 여·야 한 사람은 감옥 가야 한다고 공언을 예사로 한다. 지명된 후보가 ‘원팀’이 되자고 청하니 백의종군은 하겠다면서 팀워크에 참여하라는 강제성은 불법이라는 호기까지 부린다. 어쩌다 대선이 이런 요지경이 됐는지 모르겠다.

골목대장 싸움에서 진 자가 복수의 ‘칼’을 벼리는 꼴이다. 지난 날 YS, DJ 때 경선에 진 YS가 적극 DJ를 지원한 일은 잊었는가. 다음을 기약해서라도 ‘재수생’과 ‘9수생’ 등 해괴한 논변은 거두기 바란다. ‘설마···’이겠지만 혹시 신당이나 무소속 출마를? 중국 명나라 때 조선의 잘못된 대(對) 명나라 정책을 두고 떠돌았던, “조선 망후고 대국 망훈다(속어)”는 말이 떠오른다. 

지금의 야당은 ‘줄서기 시동’이 걸렸는지, 활로를 탐색하려는 것인지 선대위 구성을 두고 분분한 논란이 창밖으로 새어나온다. 이른바 ‘3김···’에 ‘1김’이 버럭 반기를 들었다는 거다. 백의종군도 여럿인데 거기 무슨 ‘서열’ 운운하는지의 질책도 나온다. 산전수전 다 겪은 분의 경륜으로 정권교체에 힘이 된다고 기꺼이 수락하면 그야말로 백만 원군이 될 텐데 말이다. 3등시민인 나도 정부를 바꿔보자는 데에 방점을 찍고 싶은데, 참 안타깝다. 

요지경은 여야 구분이 없다. 격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처하는 국가 안보와 기후변화 그리고 고용, 먹거리 등 시대적 소명의 정책 계발은 남의 일이고 상대방 흠집 찾기에만 전력투구하는 양상이다. ‘쪼잔’하게 후보 배우자 불임도 탓하고 돌 잔칫상에 놓은 돈을 보고 ‘죽창가’만 부르니 참 가관이다. 불임에 대해서는 소속 당에서도 사과하라 압력을 넣었지만 겨우 사흘이 지나서야 사과라고 하긴 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수행실장은 표현 과정 오해에서 비롯됐다고, 불난 집에 기름 꼴이다. 

문비어천가가 나온 지 한참 됐는데 여운도 채 가시기 전 또 명비어천가가 나왔다. ‘···어천가’의 열렬 지지자는, 동정(動靜)만 살피고 활동을 안 하는 의원들을 공개 압박하자 말 떨어지기 무섭게 페이스북에 허둥지둥 후보자 홍보 글 홍수가 터졌다. 거기도 해바라기 팔색조가 득시글거리는 모양새이니  ‘줄서기’ 행태는 여야가 따로 없는 양상이다. 어디 서야 관운(?)이 열릴 것인지를 두고 우왕좌왕 하는 꼴이 아닌가 한다. 

얼마 전엔 망토대행진 행사(?)도 있었다. 질타하는 쪽은 ‘망조대행진’이라 직격탄도 날린다. 다친 곳이 화장실과 산책길이 따로 나오니 악성 루머는 자초한 꼴이다. 숨기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있는 동선 그대로 밝히면 될 것을 왜 코미디극(劇)을 연출하는지 모르겠다. 기자들이 관심 갖고 취재하려는 것을 카파라치로 몰아 고발하고, 소방청은 119소방대원을 불러 질책을 하는 전무후무한 사태도 불렀다. 뭔가 밝히지 못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하기 충분치 않는가?

추종불허의 달변가는, ‘대장동’ 사업은 단군 이래 최대의 치적이라 자찬하더니 ‘사태’가 터졌을 때는 직원들 탓만 하고, 1원도 챙기지 않았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랬던 호기당당(豪氣堂堂)과 그때그때의 변화무쌍, 수시응변(隨時應辯)은 또 어디로 갔나. 지지율 탓인지 여러 번 ‘책임도 느끼고 반성’도 했으며, 부동산 문제는 회초리 맞겠다고도 했다. 가는 곳마다 깍듯한 절과 어김없는 눈물로 ‘감성 플레이’를 했고, 지난날 인척 데이트폭력(살인)도 사과했다. 당직자들 앞에서의 큰절은 그 호기의 체통이 좀 가볍게 보이지 않나?  

