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최씨(慶州崔氏) 동성군파(東城君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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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경주최씨(慶州崔氏) 동성군파(東城君派)

무성서원.jpg

무성서원<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원촌1길 44-12(무성리500)>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득성조(得姓祖) 소벌도리(蘇伐都利)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촌장(村長) 소벌도리(蘇伐都利)가 서기전 57년 오촌장(五村長)과 더불어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신라 개국왕으로 추대(推戴)하였다. 유리왕 9년(32년) 공에게 개국좌명(開國佐命)의 공(功)이 있다 하여 고허촌(高墟村)을 사량부(沙梁部)라 하고 촌장을 대인(大人)이라 하였으며, 6부에 성씨를 사성(賜姓)할 때 사량부에는 최씨(崔氏) 성(姓)을 주었다. 법흥왕 3년(서기 516년) 휘(諱)를 충선군(忠宣君)이라 하였으며 태종무열왕 3년(656년) 문열왕(文烈王)으로 추대하였다.
(2) 경주최씨(慶州崔氏) 시조(始祖) 최치원(崔致遠)
자는 해부(海夫)이고 호는 고운(孤雲)·해운(海雲)이다. 아버지는 경주 사량부(沙梁部)출신의 최견일(崔肩逸)이다. 경문왕 8년(868년) 12세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가서 경문왕 14년(874년)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하였다. 헌강왕 2년(876년) 당나라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県尉)가 되었다. 그후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駢)의 추천으로 관역순관(館驛巡官)이 되었다. 879년 황소(黃巢)가 반란을 일으키자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営兵馬都統)이 되어 이를 칠 때 고변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지어  황소(黃巢)에게 보내었는데 황소(黃巢)가 이 격문(檄文)을 보다가 저도 모르게 침상에서 내려앉았다는 일화가 전할 만큼 뛰어난 천하의 명문(名文)으로《계원필경(桂苑筆耕)》에 실려 전한다. 그 공적으로  경문왕 10년(879년)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내공봉(殿中侍御史內供奉)으로 도통순관(都統巡官)에 승차(陞差)되었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았다. 헌강왕 11년(885년) 신라로 귀국하여 시독겸한림학사(侍讀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서서감지사(瑞書監知事)에 임명되었다. 진성여왕 4년(890년) 부성군(富城郡), 대산군(大山郡), 천령군(天嶺郡) 등지의 태수(太守)를 역임하였다. 진성여왕 8년(894년)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왕에게 올려서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고자 하여 그에게 아찬(阿湌) 벼슬을 내렸으나 정치 개혁안이 실현되지 않아 은퇴의 길을 택하였다. 유불선(儒佛仙) 통합사상을 주창(主唱)하였으며 산수간(山水間)에서 방랑하다가 만년에 가야산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친 것으로 보인다. 고령군 쌍림면 신촌리에 있는 정자 벽송정(碧松亭)에 그의 시문(詩文)이 남아 있고 가야산신 정견모주(正見母主)가 곧 천신(天神) 이비가(夷毗訶)에 응감(應感)되어 대가야의 왕 뇌질주일(惱窒朱日)을 낳았다는 대가야(大加倻)의 건국신화(建國神話)가『석이정전(釋利貞傳)』에 수록되어 있다. 시호(諡號)는 문창후(文昌侯)로 문묘(文廟)에 종향(從享)되어 있다.
(3) 관향(貫鄕)의 유래
신라 초에 최씨로 사성(賜姓)받은 신라 사량부(沙梁部) 촌장 소벌도리(蘇伐都利)를 원조(元祖)로 하고 있으나 선계(先系)가 요원(遼遠)하여 확실한 계대(系代)를 알 수 없어 그의 24세 손으로 전해지는 최치원(崔致遠)을 시조(始祖)로 하였으며 득성조(得姓祖)로부터 대대로 경주(慶州)에 세거하였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경주(慶州)로 삼게 되었다.
(4) 분파(分派)
경주최씨(慶州崔氏)는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의 후대에서 크게 26파로 분파(分派)되어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으나 그중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광정공파(匡靖公派)·정랑공파(正郞公派)·사성공파(司成公派)·화숙공파(和淑公派)·충렬공파(忠烈公派) 등 6대파가 주축을 이루고 있다.
