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이씨(全州李氏) 덕천군파(德泉君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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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전주이씨(全州李氏) 덕천군파(德泉君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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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군유지(사당) 세종특별자치시 장군면 태산리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전주이씨(全州李氏) 시조(始祖) 이한(李翰)
①『선원계보(璿源系譜)』·『태조실록(太祖實錄)』·『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등에 의하면, 그는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21대조로 신라에서 벼슬하여 사공(司空)이 되었고, 무열왕의 10세손인 군윤(軍尹) 김은의(金殷義)의 딸과 혼인하여 시중(侍中) 자연(自延)을 낳고, 자연은 복야(僕射) 천상(天祥)을 낳았다.
그 뒤 대가 이어져 안사(安社 : 뒤에《목조(穆祖)》로 추존)-행리(行里 : 뒤에《익조(翼祖)》로 추존)-춘(椿 : 뒤에《도조(度祖)》로 추존)-자춘(子春 : 뒤에《환조(桓祖)》로 추존)-성계(成桂)로 이어졌다. 이한(李翰)의 선대(先代)가 언제부터 전주(全州)에 세거했는지 알 수 없으나 이한(李翰) 이후 전주(全州)에 세거하여 후손들이 전주(全州)를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② 이성계(李成桂)의 고조부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는 원래 전주(全州)사람이었는데 그곳 지방관(地方官)과 사이가 나빠 강원도 삼척(三陟)으로 옮겨갔다가 얼마 뒤 그 지방관이 다시 삼척으로 부임해 오자 가족을 데리고 간도(間島)로 가서 원나라의 지방관인 다루카치(達魯花赤)를 지내고 증조부인 익조(翼祖) 이행리(李行里)는 천호(千戶) 벼슬을 이어받고 조부인 도조(度祖) 이춘(李椿)은 고려에서 찬성사(贊成事)를 추증(追贈)받았으며 환조(桓祖) 이자춘(李子春)은 고려조에 삭방도만호 겸 병마사(朔方道萬戶兼兵馬使)를 지냈다.
③ 임금님의 조상을 '선원(璿源)'이라고 한다든지, 임금님은 만백성의 어버이이기 때문에 한 씨족의 시조가 될 수 없어 '제왕불감조기조(帝王不敢祖其祖)'라고 하는 표현 등은 모두 우리의 독특한 용어라 할 수 있다. 각 본관(本貫)의 시조(始祖) 또는 파조(派祖)는 왕(임금)이 아니라 그 아들 또는 형제를 시조(始祖)로 한다는 사실이다.
④ 시조(始祖)로부터 목조대왕(穆祖大王) 이안사(李安社)의 아버지인 양무장군(陽茂將軍)까지를 선원선계(璿源先系)라 하고, 목조대왕(穆祖大王)으로부터 왕통계(王統系)인 순종황제(純宗皇帝)까지를 선원세계(璿源世系) 또는 선원본계(璿源本系)라 하며, 목조대왕(穆祖大王)의 왕자파(王子派) 이후 순종황제의 왕자 군(王子君)까지의 각 파를 선원파계(璿源派系) 또는 선원속계(璿源續系)라 할 수 있다.
⑤ 옛날 전주(全州)의 옛 이름은 완산(完山)이었는데 나중에 전주(全州). 견성(甄城)이라고도 하였다. 완산(完山)은 원래 전주(全州)에 있는 산 이름이었다. 전주부(全州府)의 남쪽 3리에 있었던 작은 산으로 고덕산(高德山)으로부터 갈라진 산이었는데, 전주의 안산(案山)으로 남복산(南福山)이라고도 하였다. 따라서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완산이씨(完山李氏)’라고도 부른다
(2) 전주이씨(全州李氏) 분파(分派)
① 전주이씨(全州李氏)의 파는 총 122개로 나뉘어 있는데, 그중 효령대군파(孝寧大君派), 광평군파(廣平君派), 덕천군파(德泉君派), 밀성군파(密城君派), 양녕대군파(讓寧大君派) 등이 번창했다.
② 덕천군(德泉君) 후손들의 문과급제자 수는 도합 34명으로 전주이씨(全州李氏) 문중에서 가장 많은 문과급제자를 배출하였으며 특히 증손 함풍군(咸豊君) 후손 중에서 상신(相臣), 문형(文衡) 등 명신(名臣)이 많이 배출되어 덕천군파(德泉君派)의 명예를 드높였다.
