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일선)김씨 화의군파(和義君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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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선산(일선)김씨 화의군파(和義君派)

백봉제-개진면 옥산길 26-5.jpg

백봉제(개진면 옥산길 26-5)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선산(일선)김씨 시조(始祖)
신라김씨 선원계통보(璿源系統譜)에 의하면 선산(일선)김씨 시조(始祖)는 순충공(順忠公) 선궁(宣弓)이고 초휘는 선(宣)이다. 신라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 계통으로 신라 46대 문성왕(文聖王)의 7대손이며 일선군사(一善郡事) 체의(體誼)의 아들로 구미시 해평면 낙산동(洛山洞) 부근에서 태어났다.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후백제(後百濟) 정벌차(征伐次) 일선군(善山)에 머물 때 공은 일선리(一善吏)이었으며 15세의 나이로 자원(自願) 종군(從軍)하여 큰 공을 세우니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기뻐하여 어궁(御弓)을 하사하고 이름을 선궁(宣弓)이라 사명(賜名)하였다. 삼한통합(三韓統合)에 큰 공을 세우고 고려 개국을 익찬(翊贊 : 도움)한 공으로 태조 원년(918년) 통합공신(統合功臣)에 책봉(冊封)되고 후삼국 통합 후 태조 19년(936년) 삼한통합 익찬공신(三韓統合翊贊功臣)에 책봉(冊封)되었다. 946년 공이 별세함에 정종(定宗)이 대승(大丞)을 증직(贈職)하고 순충(順忠)이라 시호(諡號)하였다. 문종 8년(1054년)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증직(贈職)하고 일선백(一善伯)으로 추봉(追封)하였으므로 일선(一善)이 관향(貫鄕)이 되었다. 또 충렬왕 34년(1308년) 삼중대광(三重大匡)을 추증(追贈)하였다.

 

(2) 선산김씨(善山金氏) 관향(貫鄕) 표기(表記) 고찰(考察)
① 관향(貫鄕)은 “개인의 시조가 난 곳, 시조의 세거지(世居地) 또는 성(姓)의 출발지역(出自地)”을 말하며 관적(貫籍)· 본적(本籍)· 성관(姓貫)· 본(本)· 본관(本貫)· 적관(籍貫)이라고도 한다.
② 선산(善山)의 명칭은 신라 때 일선(一善)으로 고려 때 선주(善州)로 불렸으나 조선 태종 13년(1413년) 선산(善山)으로 불렀다.
③ 선산김씨(善山金氏)는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로 시조를 달리하는 성씨가 있다. 즉 이들은 이조(異祖) 동본동성(同本同姓)이다. 김선궁(金善弓)을 시조로 하는 계통은 선산(일선)김씨로, 소위 김추(金錘)를 시조로 하는 소위 ‘들성김씨’ 계통은 선산김씨로 구별하여 표기하고 있다.
  
(3) 분파(分派)
① 시조 김선궁(金宣弓)의 장남 김봉술(金奉術)의 후손들은 백암파(白巖派), 농암파(籠巖派), 문대공파(文戴公派), 간의공파(諫議公派), 화의군파(和義君派), 낭장공파(郞將公派), 취수공파(醉睡公派), 송천공파(松川公派), 성암파(省庵派), 소암파(素庵派), 곤육재파(困六齋派), 대장군파(大將軍派), 우윤공파(右尹公派) 등 13개 파를 이루고 차남 김봉문(金奉文)의 후손들은 양양공파(良襄公派), 정조공파(正朝公派), 강호파(江湖派), 과당공파(苽堂公派), 점필재파(佔畢齋派) 등 5개 파를 이루고 있다.

