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최씨(全州崔氏) 첨추공파(僉樞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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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전주최씨(全州崔氏) 첨추공파(僉樞公派)

기획연재-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

송천서원(청주시 청원구 오창읍 양지리).jpg

전주최씨(全州崔氏) 첨추공파(僉樞公派)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전주최씨(全州崔氏) 시조(始祖) 최순작(崔舜爵)


 전주최씨(全州崔氏)는 시조와 계보를 달리하는 4계파로 나뉜다. 최순작(崔純爵)을 시조로 하는 문열공파(文烈公派), 최균(崔均)을 시조로 하는 사도공파(司徒公派), 최아(崔阿)를 시조로 하는 문성공파(文成公派), 최군옥(崔群玉)을 시조로 하는 문충공파(文忠公派) 등 4파가 있다. 이들의 상계(上系)에 대해서는 아직 확정적인 고증(考證)이 없어 통일된 시조를 갖고 있지 못한다. 전주최씨 중 가장 번성한 계파는 최순작(崔純爵)의 후손들인 문열공계(文烈公系)로서 전주의 토착(土着) 성씨(姓氏)다.
② 최순작(崔純爵)은 최치원(崔致遠)·최승우(崔承祐)와 함께 ‘일대삼최(一代三崔)’라 불리었고 벼슬이 대상 원봉대학사 한림원령 평장사(大相 元鳳大學士 翰林院令 平章事)에 이르렀던 문영공(文英公) 최언위(崔彦撝)의 후예이다. 고령 세거 전주최씨(全州崔氏)가 시조로 삼고 있는 최순작(崔純爵)은 고려 정종 때에 처음으로 벼슬을 하여 고려 숙종 때 병부상서(兵部尙書)와 검교신호위상장군(檢校神虎衛上將軍)을 지내고 완주백(完州伯)에 봉해졌다. 예종 3년(1108년) 졸(卒)하였다. 시호(諡號)는 문열(文烈)이다. 이로써 그의 후손들이 전주(全州)를 본관(本貫)으로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 백제시대의 완주(完州)가 신라에 병합되자 경덕왕 16년(757년)에 주군현의 명칭이 바뀔 때, ‘전주(全州)’로 바뀌었다. 따라서 전주(全州)의 옛 이름이 완주(完州)이다.

 

(2) 두문동(杜門洞) 72현(七十二賢)과 형제 정승(政丞)을 배출한 명문(名門)
① 최양(崔瀁)의 호는 만육(晩六)이고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외숙(外叔)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가 선죽교(善竹橋)에서 살해되고 고려가 망하여 조선이 건국되자 전북 진안 팔공산(八公山)에서 들어가 3년동안 은거하면서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지켜 두문동(杜門洞) 72현(七十二賢) 중 한 분으로 추앙(推仰)받았다.
② 병자호란 때 주화론(主和論)을 이끈 최명길(崔鳴吉)은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1등공신으로 대제학(大提學)·영의정(領議政) 등에 올랐고, 그의 손자 최석정(崔錫鼎)은 소론(少論)의 영수(領袖)로서 숙종 때 6차례나 영의정(領議政)을 역임하였고 동생 최석항(崔錫恒)도 경종 때 좌의정(左議政)을 지내 전주최씨가 명문(名門) 반열(班列)에 오르게 하였다.

 

(3) 분파(分派)
최순작(崔純爵)을 시조로 하는 문열공파(文烈公派)는 최사미(崔思美) 후손의 예의판서공파(禮儀判書公派), 최사위(崔士威) 후손의 판윤공파(判尹公派), 최사의(崔士儀) 후손의 양도공파(襄度公派), 최사규(崔士規) 후손의 지평공파(持平公派), 최사강(崔士康) 후손의 경절공파(敬節公派), 최사용(崔士庸) 후손의 첨추공파(僉樞公派), 최사흥(崔士興) 후손의 감무공파(監務公派) 등으로 계파(系派)가 분파(分派)되었다.

