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정씨(羅州丁氏) 초암공파(草菴公派)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특집

나주정씨(羅州丁氏) 초암공파(草菴公派)

나주정씨 월헌공파 재실 영모재.jpg

나주정씨 월헌공파 재실 영모재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시조(始祖) 정윤종(丁允宗)
시조는 고려 중엽의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정윤종(丁允宗)이다. 우리나라에 족보가 있기 시작한 것이 1476년, 즉 성종(成宗) 7년 《안동권씨성화보(安東權氏成化譜)》부터이니 그때부터 위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최고 300∼400년 이상의 조상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소상히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나주정씨도 최초의 가첩(家牒)인 월헌첩(月軒帖)이 약 1520년, 즉 중종(中宗) 12년 전후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고려 중기의 정윤종을 시조로 적어 놓은 것은 매우 신빙성 있는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나주 정씨의 본관은 원래 압해(押海)였다. 압해에 살던 조상이 고려조(高麗朝) 초에 정성(丁姓)으로 「토성분정(土姓分定)」을 받았다. 관적지(貫籍地) 압해(押海)는 고려말에 왜구의 침범으로 실토(失土)되고 인(因)하여 태종 9년(1409년)  폐현(廢縣)이 되어 나주(羅州)에 소속되었으며 현재 전라남도 신안군 압해읍에 속해 있는 섬으로 예부터 산세(山勢)가 바다를 압도(壓倒)한다는 뜻으로 압해현((壓海縣)으로 불리었고 고려 때에 나주목(羅州牧)으로 귀속되었다.  조선 영조 시대에 와서 압해(押海)가 폐읍(廢邑)이 되었다는 이유로 압해를 버리고 본관을 나주(羅州)로 개관(改貫)하여  나주(羅州)를 관향으로 삼았다. 생몰년이 명시된 정자급(丁子及 : 1423년∼1487년)을 기준, 한 세대당 평균 30년으로 계산하여 추정한 결과 시조 정윤종(丁允宗)의 생존시기는 1120년대 즉 고려 예종 말에서 인종 연간에 해당된다.
(주) 토성분정(土姓分定)
토성분정(土姓分定)은 고려 태조가 후삼국 통일 직후인 940년에 전국 주(州)·부(府)·군(郡)·현(縣)의 이름을 개편하면서 시행했다는 정책으로, 각 지방의 호족들을 통제하기 위해 그들에게 성씨와 본관을 가지게 하며 기득권을 어느 정도 인정해 주는 대신, 타 지역으로의 이동과 세력 확장을 억제한 것을 말하며 한국 각 성씨 본관의 기원이라 한다. 전 영남대 교수 이수건(李樹健)이 1984년에 처음 내놓은 학설이다.


(2) 9대 옥당(玉堂)과 정약용(丁若鏞)을 배출한 명문(名門)
① 옥당(玉堂)은 조선시대에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 홍문관(弘文館)을 달리 이르는 말로 관리들이 선망(羨望)하는 청요직(淸要職)의 상징이다.
② 조선조로 들어와 제11세 소격서령공 정자급(丁子伋), 월헌공 정수강(丁壽崗), 공안공 정옥형(丁玉亨), 충정공 정응두(丁應斗), 사헌공(司憲公) 정윤복(丁胤福), 동원공 정호선(丁好善), 교리공 정언벽(丁彦壁), 두호공 정시윤(丁時潤), 참의공 정도복(丁道復)에 이르기까지 단1대도 거르지 않고 9대에 걸쳐 옥당(玉堂) 즉 홍문관(弘文館)의 요직(要職)에 올랐다.
③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성호 이익(李瀷)의 경세치용(經世致用) 학풍과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지향하는 북학파의 주장을 한데 묶어 용광로 안에 녹여 자신만의 독창적 학문을 완성시켜 ‘실학(實學)을 집대성(集大成)’하였다.


(3) 분파(分派)
계파를 크게보면 교리공파(校理公派), 월헌공파(月軒公派)로 나뉘어지고, 작게는 교리공파에 사직공파(司直公派), 진사공파(進士公派), 충순위공파(忠順衛公派), 부사공파(府使公派)로, 월헌공파에 문화공파(文化公派), 공안공파(恭安公派), 첨정공파(僉正公派), 연안부사파(延安府使派), 어사공파(御使公派), 전적공파(典籍公派), 서윤공파(庶尹公派), 야은공파(野隱公派), 사련공파(司鍊公派) 등으로 나뉘어졌다.


