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나라 있는 줄만 알고 내 몸 있는 줄 몰랐노라”(3)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특집

“오직 나라 있는 줄만 알고 내 몸 있는 줄 몰랐노라”(3)

인물평전
임진란 구국공신
송암 김면 장군(3)

2. 도암서원 전경-경상북도 유적 제76호(쌍림면 칠등길 138).JPG

도암서원 전경 - 경상북도 유적 제76호(쌍림면 칠등길 138)
 
<지난호에 이어>
▣ 무계전투
6월에 조정에서 합천군수(陜川郡守)로 삼았는데 그 교서에 이르기를 “정진에서 양병(揚兵)함에 적은 넋을 잃었고 무계(茂溪)에서 칼을 휘두름에 시체가 강을 메웠다.”고 했다. 행조(行朝)가 비록 수 천리 밖에 있었지만은 공의 전적이 매우 드러나서 자세히 알고 있어서 9월에 장악원정(掌樂院正-正三品)을 배수하고 얼마 후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정삼품당상관)에 올랐다.
11월에 왕께서는 공의 위망이 가장 현저(顯著)하니 의병대장(義兵大將)의 호를 특별히 내리면서 그 교서(敎書)에 천백언(千百言)의 장려가 갖추어졌는데 그 끝에 이르기를 깊은 원수를 갚고 구업을 회복하는 것이 그대가 아니고 누구겠는가“라고 했다.
공이 교서를 읽고 또 읽어 눈물을 흘리니 온 군중이 흐느껴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처음에 정인홍(鄭仁弘)이 동시에 기병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공의 명성과 위망이 자기 위에 오름을 꺼려서 혐오하고 그 휘하들이 허위를 날조하여 헐뜯었으나 공은 하나같이 계교(計較)하지 않으니 인홍도 끝내 사색(辭色)으로서 대하지는 못했다. 이에 공은 글을 호남백(湖南佰)에게 보내어 군량과 원병을 청하였는데, 사지(辭旨)가 강개하여 구구마다 눈물이었다.
그런데도 호남백이 듣지 않으니 공은 더욱 분려(憤勵)하여 기계를 수선하고 병사를 장려하여 지례(知禮-김천 지역의 옛 이름)를 무찌르고 개령(開寧)을 공격했다. 영·호남의 여러 의장과 더불어 四도에서 진격하여 적의 소굴을 소탕하고자 약속하였는데 제의장이 기약대로 오지 않았다.
▣ 고령·지례·금산 수복의 공신
공은 홀로 군사를 지휘하여 나아가서 죽이고 얻은 바가 많았다. 이로서 고령, 지례, 금산 등 읍을 수복했다. 왕은 그 공적을 장하게 여겨서 거느린 부대로서 근왕(勤王)케 하니 공이 곧 행장을 갖추고 떠나려 하니 백성들이 듣고서 울면서 말하기를 “공이 여기 있지 않으면 우리는 어육(魚肉)이 됩니다.”하니 관찰사 김공 성일(金誠一)은 급히 행재소에 아뢰어 “김면이 본도를 한발이라도 떠나면 남방은 수습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명령하여 공을 본부에 머물러서 공적을 마저 이루도록 했다.
공은 군읍(郡邑)을 순행하여 흩어지고 도망간 병졸을 불러 모았으며, 눈비와 서리에 폭로(暴露)해 몸을 돌보지 않으니 사람들이 공을 근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공의 행차가 선산을 지나가니 수령이 제수를 갖추어 기다리니 공은 그를 물리치고 이르기를 “능침(陵寢)에도 향사를 궐하는데 내가 조상에게 제사를 올릴 수 있겠는가” 하고 글로서만 고유했다. 처자가 굶주려도 방랑하여 십리 안에 있어도 끝내 들리지를 않았다.
▣ 나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 적에게 알리지 말라