(3) 전주이씨(全州李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전주이씨(全州李氏)는 413가구 1,127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의평군(義平君) 원생(元生)의 후손은 개진면 신안리에, 양녕대군(讓寧大君) 이제(李禔)의 후손은 쌍림면 귀원리에, 효령대군(孝寧大君) 이보(李補)의 후손은 우곡면 연동, 덕곡면 백리, 운천군(雲川君) 이인(李寅)의 후손은 쌍림면 평지리에,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의 후손은 개진면 생리에, 의안대군(義安大君) 이양(李穰)의 후손은 쌍림면 송림리에, 담양군(潭陽君) 이거(李璖) 후손은 대가야읍 내곡리, 영응대군(永膺大君) 이염(李琰)의 후손은 운수면 팔산리, 성산면 사부1리 등지에 세거(世居)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조선시대
① 덕천군(德泉君) 이후생(李厚生)
정종대왕과 고려말 우왕 때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를 지낸 윤(奫)의 따님인 성빈(誠嬪) 충주(忠州) 지씨(池氏) 사이에서 태조 6년(1397년) 10남으로 태어났다. 어느날 성빈(誠嬪) 지씨(池氏)가 흰 기린의 꿈을 꾸고 그를 낳았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는 하늘에 뿌리를 두었으며 어질고 후덕(厚德)함이 보통(普通) 사람보다 뛰어나 태조 임금이 특별이 사랑하여 ‘후(厚)’자(字)로 이름을 지어주었다. 태종께서 “원천(源泉 : 물이 흘러나오는 근원)에서 물을 취하면 물이 마르지 않으니 그 물은 곧 복의 물이다.”하고 특별이 덕천군(德泉君)이라 3자를 써주고 덕천(德泉)이란 군호(君號)를 정하여 하사하였다. 세종 26년(1444년) 명선대부(明善大夫) 덕원정(德原正)으로, 문종 1년(1451년) 덕천정(德泉正)으로 관직을 제수(除授)받았고 세조1년(1455년) 계유정난(癸酉靖難)의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세조 6년(1460년) 11월 10일에 덕천군(德泉君)에 봉군(封君)되었다. 문경공(文敬公)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찬한 송림군(松林君) 묘지명(墓誌銘)에 “왕자 중에서 가장 배우기를 좋아하고 예경(禮經)에 조예가 깊었으며 학자이 대부분 나아가서 배우니 한(漢)나라 하간(河間)에 비유된다고 하였다. 세조 11년(1465년) 졸(卒)하였다. 시호(諡號)는 적덕(積德)이다. 덕천군(德泉君)의 시호(諡號)에 함축(含蓄)된 덕행사실(德行事實)은 어진마음으로 덕을 쌓는 ‘현심적덕(賢心積德)’, 사람을 감동시키면서 덕을 쌓는 ‘감인적덕(感人積德)’, 사람의 생명을 구제하여 덕을 쌓는 ‘활인적덕(活人積德)’, 선행으로 많은 덕을 쌓는 ‘선행적덕(善行積德)’으로 대별(大別) 할 수 있으나 그중 덕천군(德泉君)이 베푼 ‘현심적덕(賢心積德)’의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태종을 모시고 모든 신하(臣下)가 배석(拜席)하는 대궐잔치에서 음식 중에 벌레가 있으므로 임금이 진노(震怒)하면서 음식을 만든 사람의 목을 당장 베라 하니 덕천군(德泉君)이 울면서 대궐의 섬돌아래로 내려가 그 벌레를 입으로 삼키며 해충(害蟲)이 아니라고 아뢰니 점차 노여움을 풀고 참(斬)하라는 명령을 거두고 공의 어짐에 대하여 말하기를 “내 조카 네가 아니었더라면 또 몇 사람을 죽일 뻔 했다”하면서 다시 칭찬했다는 기록에서 공의 ‘현심적덕(賢心積德)’ 즉 어진마음으로 덕을 쌓았던 사실을 알 수 있다. 효종 5년(1654년) 덕천군(德泉君)을 불천위(不遷位) 제사를 모시기 위한 사당 즉 부조묘(不祧廟)를 연기군 남방 축리에 창건하였으나 그후 퇴락하여 영조 15년(1739년) 공주군 의당면 태산리로 이건(移建) 중창(重創)하였다. 고종 9년(1872년) 영종정경(領宗正卿)에 추봉(追封) 되었다.
(註釋) 한(漢)나라 하간(河間)
한 경제(漢景帝)의 셋째 아들인 하간헌왕(河間獻王) 유덕(劉德)을 가리킨다. 유학을 숭상하며 예악(禮樂)을 닦아 산동(山東)의 제유(諸儒)들이 귀의(歸依)해 왔다는 기록이 전한다.