(4) 나주정씨(羅州丁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나주정씨(羅州丁氏)는 29가구 77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나주정씨(羅州丁氏) 진사공파(進士公派) 후손들은 개진면 개포리, 오사2리 광도, 옥산1리, 성산면 박곡리, 대가야읍 일원 등에 세거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정안경(丁安景)
영동정신호위보승랑장(令同正神號衛保勝郞將) 정세(丁世)와 영동정(令同正) 영단(英旦)의 따님 수령박씨(遂寧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좌우위보승랑장(左右衛保勝郞將)을 지내고 공민왕 19년(1370년) 개경 송악에서 처음으로 이거하여 배천(현재 황해도 연백)에 살았다. 중종 2년(1507년) 증손 수강(壽崗)이 귀하게 되어 통훈대부(通訓大夫) 사섬시정(司贍寺正)에 증직(贈職)되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② 정연(丁衍)
좌우위보승랑장(左右衛保勝郞將) 정안경(丁安景)과 별장(別將) 익화(益和)의 따님 증(贈) 숙인(淑人) 거제반씨(巨濟潘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초휘(初諱)는 협(浹)이며 중종 2년(1507년) 손자 수강(壽崗)이 귀하게 되어 통훈대부(通訓大夫) 사섬시정(司贍寺正)에 증직(贈職)되었고, 명종 1년(1546년) 증손 옥형(玉亨)이 귀하게 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가증(加贈)되었다. 공은 고려 말 국운이 다할 때 덕(德)을 숨기고 벼슬을 하지 않았다. 고향사람들이 “정공(丁公)은 덕을 숨기므로 그 자손의 이름이 창성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공의 집 옆에 있는 바위를 “정공(丁公)바위”라고 하였고 후세사람들이 죽은 뒤에 공덕(功德)을 칭송(稱頌)하기를 “암은공(巖隱公)”이라 하였다.
(2) 조선시대
① 정자급(丁子伋) 
자는 여문(呂文)이며 초자(初字)는 여윤(呂胤)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증직(贈職)된 정연(丁衍)과 전공판서(典工判書) 경도(庚道)의 따님 증(贈) 정부인(貞夫人) 재령이씨(載寧李氏) 사이에서 세종 5년(1423년) 태어났다. 단종 1년(1453년)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고 세조 6년(1460년) 평양별시(平壤別試) 문과에 급제한 후 권지성균관학유(權知成均館學諭)·풍저창주부(豐儲倉注簿)·승문원부교리(承文院副校理)·랑천현감(狼川縣監)을 역임하고 통훈대부(通訓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성종 18년(1487년) 소격서령(昭格署令)을 제수받고 동년에 졸(卒)하였다.