계사년(선조 26/1593) 정월에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로 제수하고 선전관을 보내어 유시하기를 “명나라 원병이 이미 평양을 이겼으니 경성의 적이 마침내 반드시 도망칠 것이다. 경은 정예병을 매복하여 하나라도 돌아감이 없게 하라”하니 공은 수임이래로 오직 은혜를 잡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이때에 성산(星山=星州)의 적을 무찔러서 목 베임이 수백 급이었다. 다구쳐서 선산(善山)에 진박(進薄)함에 깊이 들어감이 멈추지 않으니 관찰사가 사람을 보내어 이르기를 “바야흐로 적세가 성한데 어찌 서서히 하지 아니하오” 하니 공은 분연히 “범의 굴에 들어가지 않고서 어떻게 범의 새끼를 얻을 수 있겠소” 하고는 이미 여러 의장과 약속하였는데 공이 갑자기 병이 들어서 마침내 3월 11일에 진중에서 운명하였다.
바야흐로 병세가 위독할 때에 조공(趙宗道)이 손에 약사발을 들고 권하면서 “공이 만약 회복하지 못하면 국사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공이 억지로 일어나서 조공의 손을 잡고 이르기를 “내가 그대들과 함께 나라에 몸을 바쳐 왜적을 소멸하고 주상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맹세하였는데 불행하여 나의 수명이 여기서 마치니 이는 천명이로다. 하고 눈물을 흘리니 수하 군교와 좌우시자(侍子)들이 감히 우러러 보지를 못했다.
이어 조공에게 부탁하기를 “적이 내가 죽은 줄 알면 반드시 틈을 타서 엄습할 것이니 나의 죽음을 비밀에 부치고서 신창(新倉)에 이르러서 발상하라” 하고서 운명했다. 모든 장좌가 유명에 따라 시신을 받들고 신창에 돌아와서 비로소 발상하니 온 군중이 통곡하고 백성들은 발을 굴리면서 슬퍼 울지 않는 이가 없었다.
관찰사(金誠一)가 치계(馳啓)하여 아뢰기를 “강우 일대가 지금까지 보존된 것은 다 김면의 힘입니다. 장성이 한 번 무너졌으니 하늘이 순(順)을 돕지 않는 것입니다. 신이 홀로 남아서 어찌 꾀할까를 모르겠습니다.”고 했다. 왕께서 놀라시고 슬퍼하시며 특별히 명하여 병조판서를 증직하고 예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뒤에 선무원종공신일등(宣武原從功臣一等)으로 고쳐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가증했다.
▣ 공은 향년 53세에 타계
광해 초에 또 예관을 보내어 치제하였는데, 공의 향년은 53세요 모향모원(某鄕某原=高靈先瑩下)에 장사하였다. 조공 종도(趙宗道)와 곽공 준(郭䞭)이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다가 성이 함락되어도 굴하지 아니하고 죽었는데 그 충신(忠信)은 서로 생사로 맺어져서 서로 져버리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평일에 어버이를 섬김에 효로 들어났으니 황고(皇考) 찬성공이 북진(北鎭=慶源府使)에서 졸하였을 때 모부인을 뫼시고 영남 수천리에 날씨 또한 매우 더웠는데 공이 말도 타지 않고 도보로 호곡하며 달려가니 행로의 사람들이 모두 애통하게 여겼다. 뒤에 모부인의 상을 당하여서도 슬퍼하고 예를 다하기를 전상과 같이 하였다. 일찍이 공은 집 뒤의 산기슭에 대를 쌓고 회선대(懷先臺)라 하고 선영을 첨망하여 평생토록 사모함을 그렸다.
아! 사람이 사는 데는 오직 충과 효이거늘 바야흐로 공이 아버지의 상을 분상함에 수천 리를 도보로 갔다는 것은 이치에 마땅히 있을 수 없는 일이거늘 마침내 죽지 않는 것은 하늘의 뜻이 공을 효성에서 죽게 한다면 뒷날 국가가 망하려 할 적에 엎어지는 것을 붙들어 일으킬 임무를 질 사람이 없어서였을까!
끝내 이 왕사(王事)에 정성을 다하여 진력하다가 죽어서야 그쳤다. 공이 효에 죽지 않고 충에 죽게 한 것은 하늘이 우리 국가를 사랑해서 한 일일 것이다. 공이 몰한지 70여 년에 사림이 고령에 사우(祠宇)를 세워 조두(俎豆)로서 제향 함이니 도암서원(道巖書院)이다.