 

(4) 선산(일선)김씨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선산(일선)김씨는 88가구 203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관내에는 김달상(金達祥)의 후손인 화의군파(和義君派)가 개진면 구곡리, 인안1리 등에 세거하고 있고 김숙자(金叔滋)의 4남 김종유(金宗裕)의 후손인 과당공파(苽堂公派)가 쌍림면 매촌리에, 5남 김종직(金宗直)의 후손인 점필재파(佔畢齋派)가 쌍림면 합가1리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김득충(金得忠)
고려 명종 14년(1184년)에 태어나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태보(太保)·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수문전태학사(修文殿太學士)·판이부사(判吏部事)·감수국사(監修國史)·상주국(上柱國)·태자태사(太子太師)를 역임하였다. 고종 38년(1251년)에 졸(卒)하였다.
② 김신함(金愼緘)
 초휘는 윤함(允緘)이다. 신호위(神號衛) 보승랑장(保勝郞將) 양인(良印)의 아들로 원종 1년(1260년)에 태어났다. 전농소윤(典農少尹)·한림학사(翰林學士)·편수관(編修官)을 역임하였다. 충숙왕 5년(1318년) 졸(卒)하였다.
③ 김우류(金右鏐)
 한림학사(翰林學士) 신함(愼緘)과 수년(守年)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해풍이씨(海豊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봉익대부(奉翊大夫)·지제교(知製敎)·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진현관직제학(進賢館直提學)을 지냈으며 문장으로 세상을 울렸다.  
④ 김달상(金達祥)
보문각(寶門閣) 직제학(直提學) 우류(右鏐)와 밀직사사(密直司事) 자화(子華)의 따님인 전의이씨(全義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공민왕 10년(1361년)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왕이 남쪽으로 피난을 떠나는데 수종(隨從)한 공으로 공민왕 12년(1363년) 신축호종일등공신(辛丑扈從一等功臣)에 서훈되었으며 공민왕 12년(1363년) ‘흥왕사(興王寺)의 변(變)’이 일어났을 때 왕을 모시고 피난한 공으로 부시피난일등공신(扶侍避難一等功臣)에 책봉되었다. 그후 정의대부(正義大夫)·추밀원좌부승선(樞密院左副承宣)·지공부사(知工部事)·한양윤(漢陽尹)·좌대언(左代言)·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금위제조관(禁衛提調官)을 역임하고 공민왕 14년(1365년) 화의군(和義君)에 봉해졌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도의지교(道義之交)하였다. 공민왕 17년(1368년) 졸(卒)하였다.

 

(註釋1) 홍건적(紅巾賊)의 난(亂)
중국 중원(中原)에서 원(元)의 지배를 타도하고 한(漢)민족 왕조인 명(明)나라 창건의 계기를 만든 백련교(白蓮敎) 신자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농민반란을 말하며 머리에 붉은 두건(頭巾)을 둘렀다고 해서 홍건적이란 이름이 붙었다.

(註釋2) 흥왕사(興王寺)의 변(變)
고려 공민왕 12년(1363년) 권문세족(權門勢族)들과 결탁한 김용(金鏞)이 흥왕사(興王寺)의 행궁(行宮)에 머무르고 있던 공민왕을 시해(弑害)하려 한 사건으로 최영 등이 반란을 진압하였다.

 

⑤ 김계수(金季壽)
화의군(和義君) 달상(達祥)과 찬성사(贊成事) 선(僐)의 따님 정부인(貞夫人) 동복오씨(同福吳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선 태조 때 군용점고사(軍容點考使)를 거쳐 대장군(大將軍)으로 경상도의 왜구를 막는 계책을 강구하였다.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를 역임하였다.
⑥ 김군정(金君鼎)
화의군(和義君) 달상(達祥)과 찬성사(贊成事) 선(僐)의 따님 정부인(貞夫人) 동복오씨(同福吳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충숙왕 후 5년(1336년)에 태어났다. 국자진사(國子進士)·선덕랑(宣德郞)·의영고부사(義盈庫副使)를 지내고 공민왕 9년(1360년) 동당시(東堂試) 문과에 급제한 후 원외랑(員外郞)·전의부령(典醫副令)·좌대언(左代言)을 역임하였다. 공민왕 12년(1363년) 전의부령(典醫副令)으로 재임중이었던 공은 부친 좌대언(左代言) 김달상(金達祥)과 함께 홍건적(紅巾賊)의 난에 공민왕을 호종(扈從)하였던 공으로 신축호종일등공신(辛丑扈從一等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충의문학(忠義文學)으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공민왕 17년(1368년) 졸(卒)하였다.

