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영웅’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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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불멸의 영웅’ “아버지가 자랑스럽다”

손 원(손봉화 6.25참전용사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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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원(손봉화 6.25참전용사 아들)

 

우리 부부는 매주 홀로계시는 아버님(손봉화, 90 대가야읍)을 돌봐 드리려 시골에 간다. 지난주에 갔을 때다. 탁자위에 포장을 갓 뜯은 조그마한 케이스가 놓여 있었다. 케이스 안에는 동전 크기의 은메달이 들어 있었다. 케이스 다른 쪽 면에는 국무총리 감사의 글도 있었다. 무엇보다도 글제가 돋보였다. "불멸의 영웅" 이었다. 은메달은 6.25 70주년(1950-2020) 감사메달 이었다.
아버님은 6.25참전용사 이시다.
그러고 보니 아버님이 제대하신 지도 70년이 되어 가는 듯하다. 구순인 아버님이 자신의 군번을 기억하신다. 며칠 전 참전용사 기념회에서 실태조사서를 보내 와서 내가 대필을 해 드렸는데 서식에 군번을 적도록 되어 있어 순간 난감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군번을 적어야 한다고 했더니 바로 알려 주셔서 놀랐을 정도다.
아버님 생에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을 꼽으라면 아마도 몸소 겪으신 전쟁터의 기억이 첫째가 아닐까 싶다.
남자들은 군대 갔던 이야기를 평생 한다고 했다. 남자 둘만 모이면 자신의 군 생활 때 겪은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여자가 같이 들으면 금방 지루해 하고 흥미를 잃지만 남자들은 밤을 새워 이야기해도 못다 할 정도다. 소낙비에 진흙탕 연병장에서 팬티만 입고 축구했던 이야기는 흔한 이야기로 여자들이 가장 싫어한다고 한다.
평시의 군 생활도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데 생사의 갈림길에서 3년간의 군 생활은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내가 어릴 때 아버님은 전시 때의 군 생활을 자주 말씀하셨다. 어린 나이에 전쟁터의 절박했던 상황을 너무 자주 들어서인지 나는 전쟁 꿈을 많이 꾼 것 같다. 불안한 꿈으로 전쟁의 참상이 나의 머릿속에 또렷이 각인 되었다. 전쟁의 참상을 듣고 꿈에도 나타날 만큼 간접체험을 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어릴 때 전쟁에 대한 공포심으로 정서적인 불안을 겪었던 것 같다. 아버님이 제대를 하시고 3년 후에 태어 난 나 자신이 전쟁을 간접 체험하고 공포심을 가질 정도였으니 남편을 군에 보낸 새댁과 부모님은 얼마나 피 말리는 나날이었을까?
아버님께 들었던 말씀이 기억난다. "치열한 전투가 밤낮으로 이어졌지. 잠도 못자고 극도의 긴장 속에 참호를 기어 다녔지. 깜빡 졸고 정신이 들면 내 살을 꼬집어보곤 했다. 그래서 내가 살아 있구나. 방금 옆에 있었던 전우는 꼬꾸라져 식어가고 있었다. 순간순간이 생사의 갈림길. 삶과 죽음이 함께하는 공간. 살아 있다는 것이 기적처럼 여겨졌지.”
전쟁이 끝날 무렵 제대를 하셨다고 했다. 그 때까지 수많은 전우가 목숨을 잃었기에 자신이 무사히 제대할 수 있을까를 의심할 정도… 살면서 가끔 속상하는 일이 있으시면 전쟁터에서 겪은 생사의 순간을 떠 올리시고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는데. 이쯤이야."
"귀가해서 처자식과 행복하게 살아야지~ 했었지?"
"나는 여생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다."라고 자위하셨다.
