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선비의 일본 견문록, 기행문학 신유한 ‘해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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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조선선비의 일본 견문록, 기행문학 신유한 ‘해유록’

인물평전<신유한의 해유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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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 행렬도

 

<지난호에 이어>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은 경상남도 밀양에서 태어나 34세에 고령 양전리로 이거했다. 25세에 진사시에 합격, 성균관에 들어가 그 문장이 널리 알려졌다. 37세에 제술관으로 발탁돼 일본을 다녀와서 조선 지식인이 목도한 일본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 견문록이 해유록(海遊錄)이다.
이후 성균관 전적, 무장현감, 평해군수, 연천군수, 연일현감 등 환로에 있다가 69세 때 관직을 그만두고 고령으로 돌아왔다. 벼슬살이 때문에 그가 실제 고령에 거주한 햇수는 수년에 불과하지만 고령을 마음의 고향으로 여긴 것 같다. 70세에 경운재(景雲齋)를 짓고 가야초수(伽倻樵叟)로 자호하며 후학들을 강학했다.
신유한(이하 청천)은 이곳 경운재를 안식처로 삼아 경학약설(經學略設), 역리조해(易理粗解), 시서정종후제(詩書正宗後題), 문장곤월(文章袞鉞), 서둔록(筮遯錄)과 공진록(拱辰錄)을 저술했다. 72세에 경운재에서 타계했다.
판사공파(평산신씨 영해파)는 고려 충신 신숭겸의 후손으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할 때 판사공파조 신득청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동해바다에 투신했다.
이후 후손들은 고려 구신척결의 난을 피해 관향을 평산에서 영해(寧海)로 바꿔 난을 피하게 됐으며, 이후 다시 원적을 영해에서 평산(平山)으로 돌아왔다.
청천의 무덤은 고령군 쌍림면 신곡리 좌랑봉에 있으며, 덕곡면 원송리에 직계 후손(종손 신병열)이 살고 있다.
청천은 일본 견문록인 해유록 뿐만 아니라 그의 시세계를 보면, 여성정감을 진솔하게 드러낸 작품이 특히 많아 소개하고자 한다.

▣ 여성 정감의 표출
청천의 시세계를 작품에 드러난 내면의식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자.
청천의 시에는 여러 정감이 나타나지만 그 중에서 여성정감을 진솔하게 드러낸 작품이 도드라져 있다.

양시석호단(良時惜楛短) 좋은 때 너무 짧아 안타까운데
명월상동영(明月上東嶺) 밝은 달은 동산 위로 떠오르네.
영영입유방(盈盈入幽房) 달빛은 가득히 빈 방에 스며들어
조아의병영(照我衣屛泠) 옷과 병풍에 차갑게 비치네.
람지불성국(攬之不成掬)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고 
요래유여영(遶來有餘影) 아득히 그림자만 어른거리네.
가인재만리(佳人在萬里) 고운님은 만리나 먼 곳에 있어
채난심경경(采蘭心耿耿) 난초 따며 마음만 괴롭네
난화범징소(蘭華泛澄沼) 난초꽃은 맑은 연못 위에 떨어지고
노채수금정(露彩垂金井) 이슬은 가을 우물가에 떨어지네.
번회여수양(繁懷與誰亮) 번거로운 이내 심정 누가 풀어주리
하한무정경(河漢無停景) 하수와 한수는 멈추지 않네.
욕기상사음(欲奇相思音) 그리운 소식 전하려 해도
산천유차영(山川悠且永) 산천은 아득하고 멀기만 하네.
신조명하비(晨鳥鳴何悲) 새벽 새소리 얼마나 구슬픈지
고면방침영(顧眄方沉咏) 돌아보며 가만히 시를 읊조리네.