② 신종군(新宗君) 이효백(李孝伯)
자는 희삼(希參)이다.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과 장천부원군(長川府院君) 양후(良厚) 종무(從茂)의 따님인 증(贈) 고양군부인(高陽郡夫人) 장수이씨(長水李氏) 사이에서 세종 15년(1433년) 태어났다. 동생 운수군(雲水君) 효성(孝誠)과 함께 종친부(宗親府)를 창건(刱建)하여 종법(宗法)을 일신(一新)하였다. 활을 잘 쏘아 세조 5년(1459년) 세조가 참석한 모화관(慕華館)에서의 시사(試射)에서 30개의 화살 중 29개를 과녁에 적중시켜, 크게 감탄한 세조의 특명으로 당상관(堂上官)에 올랐다. 조정을 대표하여 수차 중국사신으로 왕래하신 결과 명나라 황제가 그 충간(忠諫)을 가상히 여겨 자신의 황폐영자(黃佩纓子)를 하사받았다. 궁술(弓術)이 비상하시어 세조가 ‘신궁(神弓)’이라 칭하였다. 그 뒤 곧 정의대부(正義大夫)에 오르고 세조 13년(1467년) 신종군(新宗君)에 봉군(封君)되었다. 그 해 이시애(李施愛)의 난으로 세조가 친히 정벌하려 할 때 선봉장(先鋒將)으로 내정되었다. 세조 14년(1468년) 온양별시(溫陽別試)에서 무과에 급제한 후 승헌대부(承憲大夫)에 올라 겸사복장(兼司僕將)에 되었고 예종 1년(1469년) 특별히 승헌 대부(承憲大夫)를 더하였다. 아우 이효숙(李孝叔)·이효성(李孝誠)·이효창(李孝昌)과 함께 4형제가 모두 활을 잘 쏘았는데, 그 중 가장 잘 쏘아 세조·예종·성종 등 역대임금의 사랑을 받았다. 거평정(居平正) 이복(李復)과 진례정(進禮正) 이형(李衡) 등 일곱 사람과 함께 ‘사종(射宗)’이라 일컬었다. 성종 18년(1487년) 졸(卒)하였다. 시호는 공간(恭簡)인데, 일을 공경하여 윗사람에게 이바지하는 것이 공(恭)이요 평이(平易)하고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간(簡)이다.
(註釋) 사종(射宗)
활을 잘 쏘는 종친(宗親)을 말한다.
③ 학성군(鶴城君) 이연정(李連丁)
신종군(新宗君) 효백(孝伯)과 동지중추(同知中樞) 경레(景禮)의 따님 현부인(縣夫人) 예안최씨(禮安崔氏) 사이에서 네째 아들로 성종 1년 (1470년) 태어났다. 처음 학성군수(鶴城郡守)에 임명되었고 연산군 5년(1499년)에 시예(試藝)에 선발되어 승진하여 정(正)이 되었다. 중종 1년(1506년) 정국원종일등공신(靖國原從一等功臣) 녹훈(錄勳)되어 품계가 명선대부(明善大夫)에 이르렀으며 중종 25년(1531년)에는 정의대부(正義大夫) 품계를 받았고 학성군(鶴城君)으로 봉군(封君)되었다. 중종 38년(1544년) 졸(卒)하였다.
④ 한양부수(漢陽副守) 이보(李堡)
학성군(鶴城君) 연정(連丁)과 사간(司諫) 팽(彭)의 따님 현부인(縣夫人) 광주안씨(廣州安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시대 때 종친부(宗親府)에서 종실(宗室)과 종친(宗親)에 관(關)한 일을 맡아보던 종4품(從四品)의 벼슬인 한양부수(漢陽副守)를 지냈다. 졸년(卒年)은 미상(未詳)이다.
⑤ 이진남(李震男)
한양부수(漢陽副守) 보(堡)와 섭명(燮溟)의 따님 파평윤씨(坡平尹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종사랑(從仕郞)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⑥ 이숙남(李叔男)
한양부수(漢陽副守) 보(堡)와 섭명(燮溟)의 따님 파평윤씨(坡平尹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한 후 조선시대 각 도 수군(水軍)을 총지휘하기 위하여 두었던 정3품 외관직 무관인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⑦ 이원(李瑗)
자는 백옥(伯玉)이고 호는 동고(東皐)이다. 어모장군(禦侮將軍) 행(行) 충좌위부사과(忠佐衛副司果) 수남(壽男)과 생원(生員) 의한(依漢)의 따님 정부인(貞夫人) 진주유씨(晋州柳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중종 38년(1543년) 태어났다. 선조 9년(1576년)  식년시(式年試) 생원(生員)에 입격(入格)한 후 선조 16년(1583년)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였다. 형조좌랑(刑曹佐郞)·사헌부(司憲府) 정언(正言)·면천군수(沔川郡守)·한성부(漢城府) 우윤(右尹)과 좌윤(左尹) 등을 지냈다. 우의정(右議政) 한효순(韓孝純)과 함께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廢母論)에 동참하였다. 인조 6년(1628년) 졸(卒)하였다.