아버님은 산전수전 다 겪으신 역전의 용사임이 분명하다.
전쟁의 참화로 먹고살기도 힘든 시기에 국가에서는 참전용사들을 미처 챙기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아버님은 살아 돌아 온 것만으로도 감사해 하셨다.
스스로 국가를 위해 목숨을 내놓고 나라를 지켜 낸 역전의 용사였음에 대한 자부심이 크셨다.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도 않았고 관심이 적어서 그때의 이야기를 가족과 지인에게만 말씀하시는 정도였다.
아버님의 말씀을 새기고 있는 나는 “이러한 일들이 훗날 사라져 간 한 무명용사의 전설쯤으로 남겠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가 OECD회원국이 되고 경제사정이 나아질 무렵, 정부는 그간 잊고 있었던 참전용사에 대한 예우가 조금씩 시작된 것 같다. 늦게나마 참전용사를 국가유공자로 예우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유공자 빼지를 달아주고 보훈병원을 지어 다소의 혜택을 주고 있다. 아버님은 빼지를 항상 옷깃에 달고 다니신다. 대문 명패와 나란히 "참전유공자의 집"이란 또 다른 패찰도 달아줬다. 몇 해 전 부터 유공자 수당도 얼마씩 받고 계신다.
참전용사들이 일흔을 넘긴 나이에 예우를 시작 했으니 늦어도 너무 늦다.
그간 수많은 참전용사는 국가로 부터 아무런 예우도 받지 못한 채 유명을 달리하기도 했다.
50년 동안 국가는 이들에게 무엇을 해 줬던가? 물론 전사자나 부상자에 대한 보훈은 있었지만 무사한 자에 대하여는 아무런 보상도 없었다.
강성한 국가는 현역에 대한 예우 못지않게 퇴역 자에 대한 예우도 특별하다고 한다. 위기 때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이들의 수고를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기에 지금의 예우 수준도 너무나 부족한 것 같다.
아버님은 늦게나마 자신들을 잊지 않고 예우를 해 주는 국가에 감사하고 계신다.
그것이 노병의 태도이고 후세를 위한 진정한 희생정신이란 생각이 든다.
지금 살아 계시는 참전용사 대부분 아흔을 넘기고 있다. 아흔까지의 평균 생존율을 고려하더라도 5%도 안 될 정도다.
20대의 공적이 50년간 묻혀 있다가 일흔이 넘어서야 국가가 챙기고자 함이 아쉽다. 아버님은 70년이 지난 구순의 나이에 "불멸의 용사"란 메달을 받으셨다. 그나마 살아생전의 수훈이라 얼마나 다행인가?
자식 된 나의 마음이 뭉클 했다. 나와 나의 자식까지 3대가 만기제대를 했다. 그 중에 아버님의 유공이 가장 빛남은 말할 것도 없다.
후대가 먹고살기 힘든 시기를 견뎌 온 터라 우리의 어르신네들은 자신을 챙기지 않은 국가를 탓 하지 않으셨다. 자신들이 지켜 낸 나라의 번영만을 기원해 오셨다. 그래서 국경일에는 국기게양을 꼭 하고 계신다.
지금이라도 그들의 생사를 불문하고 명예를 드높이고 충분한 예우를 했으면 한다.
며칠 전 참전 유공자회에서 가족 현황을 파악하는 조사서가 왔다. 조사목적이 "유공자 후예끼리의 친목도모"로 되어 있었다. 당사자들은 거의 돌아 가셨기에 자손들끼리나마 힘을 모아 선친의 호국정신을 선양하자는 취지인 것 같았다. 참으로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유공자의 가족이란 예우 정도는 있으면 좋겠다. 어떠한 혜택보다도 유공자의 가족으로서 긍지를 갖게 해 주는 것 또한 보훈이라고 여겨진다.
오늘을 사는 이들이 나라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었으면 한다.
보훈을 잘하고 있는 나라가 강성한 나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불멸의 용사"라는 동전크기의 메달이 무엇보다도 아버님의 명예를 더 높이기에 진열장 잘 보이는 곳에 올려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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