② 정수강(丁壽崗)
자는 불붕(不崩)이고 호는 월헌(月軒)이다. 소격서령(昭格署令) 정자급(丁子伋)과 우령중랑장(右領中郞將) 증(贈) 정부인(貞夫人) 관성황씨(管城黃氏) 사이에서 단종 2년(1454년) 태어났다. 성종 5년(1474년)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고 성종 8년(1477년) 문과에 급제한 후 권지전교서정자(權知典校署正字)를 시작으로 정언(正言)·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병조좌랑(兵曹佐郞)·병조정랑(兵曹正郞)을 역임하였으며, 성종 13년(1482년)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파견되기도 하였다. 연산군 9년(1503년)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이 되었으나 연산군 12년(1506년) 질병을 이유로 사직을 청하자 노하여 고신(告身 : 직첩)을 거두고 영구히 서용(敍用 : 등용)하지 말도록 하였다. 이듬해 갑자사화(甲子士禍)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중종 1년(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재등용되어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록(策錄)되었으며, 이듬해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로 외보(外補)되었다. 이후 판결사(判決事)·대사간(大司諫)·병조참지(兵曹參知)에 이르렀다. 1516년 사유가당인(師儒可當人)으로 선발되었다. 1518년 대사성(大司成)·대사헌(大司憲)을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중종 22년(1527년) 졸(卒)하였다. 저서로는 『월헌집(月軒集)』이 있다.
③ 정옥형(丁玉亨)
자는 가중(嘉仲)이고 호는 월봉(月峰)이며 시호는 (恭安)이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정수강(丁壽崗)과 지평(持平) 언신(彦辛)의 따님 증(贈) 정부인(貞夫人) 강릉김씨(江陵金氏) 사이에서 성종 17년(1486년) 태어났다. 중종 8년(1513년)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承文院) 검열(檢閱)·부정자(副正字)·이조정랑(吏曹正郞)·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장령(掌令)·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부제학(副提學) 등을 역임하고 중종 25년(1530년)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 1533년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 당시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오로지하자, 그에 의부(依附 : 의지하여 따름)하기를 꺼려하여 외직으로 나가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어 선정(善政)을 베풀었다. 중종 31년(1536년)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서 태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한 태자진하사(太子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의 북경에 다녀왔다. 이듬해 예조참판(禮曹參判)·이조참판(吏曹參判)·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고 중종 34년(1539년) 공조판서(工曹判書)·형조판서(刑曹判書)·대사헌(大司憲)·우참찬(右參贊)·예조판서(禮曹判書)·좌참찬(左參贊) 등을 거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에 이어 중종 39년(1544년)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다. 이듬해 명종 즉위와 더불어 형조판서(刑曹判書)가 되어 소윤(小尹)에 가담, 대윤(大尹)을 제거하는 데 협력하여 명종 2년(1547년) 추성정난위사공신(推誠定難衛社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 금천군(錦川君)에 봉해졌고 좌찬성(左贊成)에 올랐다가 명종 4년(1549년) 졸(卒)하였다.


④ 정응두(丁應斗) 
자는 추경(樞卿)이고 호는 삼양재(三養齋)이고 시호는 충정(忠靖)이다. 좌찬성(左贊成) 정옥형(丁玉亨)과 사직(司直) 수연(守延)의 따님 증(贈) 정경부인(貞敬夫人) 상주김씨(尙州金氏) 사이에서 중종 3년(1508년) 태어났다. 중종 26년(1531년)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고 중종 29년(1534년) 문과에 아원(亞元)으로 급제한 후 선공감직장(繕工監直長)을 시작으로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세자시강원설서(世子侍講院說書)·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조좌랑(吏曹佐郞)·이조정랑(吏曹正郞)·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홍문관부응교(弘文館副應敎)·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세자시강원우보덕(世子侍講院輔德)·홍문관응교(弘文館應敎) 등을 역임하였다. 1545년(인종 1년) 예관(禮官)으로 명나라 사신을 영접한 뒤 사간(司諫)이 되었으며 명종 2년(1547년) 대사간(大司諫)에 제수되고 이듬해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나 사직을 청하였다. 그후 외직(外職)으로 영남·경기·호남·영북·관서지방 등 5도(五道) 관찰사(觀察使)를 지내고 내직(內職)으로 참판(參判)으로 예조·병조·형조·공조 등 4조(四曹)를 역임한 후 명종 16년(1561년) 병조판서(兵曹判書)가 되었고 명종 19년(1564년) 의정부좌찬성(議政府左贊成)을 지냈다. 선조 5년(1572년) 졸(卒)하였다.