이 시는 ‘情詩二首’ 가운데 첫째 수이다. 서정적 자아는 여성으로 설정돼 있다. 시인은 여성의 정감을 여성의 입장에 서서 진솔하게 표출하고 있다. 이 여성의 님은  지금 이 곳에 없다. 만리나 떨어져 있다. 달빛은 님의 부재에 따른 그리움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 달빛을 님처럼 생각해 잡으려 하지만 그것마저도 뜻대로 되지 않는다. 님이 있는 곳은 산천이 가로막혀 그리운 소식마저 전할 수 없는 곳이다. 가을에 더욱 그리워지는 님 생각에 새벽까지 오매불망하다가 갑자기 듣게 되는 새소리, 이 소리에 여인의 심정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이제 이 여인은 그리움을 가만히 시로 읊조리는 수밖에 달리 할 일이 없었을 것이다. 님과 떨어져 있는 여성의 그리움을 진솔하게 표출한 서정시라 할 수 있다. 이런 감정은 ‘采蓮詞三首’에서도 거듭 나타난다.
청천은 이런 여성의 정감을 표출하는데 기녀를 서정적 자아로 적극 활용하기도 했다. 기녀를 성적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정신적 교감을 나누는 인격체로 대하면서 그들의 여성정감을 실감나게 그려내고 있다. ‘情詩二十韻書贈月中花’와 ‘贈梅妓’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 불우에 따른 울분과 관직에 대한 열망
청천의 조부(祖父), 백부(伯父), 생부(生父)는 밀성삼가(密城三家)라 불리워졌다.이런 문한가에서 태어난 청천 역시 문인으로 마땅히 높았다. 특히 32세에 지은 「제촉석루(題矗石樓)」는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다.
청천은 24세에 향시에 합격하고 25세에 진사시에 급제했다. 진사시에서 지은 ‘秋篁對’는 최창대에 의해 초사(楚辭)와 나란히 할 만하다고 극찬을 받았다.
26세에 성균관에 유학하자 서울의 선비들이 그의 문장과 덕행에 매료돼 교분을 맺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구차하게 굽히거나 영합하지 않아 훈척들의 미움을 받았다. 27세에 문과 별시에 응시했지만 급제하지 못했다. 33세에 비로소 증광 갑과에 급제했는데, 민진후(閔鎭厚)에 의해 ‘間世의 英才’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지만 곧바로 관직에 임용되지 못했다. 이렇게 된 표면적인 이유는 한미한 출신 성분이 결정적 동인으로 작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추풍권객파배회(秋風倦客罷徘徊) 지친 나그네 가을바람 맞으며 서성이다가
극목동남기색래(極目東南氣色來) 동남쪽 끝까지 바라보니 기색이 엄습하네
팔월한침당락엽(八月寒砧當落葉) 팔월의 다듬이 소리 낙엽에 올리고
삼경화각만등대(三更畫角滿登臺) 삼경의 화각소리 등잔에 가득하네
창강적우교룡노(滄江積雨蛟龍怒) 푸른 강 쏟아진 비에 교룡은 노하고
고목번상조작애(古木繁霜鳥雀哀) 고목에 쌓인 서리에 새들이 애처롭네
명발여군가복력(明發與君家伏櫪) 새벽에 그대와 불우함을 노래 부르면
공령퇴쇄안전배(恐令퇴碎眼前盃) 눈앞에 술잔 부술까 두렵네

위의 시는 청천이 서울에 올라와 이세경(李世擎)과 함께 유숙하면서 서로 창수한 작품이다. ‘意難平’은 불평을 말한 것이다. 청운의 뜻이 이뤄지지 못한 데서 오는 불평이다. 청운의 뜻은 관직에 진출해 자신의 경륜을 펼쳐보는 것이다.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붓을 휘두르고 칼을 쳐보자만 세월만 하염없이 흘러가고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시인은 여기서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선비를 부르는 이 서울에서 그 뜻을 한껏 펼쳐보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평원군(平原君)과 같은 선비를 알아주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嬴得’은 이런 평원군 같은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신의 뜻을 펼치기에 용이함을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 그는 다른 작품에서도 이와 같은 인물을 제시한바 있다. ‘野城作客牢愁鬱結自敍平生六十韻’에서의 漢武帝, ‘行至成歡驛奉和舅氏’ 에서의 연나라 昭王이 바로 그들이다. 한무제는 司馬相如를 발탁했으며 연나라 소왕은 대를 쌓아놓고 어진 선비를 초청했다.

