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개진면) 곳곳에 숨어 있는 재미있는 지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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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우리마을(개진면) 곳곳에 숨어 있는 재미있는 지명은?

우리들의 선조들은 조상의 핏줄을 밝히고 보존하기 위해 족보를 만들고, 후손들은 족보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그것을 이어가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살고 있는 고장의 구석구석 내력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고령군 8개 읍·면 각 마을의 재미있는 지명 유래 중 이번호부터는 개진면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⑴연혁(沿革)
고령군 8면 중 하나다. 본래 고령군 지역으로 구곡(九谷)의 이름을 따서 구곡면(九谷面)이라 해서 개포(開浦), 시례(詩禮), 한제(漢制), 오사(吾士), 광도(廣道), 구곡(九谷), 봉동(鳳洞) 등 7개 마을을 관할했다.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송천면(松泉面)의 신안(新安), 직동(直洞), 송천(松泉), 반운(盤雲), 양전(良田), 내동(內洞) 등 6개 동리와 前 현풍군(玄風郡), 진촌면(津村面)의 인안(仁安), 치산(雉山), 백산(栢山), 적산(笛山), 옥동(玉洞), 생동(省洞), 부동(釜洞), 창동(倉洞) 등 8개 동리를 병합해 개포(開浦)와 진촌(津村)의 첫 자를 따서 개진면(開津面)이라 했다. 그리고 개포, 오사, 구곡, 인안, 옥산, 생동, 부동, 신안, 직동, 반운, 양전 등 11개 동으로 개편해 관할했다. 1988년 5월 1일 동이 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 개포리(開浦里)

 