⑤ 정윤우(丁允祐)
초휘는 윤우(胤祐)이고 자는 천석(天錫)이며 호는 초암(草菴)이다. 좌찬성(左贊成) 정응두(丁應斗)와 함안군수(咸安郡守) 세충(世忠)의 따님인 정경부인(貞敬夫人) 은진송씨(恩津宋氏) 사이에서 중종 34년(1539년) 태어났다. 선조 1년(1567년) 생원 및 진사시 양시(兩試)에 입격(入格)하고 선조 3년(1570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형조좌랑(刑曹佐郞)·예조좌랑(禮曹佐郞)·병조좌랑(兵曹佐郞)·황해도도사(黃海道都事)·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헌부헌납(司憲府獻納)·사인(舍人)·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동래부사(東萊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선조 17년(1584년) 사신으로 명에 갔을 때 신종이 그의 탁월한 문장에 감탄하여 ‘유엽배육매(柳葉杯六枚)’를 하사(下賜)했다 한다. 1589년(선조 22년) 독포어사(督捕御史 : 체포를 감독하는 어사)가 되어 경상도에 파견되었다. 1593년(선조 26)에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임명되고 이후 병조참의(兵曹參議)·병조참지(兵曹參知) 등을 역임하였다. 1597년(선조 30년)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1599년(선조 32년)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를 지냈다. 그는 임진왜란 때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1등(宣武原從功臣一等)에 책록(策錄)되었고,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참판(兵曺參判)에 추증(追贈)되었다. 1605년(선조 38년) 졸(卒)하였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조선 인조 때 정언수(丁彦秀)가 경기도 고양에서 개진면 개포리 한제동(漢制洞)에 입향하였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정시생(丁時生)
초휘(初諱)는 난생(蘭生)이다. 처사 정언수(丁彦秀)와 현석(顯錫)의 따님인 문화유씨(文化柳氏) 사이에서 광해군 13년(1621년)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한 후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숙종 20년(1694년) 졸(卒)하였다.
② 정흥도(丁興燾)
초휘(初諱)는 흥복(興福)이며 자는 영오(永五)이다. 부사과(副司果) 정시생(丁時生)과 한섭(漢燮)의 따님 김해김씨(金海金氏) 사이에서 광해군 13년(1621년)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한 후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숙종 40년(1714년) 졸(卒)하였다.
③ 정순섭(丁順燮)
자는 성여(成汝)이다. 처사 정대기(丁大基)와 참봉(參奉) 택기(宅基)의 따님 창녕조씨(昌寧曺氏) 사이에서 헌종 3년(1837년) 태어났다. 음직(蔭職)으로 참봉(參奉)을 지냈다. 1886년(고종 23년) 졸(卒)하였다.
④ 정만섭(丁晩燮)
자는 문서(文瑞)이다. 수직(壽職) 통정대부(通政大夫) 정대호(丁大浩)와 병희(秉熙)의 따님 인동장씨(仁同張氏) 사이에서 헌종 12년(1846년) 태어났다. 음직(蔭職)으로 참봉(參奉)을 지냈다. 1868년(고종 5년) 졸(卒)하였다.


(2) 근∙현대 인물
① 정해식(丁海植) : 육군 준장, 조달청장, 경남 및 충북도지사
② 정종진(丁宗鎭) : 대구광역시교육청 교육감, 대구시 교육위원회 교육위원
③ 정해욱(丁海郁) : 외무고시합격, 외무부 국장, 주피지 및 호주대사관 대사
④ 정해관(丁海寬) : 보건학박사, 성균관대 의대 교수
⑤ 정태훈(丁泰勳) : 의학박사, 경북대 의대 교수 및 부속병원 내과 과장
⑥ 정해주(丁海朱) : 국제로타리클럽 3700지구 총재, 대구시 중구 평통위원
⑦ 정종길(丁宗吉) : 법무부 이사관, 법무사
⑧ 정봉진(丁鳳鎭) : 서울 삼성생명 지점장, 서울 영동백화점 관리본부장
⑨ 정해창(丁海昌) : 공군대령
⑩ 정해원(丁海源) : 국회 건설위원회 입법심의관(이사관)
⑪ 정해균(丁海均) : 현대철탑 대표이사
⑫ 정재영(丁再榮) : 한의학 박사
⑬ 정해영(丁海永) : 쌍용시멘트 부산, 마산, 동해 공장장
⑭ 정해동(丁海東) : 대구 달구벌 로타리클럽 회장
⑮ 정상영(丁常榮) : 공학박사, 한국과학기술원 교수
⑯ 정해광(丁海光) : 고령군 새마을회장
⑰ 정해규(丁海圭) : 국제상선 1급 기관사
⑱ 정일영(丁一榮) : 변리사
⑲ 정승원(丁承元) : KT 기술부장
⑳ 정영준(丁永俊) : 삼성전자 연구소 부장

 

 

자료제공 : 나주정씨 초암공파 후손 정해경(丁海庚)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구독 후원 하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