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선비의 일본 견문록, 기행문학의 걸작 신유한 ‘해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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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조선선비의 일본 견문록, 기행문학의 걸작 신유한 ‘해유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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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유록(海遊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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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집(靑泉集)

 

 

▶ 생애(生涯)
신유한(申維翰,1681~1752)은 경남 밀양에서 태어나 1752년 6월 9일 고령 고아리 경운재(景雲齋)에서 타계했다. 자는 주백(周伯), 호는 청천(靑泉)이다. 신유한은 고려 태사 장절공(壯節公) 신숭겸(申崇謙)의 후손으로 12대조 현(賢)이 덕행과 훈업으로 영해에 봉해진 이후 영해(寧海)를 본관으로 했다. 고조부 응용(應龍)은 덕을 숨기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지만 학행으로 널리 알려졌으며, 증조부 구년(龜年, 호-滄海釣叟)은 효행으로 명망이 높았다.
조부 신성오(申省吾, 호-竹溪)는 문장으로 알려졌으며, 생부 태래(泰來, 호-疑齋)와 양부(養父) 태시(泰始, 호-密窩)도 문장에 뛰어났다. 그래서 이 삼부자를 중국의 ‘三蘇’에 비견해 ‘密城三家’로 불렀다.
신유한(이하 청천)의 무덤은 고령군 쌍림면 신곡리 좌랑봉에 있으며, 현재 덕곡면 원송리에 직계 후손들이 살고 있다.
그는 밀양에서 지내다가 34세 때 고령 양전리로 이거했다. 이후 환로에 있다가 69세 때 관직을 그만두고 고령으로 돌아왔다. 벼슬살이 때문에 그가 실제 고령에 거주한 햇수는 수년에 불과하지만 고령을 마음의 고향으로 여긴 것 같다. 69세인 만년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령으로 돌아왔고, 70세에 경운재(景雲齋)를 짓고 가야초수(伽倻樵叟)로 자호하며 강학했다. 청천은 이곳을 안식처로 삼아 경학약설(經學略說), 역리조해(易理粗解), 시서정종후제(詩書正宗後題), 문장곤월(文章袞鉞), 서둔록(筮遯錄)과 공진록(拱辰錄)을 저술했다. 72세에 경운재에서 고종(考終)했다.
청천은 이에 앞서 25세 때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그 문장이 널리 알려졌다. 28세에 부친상을 치르고 영애록(永哀錄)을 저술했고, 31세에 모친상 탈상 후 가례비남(家禮備囕)을 찬술했다.
특히 두기(杜機) 최성대(崔成大)와 각별한 시교(詩交)를 나누어 사람들이 당의 원진(元稹)과 백거이(白居易)의 사귐에 비유할 정도였다.
청천은 최성대(崔成大)·이병연(李秉淵)·남태량(南泰良) 등과 교유하면서 많은 詩들을 주고받았는데, 특히 10년 연하인 최성대와는 부부 같다는 평을 들을 만큼 각별한 사이였다.
▶  탁월한 문장가로 당대 명망 있는 사대부들과 교류
청천은 일찍부터 시인,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던 인물이다. 당대 명망 있는 사대부들과 교유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탁월한 문학적 역량에서 비롯된 것이다. 1713년(숙종 39) 증광 문과에 장원 급제했다. 1714년 노론 사대부 김창흡(金昌翕)과의 교분도 이와 같은 선상에서 이해할 수 있다.
1719년(숙종 45) 39세 때 일본사행(日本使行)의 제술관(製述官, 글 잘하는 선비를 발탁해 문화 교류를 위한 책임자)으로 발탁돼 일본에 파견됐다.
제9차 통신사는 1718년 에도막부(江戶幕府) 제8대 쇼군(將軍)에 취임한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宗)의 취임을 축하하기 위해 사절로 파견됐는데 제술관으로 동행했다.
조선 후기 고령지역의 한문학계에서 청천이 차지하는 위상은 18세기에 활동했던 이 지역 출신의 주요 문인들이 대부분 그의 제자들이란 점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듬해 귀국해 ‘해유록(海游錄)’을 저술했고, 승문원 부정자와 성균관 전적을 지냈다. 1722년(경종 2) 무장 현감으로 나간 뒤 봉상시 첨정, 평해 군수, 영일 현감을 역임했다.
해유록은 청천이 숙종45(1719) 4월 11일부터 이듬해 1월 24일까지 261일 동안(10개월) 통신사 일행으로 일본에 다녀온 여정과 견문을 기록한 사행 일기(使行日記)이다. 그는 해유록에서 일기체로 항해나 통행, 풍광, 주요일정, 자신의 일, 일본인과의 교유 등과 관련된 관찰, 문답, 감상 등을 기록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국토·산천·기후·역사·도시·풍습·산업·의복·음식·가옥·인물·관제·병제 등 모든 분야를 세심하게 관찰해 꼼꼼하게 기록했다.
부록으로는 일본의 지리, 물산, 제도, 인성 등에 관해 듣고 본 것 23개 항목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적은 ‘문견잡록(聞見雜錄)’을 첨부하고 있다.
