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백씨(水原白氏) 정신재공파(靜愼齋公派), 도승지공파(都承旨公派)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특집

수원백씨(水原白氏) 정신재공파(靜愼齋公派), 도승지공파(都承旨公派)

백고재, 고령군 쌍림면 산주리 소재.jpeg

백고재(고령군 쌍림면 산주리 소재)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수원백씨(水原白氏) 시조(始祖) 백우경(白宇經)

① 자는 경천(擎天)이고, 호는 송계(松溪)이며 당(唐)나라 소주(蘇州)사람이다.  중국 황제(黃帝) 헌원(軒轅)의 후손이며 당나라에서 벼슬이 첨의사(僉議事)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올랐으나 간신배들의 모함을 당하자 서기 780년(신라 선덕왕 원년)에 당나라를 떠나 신라에 온 후 대상(大相)과 좌복야사공(左僕射司空)대사도(大司徒)의 벼슬에 올랐다. 만년에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소재 자옥산(鷄林紫玉山) 기슭에 영월당(迎月堂)과 만세암(萬歲庵)과 13층 석탑을 짓고 신라의 발전에 이바지 하였다. 어느날 선덕왕이 이곳에 몸소 찾아와 영월당 현판에 경춘(景春)이라 쓰고 만세암(萬歲庵)을 정혜사(淨惠寺)로 고쳐주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세월이 흐르는 사이 정혜사의 불당은 없어지고 13층 석탑만이 남아 국보 40호로 지정되어 보존 되고 있다. 동경통지(東京通誌) 제 7권 불사편(佛寺篇)의 아래와 같은 기록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淨惠寺惠址 在紫玉山下 新羅宣德王庚申 唐朝僉議事白宇經 被讒來寓干紫玉山下 建迎月唐萬歲庵 宣德王幸行 改庵爲淨惠寺爲景春 云云」당나라 황제가 송계공을 여러 차례 돌아오라고 간청하였으나 돌아가지 않고 신라에서 살다가 영월당에서 일생을 마치니  향년 73세였다. 

② 자(字)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등으로 불리었던 백거이(白居易)가 지은 백굉(白鍠)의 사장(事狀)에 따르면 “초평왕(楚平王) 웅거(熊居)의 손자 승(勝)이 오(吳)와 초(楚) 사이에 살면서 백공(白公)이라고 일컬어 성씨로 삼았다”고 한다. 따라서 백씨는 초나라의 공족(公族)이다. 

(註釋) 공족(公族)

왕(王)이나 공(公) 따위의 신분이 높은 사람의 동족(同族)을 의미한다. 

③ 중시조 백창직(白昌稷)의 호는 화숙(和淑)이며 시호는 영희(英禧)이다. 상계(上系)가 불분명하여 신라 경명왕 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내고 시중상장군(侍中上將軍)에 증직된 백창직(白昌稷)을 중시조(中始祖)로 받들어 1세로 기세(起世)하여 계대(繼代) 한다. 

④ 백창직(白昌稷)의 증손 백휘(白揮)가 고려 목종 때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졌고, 그의 9세손 백천장(白天藏)이 원(元)나라에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이부상서(吏部尙書)를 거쳐 우승상(右丞相)을 지내고 귀국하여 고려 충선왕 때 수성백(隋城伯)에 봉해졌다. 이러한 연고로 백씨(白氏)의 본관을 수원(水原)으로 삼았다. 수성(隋城)은 수원(水原)의 옛 지명이다.

(2) 분파(分派)

 중시조 백창직(白昌稷)의 장남 백길(白吉)의 후손이 선정공파(禪亭公派), 인주공파(仁州公派), 오산군파(鰲山君派) 등 28개 파(派)를 차지하고 차남 백탁(白卓)의 후손은 문간공파 하나뿐으로 29개파로 나누어져 있다. 

(3) 중국백씨성(中國白氏姓)과 한반도 토착백씨(土着白氏)

① 수원백씨(水原白氏)는 조선시대 세종9년에 처음으로 수원(水原)을 본관으로 사용한 분은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을 지낸 백효삼(白效參)이 세종 9년(1427년) 친시(親試)에서 과거시험지(科擧試驗紙)에 본관을 ‘수원(水原)’으로 기재하여 새롭게 창관(創貫)하여 중국백씨성(中國白氏姓)의 근원을 이루었다고 전해진다. 