공이 무릇 장가를 두 번 들었다. 전배(前配)는 완산이씨(完山李氏=全州李氏) 부호군(副護軍) 황(煌)의 딸이고 후배(後配)도 완산이씨 부림부수(缶林副守) 건(建)의 딸인데 모두 슬하에 아들이 없었다. 아우 현령(縣令) 자(滋)의 아들 의립(毅立)을 후사로 삼았으니 그의 벼슬은 현령(縣令)이다. 의립의 장남은 정황(鼎黃)인데 동지중추(冬至中樞)요. 사위는 참의(參議) 오정(吳靖)이다. 중·현손 이하는 기록하지 않는다. 나에게 신도(神道)를 빛나게 해 달라고 부탁한 사람은 6세손 절도사(節度使) 자이다. 명하여 가로대.
학문에 체와 용이 있으니(학유체용) 어찌 한갓 사물일까(豈伊死物)
만나는 바 본분 다 하면(所遇盡分) 그 근원은 하나이라(其原也一)
공이 예적 정좌하고(公剒靜坐) 주자학하시더니(曰朱曰程) 
몸 일으켜 크게 부르짖음(起身大號) 의려 많이 모였네(義旅雲聚)
정진에서 적을 죽여(殺賊鼎津) 피바다 이루었고(履腸(俗子)涉血)
무계에서 적을 꺾어(摧鋒茂溪) 적들이 어오의 밥이 되었네(賊飼漁鰲)
왕께서 용만에 계셨지만(王在龍灣) 뛰어난 공적 들이시고(茂績升聞)
대장의 호 내리면서(錫號大將) 교서 함께 주시었네(고불從天)
공이 울음으로 배수하고(公拜以삽) 노둔하고 잔열하다 사양하니(臣駑且孱)
왕의 말씀 사양마오(王曰母讓) 그대 나의 장성이니(爾予長城)
무엇으로 사랑하리(용爾維何) 호절과 아기일세(虎節牙旋)
공이 대담하여(公有斗膽) 적굴을 개미처럼 보고(蟻視賊窟)
우리 의장 합심하여(同戌義將) 며칠 안에 소멸하려 했는데(不日掃滅)
천운인가 시운인가(天耶時耶) 공이 병에서 일어나지 못하니(公不起疾)
군과 민의 호곡은(軍民號哭) 소가 부르짖고 우레가 터지는 듯(牛吼雷裂)
왕 또한 애도하시어(王用悼惜) 찬란한 벼슬을 추증하셨네(有爛追爵)
공이 옛날 정을 주로 할 때는(公主靜) 소상인양 앉았더니(坐泥塑若)
묘용을 좀 베푸심에(略施妙用) 우리 사직 붙들었네(抉我社稷)
조두가 엄연하니(俎豆有儼) 그 덕에 보답일까(액云報德)
이를 명해 보여서(銘以(口示)之) 후학이 본보기 하노라(後學之則)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부 채제공 찬
▣ 임진왜란 이후 활동
김면은 임진왜란 중인 1593년 전쟁 중에 사망했다. 김면의 사망에 대해서는 학봉 김성일의 평가에 잘 나타나고 있다. 김면은 의병운동을 전개하면서 개인보다는 공적인 부분을 먼저 함으로서 신망을 얻었던 인물이었다.
병사는 본래 병이 많은 사람으로 산림(山林)에서 병을 요양하면서 세상 일에는 뜻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변란이 일어나자 자신의 몸을 돌아보지 않고 떨쳐 일어나 의병을 일으켰습니다. 그러고는 이 왜적들과는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해가 지나도록 피나는 싸움을 하여 여러 번 적의 칼날을 꺾어 고령, 지례, 금산, 개령을 차례차례 수복하였습니다. 낙동강 오른쪽에 있는 지방이 지금까지 보전된 것은 대부분 그의 공이었습니다. 의병을 일으킨 뒤로는 그의 처자식이 가까운 지방에 있으면서 유리걸식하는데도 한 번도 만나보지 않았습니다.
지례(知禮)의 진에 오래도록 있으면서 여름과 겨울을 지나는 동안에 비바람과 눈서리를 무릅쓰고 나다녔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반드시 죽을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런데도 의연한 채 조금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나라를 위하는 그의 정성은 환하게 밝기가 단약(丹藥)과 같았습니다. 