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한씨(淸州韓氏) 몽계공파(夢溪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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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청주한씨(淸州韓氏) 몽계공파(夢溪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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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고재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시조(始祖) 한란(韓蘭)


① 원류(原流)
《청주한씨세보》에 따르면 마한(馬韓) 9대 원왕(元王)의 세 아들 우평(友平), 우량(友諒), 우성(友誠)이 각각 태원 선우씨(太原 鮮于氏), 청주 한씨(淸州 韓氏), 행주 기씨(幸州 奇氏)가 되었고 기자(箕子)로부터 계출(系出)하였다고 하는 ‘기자후예설(箕子後裔說)’을 제기하였으나 선계(先系)를 고증(考證)할 수 없어 고려 개국공신 한란(韓蘭)을 시조로 삼는다.
② 시조(始祖) 한란(韓蘭)
공은 현재 충북 영동군 황간읍 난곡리(蘭谷里)에서 한지원(韓智原)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살다가 40세 무렵에 현재 청주시 상당구 방서동(方西洞)으로 이거하여 마을 언덕에 무농정(務農亭)을 짓고 방정리(方井里) 무농평(務農坪)의 농토를 개척한 곡식 수만석을 했다. 928년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정벌하기 위하여 청주를 지날 당시 가뭄으로 왕건의 군사와 군마 등이 모두 지쳐 어려움을 겪고 있자 왕건을 군례(軍禮)로 맞이하고 하루 동안 먹을 군량미를 제공했으며 선봉장(先鋒將)으로 종군(從軍)하여 삼한통합(三韓統合)에 큰 전공을 세워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이 되었으며, 벼슬은 삼중대광문하태위(三重大匡門下太尉)에 올랐고 시호는 위양(威襄)이다.
③ 분적(分籍) 및 합본(合本)
조종운(趙從耘)이 조선시대 성씨들을 종합하여 필사본(筆寫本)으로 정리한  씨족원류(氏族源流)에 의하면 “시조 한란(韓蘭)의 4세손으로 고려(高麗) 시대에 자첨사(子詹事), 검교예빈경(檢校禮賓卿)을 지내고 평산백(平山白)에 봉(封)해진 한후저(韓候抵)가 고려 때 평산한씨(平山韓氏)로 분적(分籍)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근래에 청주한씨(淸州韓氏) 몽계공파(夢溪公派)로 합본(合本)하였다.
(2) 청주한씨(淸州韓氏)는 고대(古代)로부터 삼한갑족(三韓甲族)이다.
① 우리나라 역사 전 시대에 걸쳐 학문 및 관위(官位)에서 드러난 조상을 둔 집안을 삼한갑족(三韓甲族), 또는 삼한벌족(三韓閥族)이라고 한다.
②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315명, 상신(相臣) 12명, 공신(功臣) 24명, 대제학 1명, 왕비 6명을 배출하였고, 한확(韓確)과 한명회(韓明澮)가 세조의 묘정(廟廷)에 배향되어 명문가로서 위상을 확고히 하였다.


(3) 분파(分派)
① 청주한씨(淸州韓氏)는 크게 충성공파(忠成公派), 이양공파(夷襄公派), 검교참판공파(檢校參判公派), 문양공파(文襄公派), 문정공파(文靖公派), 호조참판공파(戶曹參判公派), 양평공파(襄平公派), 찬성공파(贊成公派), 절제공파(節制公派), 안양공파(安襄公派), 첨지공파(僉知公派), 절도공파(節度公派), 이조정랑공파(吏曹正郞公派), 양이공파(襄夷公派), 판사공파(判事公派), 정당공파(政堂公派), 양혜공파(襄惠公派), 현령공파(縣令公派), 봉익공파(奉翊公派), 양절공파(襄節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 정랑공파(正郞公派), 세마공파(洗馬公派), 충정공파(忠靖公派), 정혜공파(正惠公派), 평장사공파(平章事公派), 전교공파(典校公派), 등제공파(登第公派), 직사관공파(直史館公派), 예빈윤공파(禮賓尹公派), 몽계공파(夢溪公派), 장열공파(莊烈公派), 문절공파(文節公派) 등 33개파로 분파되었다.
② 고령 세거 청주한씨(淸州韓氏)는 모두 몽계공파(夢溪公派) 후손들이다.


