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성산면) 곳곳에 숨어 있는 재미있는 지명은?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특집

우리마을(성산면) 곳곳에 숨어 있는 재미있는 지명은?

1. 득성리 가로변.JPG

득성리 가로변

 

2. 무계리.JPG

무계리

 

3. 사부1리.JPG

사부1리

 

박곡1리 마을회관.JPG

박곡1리

 

우리들의 선조들은 조상의 핏줄을 밝히고 보존하기 위해 족보를 만들고, 후손들은 족보에 대한 애착을 가지고 그것을 이어가고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살고 있는  고장의 구석구석 내력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고령군 8개 읍·면 각 마을의 유래와 재미있는 지명을 지난호에 이어 두 번째로 성산면을 소개한다.    〈편집자 주〉

 

△ 득성리(得成里)
⑴ 연혁(沿革)
성주군 소야면 지역으로 고종 광무 10년(1906년) 고령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득성동이라 불러 성산면에 편입되고 1988년 5월 1일 동이 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⑵ 지명 유래(地名 由來)
* 득성(得成) : 조선 인조 때 병자호란 직후 전라도 지방의 나(羅)씨가 이주해 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전하는데, 당시 사부 도요지, 기산 도요지에서 생산되는 도자기가 도진(陶津) 나루를 중심으로 타 지방으로 수출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자 마을 주민들이 많은 이득을 얻어 득성(得成)이라 했다.
⑶ 기타
* 고래절 : 득성 중앙에 있는 절
* 꼬-등 : 큰산텅에 있는 산
* 당산 : 득성 뒷산으로 산제당이 있다.
* 바르불-다리 : 득성 북쪽에 있는 다리
* 비슷-골 : 득성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사바우 만댕이 : 득성 동쪽에 있는 산으로 큰 바위가 벼락을 맞아 3개의 바위가 됐다.
* 산텅산 : 득성 서쪽에 있는 산
* 성산-장(득성장) : 득성에 있는 성산면의 장으로 옛날 무계에서 이곳으로 옮겨왔고, 지금은 없어졌다.
* 소공무지들 : 득성 남쪽에 있는 들
* 쌍새밋-들 : 득성 서쪽에 있는 들로서 쌍으로 된 샘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올치-골 : 득성 동쪽에 있는 골짜기
* 작은 산텅-골 : 산텅에 있는 골짜기
* 큰-산텅 : 산텅에 있는 큰 골짜기
△ 무계리(茂溪里)
⑴ 연혁(沿革)
본래 성주군 가현면 지역으로 조선시대 김천 도찰방(김천 도찰방)에 딸린 무계역이 있었으므로 역마, 또는 무계라 했는데, 고종 광무 10년(1906년) 고령군에 편입됐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 시  율리동에 병합하고 무계동이라 해서 성산면에 편입하고 1988년 5월 1일 동이 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⑵ 지명 유래(地名 由來)
* 무계(茂溪), 무계(舞鷄) : 조선 중엽 1670년 경 오씨(吳氏)와 김씨 등이 이 마을을 개척할 당시 어떤 도인이 지나다가 서남쪽으로 뻗은 세천(細川) 3개는 닭의 오른쪽 날개이며, 동남쪽으로 흐르는 작은 내는 왼쪽 날개며, 마을 뒤의 산은 닭의 몸통 같아 마치 닭이 춤추는 곳이라 해서 무계(舞鷄)라 했다. 그 후 손씨와 이씨가 들어와 성할 무(茂)자와 시내계(溪)자를 붙여 낙동강가에 번창하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 밤마을, 율리(栗里), 새터 : 무계 동쪽에 위치한 마을로서 여양 진(陳)씨가 이곳에 정착해 새로 형성된 마을이라 해서 새터라 하고 옛날 이곳에 많은 밤나무가 있어 밤마을 또는 율리라 했다.