은혜를 입어 병사에 제수된 뒤로는 책임이 크고 임무가 무거움을 더욱 두텁게 여겨, 친히 모든 군사를 독려하여 금산 지방에 진주(進駐)해서 선산(善山)에 있는 왜적들과 서로 버티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왜적들이 자못 두려워하여 부내(府內)의 여염집을 불태워 버리고 도망할 기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심신이 피로한 나머지 갑자기 큰 병을 얻어 진중에서 목숨을 바쳤는바, 장성(長城)이 한 번 무너짐에 삼군(三軍)이 눈물을 삼키고 있습니다. 하늘이 우리나라를 돕지 않는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만이 홀로 외로이 있어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한편 1593년 김면의 사망 이후 국가에서 여러 표창이 있었다. 감사(監司) 김성일(金誠一)이 행조(行朝:행재소)에 치계(馳啓)하여 계문(啓聞)이 이르자, 임금이 매우 슬퍼하며 특별히 명하여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에 증직(贈職)하고, 또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문(祭文)을 갖추어 제사를 지냈다.
정미년(丁未年, 1607년 선조 40년)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의 예에 따라 이조판서(吏曹判書)에 가증(加贈)되었고, 광해군(光海君) 초년에 또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지냈다. 한편 증직하고 치제하였다. 예조(禮曹)가 아뢰기를, “난을 겪은 후에 미처 돌보지 못한 일이 많아, 창의(倡義)로 증직(贈職)한 사람 중에 미처 사제(賜祭)하지 못한 자가 많이 있으니, 김면은 적세(賊勢)가 치열할 때를 당하여 의병을 모집하여 힘을 다해 토벌하다가 끝내 목숨을 바치고 말았습니다. 비록 증직은 했다 하더라도 다시 치제하여 봉도의 민심을 고취시키는 것이 사리에 마땅하겠습니다.”하여 치제했다.
다음으로 공신으로 책훈되고 후손에게도 은전이 내렸다. 홍식(洪湜)이 공신도감(功臣都鑑) 대신의 뜻에 따라 아뢰기를, “전교하기를 김천일(金千鎰)·황진(黃進)·고경명(高敬命)·조헌(趙憲)·김면(金沔)은 참으로 칭찬할만한 데다가 공도 있으나 추포(追褒)를 이미 극진히 하였으니, 그 자손이 녹용(錄用)할 만하면 그 공의 높낮이에 따라 6품 벼슬에 초수하거나 제수하라고 했다. 그리고 지역사회에서도 김면의 전공을 기리기 위한 조처가 있었다. 먼저 사당이 건립되었다.
아! 공이 돌아가신지 70여 년 만에 함안(咸安)의 조봉원(趙逢原) 사달(士達, 조봉원의 자)이 고령 현감이 되어 처음으로 많은 선비들을 창도(唱導)하여 사당(祠堂)을 건립하고 공을 향사(享祀)했으며, 또 공의 묘소에 갈석(碣石)이 없다고 하여 공의 세손(世孫)들에게 고하여 돌을 다듬어 비명(碑銘)을 청하게 하고 관가(官家)에서 재력(財力)을 내어서 도와주었다.
다음으로 조선시대의 의병활동으로 왜적과 맞서 싸워큰 공을 세웠던 의병장 김면 장군을 기리기 위해 서원을 건립했다. 1666년(현종7)고령읍 연조리에 도암서원이 지어졌다. 그 후 1789년(정조13)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했다가 1868년(고종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서원이 훼철되면서 1903년(고종40) 문중에서 도암사당 왼쪽에 도암서당을 건립했다. 해방 이후 1975년 문중의 재실로 도암재(道巖齋)를 건립했으며, 2002년 도암재 건물을 도암서원으로 복원했다.
 
참고문헌, 김면장군후원회 발행,
‘임진란 구국공신 의병도 대장 김면 장군’에서 발췌
주간고령 기획팀

구독 후원 하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