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조씨(咸安趙氏) 참판공파(參判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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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함안조씨(咸安趙氏) 참판공파(參判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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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암재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시조(始祖)
기미보(己未譜 : 1979年)에 함안조씨(咸安趙氏)의 시조는 정(鼎)이요. 자(字)는 우보(禹寶) 호(號)는 모당(慕唐) 시호(諡號)는 충장(忠壯)으로 중국(中國) 후당인(後唐人)으로 신라(新羅) 말(末)에 동생 부(釜)와 당(鐺)을 데리고 절강(浙江)사람 장길(張吉)과 함께 귀화(歸化)하여 고려개국벽상일등공신(高麗開國壁上一等功臣) 신숭겸(申崇謙), 배현경(裵玄慶), 복지겸(卜智謙), 김선평(金宣平), 권행(權幸)등과 교의(交誼)가 두터웠고. 왕건(王建)을 도와 합주(陜州 : 지금 합천)에서 기의(起義)하여 태조(太祖) 14년 고창성(古昌城 : 지금의 安東)에서 견훤(甄萱)을 대파(大破)하고 동경주현(東京州縣) 대부분(大部分)을 항복(降伏)받아 고려 통일(統一)에 공(功)을 세워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 대장군(大將軍) 원윤(元尹)이 되었다. 후손(後孫)들은 그를 시조(始祖)로 삼고 함안(咸安)에 세거(世居)하여 본관(本貫)을 함안(咸安)으로 하였으며 안동의 칠현사(七賢祠)와 대구광역시 동구 지묘동에 소재한 동수(桐藪)의 충열사(忠烈祠)에 제향(祭享)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2) 두문동72현(杜門洞七十二賢)과 생육신(生六臣)을 배출한 충절(忠節)의 가문
① 조선의 개창(開創)에 반대해 두문동(杜門洞)에서 끝까지 고려에 충성을 바치며 지조를 지킨 두문동72현(杜門洞七十二賢) 중 고죽재(孤竹齋) 조안경(趙安卿)과 문경공(文敬公) 조승숙(趙承肅)을 배출하였다.
②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죽은 사육신(死六臣)의 대비하여 목숨을 잃지 않고 살았지만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던 사람인 김시습(金時習)·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조려(趙旅)·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를 생육신(生六臣)이라 한다. 어계(漁溪) 조려(趙旅)는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이에 항거하여 벼슬을 단념하고 함안에 돌아가 백이산(伯夷山) 아래에서 독서와 낚시로 세월을 보냈다.
(3) 분파(分派)
① 통판공파(通判公派), 충순공파(忠順公派), 사인공파(舍人公派), 고죽재공파(孤竹齋公派), 산원공파(散員公派), 참지공파(參知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어모공파(禦侮公派), 집의공파(執義公派), 판결사공파(判決事公派), 사과공파(司果公派), 우후공파(虞侯公派), 내헌공파(耐軒公派), 남계공파(南溪公派), 절도공파(節度公派), 현감공파(縣監公派), 참봉공파(參奉公派), 소윤공파(少尹公派), 제학공파(提學公派), 덕곡공파(德谷公派), 전서공파(典書公派), 등 21개 원파(原派)로 나뉘어졌다.
② 고령 세거 함안조씨(咸安趙氏)는 모두 생육신 조려(趙旅)의 손자대에서 참판공파(參判公派), 판결사공파(判決事公派), 남계공파(南溪公派)로 분파되었다.
(4) 함안조씨(咸安趙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함안조씨(咸安趙氏)는 196가구 529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참판공파(參判公派) 후손은 기족리(지경), 성산면 사부2리(풍곡), 무계리, 대가야읍 내곡2리(선양동), 우곡면 연리, 덕곡면 만하동 등에, 판결사공파(判決事公派) 후손은 성산면 오곡리, 남계공파(南溪公派) 중 감찰공파(監察公派) 후손은 개진면 양전2리(내동) 등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조희(趙禧)
광정대부(匡靖大夫) 정당문학(政堂文學) 열(烈)의 아들로 태어나 밀직사(密直司) 삼사좌윤(三司左尹)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② 조열(趙悅)
호(號)는 금은(琴隱)이다.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 천계(天啓)와 사헌(司憲) 규정군(糾正君) 석(碩) 사이에서 고려 말(高麗末)에 태어났다. 관직(官職)이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올랐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는 세종(世宗) 3년(1421년) 졸(卒)한 것으로 기록(記錄)되어 있다.