 

(4) 전주최씨(全州崔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전주최씨(全州崔氏)는 38가구 98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첨추공파(僉樞公派) 후손은 개진면 신안리 등에 누대에 걸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최숭(崔崇)
 검교신호위상장군(檢校神虎衛上將軍) 최순작(崔舜爵)의 아들이다. 숙종 때 과거에 급제하고 예종 때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지내고 인종 때 상서판호부(尙書判戶部)를 거쳐 판예부사(判禮部事)로 문병(文柄)을 잡으니 문풍(文風)이 진작(振作)되었고 예종 때 중랑장(中郞將)을 겸하였다. 의종 5년(1151년) 졸(卒)하였다.
(註釋) 문병(文柄)
문장을 평정하거나 문사(文士 : 문학에 뛰어나고 시문을 잘 짓는 사람)를 시취(試取 : 시험을 보아 인재를 뽑음)하거나 하는 권병(權柄 : 권력으로 사람을 좌우할 수 있는 신분이나 그 힘). 곧 과거(科擧)의 시관(試官)이 됨을 이르는 말이다.
② 최남부(崔南敷)
판예부사(判禮部事) 최숭(崔崇)의 아들이다. 고려 명종 때 지공부(知工部)의 벼슬을 시작으로 통의대부(通議大夫)를 거쳐 공부상서(工夫尙書)·보문각직제학(寶文閣直提學)·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태자소부(太子少傅)·좌우위대장군(左右衛大將軍)을 지내고 전주백(全州伯)에 봉해지고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신종 3년(1200) 졸(卒)하였다.
③ 최전(崔佺)
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 최남부(崔南敷)의 아들이다. 조산대부(朝散大夫)·
비서감(秘書監) 소윤(少尹)·좌우위보승랑장(左右衛保勝郞將)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④ 최정신(崔正臣)
좌우위보승랑장(左右衛保勝郞將) 최전(崔佺)과 성균좨주(成均祭酒) 포산군(苞山君) 원진(元振)의 따님 현풍군부인(玄風郡夫人) 곽씨(郭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종 13년(1226년) 문과에 급제한 후 좌우정언전중어사(左右正言殿中御使)·중정대부(中正大夫)를 지내고 삼사간의부사(三司諫議副使)로서 좌간의(左諫議) 유경(柳璥)과 함께 무신정권의 마지막 집권자인 최항(崔沆)의 잘못을 탄핵(彈劾)하다가 북변(北邊)으로 귀양갔다. 고종 45년(1248년) 무신정권의 실력자  최의(崔竩)가 주살(誅殺)당하자 석방되어 병부시랑(兵部侍郞)이 되었으나 원종 때 보문각지제교(寶文閣知製敎)로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른 임연(林衍)을 논죄(論罪)하다가 다시 남쪽으로 귀양갔다. 그후 삼사부사(三司副使)·좌우위중랑장(左右衛中郞將)을 역임하였다. 남쪽과 북녘으로 귀양살이 전후 십여년에 마침내 큰 벼슬에 등용되지 못하였으나 세상사람들이 곧고 강직함에 명성이 높았아 정직함은 그 이름을 저버리지 않았고 하였다(正直不負其名).
⑤ 최득평(崔得枰)
초휘(初諱)는 계보(季寶)이다. 좌우위중랑장(左右衛中郞將) 최정신(崔正臣)과 우복야(右僕寺) 공보(公輔)의 따님 백천조씨(白川趙氏) 사이에서 원종 1년(1260년) 태어났다. 18세에 원능직(元陵直)의 벼슬을 시작으로 여러번 자리를 옮겨  군부시랑(軍部侍郞)·전라도안렴사(全羅道按廉使)·상주목사(尙州牧使) 등을 역임하고 통헌대부(通憲大夫)·선부전서(選部典書)를 거쳐 상호군(上護軍)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청렴결백하며 스스로 조심하여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충숙왕 후 3년(1334년)에 졸(卒)하였다.