(4) 청주한씨(淸州韓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청주한씨(淸州韓氏)는 117가구 337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몽계공파(夢溪公派) 후손들은 쌍림면 하거리, 백산, 우곡면 대곡1리 한실마을 등에 세거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한련(韓璉)
 상서성(尙書省) 좌복야(左僕射) 평주(平儔)와 은청광록대부(銀靑光祿大夫) 상서성(尙書省) 좌복야(左僕射) 한림학사(翰林學士) 순목(淳牧)의 따님인 합천이씨(陜川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과 참의(參議)를 지냈다. 문장과 명성이 세상에 드러났다. 고려사에 “충렬왕 34년(1308년) 가을 7월 병인(丙寅) 왕이 위독해지자 예빈윤(禮賓尹) 한련(韓連)을 보내어 심양왕(瀋陽王)에게 알렸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예빈윤(禮賓尹)을 역임한 것으로 파악된다. 2017년 편찬된 청주한씨 대동보(정유보)에 의하면 “고령군 용담면 맥정촌(脉亭村)에 벽송정사(碧松亭舍)를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고 영남여지(嶺南輿地) 고령편(高靈篇) 인물조(人物條)에 “문과에 급제한 후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을 지내고 시거(始居)하였고 문장으로써 세상을 울렸으며 본현(本縣) 맥정촌(脉亭村)에 처음 살았으며 석사(石寺)에 강정(江亭)를 세웠고 용담평(龍潭坪)을 개척하였다(韓璉文科寶文閣直提學以文章鳴世始居本縣脉亭村作江亭于石寺開龍潭坪)”라고 기록되어 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② 한희적(韓希迪)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 연(璉)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현대부(中顯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를 거쳐 보문각(寶文閣)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청백리(淸白吏)이었다.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③ 한철충(韓哲冲)
자는 홍도(弘道)이고 호는 몽계(夢溪)이다. 중현대부(中顯大夫) 예의판서(禮儀判書) 희적(希迪)과 보문각(寶文閣) 제학(提學) 계령(桂齡)의 따님인 정경부인(貞敬夫人) 합천이씨(陜川李氏) 사이에서 충숙왕 8년(1321년) 태어났다. 충혜왕 복 2년(1341년) 생원시에서 장원으로 입격(入格)한 후 공민왕 2년(1353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양광도안렴사(楊廣道按廉使)‧전법판서(典法判書)를 역임하였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 길재(吉再), 목은(牧隱) 이색(李穡),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 운곡(耘谷) 원천석(元天錫) 등 명현들과 도의로 사귀었다. 고려조의 충신들과 함께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光德山)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은둔하다가 고려가 멸망한 후 경북 상주군의 백원산(白原山)으로 이주하여 은신(隱身)하다가 우곡면 도진리에 일시 은거(隱居)하였다. 태조가 아들인 렴(廉)에게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제수하고 조정에 나올 것을 권유하자 고령군과 합천군의 경계지점인 석절촌(石節村)으로 종적(蹤迹)을 감추었고 조선 정종 초에 합천군 용주면 손목리 즉 조동(釣洞)으로 행적을 감추고 망송재(望松齋)를 짓고 매일 고려의 수도인 송도(松都: 현 개성)를 바라보며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지키다가 일생을 마쳤다. 면암서원(冕巖書院)에 향사(享祀)되었다.
④ 한렴(韓廉)
호는 석촌(石村)이다. 전법판서(典法判書) 철충(哲沖)의 차남으로 고려 말에 태어났다. 고려 때 시랑(侍郞)의 벼슬에 올랐다. 태조(太祖)가 누차 불러 벼슬을 권하여도 응하지 않고 은신(隱身)하자 부모를 공양하라고 세종 때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제수(除授)하였는데 세칭(世稱) 청백리(淸白吏)로 불리었으며 초은 이인복(樵隱 李仁復)은 벼슬을 하라고 권유하는 뜻의 면부시(勉赴詩)로서 조정에 출사(出仕)할 것을 종용(慫慂 : 잘 설명하고 달래어 권함)하였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⑤ 한겸(韓兼)
전법판서(典法判書) 철충(哲沖)의 셋째 아들로 공민왕 14년(1365년) 태어났다.
태조 2년(1393년) 생원(生員)에 입격(入格)한 후 이어 문과에 급제하였다.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사간원(司諫院) 좌헌납(左獻納)이 되고 지제교(知製敎)에 이르렀다. 태종 14년(1414년) 졸(卒)하였다.


