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나라 있는 줄만 알고 내 몸 있는 줄 몰랐노라”(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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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오직 나라 있는 줄만 알고 내 몸 있는 줄 몰랐노라”(4)

인물평전
임진란 구국공신
송암 김면 장군(4)

우척현 전투 428주년 문화행사(2020년).jpg

428주년 기념 추모제 문화 행사

 

 

<지난 183호에 이어>

도암서당은 김면 장군의 후손들이 1666년(현종7)에 건립한 사당으로 김면 장군을 제향하는 곳이다. 김면 신도비는 김면 장군 유적의 입구 왼쪽 능선상에 위치하고 있다. 1789년에 조성된 것으로 채제공(蔡濟恭)이 찬했다. 윤선거(尹宣擧)가 행장(行狀)을 짓고, 채제공이 신도비문을 지었다.
1988년 9월 23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76호로 지정됐고, 쌍림면 고곡리 칠등마을에서 북쪽으로 500m 떨어진 곳에 있다. 묘소에 신도비(神道碑)와 망주석(望柱石) 2개가 있고, 도암서당(道巖書堂)·도암재(道巖齎)·도암사당 교지(敎旨) 4장 등이 있다.
묘소는 1593년(선조26)에 조성됐고, 절충장군행경상우도병마절도사 겸 지의금부사송암김공면지묘, 증정부인 완산이씨부(折衝將軍行慶尙右道兵馬節度使 兼 知義禁府事松菴金公沔之墓, 贈貞夫人 完山李氏附)라 쓰여진 비가 있다.
신도비는 1929년 3월 조성했는데, 채제공(蔡濟恭)이 찬(撰)한 비명(碑銘)에 유명조선국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절충장군 행경상우도병마절도사 송암선생 김공신도비(有明朝鮮國贈 資憲大夫 吏曹判書 兼 知義禁府事 折衝將軍 行慶尙右道兵馬節度使 松菴先生 金公神道碑)라 했다.
▣ 학문 활동과 기타
조선 중기에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출현함으로써 경상우도의 학문은 절정에 올랐다. 그는 삼가, 김해를 거쳐 진주 덕천동에 정착해 도학의 터전을 마련하고 수많은 문하생을 길러냈다. 이후에는 낙동강을 중심으로 강좌학파와 강우학파로 분기됐다. 남명의 상의(尙義)와 주기적인 기상과 학풍은 그의 문도들에게 영향을 줘 경상우도는 남명학파의 본거지가 됐다. 스승의 영향을 받은 남명 제자들은 행동을 요구하는 난세(亂世)에 두드러진 활동을 펼쳤다. 그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시 의병을 일으킨 대표적인 사람은 곽재우(의령), 정인홍(합천), 김면(고령), 이정(함안), 이대기(초계) 등이었다.
김면의 경우 김우옹(金宇顒), 정구(鄭逑) 등과 남명을 일찍부터 찾아갔다. 특히 남명이 그의 호를 지어 준 사실, 벼슬길에 나서지 않았던 점, 율례지(律禮誌) 7편을 남명에게 보여 수정을 부탁한 사실 등에서 그가 초기에는 퇴계보다는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남명학에 경도됐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김면의 초기 의병 지휘부가 참여한 곽준(郭䞭), 문위(文緯) 등도 남명의 제자였다.
김면은 어려서부터 학업에 뜻을 뒀으며, 한강 정구 등과 막역한 친구였고,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성리학으로 경의학(敬義學)을 닦아 후진을 가르치는 데 힘썼다. 정구는 동강(東岡 김우옹과 한마을에서 자라 젊어서부터 사이가 좋았다. 송암(松庵) 김면(金沔), 존재(存齋) 곽준(郭䞭), 옥산(玉山) 이기춘(李起春)도 당대의 명사였는데, 선생과 의기가 투합해 서로 만나면 의리에 대해 강론하며 저녁 내내 지칠 줄을 몰랐고 밤새 잠도 자지않았다고 한다.
김면은 천성이 절의가 있고, 충심이 돈독해 의병을 모집할 때 가족이 10리 밖에 있었으나 한 번도 가보지 않고 가족들에 대한 걱정도 하지 않았다. 임진왜란 때 의병대장 곽재우(郭再祐)와 경상감사 김수(金晬)가 서로 격문을 띄워 상대방의 죄를 주장했으나, 김면이 두 사람을 설득해 갈등을 해소하고 화해하도록 했다.