② 한반도에서 유래한 토착 백씨(土着白氏)에 관한 문헌상 최고의 기록은 고려 초기 내사령을 지낸 정간공 유방헌(柳邦憲)의 묘지명에 나오는 그의 처 ̒상당백씨(上黨白氏 : 청주백씨)’의 기록이며 단종 2년(1454년) 작성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참고하면 고령지방의 토성(土姓)으로 ‘고령백씨(高靈白氏)’가 존재하고 있어 백씨는 ‘단일본(單一本)’이 아니다. 족세(族勢)가 미약한 토착백씨들이 수원백씨(水原白氏)로 흡수되었지만 수원백씨 이외 30여 본이 전한다. 

(4) 수원백씨(水原白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수원백씨(水原白氏)는 145가구 408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후손들은 쌍림면 산주리, 신곡리, 안림리, 안화리, 대가야읍 내곡리, 성산면 득성리, 개진면 오사리 등에 세거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2. 현조(顯祖)

(1) 신라

① 백길(白吉)

자는 태초(太初)이며 중시조 백창직(白昌稷)의 아들이다. 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얻는 음보(蔭補)로 교위(校尉)를 지내고 태조 13년(930년) 우릉도(芋陵島 : 현재 울릉도)의 사절로 고려조에 파견되어 토두(土豆 : 토란)를 공물(貢物)로 받쳐 정조(正朝)의 벼슬을 받고 태조 19년(936년) 정남대장군(征南大將軍) 광평시랑(廣評侍郞)을 지냈다. 

② 백탁(白卓) 

자는 성지(聖之)이다. 고려 태조 때 병부시랑(兵部侍郞)을 지냈다. 후량(後梁) 말제(末帝) 정명(貞明) 3년(917년) 3월에 객상(客商) 왕창근(王昌瑾)이 당(唐)나라에서 돌아와 저자 거리에서 거사(居士) 차림을 한 늙은이한테 거울을 샀는데, 그 거울에 글이 씌어 있어 궁예(弓裔)가 송함홍(宋含弘)·백탁(白卓)·허원(許原) 등에게 명하여 그것을 풀게 하였다. “조계박압(操鷄搏鴨) 즉 상제(上帝)가 아들을 진한(辰韓)·마한(馬韓)에 내려 보내어 먼저 계(雞)를 잡고 뒤에 압(鴨)을 칠 것이다.”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계(鷄)”는 계림(鷄林)을, “압(鴨)”은 압록강을 말하므로, 신라를 차지한 다음에 압록강 유역을 쳐서 수복한다는 뜻으로 왕시중(王侍中) 즉 태조 왕건(王建)이 임금이 된 뒤 먼저 계림(鷄林) 즉 신라를 얻고 뒤에 압록강(鴨綠江)을 거둔다는 뜻이다.”라고 하였다. 세 사람은 서로 이르기를, “임금께서 시기하여 사람 죽이기를 좋아하니, 만일 사실대로 아뢰면 왕시중(王侍中)이 반드시 해(害)를 만날 것이고 우리도 또한 화(禍)를 면치 못할 것이다.”라고 하고 꾸며댄 말로 보고하여 태조 왕건(王建)의 목숨을 구하였다고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2) 고려

① 백사유(白思柔)

호는 퇴은(退隱)이고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백길(白吉)의 장남이다. 광종 24년(973년) 왕융(王融)이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진사(進士)를 뽑았는데 급제한 후 벼슬이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성종 10년(991년) 사신으로 송나라에 파견되어『대장경(大藏經)』과『어제(御製 : 임금이 지은 글)』를 하사한 것을 사례(謝禮) 하였다. 993년과 995년의 두 차례에 걸쳐 예부시(禮部試)의 지공거(知貢擧)를 역임하였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② 백휘(白揮) 

자(字)는 경열(慶悅)이고 호(號)는 포주(浦洲)이며 시호(諡號)는 청헌(淸獻)이다. 백사유(白思柔)의 장남이다. 국자진사(國字進士)를 지내고 벼슬은 내봉감(內奉監)에 이르렀다. 고려 목종조(穆宗朝 998~1009)에 대사마 대장군(大司馬 大將軍)으로 수원군(水原君)에 봉(封)해졌으며 문종조(文宗朝)에 평장사(平章事)가 되었다. 공의 문학고행(文學高行)은 멀리 중국에까지 떨쳤다고 한다. 생졸년 미상이다. 