개포1리  마을전경.JPG


⑴ 연혁(沿革)
본래 고령군 구곡면 지역으로 앞에 낙동강 개포나루가 있어 개포라 했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시례동, 한재동을 병합해 개포동이라 하고 개진면에 편입됐다. 1988년 5월 1일 동이 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⑵ 유래(由來)
* 개포(開浦) : 일찍이 낙동강을 이용한 수운(水運)의 요지로서 소금, 곡식을 운반한 선창이었는데 원래는 개산포구(開山浦口) 마을이었다. 고려 때 팔만대장경판이 강화 전등사에서 경남 합천 해인사로 이송될 때 서해안을 거쳐 김해의 낙동강 하구를 거슬러 올라와 개산포구에 도착해 육로로 대가야읍 화갑을 거쳐 해인사에 봉송된 이후부터 개경포(開經浦)로 지칭됐다. 1914년 일본이 ‘경’자를 빼버리고 개포동으로 부른다. 1988년 5월 1일 동이 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번창하던 옛 포구는 자취를 감추고 한가로운 오늘의 모습이 애처롭다.
* 한제골, 한짓골, 한절골 : 옛날 조(曺)씨, 문(文)씨, 최(崔)씨 3성이 개척한 마을로서 마을 뒤에 큰 절이 있었다 해서 한절골로 부른다. 한제, 한짓으로 부르기도 한다.
* 시리골, 시례 : 골짜기의 생김새가 마치 떡시루같이 생겨 붙여진 이름이다. 문씨가 개척한 마을로서 팔만대장경을 해인사로 옮길 때 연락소가 있었다고 한다.
⑶ 기타
* 관음보살좌상(觀音菩薩坐像) : 지방유형 118호, 폭 1m, 높이 1.5m, 두께 30㎝의 얇은 주형(舟形), 판석(板石) 표면에 부각(浮刻)한 보살좌상으로서 고려 성종 4년의 석조물이라고 각조 년대가 명기되어 있다.
표면이 고르지 않은 자연석에다 부각해서인지 조상(造像)의 표현에 있어서 얕은 부각에서그치고 어려운 면에서는 윤곽 둘레를 얕게 파내면서 표출시키거나 음각으로 나타냈다.
조상은 단편 연화좌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왼손에 연꽃줄기를 잡고 있는 보살좌상으로서 통견법의(通肩法衣)에 관모를 쓰고 관모 중앙에 화불(化佛)을 새겼다. 조상 둘레에는 원형과 두광(頭光)과 주형의 신광(身光)을 돌리고 그 바깥쪽에 단조로운 화염문(火炎文)을 새겨 광배(光背)를 각조했으며 왼손에 잡고 있는 연꽃 줄기는 어깨너머 광배까지 연장되어 광배면(光背面)에서 연꽃을 새겼다.
조상(造像)은 단조로운 선각(線刻)으로 얕게 표출돼 평면적인데다가 균형(均衡), 조화(調和)와 정교미(精巧美)를 찾아볼 수 없으나 연꽃의 긴 줄기를 잡고 있는 보살상의 표현 양식은 동화사(桐華寺) 염불암의 거대한 음각 보살상이나 선산 궁기리 보살상과 닮고 있어 주목된다.
특히 광배과면에 ‘옹희 2년 을유 6월 27일’이라 음각된 명문(銘文)이 있어서 조선 연대가 고려 성종 4년(985)임을 밝혀주고 있다.
* 개포나루(개포진, 개경포) : 개포리 앞 낙동강가의 나루로 옛날에는 소금을 비롯한 곡식을 실어 나르는 큰 나루였으며, 특히 국보 팔만대장경판을 강화도에서 서해를 거쳐 김해지방 낙동강을 거슬러 개포나루에 옮겨 육로로 합천 해인사에 봉안한 그 이름 있는 나루였다.
지금은 개진면에서 달성군 구지면으로 건너가는데 옛 정취를 찾을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 시례동(詩禮洞, 시리골, 시릿골) : 개포 서북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 시릿골 : 시리골 뒤에 있는 골짜기
* 달의-말랑 : 개포 남쪽에 있는 산으로 매년 정월 대보름날 이 곳에서 달맞이를 했다.
* 당산 : 개포 동쪽에 있는 산으로 서낭당이 있었다.
* 독구름 : 개포 북쪽에 있는 산
* 문등골 : 개포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나병(문둥이) 환자가 살았다고 붙여진 이름
* 배-쟁이 : 개포 남쪽에 있는 마을로 임진왜란 때 망우당 곽재우 장군이 이곳에서 왜군을 섬멸했던 곳이다.
* 부칫골 : 개포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부처가 있어 붙여진 이름
* 불뭇-골 : 개포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부처가 있어 붙여진 이름
* 삼-정지 : 시리골 입구에 있는 느티나무로 둘레가 세 아름이나 된다. 조(曺), 한(韓), 정(丁) 세분이 심었다고 삼-정지이다.
* 시렛-들 : 시리골 앞에 있는 들
* 시진-들 : 개포 남동쪽에 있는 들
* 열밋-재 : 개포 서쪽에 있는 큰 고개로 직동 열미(열뫼)를 지나 고령읍, 대구지방으로 간다.
* 제삼정(濟三亭) : 영조 20년 1745년 창건, 본군 현감 이형중(李衡仲)이 부임해 송천방(松泉坊), 구곡방(九谷坊), 진촌방(津村坊) 백성을 동원해 이룩하니 제삼정이 됐다. 이 부근 여러 건물은 조창(漕倉)이며 영남에서 제일가는 무역포구로서 지방물산과 해외 물품이 집산하니 복잡할 때는 원님(군수)이 정자에 와서 관세하는 광경을 살폈다고 한다. 이 정자 자리가 지금은 낚시터로 변했다.
* 창-마(창촌) : 개포나루 마을로 조선시대 선창이 있어서 어물, 소금 등 많은 해산물이 개포나루로 통과했는데 많은 물건이 배로 도착하면 이곳 큰 창고로 보관했는데 창고가 있었던 마을이라 창마라 한다.
* 창-들 : 창마 서쪽에 있는 들
* 현감 김중조 선정비(縣監 金重祚 善政碑) : 고령 현감 김중조 선정비로 열밋재에 있었다.

 

▣ 구곡리(九谷里)

 