 

(2) 조선시대
① 김여덕(金餘德)
대장군(大將軍) 계수(季壽)의 장남으로 태어나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내고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증직(贈職)받았다.
② 김유장(金有章)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 여덕(餘德)과 증(贈) 영상(領相) 위(緯)의 따님 숙부인(淑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상서원(尙瑞院) 직장(直長)을 지내고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③ 김치원(金致元)
상서원(尙瑞院) 직장(直長) 유장(有章)과 이조좌랑(吏曹佐郞) 융(融)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세조 1년(1455년) 사직(司直) 재임 중 계유정난(癸酉靖難)의 공으로 원종3등공신(原從三等功臣)에 녹훈(錄勳)되었고 행상호군(行上護軍)과 대마주경차관(對馬州敬差官)으로 거쳐 예종 1년(1468년) 절도사(節道使)를 지냈다.
④ 김치형(金致亨)
상서원(尙瑞院) 직장(直長) 유장(有章)과 이조좌랑(吏曹佐郞) 융(融)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세조 1년(1455년) 행사용(行司勇) 재임 중 계유정난(癸酉靖難)의 공으로 원종3등공신(原從三等功臣)에 녹훈(錄勳)되었고 세조 13년(1468년) 구성군(龜城君) 이준(李浚)을 도와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였고 성종 때 통정대부(通政大夫) 삭주 도호부사(朔州都護府使)·통정대부(通政大夫) 행(行) 귀성부사(行龜城府使)·전라좌도수군절도사(全羅左道水軍節度使) 등을 역임하였다.
⑤ 김치리(金致利)
상서원(尙瑞院) 직장(直長) 유장(有章)과 이조좌랑(吏曹佐郞) 융(融)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삼남으로 태어났다. 세조 때 선전관(宣傳官)·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충청도분대감찰(忠淸道分臺監察)·형조좌랑(刑曹佐郞)을 거쳐 성종 때 장예원사의(掌隷院司議)·언양현감(彦陽縣監)·영산현감(靈山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영산현감(靈山縣監) 재임 중 선정(善政)으로 고을 사람들이 거사비(去思碑) 즉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영산현감(靈山縣監) 김치리(金致利)의 장남 성균진사(成均進士) 김세진(金世珍)과 차남 성균진사(成均進士) 김세보(金世寶)가 연산군 폭정으로 대과를 포기하고 연산군 재위기간(1495년∼1505년) 중에 창녕에서 현풍현 진촌면 백산동 현재 고령군 개진면 옥산1리에 입향하였으며 그후 26세 일은(逸隱) 김효일(金孝一)이 구곡리로 이거하였다. 제용감(濟用監) 직장(直長)을 지낸 김우경(金禹卿)이 10리 정도 떨어진 현풍현 진촌면 이란(二卵) 현재 고령군 개진면 인안1리에 이거하여 그 후손들이 그곳에서 세거하게 되었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김응시(金應時)
성균진사(成均進士) 세진(世珍)과 대호군(大護軍) 집(緝)의 따님인 의인(宜人) 야성송씨(冶城宋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중종 때 음직(蔭職)으로 중직대부(中直大夫)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지냈다.
② 김경(金敬)
제용감(濟用監) 직장(直長) 우경(禹卿)의 장남으로 태어나 장예원(掌隸院) 판결사(判決事)를 지냈다.
③ 김굉(金鍧)
자는 견여(堅汝)이고 호는 백봉(栢峯)이다. 처사(處士) 언서(彦瑞)와 태극(太極)의 따님인 오산김씨(鰲山金氏) 사이에서 선조 24년(1590년) 태어났다. 합천 용연서원(龍淵書院)에 배향된 명유(名儒) 경암(敬庵) 문동도(文東道)와 도의상선(道義相善)하였다. 손님을 대접하는데 성의를 다하고 예의 바르게 공경하는 태도로 사람을 대하니 ‘근후군자(謹厚君子)’라 하였다. 인조 18년(1640년) 졸(卒)하였다.
④ 김선영(金善英)
자는 술초(述初)이고 호는 동호(東湖)이다. 장사랑(將仕郞) 극창(克昌)과 증(贈) 참의(參議) 희(熺)의 따님 진주강씨(晋州姜氏) 사이에서 선조 38년(1605년) 태어났다.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할 때 부사과(副司果)로 왕을 호종(扈從)하였다. 인조 14년(1636년) 문과에 급제한 후 내직으로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형조정랑(刑曹正郞)·예조정,좌랑(禮曹正佐郞)겸(兼)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성균관직강(成均館直講)·시강원필선(侍講院弼善)·통례원봉례(通禮院奉禮)를 역임하였고 외직으로는 단성현감(丹城縣監)·무안현감(務安縣監)·고성현령(固城縣令)·흥해군수(興海郡守)·청송도호부사(靑松都護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역임한 고을 모두에는 공이 청렴결백하여 애민(愛民)하였다는 비가 남아 있다. 숙종 3년(1676년) 졸(卒)하였다.
⑤ 김시진(金時振)
자는 군옥(君玉)이고 호는 죽헌(竹軒)이다. 처사 선원(善元)과 찬(瓚)의 따님인 진주정씨(晋州鄭氏) 사이에서 인조 15년(1637년) 태어났다. 운계(雲溪) 정홍석(鄭弘錫)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문행(文行)으로 이름이 드러나 도동서원(道東書院) 청금록(靑衿錄)에 입록(入錄)되고 원장(院長)을 지냈다. 숙종 30년(1703년) 졸(卒)하였다.

