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산전씨(完山全氏) 찰방공파(察訪公派), 탁계공파(濯溪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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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완산전씨(完山全氏) 찰방공파(察訪公派), 탁계공파(濯溪公派)

1. 경앙재, 합천군 쌍책면 하신4길5.JPG

경앙재(합천군 쌍책면 하신4길 5)

헌성비.JPG

헌성비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전씨(全氏)의 시원(始源)
① 우리나라 전씨(全氏)의 도시조(都始祖)는 백제 건국초의 십제개국공신(十濟開國功臣) 중의 한 분인 환성군(歡城君) 전섭(全攝)이다.
② 고구려 동명왕(東明王) 주몽(朱蒙) 사후에 이복형인 유리(琉璃)가 왕위를 계승하자 이복동생인 비류(沸流)와 온조(溫祚)는 신변에 위협을 느껴 전섭(全攝), 오간(烏干), 마려(馬黎),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우(屹于), 곽충(郭忠), 한세기(韓世奇) 등 열사람과 함께 남하(南下)하여 고구려 유리왕 2년 즉 기원전 18년에 하남위례성(河南慰禮城)에서 열사람의 건의로 도읍지를 정하고 10명의 신하가 도와주어 국가를 세웠다는 뜻으로 국호(國號)를 ‘십제(十濟)’로 하였다가 후에 백제(百濟)로 개칭(改稱)하였다.
③ 온조왕(溫祚王)을 도와 십제국(十濟國)을 건국하는데 공훈을 세운 열 분을 ‘십제개국공신(十濟開國功臣)’으로 책록하였고 전섭(全攝)을 ‘환성군(歡城君)’으로 봉군(封君)하였다.
④ 전씨는 18관(貫)으로 분적(分籍)되었으나 같은 혈족임을 인식하고 1924년 갑자대동보(甲子大同譜)를 간행한데 이어 1966년 병오대동보(丙午大同譜)를 간행하여 범전씨(汎全氏)의 기틀을 더욱 다졌다.
(2) 완산전씨(完山全氏) 시조(始祖) 전집(全潗)
 시조 전집(全潗)은 도시조 전섭(全攝)의 30세손으로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전집(全潗)은 고려 공민왕 10년(1361년) 중랑장(中郞將)으로 용약출진(勇躍出陳)하여 두차례에 걸쳐 홍건적(紅巾賊)을 물리친 공으로 추충정난공신(推忠靖扈亂聖功臣)이 되어 완산군(完山君)에 봉해지고 그후 삼중대광 첨의 문하시랑 평장사(三重大匡 僉議 門下侍郞平章事)에 추증(追贈)되었다. 그래서 후손들이 정선전씨(旌善全氏)에서 분관(分貫)하여 완산(完山)을 본관으로 해서 대를 계승하고 있다. 완산(完山)은 지금 전주(全州)의 옛이름이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3) 분파(分派)
 완산전씨(完山全氏)는 크게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낸 지경(之經)의 3형제에서 부사공파(府使公派), 도사공파(都事公派), 예부상서공파(禮部尙書公派) 등 3개파로 분파(分派)되었다.
(4) 임란(壬亂)에 창의(倡義)하고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을 배출한 명문가
① 임진왜란 때 초계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완산전씨(完山全氏) 가문은 외응장(外應將) 전치원(全致遠)과 두 아들 전우(全雨), 전문(全雯), 종질인 조호장(調護將) 전제(全霽) 등이 무계, 초계 전투 등지에서 혁공(赫功)을 세워 경상우도와 초계지역을 온전하게 보존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② 완산전씨(完山全氏)는 대한민국 11대, 12대 대통령을 역임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을 배출하였으며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완산군(完山君) 전집(全潗)의 22세손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義兵)을 일으킨 조호장(調護將) 전제(全霽)의 13세손이다. 전대통령 선조의 고향은 원래 합천군 쌍책면 하신리이였으나 증조 전석주(全錫注)가 합천군 율곡면 내천리로 이사를 했다.
(5) 고령과의 인연
집안에서 전해 오는 옛 이야기인 가전구문(家傳舊聞)에 의하면 완산전씨(完山全氏) 합천입향조(陜川入鄕祖)인 전하민(全夏民)이 문종 1년(1451년) 경주에서 이거하여 대가야읍 금산재 아래 마을에서 잠시 우거(寓居)하였으나 지방민의 텃세로 합천군 쌍책면 하신리로 옮겨 살았다고 한다.
(6) 완산전씨(完山全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완산전씨(完山全氏)는 33가구 77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완산전씨(完山全氏) 찰방공파(察訪公派) 후손들은 대가야읍 연조리,  탁계공파(濯溪公派) 후손들은 쾌빈3리를 중심으로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조선시대
① 전지경(全之慶)