(2) 조선시대
① 한상공(韓尙恭)
상주목사(尙州牧使) 렴(廉)과 인천이씨(仁川李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온양군수(溫陽郡守)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② 한상량(韓尙良)
상주목사(尙州牧使) 렴(廉)과 인천이씨(仁川李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생원(生員)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③ 한상검(韓尙儉)
호는 시백(示百)이다. 상주목사(尙州牧使) 렴(廉)과 인천이씨(仁川李氏)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의령현감(宜寧縣監)을 지냈다. 향인(鄕人)들이 절의(節義)가 환히 밝았다고 칭송하였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④ 한수(韓壽)
자는 복우(福祐)이고 호는 청탄(淸灘)이다. 생원(生員) 상량(尙良)과 참의(參議) 천생(天生)의 따님인 흥양송씨(興陽宋氏) 사이에서 태종 9년(1409년) 장남으로 태어났다.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지내고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울렸다.
성종 23년(1492년) 졸(卒)하였다.
⑤ 한숭의(韓崇義)
자는 예지(禮知)이다. 예조좌랑(禮曹佐郞) 수(壽)와 참판(參判) 재성(在成)의 따님 초계정씨(草溪鄭氏) 사이에서 성종 6년(1475년) 태어났다. 글씨를 잘 써 명성이 세상에 드러났으며 무과에 급제한 후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별시위(別侍衛) 수의부위(修義副尉) 도사(都事)를 지냈다. 중종 34년(1539년) 졸(卒)하였다.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⑥ 한찬(韓璨)
증(贈) 병조참의(兵曹參議) 숭의(崇義)와 현감(縣監) 광우(光祐)의 따님 증(贈) 숙부인(淑夫人) 동래정씨(東萊鄭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한 후 우후(虞侯)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⑦ 한침(韓琛)
자는 영옥(永玉)이다. 증(贈) 병조참의(兵曹參議) 숭의(崇義)와 현감(縣監) 광우(光祐)의 따님 증(贈) 숙부인(淑夫人) 동래정씨(東萊鄭氏)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효행과 덕행이 있었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⑧ 한응린(韓應麟)
자는 이서(而瑞)이다.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 침(琛)과 참판(參判) 원조(元祖) 따님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훈련원(訓練院) 주부(主簿)를 지냈다.『송암선생실기(松菴先生實記)』에 수록된 ‘임란창의시동고록(壬亂倡義時同苦錄)’에 의하면 “의병도대장(義兵都大將) 송암(松菴) 김면(金沔) 휘하에서 위장(衛將)으로서 각종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다.” 공조참판(工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⑨ 한지(韓潪)
자는 중연(仲淵)이다. 첨지(僉知) 응기(應麒)와 판서(判書) 조위(曺瑋)의 따님 숙부인(淑夫人) 창녕조씨(昌寧曺氏) 사이에서 인조 14년(1636년) 태어났다. 통훈대부(通訓大夫) 강진현감(康津縣監)을 지냈다. 숙종 18년(1692년) 졸(卒)하였다.