 

(2) 근∙현대 인물
① 김의용(金義容) : 개진면장, 고령군 재무과장
② 김교휘(金敎暉) : 육군 중령
③ 김대성(金大成) : 대구시의회 의원
④ 김순분(金順紛) : 고령군의회 의원
⑤ 김상호(金相鎬) : 장면 국무총리 공보비서관
⑥ 김진호(金振鎬) : 한시 및 문학평론가, 선산(일선)김씨 대종회 사무차장
⑦ 김영수(金永水) : 성동상사 사장, 화의군파 회장
⑧ 김영하(金永夏) : 고령기와산업 창립자,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개진면장
⑨ 김영국(金永局) : 대진산업 사장, 화의군파 회장
⑩ 김영균(金永均) : 대통령비서실비서관, 세무서장
⑪ 김영순(金永淳) : 초등학교 교장
⑫ 김삼도(金三道) : 달성군의회 의원, 옥포새마을금고 이사장, 화의군파 회장, 달성군의정동우회 회장
⑬ 김수쾌(金洙快) : 대구중앙도서관장
⑭ 김태천(金泰天) : 한국증권연수원장, 중국 인민대 객원교수
⑮ 김홍기(金洪基) : 국제호텔 부사장
⑯ 김홍렬(金洪洌) : 중등교장
⑰ 김홍균(金洪均) : 행정학박사, 세무법인 이우 대표
⑱ 김영제(金永齊) : (주) 삼성전자 중국현지법인 이사
⑲ 김은동(金殷東) : (주)고령기와 회장, 선산(일선)김씨 대종회부회장, 대구경북 회장
⑳ 김은영(金恩英) : 달성군의회 의원
㉑ 김희재(金熙宰) : 변호사

 

자료제공 : 후손 김진호(金振鎬)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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