김면은 장수의 집안에서 태어나서 강개(慷慨)하게 큰 절개가 있었는데다 유술(儒術)이 저절로 드러나고 덕망(德望)과 인선(仁善)으로 의로움을 행함으로 해서 사류(士類)들에게 추앙받았다. 그러나 공은 주저하면서 뒤로 물러나 남에게 양보하는 것이 군자다운 행동이라 칭했고, 유람하면서 돌아다니는 습관을 좋아하지 않았다. 힘쓰는 일은 근실한 공부에 뒀으므로, 종족(宗族)과 향당(鄕黨)이 항상 칭송하고 성심으로 복종(服從)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부사공(府使公) 김세문(金世文)이 북진(北鎭, 경원)에서 죽었을 때는 공이 남쪽의 고향에서 도보로 급히 달려가서 몸소 영구(靈柩)를 부축해 돌아왔다. 비록 전패(顚沛)의 위급한 즈음에 있으면서도 상제(喪祭)를 한결같이 예제(禮制)에 따라 행했다.
모부인(母夫人)의 집에서 모시고 살 때는 좌우로 나아가 봉양하며 정성과 공경을 갖추 다 했는데, 상(喪)을 당하기에 미처 애척(哀戚)과 역복(易服)을 예절(禮節)에 알맞게 하기를 한결같이 전의 아버지 상 때와 같이 했다. 거처하는 마을의 산기슭에 나아가, 선영(先塋)에서 서로 바라보이는 땅에다 대(臺)를 쌓아 그 이름을 회선대(懷先臺)라고 해, 아침저녁으로 무덤을 바라보면서 종신토록 사모하는 마음을 의탁했다. 그가 의병장으로 있을 때에 가족이 10리 바깥에 있었지만, 한 번도 가서 보지 아니했고, 유리(流離)하고 굶주렸으나 조금도 고휼(顧恤)하지 아니했다. 선산(先山)이 있는 곳을 지나갔을 때는 본현(本縣)에서 제수(祭需) 올릴 것을 준비했다. 그러나 공이 물리치면서 말하기를, “주상(主上)께서 능침(陵寢)에도 제사지내지 못하는데, 내가 어찌 감히 공청(公廳)에서 마련한 것을 받아서 나의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겠는가” 하고, 제문(祭文)을 지어서 무덤에 고했다. 이것을 보더라도 공의 결백한 마음을 알 수가 있다.
한편 김면의 학문을 살펴볼 수 있는 저서로는 『상평록일기(常平錄日記 )』,『삼강략(三綱略)』2권, 『심유지(心遺誌)』3권, 『봉선의(奉先儀)』2권, 『율례지(律禮誌)』2권, 시문집 등이 있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모두 거두어들여져 없어지고, 현존하는 저서는 『송암실기』3권만이 남아 있다.
『송암실기』는 1772년(영조 48)에 한방윤(韓邦胤)이 김씨 문중의 서책이 보관되어 있는 상자에서 김면의 시문과 일기를 발견, 이를 최재억(崔載億)과 이회근(李悔根)이 『제선생유집급문견신록(諸先生遺集及聞見新錄)』에 수록했으며, 1785년(정조9) 후손들이 이를 보충해 편집·간행했다. 내용 가운데 서(書)는 주로 곽재우·김성일에게 보낸 것으로, 임진왜란 때 왜적의 침입에 대항해 같이 힘을 합칠 것을 호소하고 국토를 수복할 날이 멀지 않았음을 믿고 더욱 분투할 것을 촉구한 글이다. 창의사적 중 「임계일기(壬癸日記)」에는 임진왜란 직후 곽재우·문위(文緯) 등과 함께 의병을 규합한 뒤 정진(鼎津)에서 대승을 거두고 뒤이어 무계(茂溪)에서 적장을 죽인 일, 사암(沙巖)에서 별도로 의병을 규합해 의병대장의 직책을 맡은 일 등이 소상히 기록돼 있다.
『송암선생실기』는 1785년에 간행됐다.『송암실기(松庵實記)』 편찬 2년 뒤인 1774년(영조 50) 당시 현감이던 김수묵의 서문을 받아 1권의 책이 완성됐으나 출간하지 못했다. 그리고 1785년(정조9) 다시 유고, 사적, 부록으로 편차(編次)하고 김상보(金尙普)의 발문과 현감 김중조의 서문을 받아 완성했다. 중권에「창의사적(倡義事蹟)」·「임계일기(壬癸日記)」·「모계수기(矛溪手記)」 등이 들어 있다.
하권에는 제문(祭文), 가장(家將), 행장(行狀), 시장(諡將), 「도암사상량문(道巖祠上梁文)」, 「도암사봉안문(道巖祠奉安文)」 등이 있다.
▣ 김면 장군 유적, 도암서원 현창사업
고령김씨 대종회(종회장 김용인)에 따르면 2021년부터 6년간에 걸쳐 연차적으로 국·도·군비를 투입해 김면 장군 유적지 도암서원(道巖書院)을 새롭게 단장하는 현창사업을 한다고 밝혔다.
사업내용을 보면, 도암서원(경북도문화재 76호) 전시관을 새롭게 단장하고, 김면 장군과 임진왜란 의병활동에 대한 각종 자료를 전시해, 애국애족의 뜻을 함양하고 그 뜻을 기리고자한다.