(5) 문묘(文廟) 종향(從享), 체협공신(諦祫功臣)을 배출한 명문(名門)
경주최씨(慶州崔氏)는 문묘(文廟)에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이 종향(從享)되어 있고 공신(功臣) 중의 공신(功臣)으로 공로가 있는 신하가 죽은 뒤에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사당인 종묘(宗廟)에 함께 제사를 지내는 체협공신(諦祫功臣)에 최승로(崔承老), 최숙(崔肅), 최제안(崔齊顔) 등 세 분을 배출하는 등 학문 및 관위(官位)에서 드러난 조상을 둔 명문(名門)이다.
(6) 경주최씨(慶州崔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경주최씨(慶州崔氏)는 406가구 1,159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낙안공(落安公) 처사(處士) 최자용(崔自溶) 후손은 우곡면 봉산리, 동성군(東城君) 최종유(崔宗楡) 후손은 우곡면 속리, 개진면 개포리, 오사1리, 우계(寓溪) 처사(處士) 최동환(崔東煥) 후손은 덕곡면 옥계리 등에 집성촌(集姓村)을 이루고 세거하고 있다.
(1) 고려시대
① 최승로(崔承老)
신라 6두품인 은함(殷含)의 아들로 태조 10년(927년)에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12세 때  태조에게 불려나가『논어(論語)』를 읽었다. 이에 태조는 염분(鹽盆 : 소금을 만들 때 쓰는 큰 가마)를 하사하고 원봉성학생(元鳳省學生)이 되게 하였다. 또한 안마(鞍馬)와 예식(例食 : 관례에 따라 받는 곡물) 2,000석(碩)을 하사하였다. 이때부터 그에게 문한(文翰)에 관한 모든 책임을 맡겼다. 성종 1년(982년) 정광행선관어사상주국(正匡行選官御事上柱國)을 지낼 때 시정득실(時政得失)을 논하는 상소문이 유명한 ‘시무28조(時務二十八條)’로 척불숭유(斥佛崇儒)에 바탕을 둔 개혁안을 내어 국가체제를 정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성종 2년(983년)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 성종 7년(988)년에는 문하수시중(門下守侍中)으로 청하후(淸河侯)로 봉해져 식읍(食邑) 700호(戶)를 받았다. 성종 8년(989년)년에 졸(卒)하였다. 태사(太師)에 추증(追贈)되고, 목종 1년(998년) 체협공신(禘祫功臣)으로 성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그리고 덕종 2년(1033년)에 대광내사령(大匡內史令)이 더해졌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② 최숙(崔肅)
대광내사령(大匡內史令)을 증직(贈職) 받았던 승로(承老)의 아들로 태어났다.  성종 12년(993년)에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현종 18년(1027년) 목종의 체협공신(禘祫功臣)으로 묘정(廟廷)에 배향되었으며, 덕종 2년(1033년) 태사(太師)로 추증(追贈)되었다. 시호(諡號)는 원래 인효(仁孝)였으나, 선종 2년(1085년)에 문종의 시호(諡號)를 피하여 충의(忠懿)로 고쳤다.
③ 최제안(崔齊顔)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낸 숙(肅)의 아들로 태어났다. 최승로(崔承老)의 손자이다. 현종 11년(1020년) 천령절(千齡節)을 하례(賀禮)하기 위하여 거란에 다녀와서 태자우서자(太子右庶子)가 되고, 1030년에 중추사(中樞使)을 거쳐 덕종 3년(1034년) 호부상서(戶部尙書)·이부상서(吏部尙書)·상서좌복야중추사(尙書左僕射中樞使)·참지정사(參知政事) 등을 역임하였다. 정종 9년(1043년)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 판상서호부사(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 判尙書戶部事)에 임명되고, 뒤에 태사문하시중(太師門下侍中)을 역임하였다. 문종 1년(1046년) 졸(卒)하였으니 3일간 조회(朝會)를 폐지하고, 시호를 순공(順恭)이라 하였으며 태사중서령(太師中書令)에 증직(贈職)되었다. 문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순공(順恭)이다.
④ 최선지(崔善之)
초휘는 제원(齊元)이고 자는 경여(慶餘)이다. 문종 1년(1047년) 문종이 임금이 불러서 선지(善之)라고 사명(賜名)하는 조서(詔書)를 내렸다. 문종 28년(1074년) 9월 도염서사(都染署史)에 제수(除授)되었다.