③ 조안경(趙安卿)
자(字)는 경밀(景謐)이며 호는 천산(泉山) 또는 고죽재(孤竹齋)이다. 감찰공 인계(仁啓)의 아들이다. 문충공 이인복(李仁復)의 문하에서 공부하여 고려 충정왕 3년(1351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호조전서(戶曹典書)에 이르렀다. 공민왕 때 신돈(辛旽)에 의해 파직되어 귀양을 갔다가 신돈이 죽은 후에 풀려났다.  조선의 태조가 공양왕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니 공은 부조현(不朝峴)에 올라서 비탄의 눈물을 흘리며 벼슬을 버리고 두문동에 숨어 조선 태조가 구관직(舊官職)으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해주의 수양산(首陽山) 동쪽 천산(泉山)에 숨어 평생 다시 세상에 나아가지 않았다. ‘두문동(杜門洞) 72현’ 중의 한 분으로 표절사(表節祠)와 두문동서원에 제향(祭享)되었다.
④ 조승숙(趙承肅)
자는 경부(敬夫)이고 호는 덕곡(德谷)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영돈정(領敦正) 경(璥)과 죽당(竹堂) 정복주(鄭復周)의 따님인 하동정씨(河東鄭氏) 사이에서 공민왕 6년(1357년) 태어났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우왕 3년(1377년) 문과에 급제, 특별히 저작랑(著作郎)에 제수되어 충하사(充賀使)로 원나라에 갔다가 그 곳 임금으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받고 귀국하였다. 공양왕 3년(1391년) 봉정대부(奉正大夫)•부여감무(扶餘監務)를 역임하다가 이듬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갔으며 수차례 벼슬길에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교수정(敎授亭)을 지어 두문불출하면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두문동72현(杜門洞七十二賢) 중의 한 사람이며 태종 17년(1417년) 졸(卒)하였다. 조선 숙종 때 개성 두문동서원(杜門洞書院)과 함양의 도곡서원(道谷書院)에 봉향되었다.
⑤ 조이(趙彛)
초명(初名)은 조인여(趙藺如)이다. 공조전서(工曹典書) 열(悅)과 곤양전씨(昆陽田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중이 되었다가 환속(還俗)한 뒤에 과거 공부를 해서 진사(進士)에 합격하였다. 뒤에 원(元)으로 들어가 여러 나라 말을 해득하여 수재(秀才)라 일컬어졌다. 원나라에 가서 원나라의 황제가 거처하는 곳에 출입하면서 일본을 회유하는 데 고려를 앞세울 것을 종용하였다. 그리하여 원종 7년(1266년) 원나라는 국신사(國信使) 흑적(黑的)·은홍(殷弘) 등을 파견하였으며, 고려에서는 송군비(宋君斐)에게 이들을 향도(嚮導)하도록 하였다. 흑적 등이 거제도까지 갔다가 풍랑을 빙자하여 되돌아오는 것으로 끝났다. 신호위(神號衛) 정용산원(精勇散員)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2) 조선시대
① 조려(趙旅)
자는 주옹(主翁)이고 호는 어계(漁溪)이며 시호는 정절(貞節)이다. 증(贈) 사복시정(司僕寺正) 안(安)과 재신(宰臣) 역(懌)의 따님 성산이씨(星山李氏) 사이에서 세종 2년(1420년) 태어났다. 단종 1년(1453년) 성균관(成均館) 진사(進士)가 되고 명망이 높았으나, 단종 3년(1455년) 세조에게 선위(禪位)하자 성균관에 있다가 명륜당(明倫堂)에 올라 여러 유생과 작별하고 낙향(落鄕)하여 함안으로 돌아와서 백이산(伯夷山) 아래에 은거하고 종신토록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다만 시냇가에서 낚시질로 여생을 보냈기 때문에 스스로 어계(漁溪)라 자호(自號)하고 성종 20년(1489년) 졸(卒)하였다. 손자 순(舜)이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올라 귀(貴)하게 되어 도승지(都承旨)에 증직되었고 숙종 24년(1698년) 단종의 왕위가 복위되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追贈)되고, 정조 때에는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 숙종 29년(1703년) 포증(褒贈)되고, 그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웠으며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문집에『어계집(漁溪集)』이 있다.
