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나라 있는 줄만 알고 내 몸 있는 줄 몰랐노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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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오직 나라 있는 줄만 알고 내 몸 있는 줄 몰랐노라”(2)

인물평전
송암 김면 장군(2)

2. 도암서원, 경상북도 유적 제76호(쌍림면 칠등리 소재).JPG

 

2. 도암서원, 경상북도 유적 제76호(쌍림면 칠등리 소재).JPG

도암서원, 경상북도 유적 제76호(쌍림면 칠등리 소재)


지난호에 이어
▣ 무계전투
3도의 군사가 모여서 성세(聲勢)를 서로 의지하면서 일본군을 사로잡거나 목 베는 일을 서로 계속했으므로 일본군은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이윽고 명(明)나라 군사가 서울을 회복한 후 왜적들을 내몰아 남하했다. 두 왕자가 전에 왜적에게 포로 되어 적중(賊中)에 있었다. 공이 또 여러 군사를 규합하여 길을 막아서 탈취하고자 했으나 미처 출발하기도 전에 개령의 왜적과 성산(星山)의 왜적이 합세해 다시 세력을 크게 떨친다는 소문을 듣고, 드디어 곽준(郭䞭)과 오장(吳長)을 방백(方伯)에게 보내어 장차 군사를 옮겨 공격하기로 상의했다.
계사년(1593년, 선조 26) 정월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되었는데, 임금이 특별히 선전관(宣傳官을 보내어 교지(敎旨)를 유시(諭示)했다. 이에 김면은 합도의병대장(閤道義兵大將)으로 여러 진을 순검(巡檢)했다.
2월에 공이 왕명을 받들고 이에 호남(湖南)·호서(湖西)의 군사들과 함께 금산(金山)의경계에 나아가 진(陳)을 치니, 개령·성산의 여러 왜적들이 주둔한 군사를 거두어서 도망함으로, 공이 마침내 개령에 나아가 진을 치고서 선산(善山)의 왜적을 토벌할 것을 도모했다. 장차 요해지(要害地)에 매복(埋伏)을 설치한 다음 죽현(竹峴)의 길을 차단하려고 군모(軍謀)가 크게 정해지자 부서 나누기를 이미 정비했다. 그런데 공이 갑자기 병이 나서 3월 11일에 진중에서 죽자 군민들이 애통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곽준(郭䞭), 문위(文偉), 정유명(鄭惟明), 성팽년(成彭年) 등이 함께 염습(殮襲)을 참관하여 24일에 고령(高靈)의 칠동(七洞)에 있는 선영(先塋) 아래에 장사지냈다. 감사(監司) 김성일(金誠一)이 행조(행재소)에 치계하여 계문(啓聞)이 이르자 임금이 매우 슬퍼하며 특별히 명하여 병조판서 겸 지의금부사(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에 증직(贈職)하고, 또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문(祭文)을 갖추어 제사를 지냈다.