구곡1리 마을전경.JPG


⑴ 연혁(沿革)
구실, 구곡으로 불리운 이 마을은 본래 고령군 지역으로 9홉 골짜기로 둘러 있어 구실 또는 구곡(九谷)이라 했다. 조선시대 이 이름을 따서 구곡면(九谷面)이 됐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봉동(鳳洞)을 병합해 구곡동(九谷洞)이라 해서 개진면에 편입됨, 1988년 5월 1일 동이 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⑵ 지명 유래(地名 由來)
* 구실, 구곡(九谷) : 올밧골, 올밤골, 건진골, 월당골, 진방골, 밋골, 문안골, 골안골, 새안골 등 아홉 골짜기가 둘러 있으므로 구실, 또는 구곡이라 불렀다.
또 다른 유래로는 아홉 골짜기로 둘러 쌓여 있어 구곡이라 했음은 공통점이고, 범이 살았던 범산골, 절이 있던 절골, 바위에 글이 있었던 문바위골, 문안 같은 문안골, 고기를 구웠던 국계골, 원당사가 있었던 원당골, 햇빛이 많이 비치는 대양골, 동에 있는 전방골, 골이 깊은 올방골이라 해서 구곡이라 했다고도 한다.
* 봉골, 봉동, 봉명동(鳳鳴洞) : 구실 남동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약 300년 전 형성된 마을이다. 마을 뒷산의 형상이 마치 ‘봉’과 같아 봉골, 봉동, 봉명동이라 불렀다.
* 왜나루 : 옛날 낙동강이 이 마을 앞을 흐를 때 나루터가 있었는데 임진왜란 때 왜적이 이 나루를 건너갔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이곳의 흙이 기와를 굽는데 좋아서 전국 사찰 및 문화재 보수용으로 널리 보급된다.
* 유목정 : 지벌리 맞은편 낙동강변에 버드나무 숲이 유명해 주점을 차려놓고 행락한 곳이라 붙여진 이름. 지금은 한 그루 고목과 4가구가 살고 있다.
⑶ 기타
* 구곡재(九谷齋) : 1956년 창건, 허시(許施)를 위한 재실
* 갱번-들 : 봉골 서쪽 낙동강가의 들
* 건진-들 : 구실 둘레에 있는 골짜기
* 골안-골 : 구실 북쪽에 있는 골짜기
* 구시방-골 : 봉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 구실-골 : 구실 마을 뒤에 있는 골짜기
* 구실굼들 : 구실 앞에 있는 들
* 기엉-골 : 봉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 당산-등 : 봉골 북쪽에 있는 서낭당이 있는 등성이
* 명산-봉 : 구곡동에 있는 산
* 문안-골 : 구실 둘레에 있는 골짜기
* 밑-골 : 진방골 밑에 있는 골짜기
* 배신비(裵神碑) : 조선 명종 16년(1561)에 진사가 된 학자로 임란 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와 같이 의병을 일으켜 도진산성(桃津山城)에서 왜병과 싸우고 선조 35년(1602)에는 낙산서당(洛山書堂)을 창건했으며, 후학들이 낙천 배신의 도학을 추모하고 업적을 기록한 비다.
* 보구-터 : 송정못 밖에 있는 터
* 봉골(봉동, 봉명동) : 구실 동남쪽에 있는 마을 시리봉과 명산봉 사이에 있다.
* 비산-등) : 봉골 서쪽에 있는 등성이
* 새안-골 : 문안골 옆에 있는 골짜기
* 송정(松亭, 허송정) : 치재(癡齋) 허명신(許命申)이 지은 정자이며 못도 팠다.
* 송정못 : 치재선생이 판 못이름
* 수만-산 : 구실 동북쪽에 있는 산
* 시리-봉 : 구실 북쪽에 있는 산으로 산 모양이 떡시루처럼 생겨서 붙여진 이름
* 안-산 : 봉골 앞에 있는 산
* 암품-골 : 봉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올밤-골 : 구실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일찍 익는 올밤나무가 많다고 붙여진 이름
* 올밧-골 : 올밤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왜나무 : 지벌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 기와를 구웠다.
* 유목정(柳木亭) : 왜나루 서남쪽에 있는 마을로 버드나무 정자가 있었다.
* 이행단(李杏壇) : 구실 오른쪽 산기슭에 있는 은행나무 이름으로 죽포(竹圃) 이견용(李見龍)과 그 아우 국포(菊圃) 이문용(李文龍)이 술을 가지고 치재 허명신 선생을 자주 찾아가 이 은행나무 밑에서 글을 짓고 놀았다고 붙여진 이름
* 조양재(朝陽齋) : 1900년 창건, 안동권씨 권시추(權時樞)는 문장이 뛰어나고 효행이 지극한 학자로 후진을 길러 향리에 이름이 높았으며 그를 추모해 후손들이 건립한 재실이다.
* 진방골 : 구실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짐-산 : 유목정 뒤에 있는 작은 산

 

 

* 고령문화원 발행 고령문화 제7집
 ‘高靈地方의 마을史’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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