⑶ 기타
* 모의제(慕義齊) : 조선 순조 때 함북 가산(嘉山) 군수 ‘정기(鄭耆)’의 묘제이다. 홍경래(洪景來)가 다복동(多福洞)을 중심으로 난을 일으켜 선천을 침범하니 군수 김익순(金益淳)이 항복하고 가산을 침범하니 가산 군수 정기는 홍경래에게 불의를 꾸짖고 끝까지 항전, 자신과 동생, 그리고 아들까지 순절하니 나라에서 병조판서 벼슬을 내리고 충열공(忠烈公) 시호를 내렸고, 정국풍(鄭國風)이 이곳 후산에 묘지를 정하고 모의제를 세웠다.
김익순 : 방란시인 김삿갓(김병연)의 조부
정기 : 한강 정구 선생의 후손
무계산성은 송암 김면 장군이 이곳에서 왜적과 싸워 크게 전승한 곳이다.
* 논공-들 : 농바우 아래 있는 들, 달성군 논공과 접해 부른 이름
* 농-바우 : 무계동 남서쪽에 있는 바위로 농(옷장)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
* 농바우-재 : 농바우가 있는 고개로 무계에서 박곡동으로 넘어가는 고개다.
* 무계앞들 : 무계 앞에 있는 들
* 무계역-터 : 무계에 있는 역 터인데, 조선시대 김천 도찰방에 딸린 역으로 성주 안언역과 고령 안림역에 연결됐다.
* 무계-장 : 무계 앞에 열린 장으로 득성으로 옮겨졌다.
* 새터-산 : 새터 뒤에 있는 산
* 이노재(履露齋) : 1902년 창건, 해주인 오수문(吳遂文)의 제자들이 선생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세운 재실.
* 햇골마을 : 무계 남서쪽에 있는 마을
* 햇골-들 : 햇골 앞에 있는 들
* 무계리 성지(茂溪里 城址) : 북쪽의 자연 절벽을 이용해 쌓은 토성으로 임란 시 의병(義兵)들이 축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주마대지(走馬臺址) 흔적이 남아 있다.
△ 박곡리(朴谷里)
⑴ 연혁(沿革)
성주군 가현면 지역, 고종 광무 10년(1906년) 고령군에 편입되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박곡동이라 해서 성산면에 편입, 1988년 5월 1일 동이 리로 바뀌었다.
⑵ 지명 유래(地名 由來)
* 박실, 박곡 : 병자호란 후 성주 지역에서 박씨들이 이곳에 와서 정착하자 박(朴)씨들이 산다고 박실(朴室) 또는 박씨골 박곡(朴谷)이라 했다.
* 원동(院洞), 원골 : 조선 중엽 성주 원이 이 지방을 순찰할 때 쉬어가던 원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다.
※ 임진왜란 때 덕곡면 본리 출신 박대복(朴大福)이 김면 장군에게 군량미 2천석을 희사해 김면 장군이 무계대첩에서 대승하게 되고, 나라에서 박공에게 녹봉으로 이 지방을 희사해 ‘박실’이 되고 김면 장군이 왜의 시체가 강을 막았다 해서 왜갈목(倭渴목)이라 했으며, 그곳에 박공 사적비가 있다. 
⑶ 기타
* 갯가울골 : 박실 북쪽에 있는 골짜기
* 농바우 만댕이 : 농바우가 있는 산
* 대 만댕이(대만당) : 원골 뒤에 있는 산
* 등장-골 : 박실 북쪽에 있는 골짜기
* 땅밋-등 : 대만당 앞에 있는 등성이
* 마웃-등 : 박실 북쪽에 있는 등성이
* 봉우-모퉁이들 : 적은 봉우 아래 있는 들
* 사들전들 : 대만당 아래에 있는 들
* 살전골 : 대만당 앞에 있는 들
* 섬등들 : 박실 북쪽에 있는 들
* 성때 만댕이 : 박실 동쪽에 있는 산
* 시집-것들 : 대만당 앞에 있는 골짜기
* 안-산 : 대만당 앞에 있는 산
* 앞둣-골 : 박실 서쪽에 있는 골짜기