▣ 임란 중 경상우도 의병의 조정과 통솔
임진왜란 중에 관군과 의병은 전공과 책임문제를 둘러싸고 대립하여 일본군과의 싸움에 앞서 전력을 약화시키기도 했다. 이때 경상우도에서는 관군과 의병의 갈등을 조정하여 전투력을 배가시킨 인물은 김면과 김성일이었다.
먼저 경상우도에서는 전쟁 초기에 감사 김수(金睟)와 곽재우(郭再祐)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일차적으로는 임진난 초기에 관찰사가 도망한 데서 연유한 것이지만, 용인(龍仁)에서 패전하고 돌아온 김수는 산음(山陰)에 도착해 자신의 실책에 아랑곳 하지 않고 도리어 의병활동을 방해하자 민심도 폭발하게 됐다. 이에 곽재우는 김수의 처단을 요구했다. 이런 때에 곽재우의 휘하에 있던 김경근(金景謹)이라는 자가 변심하여 김수에게 이 사실을 알려 피난하게 했다. 이에 김수는 도리어 곽재우를 무고(誣告)하여 역적으로 몰게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은 감정이 격해지게 되어 경상도에서는 병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김면이 곽재우를 설득했다.
막부(幕府)의 명성을 듣고서 항상 흠모하여 왔습니다. (중략) 단지 귀하께서는 조정의 명령을 받지 않고 백면서생으로 의병을 일으킨 만큼 근심할 것은 단지 의기가 부족한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정중함을 잃을까 두렵습니다. 지금 행재소가 막히고 멀어서 주청을 하여도 잘 통하지 않으니, 우리들 초야의 신분으로서 일을 일으킨 자는 의뢰할 곳이 없으므로 부득이 관리에게 명령을 받은 연후라야 명분이 바르고 말이 순조로워서 가히 적을 칠 수 있고, 체통에 순서가 있게 되고, 조창(條暢)에 이로(理路)가 있습니다. 만약에 일을 그르친 사람을 두고서 죄가 있다고 하여 목을 베었다고 하면 의기에는 당당함이 있을지 몰라도 순리에 따라 공을 세우는 데는 미진함이 있을까 두려워하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한편 곽재우도 김면을 만나고 나서, 내가 김 장군을 살펴보니 기도(氣度)가 엄의하고 거지(擧止)가 안한하여 흉적을 소멸하고 영남을 보전할 사람은 이분이다 라고 하면서 김면을 높게 평가했다. 그리고 김수가 국왕 선조(宣祖)에게 아뢴 글에서, ‘비록 스스로 싸우지는 못하지만 나라를 위해 죽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김면은 기강이 있어 정인홍보다 조금 낫습니다 라고 한데서도 김면의 위상을 알 수 있다.

▣ 김면은 경상우도의 조정자로서 의병활동
김면은 경상우도에서 폭넓은 조정자로서 조정의 지원 속에 활발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요인은 첫째, 관직의 임명을 통한 김면의 경상우도에서의 앞선 지위이다. 조정은 호령이 통하지 않는 난리중이라서 의병 활동의 효율성을 높이고 의병의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서 의병장들에게 관직을 주어 포상하였다. 이에 김면은 경상도의병도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이어 경상우병사가 되었다.