② 조동호(趙銅虎)
자는 정부(貞符)이고 초휘(初諱)는 동호(洞虎)이다. 증(贈) 이조판서(吏曹判書) 려(旅)와 현령(縣令) 운(運)의 따님 증(贈) 정부인(貞夫人) 흥양이씨(興陽李氏) 사이에서 세종 23년(1441년) 태어났다. 예종 1년(1469년)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성종 7년(1476년) 호분위(虎賁衛) 부장(部長)을 거쳐 사옹원(司饔院) 주부(主簿)·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청하현감(淸河縣監)·영덕현령(盈德縣令)·진산군수(珍山郡守)·사옹원(司饔院)판관(判官)·사온서(司醞署) 영(令) 등을 역임하였다. 중종 12년(1517년) 졸(卒)하였다.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③ 조순(趙舜)
자는 요경(堯卿)이고 호는 옥봉(玉峰)이다. 진산군수(珍山郡守) 동호(銅虎)와 감찰(監察) 증(增)의 따님 증(贈) 정부인(貞夫人) 고성이씨(固城李氏) 사이에서 세조 11년(1465년) 태어났다. 성종 17년(1486년) 진사•생원 양시(兩試)에 입격(入格)한 후 성종 23년(1492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연산군 3년(1497년)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으로 영의정(領議政) 노사신(盧思愼)을 논박(論駁)하다가 파직(罷職)되었으나 중종 2년(1507년) 어사(御使)로 복직(復職)되어 그후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시독관(試讀官)·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집의(執義)을 역임하였다. 중종 6년(1511년) 홍문관(弘文館) 직제학(直提學)·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중종 8년(1513년) 호조참의(戶曹參議)·충청도병마절도사(忠淸道兵馬節度使)를 지냈다. 중종 10년(1515년)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 중종 17년(1522년)도승지(都承旨)가 되고 중종 18년(1523년) 예조참판(禮曹參判)·동지의금부사(兼同知義禁府事)·이조참판(吏曹參判) 등을 역임한 후 경기 관찰사(京畿觀察使)·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를 지냈다. 중종 22년(1527년) 졸(卒)하였다.