⑧ 이구(李球)
어모장군(禦侮將軍) 행충좌위부사과(行忠佐衛副司果) 수남(壽男)과 생원(生員) 의한(依漢)의 따님 정부인(貞夫人) 진주유씨(晋州柳氏) 사이에서 삼남으로 명종 21년(1566년) 태어났다. 음직(蔭職)으로 대정현감(大靜縣監)을 거쳐 승지(承旨)를 역임하고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졸년(卒年)은 미상(未詳)이다.
⑨ 이척연(李惕然)
자는 성오(省吾)이고 호는 동이(同異), 동포(東圃)이다. 대정현감(大靜縣監) 구(球)와 보공장군(保功將軍) 여흘(汝屹)의 따님 순천김씨(順天金氏) 사이에서 선조 24년(1591년) 태어났다. 인조 5년(1627년)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입격한 후 인조 6년(1628년) 별시(別試) 문과에 급제하였다.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을 거쳐 호조(戶曹)·예조(禮曹)·병조(兵曹)의 좌랑(佐郞)·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지평(持平)·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이 되어 훈귀(勳貴)들의 횡포를 탄핵하여 풍속과 질서를 바로잡는 데 힘썼다. 외직으로 직산현감(稷山縣監)·안변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안동도호부사(安東都護府使) 등을 지냈다. 그뒤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호조(戶曹)·예조(禮曹)·병조(兵曹)의 참의(參議)·승지(承旨) 등을 역임하고 사임하였다. 현종 4년(1663년) 졸(卒)하였다. 그는 학문이 깊었으며 특히 성리학에 밝아 ‘기일원론(氣一元論)’에서 ‘심무체론(心無體論)’을 주장하였다. 저서로는『보곤론(補袞論)』·『상례요람(喪禮要覽)』등이 있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8세 처사(處士) 정호(廷琥)가 임진왜란을 피하여 선향지(先鄕地) 김포에서 낙남(落南)하여 현재 달성군 옥포면 김흥3리 속칭 ‘능전(能田)’마을로 입향하여 16세 건배(建培) 선조까지 세거하였으나
(2) 17세 석하(碩夏) 선조가 고종 25년(1888년) 졸(卒)하자 배위 파평윤씨(坡平尹氏)가 지경(地境)이 궁벽(窮僻)하고 농업환경이 열악(劣惡)한 ‘능전(能田)’마을을 떠나 집안 식구를 거느리고 자부(子婦) 달성서씨(達城徐氏)의 친정마을인 개진면 생동(省洞)으로 이거(移居)하여 그 후손들이 100여년간 세거(世居)하고 있다.
4. 입향조 이후 주요인물
(1) 이용범(李龍範) : 담수회 고령지회장, 성균관유도회 고령군 지부 부회장
(2) 이대성(李大成) : ㈜구딕스(Goodix) 이사
(3) 이용철(李鎔徹) : 경기도 고등학교 교감, 박사
(4) 이성태(李聖泰) : 덕산산업 대표
(5) 이차근(李次根) : 초등학교 교장
(6) 이웅희(李雄熙) : 미국 L/A 거주(건축가)
(7) 이용웅(李龍雄) : 육사 졸업, 육군 중령
(8) 이용현(李龍鉉) : 경북대학교의과대학 의사
(9) 이찬웅(李燦雄) : 삼성중공업 부장
(10) 이판술(李判述) : 초등학교 교장, 고령문화원 부원장
(11) 이승훈(李勝勳) : ㈜MBN 차장
(12) 이승철(李勝徹) : 포스텍 기계공학부 교수, 박사
(13) 이정술(李正述) : 행안부 중앙민방위교육원장, 안실련사무총장, 박사
(14) 이재술(李在述) : ㈜삼보모터스 상무이사
(15) 이말술(李末述) : ㈜LG CNS 상무이사
(16) 이차봉(李且奉) : 공군 중령, 아시아나항공 조종사
 
 
 
자료제공 : 덕천군파 생리종중 주손 이용범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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