(註釋)  치사(致仕)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
⑥ 최재(崔宰)
자(字)는 재지(宰之)이다. 선부전서(選部典書) 최득평(崔得枰)과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예(豫)의 따님인 청천군부인(淸川郡夫人) 곽씨(郭氏) 사이에서 충렬왕 29년(1303년) 태어났다. 충숙왕 17년(1330년) 문과에 급제한 후 중부령(中部令)·감찰지평(監察持平)·전법정랑(典法正郎)을 거쳐 지흥주사(知興州事)로 외보(外補 : 지방관에 보임함)되어 백성을 잘 다스렸다. 충목왕 3년(1347년) 정치도감(整治都監)의 판관(判官)으로 참여했으며, 이듬해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로 나갔다가 다시 전객부령(典客副令)·자섬사사(資贍司使)로 옮겼다. 충정왕 1년(1349년) 양주(襄州)의 수령으로 나가 있던 중 원나라의 강향사(降香使)가 존무사(存撫使)를 부당하게 욕보이는 것을 보고 개탄, 항의의 표시로 사직했으나 이로 인해 오히려 감찰장령(監察掌令)에 특진(特進)되었다. 공민왕 즉위 후 개성소윤(開城少尹)·전법총랑(典法摠郎)·감찰집의(監察執義)·상서우승(尙書右丞)·대부시사(大府寺事)·공주목사(公州牧使) 등의 관직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공민왕 10년(1361년) 상주목사(尙州牧使)로 재임시 홍건적(紅巾賊)의 재침으로 피난하는 왕을 상주에서 맞게 되었는데, 호종했던 관리들의 참소(讒訴 : 악한 말로 남을 헐뜯고 고소함)로 파직되었으나 공민왕 13년(1364년) 감찰대부(監察大夫)로 기용되고, 중대광완산군(重大匡完山君)에 봉해졌고 그 뒤 전리판서(典理判書)·개성윤(開城尹)을 역임하였다. 우왕 4년(1378년) 졸(卒)하였다. 시호는 문진(文眞)이다.

(註釋1) 강향사(降香使)
향을 보내서 치성드리는데, 그 향을 가지고 가는 사람을 뜻한다.
(註釋2) 존무사(存撫使)
고려시대 백성의 질고와 수령의 전최(殿最 : 치적을 조사하여 보고하던 일)를 살피는 일을 담당한 지방관을 말한다.