일본 문인들과 교류한 경험도 담았고, 이 일기는 이후 일본으로 사행을 떠나는 사람들의 필독서가 됐다. 임진왜란 이후 총 12회에 걸쳐 이루어진 통신사 관련 일본 기행문은 수십 종에 달한다. 그 중에서도 ‘해유록’은 문학적으로 가장 우수한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  박지원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와 쌍벽, ‘해유록’
연암 박지원의 ‘일야구도하기(一夜九渡河記)’는 청나라에 다녀온 경험을 쓴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실려 있는 글로 여정과 견문을 기록한 수필이다. 열하일기와 함께 조선 기행문학의 쌍벽이라 불리는 ‘해유록’은 총인원 475명, 소요 일수 261일, 수로 5,210리, 육로 1,350리의 험난한 일본 여행길에서 18세기 초 조선의 지식인이 경험한 문화적 충격들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저자는 일본의 문인들과 교류한 경험이나, 일본의 생활 풍습 및 경제상 등에 대한 관찰을 다양하게 풀어 놓는다. ‘해유록’, ‘조선 선비의 일본견문록’에서는 대마도에서 도쿄까지 청천의 여정을 통해 18세기 초 일본으로 안내한다. 각 일기마다 관련 해설과 주, 그림 자료를 함께 수록해 조선통신사들이 지나간 곳들의 과거와 현재, 당시의 역사적 상황 등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1719년 제술관으로 발탁돼 일본을 방문했다. 이때 그의 글을 청하는 이들로 거리가 메이고 문이 막힐 지경이었는데, 앉은자리에서 수백 편을 일필휘지로 써 일본 문인들을 찬탄케 했다. 비록 일신에 빼어난 문재(文才)를 지니고 그 시명(詩名)이 국내외에 높았으나 서얼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평생 말단관직을 전전하며 가난하게 살았다. 말년에는 고향으로 내려가 후학들을 가르치다가 1752년 일흔두 살로 타계했다.
▶ 청천은 311題 686首의 한시를 남겨
저술로는 ‘靑泉集’, 1770년 刊 6권 3책(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이 전하며, ‘청천속집(靑泉續集)’ 12권 6책, 통신사행 때 보고 들은 것을 쓴 장편의 기행일기인 ‘해사동유록(海槎東遊錄, 海遊錄)’, ‘문견잡록(聞見雜錄)’, ‘성사답향(星槎答響)’ 2권, ‘일본잡기(日本雜記)’, ‘송운대사분충서난록(松雲大師奮忠紓難錄)’ 등이 있다. 한시 ‘일본죽지사(日本竹枝詞)’가 유명하다.
‘해사동유록(海槎東遊錄)’은 50여 편의 시와 ‘일본죽지사(日本竹枝詞)’는 이국(異國)의 물색(物色)을 자세하게 관찰해 흥미롭게 묘사한 기행시(紀行詩)이다. 청천은 이들 시에서 여속(女俗), 남녀애정(男女愛情) 등을 특히 많이 다루어 이국적이면서 낭만적인 시정의 세계를 이룩하고 있다. 그러한 것의 대표작으로 〈일본죽지사(日本竹枝詞)〉를 들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 총 12회에 걸쳐 이루어진 조선통신사행에서 나온 일본 기행문은 수십 종에 달하지만, 그중에서 문학적으로 가장 우수한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코 청천(靑泉)의 ‘해유록’을 말한다. 비단 문장이 유려해서일 뿐 아니라 묘사가 꼼꼼하고 그 내용이 풍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1719년 기해사행 이후의 통신사들은 ‘청천해유록초’라는 일종의 다이제스트판을 만들어서 꼭 가지고 갔다고 한다.
▶ ‘해유록’은 최초의 일본여행 가이드북이었던 셈
영조 임금은 일본을 다녀온 통신사들에게 일본 문인들과의 교류가 ‘신유한’에 비해 어떠했는가 하고 직접 캐묻기도 했다. 또한 후대의 통신사들은 가는 곳마다 청천의 글이 화려하게 표구되어 걸려 있는 것을 보았으며, 그의 안부를 묻는 질문에 시달려야 했고, 그가 죽었다는 소식에 목메어 우는 많은 일본인들을 달래느라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이처럼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문명(文名)이 높았던 청천이지만 정작 고국에서는 서얼이라는 신분 때문에 지방관을 전전하며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더불어 조선 기행문학의 쌍벽이라 일컬어지는 ‘해유록’이지만, 그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것은, 연행(중국사신행)에 비해 사행(일본사신행)을 꺼리던 당대의 인식과 관련이 있다. 문화선진국인 중국에 가는 것은 문명을 드날릴 기회로 너도나도 반기지만, 문화후진국인 일본에 가서 글 노동을 하는 것, 그것도 목숨을 걸고 바닷길을 지나는 것은 아무도 원치 않았던 것이었다. 그것이 중인이나 서얼 중에 글 잘하는 이들이 주로 사행에 뽑힌 이유이기도 하다.