의병에 대한 인식의 차이이다. 김면은 의병과 관군과의 관계설정에 있어 의병도 관군의 지휘를 받을 것을 강조했다. 이런 면모는 곽재우와 정인홍에 대한 그의 평을 통해서 그의 의병관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우리는 의로서 일으켰으니, 관군의 절제를 받아야 할 것이다. 부디 백성을 침략하지 말 것이며, 오직 의에 따를 뿐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어디에 의병다운 것이 있겠는가 라고 했다. 일찍이 남들에게 말하기를, 곽재우는 본래 유식한 사람이 아니니 그 하는 일이 부족한 것을 책망할 것이 못된다. 그러나 정인홍은 세상 사람들이 어진 사람이라고 일컫는데 오히려 이러하니 부끄럽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했다.
이후 김면이 거창에서 의령을 순행(巡行)할 때에 종사관(從事官) 12인, 군관(軍官) 40인, 군졸(軍卒) 수백 명이 스스로 따랐다. 여러 가지 깃발이 연달아 20리에 뻗혔으므로, 혹자는 공이 짐짓 자랑하고 뽐내는 행렬(行列)을 짓는다고 의심했다. 그러나 공의 뜻은 실지로 방백(方伯)과 수령들이 모두 조소(鳥鼠)처럼 달아나 숨어서 군사의 위세(威勢)가 떨치지 못하고 인심이 안정되지 않을까 의심했기 때문에, 위무(威武)를 크게 벌여서 이것을 보고 듣는 사람들을 용기 있게 움직이게 하려는 것이었다.
처음에 정인홍, 곽재우와 같은 때에 군사를 규합했는데, 곽재우는 감사(監司) 김수(金睟)가 군사들에게 옹호되어 왜적을 피해버린 것을 보고 격분하여 격문(檄文)을 보내어 그 죄목(罪目)을 헤아리니, 김수도 또한 곽재우가 교만하고 난폭하여 통제하기가 어려운 상황을 열거하여 조정에 보고했다. 장차 감사와 의병장 사이에 서로 다투려는 형세가 보이자. 공은 ‘금일에 왜적을 토벌하는 일이 급선무이므로, 곽재우는 마음대로 국가의 관리를 쫓아낼 수 없을 것이고, 김수 또한 의병을 모함에 빠트릴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 마침내 글을 만들어 그들을 서로 화해시켰기 때문에 변고(變故)가 일어나지 않았다.
정인홍은 성격이 남을 시기하여 이기려고 했고, 그 무리 중에 권양(權瀁) 같은 자는 경솔하고 약삭빠르며 패려하고 거짓되어 자기 스승을 추켜세워 여러 의병의 우두머리를 삼으려 했는데, 공의 위명(威名)과 성적(聲績)이 정인홍의 위에 높이 나왔기 때문에, 그들은 거짓말로 선동하고 비방(誹謗)을 조장하여 사람들이 함부로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으며, 대장(大將)에 임명되기에 미쳐 임금이 은총(恩寵)의 교지(敎旨)를 내려서 공을 포상(褒賞)하자 정인홍은 원한을 머금고 서로 승강이 하는 일이 많았으나, 공은 모두 그 주장을 받아들이고 따지지 아니하니, 정인홍도 또한 감히 성질난 말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 이것은 대개 정인홍은 자기 재주를 믿고 다른 사람에게 괴팍하게 굴며 힘써 남의 위에 올라서려고 했으므로, 관련하여 알게 됐던 자들은 이끌려 들어감을 당하지 않으면 반드시 모함(謀陷)하여 해를 입혔는데, 공은 능히 미워하지 아니하고 엄정하게 이치로써 이겼으므로, 조령(鳥嶺) 오른쪽에 거주하면서 끝내 흉간(兇奸)이 더럽게 패배시킨바가 되지 아니한 사람은 오로지 공 한사람뿐이었다. 그러나 임진왜란도 계사년 3월 이후 강화가 시작되고, 왜적이 한성에서 퇴각함에 따라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게 되었으며, 1593년 11월에는 환도(還都) 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임진왜란 초기에 활약한 의병들은 계사년 이후 대부분의 의병장들이 관직을 받아 활약하게 됨에 따라서 관군으로 편입되든지, 아니면 귀농(歸農)하게 됐다. 또 이때에 이르면 의병의 폐해 때문에 의병은 억제하고 관군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이 바뀌게 되어 의병활동은 위축되게 되었다.