⑤ 최종유(崔宗楡)
형부상서(刑部尙書) 적립(適立)의 아들로 태어났다. 인종 때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를 거쳐 중서시랑판비서성사(中書侍郞判秘書省事)를 역임하였으며 동성군(東城君)에 봉군되었으며 시호는 충민(忠敏)이다.
⑥ 최인호(崔仁護)
중서시랑판비서성사(中書侍郞判秘書省事) 종유(宗楡)의 아들로 태어났다. 의종 때 유교경전을 시험보았던 경의과(經義科)에 급제한 후 차서(次序)를 뛰어 넘어 좌사간(左司諫)에 초배(超拜)되었으나 직언하기를 기피하지 않아 원도(遠島)로 유배되었으나 얼마 후에 불러 들여 중서령(中書令)의 관직을 주었다.
⑦ 최돈례(崔敦禮)
중서령(中書令) 인호(仁護)의 아들로 태어났다. 명종 8년(1178년) 감찰어사(監察御史)로서 연해명주도(沿海溟州道)에 찰방사(察訪使)로 파견되어 민정(民情)을 살폈다.
⑧ 최정분(崔正芬)
감찰어사(監察御使) 돈례(敦禮)와 상서(尙書) 진(縉)의 따님 정부인(貞夫人) 청주한씨(淸州韓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고종 6년(1219년) 호부시랑(戶部侍郞)이 되어 몽고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무기와 군수물자를 검열하였고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使)·어사대부(御史大夫)·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냈다.
⑨ 최정화(崔正華)
감찰어사(監察御使) 돈례(敦禮)와 상서(尙書) 진(縉)의 따님 정부인(貞夫人) 청주한씨(淸州韓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추밀원사(樞密院事)·호부상서(戶部尙書)·유수(留守) 등을 지냈다. 고종 3년(1216년) 거란(契丹)의 후예인 금산왕자(金山王子)와 금시왕자(金始王子)가 의주(義州)·삭주(朔州)·영주(寧州) 등지로 침입하여 식량을 약탈하고, 그곳을 생활의 근거지로 삼으려 하자 후군병마사(後軍兵馬使) 김취려(金就礪)와 함께 지병마사(知兵馬事)로서 교전(交戰)하여 많은 전공(戰功)을 세웠다.
⑩ 최간(崔澗)
참지정사(參知政事) 정분(正芬)과 정경부인(貞敬夫人) 청주한씨(淸州韓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원종 때 우대언(右代言)으로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가 되어 임연(林衍)의 야별초(夜別抄)를 잡아서 금주(金州)에 가두었다.
⑪ 최석(崔碩)
경상도안찰사(慶尙道按察使) 간(澗)과 정부인(貞夫人) 개성왕씨(開城王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충렬왕 7년(1281년) 승평부사(昇平府使)로 재직 중 비서랑(秘書郞)으로 전직하자 마을사람들이 예전의 관례에 따라 말 8필을 기증하였는데, 공이 상경 후 기증받은 말 8필과 공의 암말이 승평부(昇平府 : 현재 순천)에서 낳은 망아지 1마리를 보태어 9필을 다시 돌려보내 그 뒤부터 부사가 오고갈 때의 이런 관폐(官弊)가 없어졌다. 이에 주민들은 그의 송덕을 기려 비를 세우고 ‘팔마비(八馬碑)’라 하였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76호로 지정되었다.
⑫ 최백안(崔伯顔)
밀직부사(密直副使) 안우(安祐)와 숙부인(淑夫人) 함안조씨(咸安趙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공민왕 10년(1361년)〈홍건적의 난리 때〉왕이 남행(南行)할 때 검교상호군(檢校上護軍)으로 호종(扈從)하여 ‘신축호종일등공신(辛丑扈從一等功臣)’에 책록(策錄)되었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전리참판(典理參判)에 올랐다. 공양왕 때 대봉산에 들어가 백이숙제(伯夷叔齊)의 고사에 빗대어 ‘채미가(採薇歌)’를 지었다.