▶ 한글세대를 위한 새로운 ‘해유록’ 나와
‘해유록’은 1970년대 말에 두 종이 번역되었으나 현재는 구해 보기 쉽지 않다. 그나마도 한시가 모두 빠져 있는 등 완역이 아니었고, 한문체가 그대로 살아 있어 오늘날의 독자들이 쉽게 읽을 수 없다. 최근 북한의 번역본이 소개되기도 했으나 주체사관에 입각해 중국의 시나 고사를 인용한 비유 등을 모두 빼버려 고전을 읽는 맛이 떨어진다. 또한 학문적인 가치에서 남옥의 ‘일관기’, 성대중의 ‘일본록’, 원중거의 ‘승사록’ 등 다양한 일본 기행문들이 점차 번역되고 있으나 이 역시 일반 독자들이 읽기에는 분량이나 문장이 쉽지 않다. ‘조선 선비의 일본견문록’은 청천의 ‘해유록’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새롭게 번역한 책이다. 특히 매 일기마다 관련 해설과 주, 그림 자료를 덧붙여 글의 의미 맥락은 물론 조선통신사들이 지나간 곳들의 과거와 현재, 당시 역사적 상황 등을 더 깊고 폭넓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돕고자 했다. * 조선후기 지식인의 생생한 일본 보고서
 조선후기 지식인이 쓴 이 생생한 일본 보고서를 지배하는 정서는 양가감정이다. 임진왜란의 상흔이 채 아물지 않은 시기, 다시금 팽창하는 그 군사력과 경제력에 경계하고 긴장하면서도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야만국․오랑캐라고 얕잡아보는 시각이 계속 충돌한다(심지어 자연경관을 바라볼 때에도 이런 좋은 경치가 잘못돼 오랑캐의 땅에 있구나 하고 한탄한다). 대마도주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기를 거부하고, 아메노모리 호슈의 지적에도 끝까지 일본이 아니라 '왜'라 부르기를 고집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기리는 사찰 방문을 놓고 언쟁을 벌이는 등의 일화들은 그런 양가감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일본 측 역시 문화적으로는 조선통신사들을 숭앙하면서도, 일본적 화이관을 서서히 드러내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공식 외교 방문 수행원으로서의 이런 긴장과 갈등의 연속 속에서도 호기심 많고 다정다감한 한 문인으로서 느끼는 소회나 감상이 행간에 묻어나는 것 또한 이 책의 묘미이기도 하다. 매년 한일문화교류사업의 일환으로 조선통신사행이 재현되는 등 많은 행사가 이루어지지만,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는 데 옛 통신사의 여행기를 직접 읽는 것만큼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 것이다.
▶ 일본 문인들과의 재치 있는 시문 수창
 나는 그(미목호)와 함께 시를 부르는 대로 곧 화답하고, 이야기도 매우 정성스럽게 했다. 그는 내가 벼루에 먹을 가는 것을 보고 농담 삼아 "학사께서는 마땅히 쇠 벼루를 쓰셔야겠습니다." 했다. 그것은 나의 이름이 상추밀(桑樞密)과 같이 유한(維翰)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또 그 말을 받아서 "당신이 철(鐵)을 겁내는 줄 알기 때문에 내놓지 아니하오." 하고 대답했더니, 좌중이 모두 웃었다. 청천은 통신사행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그를 방문해오는 수많은 일본 문인들과 시문으로 화답했다. 그가 시모카마가리에 들렀을 때 방문한 이가 일본 주자학의 태두 하야시 라잔의 제자 미목호(味木虎)였다. 그런데 위 문답을 듣고 사람들은 왜 웃었을까? 미목호는 신유한의 이름이 오대(五代) 때 추밀 벼슬을 한 상유한(桑維翰)과 같은 데서 착안해, 시문 수창으로 벼루 갈기가 바쁜 청천에게 쇠 벼루를 써야겠다고 먼저 농담을 건넨다.
상유한이 여러 번 과거에 떨어지자 친구들은 다른 길을 택하기를 권했다고 한다. 그러자 그는 쇠로 벼루를 만들고는 "이 벼루가 다 달아야 내가 과거를 그만두겠다." 하였다. 그 뒤 상유한은 과연 과거에 급제해 벼슬이 추밀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대해 청천 역시 지지 않고 반격했다. 그대의 이름이 미목호(味木虎)이니, 호랑이가 철(곧 총)을 무서워하는 줄 알기 때문에 쇠 벼루를 내놓지 않는다고. 제술관 신분으로 쉼 없이 벼루를 갈고 붓을 휘둘러대는 청천과 그런 그와의 시문 수창에 연연하는 일본 문사 미목호 간에 주고받은 필담은 이처럼 재치가 넘쳤다. <다음에 계속>
 
(출처 : 경북청유(慶北靑儒) 선비문화 고령포럼, 조선통신사 신유한의 일본견문기, 한국학중앙연구소 향토문화전자대전 발췌)
주간고령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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