위의 시에는 현실은 각박하지만 희망을 가지고 자신의 뜻을 반드시 성취하겠다는 시인의 강열한 의지가 잘 드러나 있다. 그렇지만 이런 강열한 의지가 현실적 성과를 담보해주지는 못했다. 특히 현주를 만나 자신의 뜻을 펼치는 일은 자신의 의지대로 될 수 있는 성격의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신분적 문제는 더욱 그러했다. 이런 상황에서 청천의 심사는 날이 갈수록 더욱 울울해졌다.
갑오년(1714년) 겨울 11월에 나는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돌아가려 했다. 전대의 돈은 다하고 말은 누렇게 됐다. 해진 도포를 입고 처량하게 눈과 서리 내리는 속으로 향했다.…… 내가 산남에 도착해보니 집은 네 벽만 있었다.…… 형제와 처자는 굶주린 빛이 서글피 있고 고향 사람으로 먼 사람은 입으로, 가까운 사람은 눈으로 서로 물리치며 비웃기를 쉬지 않았다. 이에 더욱 억울해 편안치 않아 모습은 날마다 더욱 말라가고 정신은 날마다 더욱 낙담해 이미 아울러 문한을 끊고 지쳐서 처음 함께 노닐던 것을 잊어갔다.

위의 글에는 34세 때 청천이 처한 상황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다. 연보에 의하면 이 해 여름에 청천이 서울에 올라갔다가 겨울에 돌아온 것으로 돼 있다. 33세에 증광시(增廣試)에 합격했지만 관직에 등용되지 않자 마냥 기다릴 수 없어 서울로 올라가 환로(宦路)를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희미한 출신성분 때문에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낙향했다. 고령 집으로 돌아와 보니 집안의 경제적 궁핍은 극심했다. 여기에다 자신에 대한 주변의 비난은 더욱 가중됐다. 이에 따른 울울한 심사로 결국 그의 심신은 피폐의 극점으로 치달았고 마침내 문한(文翰)을 끊어버리기에 이르렀다. 자신의 존재의의로까지 여기며 자부하던 문한마저 끊고 청운의 초지를 잊어버린 데서 그의 좌절감의 깊이를 가늠해볼 수 있다. 문한을 끊었다는 언표는 수사적 의미에 가깝다.
회재불우(懷才不遇)에 따른 울분을 역설적으로 토로한 것이다. 오히려 청천은 자신의 회재불우를 봉황, 용 혹은 거문고, 칼이라는 객관적 상관물에 비유해 적극적으로 형상화했다.
그런데 작품 활동을 통해 자신의 문학적 재능을 드러내는 것이 개인적인 위안이 될 수는 있었지만, 불우함 자체를 해결할 수는 없었다. 불우함은 보다 근원적이고 구조적인 사회문제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그는 진지한 자세로 인식의 전환을 모색했다. 아래의 詩를 보자.

정수공명회(靜數功名會) 공명의 이루어짐을 고요히 헤아려보고
명사부태인(冥思否泰因) 성쇠의 원인을 고요히 생각해보겠네.
-중략-
각수기분정(各隨其分定) 각각 분수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니
영이소능윤(寧以所能掄) 어찌 그 능력으로 택할 수 있으랴

위는 ‘野城作客牢愁鬱結自敍平生六十韻’ 가운데 몇 구를 적출한 것이다. 공명과 성쇠는 분수에 달려 있을 뿐 개인의 능력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관직도 마찬가지로 신분에 따라 정해져 있는 것이니 개인의 능력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파악한 것이다. 정해진 분수를 따르는 언명은 구사(求仕)라는 행위를 그만둔다는 뜻이다. 관직은 능력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라면 노력으로는 더욱 구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환로진출을 명에 따르겠다는 것이다. 관직에 대한 열망이 좌절을 거쳐 순명(順命)으로 변전한 것이다. 청천이 마지막으로 택한 순명은 열망과 좌절의 변증법적 기제에서 산출된 것이다. 그러나 순명은 수동적으로 받아드리는 운명과는 그 성격을 달리한다. 곧 주체의 의지가 일정하게 반영된 능동적인 행위라 할 수 있다.
훈척들이 그의 한미한 가문을 거론하면서 이의를 제기하긴 했지만 드디어 그는 37세에 비서저작랑(秘書著作郞)에 제수됐다. 역설적이게도 포기하고 체념한 뒤 오히려 환로가 열린 것이다.