완산전씨(完山全氏) 시조(始祖) 전집(全潗)의 아들로 태어났다.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한 후 승의랑(承議郞)•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냈다. 태종 17년(1417년) 공은 원욱(元郁), 장지성(張之成), 정언충(鄭彦忠) 등 23인과 함께 사헌부(司憲部)에서 ‘총마계서(驄馬稧書)’를 행하였다. 세종 29년(1447년) 사간원(司諫院) 우정언(右正言)을 역임하였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註釋) 총마계서(驄馬稧書)
사헌부(司憲府) 관원 등이 계를 만들고, 모임을 가진 후 이를 기념하여 그 사실과 시문(詩文)을 적고 이를 권축(卷軸)으로 만들어 나누어 가지는 것을 말한다. ‘총마계축(驄馬稧軸)’이라고도 한다.
② 전하민(全夏民)
예부상서(禮部尙書) 사경(思敬)과 대사성(大司成) 원익(元益)의 따님 정부인(貞夫人) 월성이씨(月城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종 17년(1417년) 정유(丁酉) 식년시(式年試) 문과에 급제한 후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을 거쳐 교리(校理)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완산전씨(完山全氏) 합천입향조(陜川入鄕祖)이다.
③ 전승덕(全承德)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하민(夏民)과 수사(水使) 의인(宜人) 신천강씨(信川康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전라병마절도사(全羅兵馬節度使)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④ 전수문(全秀文)
 전라병마절도사(全羅兵馬節度使) 승덕(承德)과 전생서(典牲署)에 근무하였던 긍(兢)의 따님 정부인(貞夫人) 초계변씨(草溪卞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진산군수(珍山郡守)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⑤ 전희문(全希文)
 자는 중유(仲儒)이고 호는 명재(明齊)이다. 전라병마절도사(全羅兵馬節度使) 승덕(承德)과 전생서(典牲署)에 근무하였던 긍(兢)의 따님 정부인(貞夫人) 초계변씨(草溪卞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세조 8년(1462년) 태어났다. 중종 때 보랑(寶郞)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 등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기묘사화(己卯士禍)가 발생하자 초계(草溪)에서 평양 방산(方山)으로가서 은둔하다가 중종 38년(1543년) 졸(卒)하였다.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 겸(兼) 동지경연의금부사(同知經筵義禁府事)에 증직(贈職)되었다.
(註釋)  기묘사화(己卯士禍)
중종 14년(1519년) 남곤(南袞)·홍경주(洪景舟) 등의 훈구파(勳舊派)에 의해 조광조(趙光祖) 등의 급진적 개혁이 좌절되고 신진사류(新進士類)들이 숙청된 사건을 말한다.
⑥ 전영수(全永綏)
 자는 세안(世安)이다. 진산군수(珍山郡守) 수문(秀文)과 첨사(僉使) 지형(之亨)의 따님 흥양이씨(興陽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재령군수(載寧郡守)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⑦ 전치원(全致遠)
 자는 사의(士毅)이고 호는 탁계(濯溪)이다. 종사랑(從仕郞) 인(絪)과 우후(虞侯) 성(誠)의 따님 김해허씨(金海許氏) 사이에서 중종 22년(1527년) 태어났다.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과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인이다. 선조 8년(1575년) 행의(行誼)로 사포서(司圃署) 별제(別提)를 제수(除授)받았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6세의 나이로 설학(雪壑) 이대기(李大期)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낙동강을 건너려는 왜군을 저지하였으며, 이듬해에는 곽재우(郭再祐)와 연합하여 현풍(玄風)·창녕(昌寧)·영산(靈山) 등지의 적을 공격하였고, 김면·정인홍(鄭仁弘) 의병과 함께 무계진(茂溪津)·정암진(鼎巖津) 등지에서 왜적을 격파한 전공(戰功)으로 선조 26년(1593년) 사근찰방(沙斤察訪)에 제수되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인조 18년(1640년) 현와(弦窩) 이도(李蒤)의 상소가 윤허(允許)되어 집의(執義)로 증직되었고 연곡서원(淵谷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숙종 28년(1702년)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추배(追配)되었다. 선조 29년(1596년) 졸(卒)하였다. 고종 18년(1881년)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임계난잡록(壬癸亂雜錄)을 남겼다.
⑧ 전제(全霽)