(2) 조선시대
① 최예(崔枘)
호는 태재(泰齋)이며 전리참판(典理參判) 백안(伯顔)과 숙부인(淑夫人) 개성왕씨(開城王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종 때 풍해도(豊海道 : 현재 황해도)에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백성에게 훈유(訓諭 : 가르치어 타이름)를 알리던 벼슬인 선유사(宣諭使)에 제수(除授)되었으며 풍해도(豊海道)를 안정시킨 후에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
② 최제남(崔悌男)
대사성(大司成) 예(枘)와 직강(直講) 광(匡)의 따님인 숙부인(淑夫人) 하양허씨(河陽許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영월군사(寧越郡事)·사헌장령(司憲掌令)·수원도호부사(水原都護府使)·황주목사(黃州牧使)·부정(副正) 등을 역임하였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입암공(立巖公) 언준(彦峻)의 5세손으로 가선대부(嘉善大夫) 부호군(副護軍)을 지낸 원협(遠峽)이 영조 때 창원 완암촌(完岩村)에서 고령군 개진면 양전동으로 이거하였으며 일파(一派)가 속리(涑里), 사촌리(沙村里) 등으로 전거(轉居)한 것으로 파악된다.
(2) 창암공(蒼巖公) 종준(宗峻)이 선조 때 달성군 구지면 도동에서 고령군 개진면 개포동으로 이거하였고 일파(一派)가 개진면 오사1리로 전거(轉居)하였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최곤술(崔坤述)
자는 경순(敬純) 또는 자강(子剛)이며 호는 고재(古齋)이다. 진릉참봉(眞陵參奉) 창수(昌粹)의 장남으로 고종 7년(1870년) 태어났다. 경상관찰부(慶尙觀察府)가 실시한 영재선발시험(英才選拔試驗)에 수석(首席)으로 합격하여 낙육재(樂育齋)에서 3년간 수학(修學)하였으며 고령향교 내에 만하(晩霞) 이봉조(李鳳朝)가 설립한 사립(私立) 명륜학원(明倫學院) 교장(校長)과 전교(典校)를 역임하였다. 1904년 대한제국 때에 비서원(秘書院)의 비서승(祕書丞)에 임명되었으나 불취(不就)하고 현존 최고(最古) 문집인 고운집(孤雲集) 상∙하권 양권을 발간하였으며 이듬해 중간(重刊)하였다. 고운 최치원 선생의 학사당(學士堂) 이전 및 건축시 주재(主宰)하였으며 1953년 졸(卒)하였다. 고재집(古齋集) 2권이 전하며 후학들이 ‘고재계(古齋稧)’를 수계(修契)하여 공을 추모하고 있다.
② 최곤탁(崔坤逴)
자는 경구(敬久)이며 호는 수강(叟岡)이다. 진릉참봉(眞陵參奉) 창수(昌粹)의 차남으로 고종 16년(1879년) 태어났다. 승훈랑(承訓郞) 정릉참봉(貞陵參奉)을 지내고 관의(官醫)로 봉직하면서 많은 의료시혜(醫療施惠)를 베풀었으며 순종 때 재무행정을 관장하던 중앙관청인 탁지부(度支部) 주사(主事)를 지냈다.
(2) 근∙현대 인물
① 최운수(崔雲守) : 장학관, 경주여고 교장
② 최운지(崔雲芝) : 관세청차장, 3선 국회의원, 대한지적공사, 국제전선 사장
③ 최재호(崔在護) : 법원행정처장, 대법관, 영남대 재단이사장
④ 최재삼(崔在三) : 대구 지방경찰청장, 해양경찰청장
⑤ 최재욱(崔在旭) : 환경부장관, 국무조정실장, 2선 국회의원
⑥ 최우종(崔雨鍾) : 부강금속 대표이사, 경주최씨 동성군파 종친회장
⑦ 최재문(崔在文) : 대구과학고 교장
⑧ 최우석(崔祐碩) : 논산지청 검사
⑨ 최정수(崔貞秀) : 육사20기, 육군 대령, 연대장, 스페인대사관 국방 무관
⑩ 최호균(崔浩均) : 삼천리자전거 전무
⑪ 최영종(崔英鍾) : 현대증권 대구경북본부장
⑫ 최성종(崔成鍾) : 대구공항공사 사장
⑬ 최인종(崔仁鍾) : (주)미드니 대표, 2021년 산업금탑훈장 수상
⑭ 최석종(崔石鍾) : (주) Y.M.P 대표, 2021년 산업금탑훈장 수상
⑮ 최재왕(崔在王) : 대구신문 사장
⑯ 최호종(崔好鍾) : (주)세창건설 대표
⑰ 최재인(崔在寅) : (주)이탈리아노 대표
⑱ 최지수(崔知洙) : L.A 변호사

 

자료제공 : 후손 최직종(崔直鍾)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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