⑩ 한여임(韓汝恁)
자는 사숙(士淑)이고 호는 죽오(竹塢)이다. 통훈대부(通訓大夫) 강진현감(康津縣監) 지(潪)의 아들로 현종 4년(1663년) 태어났다. 성품과 기상(氣像)이 자애(慈愛)하고 어질어 내면이 살찌고 겉으로는 공손하며 효도와 우애가 지극히 순수하니 향리(鄕里)가 모두 복종하였다. 졸년(卒年)은 미상(未詳)이다.
⑪ 한형(韓熒)
자는 명원(明源)이며 호는 매오(梅塢)이다. 처사(處士) 여임(汝恁)과 유장(有章)의 따님 고령김씨(高靈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임천(林泉)에서 행실을 닦았으며 어짐을 좋아하고 덕을 베푸니(施仁布德) 유림에서 높이 받들어 우러러 보았다. 졸년(卒年)은 미상(未詳)이다.
⑫ 한경(韓經)
자는 사대(士大)이며 호는 운고(雲皐)이다. 처사(處士) 대일(大逸)의 셋째 아들로 숙종 42년(1716년) 태어났다. 공이 과거시험을 단념하고 성리지학(性理之學)에 전념하며 두문불출(杜門不出)하였다. 성리(性理)공부를 하면서 성현(聖賢)을 추모하니 사람들이 현인(賢人)으로 추앙(推仰)하였다. 정조 1년(1777년) 졸(卒)하였다.
⑬ 한중섭(韓重攝)
자는 화백(和伯)이고 호는 학남(鶴南)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 회(繪)와 이남(以南)의 따님 숙부인(淑夫人) 김해백씨(金海白氏) 사이에서 영조 11년(1735년) 태어났다. 문장이 아름답고 덕행(德行)이 뛰어나  사람들이 우러러 보았다. 순조 24년(1824년) 졸(卒)하였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영남여지(嶺南輿地)』고령편을 참고하면 보문각(寶文閣)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한련(韓璉)이 고령군 쌍림면 맥정촌(脉亭村)에 시거(始居)하면서 용담평(龍潭坪)을 개척하였으며 두문동(杜門洞) 72현(七十二賢) 중의 한 분인 몽계공(夢溪公) 한철충(韓哲沖)이 고령 석절촌(石節村)에 우거(寓居)한 사실을 비추어 볼 때 한련(韓璉)이 1350년경에 개성에서 고령으로 입향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 상주목사(尙州牧使) 렴(廉)의 장손 흠(欽)은 1400년대 초반 합천군 가야면 사촌(簑村)1리로 이거(移居)하였고 차남(次男) 상량(尙良) 후손은 쌍림면 백산, 하거2리에 세거 정착하였으며 삼남(三男) 상검(尙儉) 후손은 1400년대 초반 의령으로 이거(移居)하였다.
(3)『고령향교지(高靈鄕校誌 : 2002년)』집성촌편(集姓村編)에 의하면 의령에서 각각 1669년경 참봉(參奉) 여해(汝諧)가 우곡면 야정2리 아곡(阿谷)으로, 운고(雲皐) 한경(韓經)이 1745년경 고령군 우곡면 대곡1리로 환거(還去)∙정착(定着)하여 세거(世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4. 근∙현대 인물
① 한승세 : 의학박사, 영남대학교 흉부외과 과장
② 한삼화 : ㈜삼한C1 대표이사
③ 한창호 : 소아과 의사
④ 한형철 : 미국 콜롬비아대학교 교수
⑤ 한도현 : 정형외과 의사
⑥ 한정숙 : 미국 워싱턴주립 대학교 신경과 간호과장
⑦ 한시학 : 우곡우체국장, 우곡면 노인회 회장
⑧ 한영호 : 서울 원효사 주지
⑨ 한동호 : 치과의사
⑩ 한열찬 : 고령군의회 부의장
⑪ 한상수 : 이화벽돌(주)
⑫ 한중석 : 고령군 문화유산추진단장, 운수면장
⑬ 한석동 : 우곡우체국장

 

 

자료제공 : 후손 한석동(韓錫東)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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