 자는 시적(時適)이고 호는 영수(英叟)이다. 승사랑(承仕郞) 별시위(別侍衛) 경원(慶遠)과 현감(縣監) 응희(應禧)의 따님 합천이씨(陜川李氏) 사이에서 명종 13년(1558년)에 태어났다. 어려서 당숙(堂叔) 탁계(濯溪) 전치원(全致遠)에게 수학하였는데 문예(文藝)를 일찍 이루었고 무예(武藝)가 탁월하였다. 김면(金沔), 곽준(郭䞭) 등과 금석지맹(金石之盟)으로 교우(交友)하였고 선조 24년(1591년) 신묘(辛卯) 별시(別試) 무과에 급제한 후 첨정(僉正)으로 대구진 병마절제도위(大邱鎭 兵馬節制都尉)를 지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설학(雪壑) 이대기(李大期), 예곡(禮谷) 곽율(郭) 등과 창의기병(倡義起兵)하여 조호장(調護將)의 임무를 맡아 무계(茂溪), 마수원(馬首院) 전투 등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에는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창녕 화왕산(火旺山) 축성(築城)에 참여하였고 명나라 군대와 함께 앞장 서서 성(城) 위에 올라가 전공을 세웠으나 부적자(附賊者) 이사종(李士宗)의 칼에 순사(殉死)하였다. 호조참판(戶曹參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총관(五衛都摠府總管)에 증직(贈職)되었고 합천 도계서원(道溪書院)에 배향(配享)하였다.
(註釋) 부적자(附賊者)
적병에 붙어 따르는 사람 즉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 협조하는 자 즉 부왜자(附倭者)를 말한다.
⑨ 전탁(全濯)
자는 시형(時亨)이다. 승사랑(承仕郞) 호분위(虎賁衛) 기원(基遠)과 단인(端人) 고령박씨(高靈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청암찰방(靑岩察訪)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⑩ 전우(全雨)
 자는 시화(時化)이고 호는 수족당(睡足堂)이다.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던 치원(致遠)의 아들로 명종 3년(1548년) 태어났다.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의 문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부친 탁계(濯溪) 치원(致遠)과 설학(雪壑) 이대기(李大期)와 함께 통유문(通諭文)을 경내(境內)에 돌리고 향군(鄕軍)을 소집할 때 초계군 북부지역을 책임지고 활동하였다. 임진왜란의 전공으로 사축서(司畜署) 별제(別提)를 지낸 후 중임도찰방(重林道察訪)에 발탁되었으며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追贈)되었다. 선조 34년(1601년) 영남인(嶺南人)으로 서울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던 26인의 명유(名儒)들이 장악원(掌樂院) 신해(新廨 : 새로 지은 관아)에서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 정곤수(鄭崑壽),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 이호민(李好閔), 자암(紫巖) 이민환(李民寏), 진흥군(晋興君) 강신(姜紳), 동계(桐溪) 정온(鄭蘊) 등을 중심으로 하여 ‘영남동도회(嶺南同道會)’를 결성하고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나누었다. 광해군 8년(1616년) 졸(卒)하였다. 철종 6년(1855년) 영남사림들이 그를 추모하여 도계서원(道溪書院)에 추향(追享)하였다.
⑪ 전기직(全氣直)
 자는 이직(而直)이다. 처사 세희(世禧)와 진사(進士) 두경(斗璟)의 따님인 일선김씨(一善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노직(老職)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註釋) 노직(老職)
노인을 우대하기 위하여 제수(除授)하는 산직(散職 : 조선 시대에 일정한 직임이 없는 관직을 일컫는 말)으로서 양•천(良賤)을 막론하고 80세 이상된 노인에게 주는 관직을 말한다. 매년초에 각도 관찰사가 제읍(諸邑) 호적(戶籍)에서 80세 이상된 노인을 뽑아 기왕에 받은 노직(老職)의 유무를 조사한 다음 이조(吏曹)에 보고하여 제수하게 되어 있었음. 이 경우 서경(署經 :  신원조회 또는 신원증명)을 면제하고 바로 성첩(成牒 : 문서에 관인을 찍음)하여 보내서 관찰사로 하여금 전가(前加 : 전날에 제수한 가자(加資))를 조사하여 나눠주도록 하였음.
 
3. 고령(高靈) 입향(入鄕)
완산전씨(完山全氏)는 청암찰방(靑岩察訪)을 지낸 탁(濯)의 6세손 즉 곤손(昆孫)인 처사(處士) 홍렬(弘烈)이 영조 26년(1750년)경 산청(山淸)에서 처향(妻鄕)인 고령군 덕곡면 인곡(仁谷)으로 입향하여 세거하다가 대가야읍 일원으로 전거(轉居)하였고 그후 탁계공파(濯溪公派) 후손들이 합천군 쌍책면 하신리에서 고령군 대가야읍 쾌빈3리(정뱅이)에 입향하여 살고 있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현달(顯達)한 인물이 없어 생략한다.

 

 

 

자료제공 : 찰방공파 후손 전의남(全義男)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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