(2) 조선시대
① 최유경(崔有慶)
자는 경지(慶之)이고 호는 죽정(竹亭)이다. 전리판서(典理判書) 최재(崔宰)와 군부정랑(軍簿正郞) 윤류(允鏐)의 따님 무안군부인(務安郡夫人) 박씨(朴氏) 사이에서 충혜왕 4년(1343년) 태어났다. 공민왕 21년(1372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이 되어 방자(放恣)한 환관(宦官) 윤충좌(尹忠佐)를 탄핵했다. 우왕 14년(1388년) 양광도안무사(楊廣道安撫使)로서 권력을 휘두르며 관직과 옥(獄)을 팔고 전국에 걸쳐 토지와 노비를 축적하는 등 탐학(貪虐)을 일삼던 임견미(林堅味)와 염흥방(廉興邦)의 가노(家奴) 8명을 체포하여 처형하였고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서북면조전사 겸 찰방(西北面漕轉使 兼 察訪)으로 우왕에게 이성계의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 사실을 고하였다. 이듬해 최영(崔瑩)이 실각되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올랐다. 1392년 조선 개국 후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태조 4년(1395년)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임금이 우정승 김사형(金士衡)에게 일러 말하기를 “경상도 도관찰사 최유경(崔有慶)이 무진년(1388년 위화도 회군시)에 비록 우리들을 배반하였으나 그 임금을 위한 것이요, 또 포치(布置 : 분포하여 배치함)하는 재주가 있다.”고 하여 이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중군 동지절제사(中軍同知節制使)를 제수하고, 그대로 관찰사를 겸임시켰다. 그후 중추원부지사(中樞院府知使)·개성유후사유후(開城留後司留後)·경기,충청도도체찰사(京畿,忠淸道都體察使) 등을 역임하고, 태종 1년(1401년) 참찬의정부사(參贊議政府事) 때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1403년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 1404년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에 이르러 치사(致仕)했다. 태종 13년(1413년) 졸(卒)하였다. 태종 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고, 청주(淸州) 송천서원(松泉書院)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평도(平度)이다.
② 최사용(崔士庸)
한성부판사(漢城府判事) 최유경(崔有慶)과 문하시중(門下侍中) 숭(崇)의 따님 고성현부인(固城縣夫人) 이씨(李氏) 사이에서 태조 1년(1392년) 태어났다. 춘정 (春亭) 변계량(卞季良)의 문인이다. 조선시대에, 공신(功臣)이나 전·현직 고관의 자제를 과거에 의하지 않고 관리로 채용하던 음서(蔭敍)로 종묘주부(宗廟注簿)·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공조좌랑(工曹佐郞)·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제용감(濟用監) 부정(副正)·청송부사(靑松府使)·밀양부사(密陽府使)·상주목사(尙州牧使)·군기판사(軍器判事) 등을 역임하고 문종 1년(1451년)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에 제수되었고 그후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陞品)되고 지중추부사상호군(知中樞府事上護軍)로 승진(陞進)하였다. 단종 2년(1454년) 졸(卒)하였다.
③ 최안지(崔安智)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최사용(崔士庸)과 개성유후(開城留後) 성(省)의 따님 숙부인(淑夫人) 광주이씨(廣州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음사(蔭仕)로 세조 12년(1466년) 칠원현감(漆原縣監), 성종 7년(1476년) 예빈시(禮賓寺) 판관(判官), 성종 18년(1487년) 삼화현령(三和縣令) 등을 지냈다.
④ 최순달(崔舜達)
자는 성보(聖寶)이다. 처사 최숙철(崔淑喆)과 창윤(昌潤)의 따님 안동권씨(安東權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진사(進士)를 지냈다. 후손들이 공의 학덕(學德)을 기리고자 재숙지소(齋宿之所)로 원모재(遠慕齋)를 창건하였으나 1650년 흔적 없이 불에 아주 타 없어져 아직 중건(重建)하지 못하였다. 생졸년(生卒年)은 미상(未詳)이다.
⑤ 최종무(崔宗武)
처사(處士) 최한남(崔漢南)와 치육(致六)의 따님인 제주고씨(濟州高氏) 사이에서 선조 1년(1568년) 태어났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효종 10년(1659년) 졸(卒)하였다.
⑥ 최기래(崔起來)
자는 형백(馨伯)이고 호는 낙와(洛窩)이다. 처사(處士) 최한필(崔漢弼)과 대춘(大春)의 따님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선조 9년(1576년) 태어났다. 선조 36년(1603년) 무과에 급제한 후 훈련원(訓練院) 봉사(奉事)를 지냈다. 인조 2년(1624년) 이괄(李适)의 난(亂)에 동서로 치고 달려 적의 목을 베어 죽이거나 사로잡은 것이 헤아릴 수도 없어 적진(敵陣)에서 용맹(勇猛)스럽고 매우 날쌘 장수(將帥) 즉 ‘비장(飛將)’이라 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니 총독부사(摠督副使)최명길(崔鳴吉)이 경탄(驚歎)하고 ‘진정한 장사(眞壯士)’라고 칭송하였다. 이괄(李适)의 난(亂)이 평정되자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병자호란을 당하여 남한산성이 포위되었다는 급보(急報)를 듣고 의병(義兵)을 모집하여 집안의 하인들을 거느리고 청주(淸州)에 이르자 화의(和議)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왔다. 효종 3년(1652년) 졸(卒)하였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철종 때 첨추공파(僉樞公派) 파조(派祖) 최사용(崔士庸)의 손자 최숙철(崔淑喆)이 현풍(玄風)에 우거(寓居)하였고 그의 11세손 최응한(崔應翰)이 달성군 구지면에서 개진면 신안리에 입향하여 6대째 세거하고 있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최이철(崔伊澈) : 경찰 경위
(2) 최병철(崔柄澈) : 경찰 경위
(3) 최현식(崔現植) : 서울 한의원, 한의사
(4) 최헌식(崔憲植) : 한국은행 과장
(5) 최태식(崔泰植) : 대구광역시 서구청 사무관
(6) 최부식(崔富植) : 경찰 경감
(7) 최근식(崔根植) : 근희 빌딩 대표

 

 

자료제공 : 전주최씨 첨추공파 후손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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