* 여싯-골 : 박실 북쪽 골짜기로 여우기 있다고 붙여진 이름
* 왜관목(못) : 원골 남동쪽에 있는 못으로 임진왜란 때 왜병이 패한 곳이다.
* 음나무골 : 박실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나무가 많았다.
* 작은여싯골 : 여싯골에 있는 작은 골짜기
* 작은집불(골) : 대만당 아래 있는 골짜기
* 장둣곡들 : 박실 남쪽에 있는 들
* 작은 봉우 : 왜관목 남쪽에 있는 산으로 강정동 봉화산 북쪽의 작은 산
* 절대 평지 : 박실 북쪽에 있는 골짜기
* 집앞-들 : 원골 앞에 있는 들
* 큰대안-골 : 박실 북쪽에 있는 골짜기
* 큰만숫-골 : 박실 북쪽에 있는 골짜기
* 큰 여싯-골 : 여싯골에 있는 큰 골짜기
* 큰집-불 : 대만당 아래 있는 골짜기
* 박곡리 고분군(朴谷里 古墳群) : 가야시대 무덤으로 추측되며, 일정 때외 그 후에도 도굴돼 현재는 형태만 남아있다.
△ 사부리(沙鳧里)
⑴ 연혁(沿革)
고령군 구읍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도령동, 풍곡동, 신촌동을 병합하고 사부동이라 해서 성산면에 편입되고 1988년 5월 1일 동이 리로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⑵ 지명 유래(地名 由來)
* 사부골, 사기골, 사부동 : 1537년 경 성주이씨가 이 마을을 개척했다. 사기를 구워낸다고 사기골, 사부골, 사부동이라 했다.
* 도룡골, 도룡곡, 도옹곡(陶甕谷) : 1. 옛날 용이 다니던 골이라 해서 도룡골, 도룡곡이라고 했다고 함. 2. 옛날부터 이곳에는 도자기를 굽는 가마가 많아 옹기와 도자기를 구워냈다고 해서 도옹곡이라 했다.
* 싯질, 풍곡(楓谷) : 사부골 서남쪽 마을로 긴 돌이 많아 싯질이라 하고 산으로 둘러쌓여 단풍나무가 많아 풍곡이라 했다.
* 대밭마, 죽전촌(竹田村) : 사부골 남서쪽의 7가구가 사는 조그마한 마을로 대나무가 많아 대밭마 또는 죽전촌이라 했는데, 지금은 대나무가 없어졌다.
* 주막 : 사부골 남쪽 국도변에 있는 마을로 이 마을에 주막이 많았으므로 주막이라 불렀다. 지금은 주막은 없고 농업에 종사한다.
⑶ 기타
* 개매-들 : 사부골 동쪽에 있는 들
* 노적봉 : 도룡골 앞에 있는 산으로 노적가리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 멍덕골 : 사부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 베-나무 : 사부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 봉강재(鳳岡齋) : 성산면 사부리에 위치한 이진의(李震義, 호:봉강, 자:언동)을 위한 재실로서 공의 호를 따라 봉강정이라 칭한다.
* 부뜩-골 : 도룡골 뒤에 있는 골짜기
* 사부 도요지 : 사부동 99번지에 있는 도요 사적지로 이곳에서 도자기를 만들었다. 사적 71호이다.
* 섬박굼 : 사부골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사부도요지 자리이다.
* 신기실 : 사부골 서남쪽에 있는 골짜기
* 싸렉드 : 도룡골에 있는 등성이로 싸렉(싸라기)처럼 생긴 돌이 많았다.
* 진살미 ; 사부골 앞에 있는 들
* 참나무골 : 사부골 남쪽 골짜기로 참나무가 많다.
* 큰덕골굼들 : 사부골 서남쪽에 있는 들
* 풍곡산성(楓谷山城) : 서북쪽은 자연 절벽이고, 동남쪽에 토성을 쌓았다. 임란 시 의병들이 축성한 것이라 전하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다음호에 계속>
고령문화원 발행 고령문화 제7집 ‘高靈地方의 마을史’에서 발췌

구독 후원 하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