1단계 사업으로 신도비 비각, 안내판 설치, 조경 등 묘역을 정비하고 산책로 개설 및 편의시설 설치, 김면 장군 동상 건립 및 위령탑 건립, 화장실 리모델링 등 대대적으로 정비한다.
그리고 순국 9인 위령탑 및 순의비 건립, 제단 설치, 식당, 강당, 샤워실 등을 설치하고, 관리동 신축 이전 및 창고 신축, 그리고 서원 주변 경관 조경 사업을 실시키로 했다.
이 사업은 대가야역사문화 관광업과 연계해 나라사랑 정신문화 향상을 위한 유적지의 관광활성화 사업으로 추진한다.
2단계 사업(2023년~2024년)으로 생가 복원 사업을 위해 부지를 매입하고, 두 차례의 학술논문 발표회를 갖기로 했다.
또한 현 송암정(고령군 양궁장)을 도암서원 영내로 이전해 탈의실·샤워장 시설을 갖춰 전천후 시설로 운영토록 한다.
3단계 사업으로 전시관을 신축하고, 관리사무실 신축, 강당 신축, 주차장 확장 미 편의시설 등 대대적인 현창사업이 계획돼 있음을 고령김씨 대종회에서 밝힌 내용이다.
대종회는 취지문을 통해 임진왜란(1592~1598)은 왜구의 침입으로 국가존망의 위기를 맞이한 전쟁이었다. 그리고 이 국난을 극복하는 데는 우국충정으로 봉기활약한 의병들의 공이 지대했으며, 전국에 창의구국의 활약을 한 의병장은 130여명이나 됐다.
이 가운데 송암 김면 선생은 전국에서 제일 먼저 의병을 일으켜서 큰 전공을 세우고 순국, 전상, 실종 등 참화를 입었을 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우리 종문이 입은 피해상도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러나 송암 선생에 대해서는 국가문화재지정 서원건립 추원향사 등 응분의 예도를 갖추고 있으나 함께 창의순국 등 선조의사들에 대해서는 국가에서 아무런 추원의 예도를 갖지 못하고 있음은 지극히 송구한 마음 금할 수 없다.
그래서 때 늦었지만 지금부터라도 임란창의 순국한 선조의사들의 활약상과 전공을 재조명하고 숭고한 유지를 추원 기념할 상징적 모체인 임란순국선조(족친)의사 순의비(殉義碑)를 건립해 그 우국충정을 추원 선양하는 등 필요한 예도를 갖게 하는 것이 후손은 물론 도암서원을 방문하는 선열들에 대한 도리를 하는 것이란 생각에서 추진하게 됐다고 대종회에서 알려왔다.
▣ 후손, ‘거창 의병이 없었다면 나라도 없다’ 책 발간
‘只知有國不知有身’ “오직 나라 있는 줄만 알고 내 몸 있는 줄 몰랐노라” 임진왜란 구국공신 김면 의병도대장 어록이 말해주듯, 송암은 나 개인은 없고 오직 나라만이 존재한다는 애국심의 혼이 서려 있는 감동적인 문구다.
송암은 자기 몸은 돌보지 않았고, 특히 가족이 십리 안에 있어도 찾지 않았으며, 근 1년 동안 갑옷을 벗지 않고 여름이 지나고 겨울의 찬바람과 눈서리에 노출되는 것도 괘념치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곧 죽을 것이라고 했지만 조금도 괴이치 않고 오직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구하는 일에만 힘을 다 했기에 진중에서 병을 얻어 순국했다.
거창 우척현(牛脊峴) 전투는 경상우도를 지켜서 임진왜란 개점기에 일본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어 결국 조선에서 후퇴하게 만든 계기가 된 전투로 후손들은 평가한다.
후손들은 우척현 격전지에 기념비를 세우고 매년 8월 16일 ‘우척현 전승 기념제’ 문화행사를 자치단체 기관장들의 참석아래 가지고 있다. 또한 거창문화원에서는 ‘거창지역의 임진란사연구’ 학술대회도 열고 있다.
송암의 우국충정과 선비정신을 기리는 의병활동에 걸맞은 기념비를 건립하고, 고령김문 후손들은 ‘李忠武公全書’에 나오는 무경상즉무전라(無慶尙則無全羅)를 인용해 ‘거창 의병이 없었다면 나라도 없다’라는 책을 발간 송암을 현창한다. 끝    주간고령 기획팀

참고문헌 : 김면장군 후원회 발행, ‘임진란 구국공신 의병도대장 김면 장군’, 편저자 南齋 김재호 ‘거창 의병이 없었다면 나라도 없다’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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