지금 대선 양강 구도를 보는 국민의 심중은 크게 둘로 나뉜다. 청산유수의  능변의 후보자에 마음이 가는 국민이 있는가 하면, 이른바 ‘버벅거림(*신문에 난 말)’의 눌변(訥辯)이지만 말할 때마다 숙고(熟考)하는 그 후보자를 선호하는 국민도 있다. 임기응변보다는 다소 머뭇거려도 중후한 언변(言辯)을 선호하는 국민도 있다는 말이다. 

한 신문 논설위원은 이렇게 평가했다. “재치 있고 막힘없이 시원시원은 했지만 지나침에 오히려 고개를 젓게 하고, 현란한 말솜씨로 상대를 제압 공격하고, 자기 정책(지역화폐)의 문제점을 지적한 국책연구원장을 향해서는 청산해야 할 적폐라고 언성을 높이기도 했다. 다소 비논리적 오류가 있을 때도 쉽게 인정하지 않으며 오히려 역공하며 자기를 비판하는 신문은 폐간해야 한다는 말을 스스럼도 없는 논변(論辯)을 이어갔다”고 했다.

이 정부 실패한 정책 중 하나가 부동산인데, 청와대의 딸은 1년이 넘도록 공관생활을 했으니 정말이지 무주택자에게는 염장이다. 아빠찬스의 논란이 분분했지만 법 위반은 없으니 괜찮다고 변명하고, 딸이 부모 집에 사는 게 뭐 문제냐고 참 뻔뻔한 역성도 든다. 틀면(녹음기) 나오던 ‘기회는 공정···’은 어디로 갔나? 선대본(대책본부)에 ‘후보배우자실’도 있는데 ‘(靑)영애실(令愛室)’이 뭐 잘못이냐 하면 될 것을···! 한참 전 어떤 철부지가 ‘돈도 실력이야’ 했다가 몰매를 맞더니 ‘아빠찬스도 실력이야’가 피차 등가(等價)로 놓일 수밖에 없게 됐다. 여기 또 코미디극이···.

바로 그날 청와대 직속 소주성위(委)는 “최저임금 인상 정책은 고용에 긍정적 효과”라 자화자찬 기사가 났다. 같은 날 신문은 또 ‘52시간제로 인한 경영난’으로 “신고리 5,6호기 건설업체 작업 중단”이 나오기도 했다. 그래서 한전 사장이 “탈원전 정책” 거둬야 한다고 작심 표명했는가 보다. 세계가 인정하는 원자력 기술인데 왜 탈원전에 몰두하는지 이 무명 시민도 도저히 알 수가 없다. 탈원전 반대론자는 청와대가 빙의(憑依)에 걸렸다고 힐책도 한다. 나도 슬쩍 여기 끼었다. 

  부동산, 탈원전, 일자리 등 현실은 남의 일이고 이른바 ‘희망고문’인 도연명의 무릉도원에만 골몰하는 모양새다. ‘환상의 도원경(桃源境)’을 배척하는 인류는 없을 것이다. 밭 갈고 씨 뿌려 땀 흘려 거둔 곡식의 기쁨만 향유하지, 이를 거두기까지의 피땀 흘린 노력은 보지 않겠다는 거와 같다. 수명 다된 원자로 7천만 원 들여 10년 연장해논 원전도 멈추게 했다. 다된 밥에 숟가락 들기 전 엎어버린 꼴이다.    

  그제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가 있었다. 또 혹시 죽비나 나올 줄 알았는데 혹시나가 역시나가 됐으며 자화자찬의 성찬(盛饌)일 뿐이었다. 집값 하락·안정이 목표라고? 다 올려놓고 안정이라니, 까짓것 언젠가는 내리겠지인가, 아니면 항룡유회(亢龍有悔)를 슬쩍 흘리는 건가. 고작 한다는 지난번의 죽비도, ‘허허 참! 나, 오늘 재수 없어 길가다 개똥에 미끄러졌네···’와 뭐가 다른가 말이다. 진정성이 보이지 않는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대장동 사건, 수사 54일 만에 중간 수사결과를 내놓은 것이다. 이를 두고도 설이 분분하다. ‘윗선’과 ‘그분’의 규명도 없고 고소장에 뇌물도 넣었다 지웠다 하니 ‘헛방···’이 나온다. 그래서 특검 당위론이 더 커졌다고 했으며, 코미디 흥행작 소재가 될 것이라는 풍자도 나왔다. 역시 여는 검찰 탓하고, 야는 “이재명 방탄수사”라 직격한다. 이른바 고된 시집살이 며느리의 ‘방에 가면 시어머니, 부엌에 가면 시누이···’ 꼴이다.