③ 백간미(白簡美) 

자는 신보(愼甫)이고 호(號)는 월곡(月谷)이며 시호는 정민(貞愍)이다. 백휘(白揮)의 장남이다. 고려 성종조(成宗朝)에 등과하여 벼슬이 광록대부 판병부사 감수국사겸 대장군보국사(光祿大夫 判兵部事 監修國史兼 大將軍輔國事)로 6대 국왕(國王)을 섬겼다고 한다. 생졸년 미상이다. 

④ 백원정(白元貞) 

자는 자직(子直)이고 호는 성암(星岩)이며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 백진주(白眞周)의 아들이다. 고종조에 상서성(尙書省) 상장군(上將軍)·추충정국협모동덕위사공신(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판이부사(判吏部事) 겸 서경유수(西京留守)·상주국임평부원군(上柱國林平府院君)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⑤ 백천장(白天藏) 

호는 묵와(默窩)이고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상서성상장군(尙書省上將軍) 백원정(白元貞)의 아들이다. 이재(彛齋) 백이정(白頤正)과 역동(易東) 우탁(禹倬)의 문인이다. 한림학사(翰林學士)와 정당문학(政堂文學)을 역임한 후에 원나라에 유학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이부상서(吏部尙書).우승상(右丞相)을 역임하고 귀국한 후에 수원백(水原伯)에 봉해졌다. 생졸년 미상이다. 

⑥ 백장(白莊) 

자는 명윤(明允)이고 호는 정신재(靜愼齋)이다. 밀직부사(密直副使) 백인경(白仁景)과 태자대부(太子大傅) 문정공(文貞公) 이장용(李藏用)의 따님 인천이씨(仁川李氏) 사이에서 고려 충혜왕 복위 4년(1342년) 태어났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공민왕 6년(1357년)에 성균관(成均館)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한 후 원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한림시독학사(翰林侍讀學士)의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귀국하여 공민왕 때 광정대부(匡靖大夫)‧이부전서(吏部典書)‧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등을 역임하였다. 이성계의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가 망하자 개경(開京)을 떠나 강원도 원주 치악산(雉岳山)으로 들어가 성리학(性理學)에 몰두하였다. 태조 이성계가 누차 벼슬을 내려 불렀으나 불응하자 서산군 해미(海美)로 유배(流配) 되었다. 태종 즉위 후 특사(特赦)하고 이조판서(吏曹判書)‧집현전대제학(集賢殿大提學) 등을 제수(除授)하며 그를 회유하였으나, 이 또한 거절하여 전라북도 장수현(長水縣) 임현내면(任縣內面) 호덕동(虎德洞) 위동(位洞)으로 유배되었다. 태종 11년(1411년) 졸(卒)하였다. 장수 월강서원(月岡書院), 장흥 기양사(岐陽祠)에서 향사(享祀)한다. 의정부영의정 겸 영중추부사(議政府領議政兼領中樞府事) 및 이부전서 보문각대제학(吏部典書寶文閣大提學)을 추증(追贈)하고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이다. 정신재공파(靜愼齋公派) 파조(派祖)이다. 

(3) 조선시대

① 백여옥(白如玉)

호는 경재(敬齋)이며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백장(白莊)의 차남이다. 명상(名相) 방촌(厖村) 황희(黃喜) 문하에서 수학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을 지냈다. 1974년 월강서원(月岡書院)에 추향(追享)되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② 백운비(白雲飛)

자는 경은(景恩)이며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의 차남이다. 형조참판(刑曹參判)을 거쳐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냈다. 단종의 장인 송현수(宋玹壽)가 단종복위사건(端宗復位事件)에 연루(連累)되자 연좌(連坐)되어 서산군 해미(海美)로 유배(流配)되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③ 백인영(白仁英)