④ 조감(趙堪)
자는 극기(克己)이고 호는 옥천(玉泉)‧옥천(玉川)이다. 목릉전참봉(穆陵殿參奉) 정견(庭堅)과 취홍(就洪)의 따님 진주하씨(晋州河氏) 사이에서 중종 25년(1530년) 태어났다. 장인 휴암(休庵) 백인걸(白仁傑)의 문인이다. 벼슬은 음사(蔭仕)로 장수찰방(長水察訪)에 보직(補職)되었다가, 선조 9년(1570년) 진사(進士)에 입격(入格)한 후 사포서별좌(司圃署別坐)가 되고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옮겼다가 평시서(平市署) 직장(直長)이 되고, 선조 18년(1585년) 종부시(宗簿寺) 주부(主簿)를 거쳐 이듬 해 선조 19년(1586년) 졸(卒)하였다. 통훈대부(通訓大夫)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에 증직(贈職)되었다. 파주 용주서원(龍洲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⑤ 조의도(趙毅道)
자는 강백(剛伯)이고 종부시(宗簿寺) 주부(主簿) 감(堪)과 우참찬(右參贊) 충숙공(忠肅公) 휴암(休庵) 인걸(仁傑) 사이에서 명종 3년(1548년)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임시조정에서 병조(兵曹)에 속하여 장막(帳幕)을 치는 따위의 일을 맡아보던 관아인 전설사(典設司) 별제(別提)로 있다가 예빈시(禮賓寺) 직장(直長)·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을 거쳐 첨정(僉正)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전공으로
선조 38년(1605년) 선무원종2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선조 34년(1601년) 졸(卒)하였다. 호조참판(戶曹參判) 겸(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摠管)에 증직(贈職)되었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처사(處士) 기(機)가 1670년경 파주에서 성산면 기족리 지경(地境)에 입향하였으며 장손 중호(重皥) 계열은 그곳에서 정착세거(定着世居)하였고 차손 중건(重建)의 아들 세진(稅鎭)은 성산면 기족리 지경에서 성산면 사부2리 풍곡(楓谷)으로 이거(移居)하여 장손(長孫)계열만 정착세거하였고 지손(支孫)계열은 우곡면 연리로, 개진면 양전2리 내동을 거쳐 덕곡면 만하동에 정착세거한 것으로 파악된다.
(2) 처사(處士) 중후(重後)가 1700년대 중반 청도 이서에서 처음 대가야읍 수곡(현재 내곡 3리 시실)으로 입향하였다가 고개 넘어 내곡2리 선양동(善良洞)으로 이거(移居)•정착세거 한 것으로 추정된다.
(3) 처사(處士) 성덕(性德)이 1700년대 중반에 청도에서 개진면 양전 2리 내동으로 이거(移居)•정착세거 한 것으로 추정된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조태진(趙泰鎭)
 자는 덕곡(德谷)이며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를 지낸 중호(重皥)와 지영(枝榮)의 따님 정부인(貞夫人) 성산이씨(星山李氏) 사이에서 영조 28년(1752년) 태어났다. 송라찰방(松羅察訪)을 지냈다. 정조 24년(1800년) 졸(卒)하였다.
② 조찬규(趙燦奎)
자는 명여(明汝)이며 증(贈) 한성부(漢城府) 좌윤(左尹) 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總管) 성완(性完)과 지망(之望)의 따님 증(贈) 정부인(貞夫人) 성주여씨(星州呂氏) 사이에서 순조 18년(1818년) 태어났다.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兼) 경복궁(景福宮) 위장(衛將)을 증직(贈職)받았다. 고종 25년(1888년) 졸(卒)하였다.
③ 조용목(趙鏞穆)
 자는 치성(致聲)이고 호는 납포(納圃)이다. 증(贈)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겸(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민규(敏奎)와 능곤(能坤)의 따님 증(贈) 정부인(貞夫人) 김해김씨(金海金氏) 사이에서 헌종 5년(1839년) 태어났다. 고종 22년(1885년) 무과에 급제한 후 고종 27년(1890년)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고종 30년(1893년)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겸(兼)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1908년 졸(卒)하였다.
(2) 근∙현대 인물
① 조재영(趙在榮) : 농협중앙회 경북지회 부지부장
② 조수현(趙秀賢) : 서울서부지방법원 수석부장판사, 변호사
③ 조재구(趙在九) : 대구광역시의원 건설교통위원장, 대구광역시 남구청장
④ 조인수(趙寅洙) : 문학박사, 대구대 교수
⑤ 조영흠(趙永欽) : 공학박사, 영남대 교수
⑥ 조재호(趙宰澔) : 사시합격, 변호사
⑦ 조재미(趙在美) : 환경부 사무관
⑧ 조현열(趙顯烈) : 연세정형외과 원장
⑨ 조기태(趙基泰) : 한국양봉협회장
⑩ 조준형(趙畯亨) : 셀트리온제약 총괄본부장
⑪ 조재화(趙在和) : 부산은행 지점장
 
 
자료제공 : 후손 조재태(趙在泰)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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