  한때 국가사회 발전에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선다)’가 회자(膾炙)되더니, 여기에 나온 반론은 ‘공자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였다. 서로 정연한 논리를 펴더니 결국 무승부로 판별이 된 걸로 기억한다. 조선 500년 동안 지켜 내린 국교인 유교와, 산업화 사회를 살아가려는 데에는 상충되는 개념의 이론(異論)이 아닌가 한다. 

  정말 ‘바로 서고 살아야 할 데’가 있다. 법원과 검·경찰이다. 이런 사정(司正) 기관의 이른바 엄정한 판단이 추상(秋霜) 같아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까지 행사해 온 검찰권과 법원의 재판 결과를 두고 이해득실에 따라 평판이 갈리니, 이럴 때 국민은 어느 편에 서야 하나. 지난 대법원 최종 판결에 한 당사자(경남 도지사)는 ‘정의는 언젠가 살아나 자기편이라’ 하고, 또 어느 재판에서는 판사가 무슨 ‘전지전능이냐’고 비난한 적도 있다. 결론은 국민을 통괄하는 “사법(司法)이 살아야 나라가 선다(산다)”이다. 열심히 살아가는 선량한 국민들에게 믿을 곳이 그곳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전 전 대통령이 이 들끓는 대선판에 별세했다. 당연히 12·12, 5·18 등의 악행을 들먹이는 반면 공도 있다는 극소수도 있다. 이에 더하여 철권통치가 악이요, 공은 사회 기강 확립과 경제전문가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이다. 이른바 ‘공2과8’이다. 나도 한마디 거든다. 생전엔 철천지원수처럼 대척점에 섰다가 죽음 앞에서는 푸는 것이 우리 전래의 미풍양속이 아닌가 하는, 그야말로 ‘꼰대’ 같은 생각이다. 그런데 여당 대선 후보는 5·18묘역 전두환의 표지석을 밟으며, “윤석열도 이리 밟을까”라는 반어법(反語法)을 쓰며 비트는 말의 유희(遊戱)도 했다. 막말로 국가지도자의 ‘깜냥이 좀···’이다.  

  나 이러다 ‘테러’ 당할지 모르겠지만 정치권의 야박함을 한 번 언급해 보는 것이다. 극히 일부 맹렬 추종자들이 설치한 종각의 추모소도 그냥 덮어주고, 한 인간의 죽음 앞에 아량과 관대(寬大)도 좀 베풀었으면 하는 내 간절한 심정이다. 그의 “과오는 분명 큰 벌 받을 일이지만·····”이 내 말의 요지다.  

  다가오는 대선 어떻게 결론이 날까, 혹여 요지경이나 아수라는 벌어지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너무 격한 쟁투가 보이니 말이다. 선거를 앞두니 박정희 정부 때의 기억이 하나 떠오른다. 비난과 원성도 많았던 쿠데타였지만, 집권 초기에는 이른바 구악을 일소하고 새 나라를 만들겠다는 강고한 결의가 있어 국민들도 동조를 했지만, 점차 권력에 침잠(沈潛)했는지 당시 어느 국회의원 선거 때 ‘표 거래상’이 판을 치고 있었다. 

  고무신이 등장하고 유세장마다 공공연히 막걸리 통을 갖다놓고 퍼주기 시작했다. 배고픈 시절 미성년자가 술 먹고 비틀거리던 웃지 못 할 일도 있었다. 일거양득 술도 마시고 고무신도 받고 했으니, 술 취해 춤추고 흥얼거리며 “성거야성거야 인자 가마 언제 오노” 했던, 내 고향 근처 선거 풍경을 잊을 수가 없다. 선진국 대열에 선 지금은, 아직도 흑색선전(마타도어)은 좀 있지만 국민도, 후보자도 언감생심이다. 꿈같은 얘기다.    끝


* 사외(社外) 기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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