▣ 백성에 대한 애정
청천은 37세에 환로에 진출한 후 30여 년간 관직에 있으면서 무장현감, 평해군수, 연천군수, 연일현감 등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했다. 평소 애민의식을 지니고 있었기에 목민관으로서 선정을 펼치고자 했다. 부임한 고을마다 선정을 베풀었으며, 특히 평해군수 재임 때는 선치(善治)가 인정돼 재임기간이 연장되기도 했다. 이런 목민관의 경험을 바탕으로 민생의 현장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었다.
백성들은 띠풀을 엮어 거주하면서 화전을 일구는데 토질이 좋지 않아 습하다. 한 번 경작하고 한 번 쉬어야 하는데 그 심는 것은 조, 콩, 팥, 보리이며, 힘들여 경작해도 세금을 내지 못한다. 시장에는 명주, 모시, 생선, 고기 같은 것이 없다. 백성들은 거친 삼베옷을 입고 먹는 것은 푸성귀와 소금이니 정진 수행하는 수도승 같다.
집에는 과실수가 없으며, 사람들은 복숭아와 자두를 모른다. 봄에는 참마와 감자를, 여름에는 산딸기를 먹으며, 가을에는 도토리를 먹는다. 산을 파내고 우물을 만들어 그 물을 마시니 그 샘물은 깨끗하게 해도 앙금이 있어 병들어 기침을 하면 피 섞인 가래가 나온다.
위는 ‘신이연천현기(新莅連川縣記)’의 일부분으로 청천이 연천현감으로 재직(1739-1743)할 때 지은 기문이다. 연천현 백성들의 비참한 의식주의 실상이 생생하게 드러나 있다. 특히, 열악한 백성들의 식생활이 특기돼 있다. 절대적 궁핍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참상이 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다. 청천은 이 글에서 백성들의 삶을 이런 절대적 궁핍으로 몰고 간 주요한 원인으로 중국 사신에게 드는 비용을 백성들에게 징수한 데서 찾고 있다. 세금의 부당한 징수를 민생 파탄의 근본원인으로 지적한 것이다.
물론 민생의 파탄은 불가항력적인 자연재해 때문에 일어나기도 했다. 청천은 이것마저도 목민관에게 그 책임의 일단이 있다고 여긴 것 같다. ‘조강행(祖江行)’을 보기로 하자.

편주백조강(扁舟洦祖江) 쪽배는 조강에 정박하고
모숙강촌노(暮宿江村盧) 저물어 강촌 마을에 투숙하니
홍수야분설(洪壽若噴雪) 큰 파도 흰 눈 뿜어내듯
팽배등공허(澎湃騰空虛) 물결 솟구치듯 하늘로 오르네.
강촌노옹빈애애(江村老翁鬢皚皚) 낭촌 늙은이 귀밑머리 하얀데
자언생재차항거(自言生在此港居) 스스로 말하기를 이 항구에 산다하네.
조강일명삼기하(祖江一名三岐河) 조강은 일명 삼기하라 하지요
시위삼강합조창해파(是爲三江合朝創海波) 세 강이 바다로 함께 흘러가기 때문에
남통호해서락낭(南通湖海西樂浪) 만으론 호남, 해서론 평양으로 통하니
축노상속여비준(舳艫相屬如飛晙) 이어진 배들은 베틀북과 같다오.
어염과포미작산(魚鹽果布米作山) 고기, 소금, 과일, 배, 쌀 산같이 쌓일 땐,
차항일일천범과(此港一日千帆過) 이 항구에 하루에 천 척의 배가 지나갔지요.
--- 중   략 ---
<다음에 계속>

(출처 : 경북청유(慶北靑儒) 선비문화 고령포럼, 조선통신사 신유한의 일본견문기, 한국학중앙연구소 향토문화전자대전 발췌)
주간고령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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