자는 언화(彦華)이며 처사(處士) 백익장(白益長)의 아들이다. 중종 20년(1525년) 생원시(生員試) 및 진사시(進士試) 양과에 입격한 후 중종 32년(1537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1539년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1541년에는 사헌부헌납(司憲府獻納)을 거쳐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내자시정(內資寺正)·양주목사(楊州牧使)를 역임하였다. 명종 8년(1553년) 내섬시정(內贍寺正)에 이어 이듬해 좌부승지(左副承旨)·우승지(右承旨)를 역임한 뒤 도승지(都承旨) 겸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이 되었다. 그 뒤 1564에는 공조참의(工曹參議)에 이르렀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도승지공파(都承旨公派) 파조(派祖)이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정신재공파(靜愼齋公派) 

공조참의(工曹參議) 백순중(白順中)이 동생 백순동(白順同)과 함께 전북 장흥군 안량면 기산리에서 사화(士禍)를 피하여 조선 명종 재위기간(1546년 〜1566년) 중 고령군 쌍림면 신촌리로 이주(移住)하여 수원백씨 정신재공파(靜愼齋公派) 고령입향조가 되었다. 동생 백순동(白順同)은 외조부의 전장(田庄)이 있는 옥야(沃野) 즉 지금의 익산(益山)으로 이거(移居)하였다. 

(2) 도승지공파(都承旨公派)

음서(蔭敍)로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백유청(白惟淸)이 1545년(명종 즉위) 을사사화(乙巳士禍)의 화를 입어 포천에서 고령으로 귀양을 와서 시거(始居)하게 되었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백후천(白後天)

자는 원건(元健)이며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백유영(白惟瑛)과 진사 심흠치(沈欽致)의 따님인 청송심씨(靑松沈氏) 사이에서 선조 1년(1568년) 태어났다. 

인조 11년(1633년)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영종만호(永宗萬戶)에 제수되었다. 양주에서 함안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선조 35년(1602년) 졸(卒)하였다. 광해군 12년(1620년)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증직되었다. 

② 백수평(白守平)

자는 평서(平瑞)이며 유생 백단회(白丹會)와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숙종 28년(1702년) 태어났다. 흉년이 들어 곡식 4백석을 출연(出捐)하여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며 밥을 빌어먹는 사람들을 구제하였으며 돈 100냥을 내어 관아에 딸려 있는 3필 말을 세우니 피폐한 온 고을이 도움을 받아 칭찬이 자자하였다. 정조 9년(1785년) 졸(卒)하였다.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2) 근∙현대 인물 

① 백경조(白敬祚) : 울릉경찰서장

② 백동제(白東濟) : 전국백씨중앙종친회장, 국제라이온스 대구지구 총재, 성림축산 대표, 청운장학재단 이사장

③ 백덕문(白德文) : 초대 고령군의회 의원 및 부의장  

④ 백무현(白武鉉) : 공군 중령, 항공기 조종사

⑤ 백문현(白文鉉) : 의학박사, 교수

⑥ 백삼기(白三基) : 의정부지청 차장검사, 제주지검 및 대구지검 차장 검사

⑦ 백송학(白松鶴) : 고령군 백씨종친회 회장

⑧ 백성기(白成基) : 의학박사, 경북대의대 교수, 경북대병원 성형외과과장.

⑨ 백운현(白雲鉉) : 조선일보 인사부 차장

⑩ 백원치(白員治) : 초대 고령군의원, 제11대 대한노인회 경북 고령군지회장

⑪ 백영호(白永浩) : 제3대 고령군의회 의원

⑫ 백임현(白林鉉) : 육군 소령

⑬ 백재현(白在鉉) : 한국일보 기자, 부산제일경제 부회장

⑭ 백종범(白鍾範) : 울산과학기술원 에너지 및 화학공학부 교수

⑮ 백지현(白智鉉) : 정형외과 의사 

⑯ 백학기(白鶴基) : 제일합섬 대표이사 부사장

⑰ 백혜령(白惠玲) : 소아과 전문의

⑱ 백혜정(白惠貞) : 치과전문의, 위생병원 교정과장

⑲ 백혜주(白惠珠) : 창원전문대 교수

⑳ 백훈현(白勳鉉) : 위생병원 이비인후과 전문의

 

자료제공 : 고령군 노인회 회장 후손 백원치(白員治)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구독 후원 하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