▣ 경상우도의 후기 의병운동은 김면을 중심으로 통제 체계화
이때 경상우도의 후기 의병운동은 김면을 중심으로 통제되면서 체계화되었다. 이것은 김면이 경상우도 의병도대장에 임명된 시점이었는데, 이후 경상우병사가 되었다. 김면의 후기 의병에 대한 직접적인 통솔은 전쟁보다 순시라는 측면에서 문제가 되기도 했다. 경상우도 김면 군의 후기 의병 조직은 의병도대장 김면 고령, 의병 좌장 곽재우 의령, 의병 우장 정인홍 합천, 초유사(순찰사) 김성일이었다.
한편 국가에서 파악한 의병의 규모를 통해서도 경상우도 김면 의병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의병에 대한 국가의 장악과 함께 전국의 의병 수는 1953년으로 접어들면서 줄어들었다. 임진왜란 시기의 전국의 관군과 의병의 수는 경상도의 경우 관군 65,000명, 의병 12,000명이었다. 1593년 파악된 경상우도의 의병 수는 합천 의병장 정인홍 3,000명, 의령 의병장 곽재우 2,000명, 거창 의병장 김면 5,000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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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허비

 

▣ 김면 장군 신도비 전문
증 정헌대부 이조판서 겸 지의금부사 절충장군 수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송암 김공 신도비명 병서
공의 휘는 면(沔)이요 자는 지해(志海), 호는 송암(松菴)이다. 김씨는 본래 신라왕 후예인지라 신라가 망하니 자손이 흩어져서 국내의 각처에 살았는데, 고령에 사는 이들이 고령을 본관으로 했다.
휘 남득(南得)이 있었는데 고려조 말기에 드러나서 고양부원군(高陽府院君)으로 책훈되었는데, 공의 7세조이다. 증조는 감찰을 지내고서 증 참판인 휘 장생(莊生)이요. 조(祖)는 도승지 휘 탁(鐸)이요. 고(考)는 부사(府使)를 지내고 증 좌찬성(左贊成)인 휘 세문(世文)이다. 어머니는 증 정경부인 김해김씨로 판관 중손(仲孫)의 따님이다.
공은 기량이 높고 강개(慷慨)하여 큰 절의(節義)가 있었다. 글을 읽음에 문장에만 힘쓰지 아니하고 조용히 성현의 요결(要訣)을 궁구하고 더욱 이정(二程=북송의 유학자, 정호(程顥)·정이(程頤) 형제를 칭함)의 글을 즐거이 읽고 말하기를 “행위처사를 이에서 얻으면 큰 과실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젊어서 남명(南冥)을 스승으로 하고 한강(寒岡)과 벗하여 조행(操行)이 독실하니 사방에서 배우는 자가 모여들었다. 향민들도 아름다운 덕에 훈습(薰習)되어 서로 경계하기를 “옳지 않는 일을 하지 말라 송암 선생이 두렵다.”고 했다.
처음에 효렴(孝廉=효성스럽고 청렴결백한 사람)에 으로 천거되어 침랑(寢郞=종묘, 능침, 원의 영을 관리하는 벼슬로 참봉 등의 통칭)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선조 즉위 초에 널리 유현(儒賢)들을 가려서 6품직에 올렸는데 조월천(趙月川), 성우계(成牛溪=成輝), 정한강(鄭寒岡=鄭逑), 이연봉(李蓮峯=李基卨)과 공(公)이었다.
처음에 공조좌랑(工曹佐郞-正六品)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는데, 이윽고 처음과 같이 배수(拜受)하여 부름이 도타우니 한번 부임하였다가 사직하고 돌아와서는 그대로 종신하려 했다.
만력 임진(선조 25년/1592) 4월에 왜적이 대거 침입하니 우리의 열진(列陳)이 무너져서 종사(宗社)의 존망이 경각에 놓이게 됐다.
공은 눈물을 흘리면서 “임금이 위급한데 신하로서 죽음을 마다한다면 어찌 성현의 글을 읽었다고 하리오” 하고는 드디어 조공 종도(趙公 宗道), 곽공 준(郭公 䞭), 문공 위(文公 緯) 등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키니 한 달이 못되어서 군사가 수천 명이 되었다. 이때에 왜적은 지례(知禮-김천지역의 옛 이름), 금산(金山), 개령(開寧-김천 지역의 옛 지명)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이르기를 십만이라고 했다.
공이 군사를 이끌고 우지(牛旨)에 진을 쳤는데, 호령이 엄명(嚴命)하여 기거동작이 엄연하여 군소리가 없었다. 적장이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아군을 공격해 오므로 공은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과 더불어 싸워서 적의 세력을 꺾으니 군세가 비로소 떨어지게 되었다.
이때에 곽공(郭公) 재우(再祐)도 의병을 일으켜 서로 호응하였는데, 도백(道伯=관찰사) 김수(金晬)와 서로 미워하여 격서(檄書)를 돌려 김수의 죄를 들고 김수 또한 곽공의 단점을 행재소(行在所)에 치계(馳啓)하였다. 공은 왜적을 물리치는 일이 아직 멀었는데 내홍이 일어남을 근심하여 곽공에게 글을 보내어 곽공도 깨닫고서 인책하는 마음을 풀어서 일이 무사하게 됐다.
공이 군대를 이끌고 나아가서 적과 정진(鼎津)을 끼고 진을 치니, 백성들이 나무를 베어서 무기를 만들고 대나무로서 깃대를 만들어 따라 붙는 자들이 저자군 같았다. 곽공이 장좌에게 말하기를 김의장(金義將)이 강하나 사이를 두고 진을 치고 있는데, 그 주책(籌策)이 어떠한가 모르겠다 하고 곧 십여 기를 따르게 하여 진문을 두드렸다.
공이 장막안으로 맞아들여 대담하여 기쁨을 나누다가 자리를 파(罷)했다. 곽공이 물러나서 좌우에게 이르기를 “엄의(嚴毅)하도다 그 모습과 품성이 안한(安閒)하고, 그 기백이 어느 사람과 다르니 이 분을 믿지 않고 누구를 믿을 것인가” 했다.
공이 조종도(趙宗道)에게 일러 주기를 “적은 많고 우리의 적은 적으니 꾀로서 치지 않으면 쉽게 파하지 못할 것이다.”하고 곧 장사를 시켜 사방(四方)에서 둘러싸고 북과 호각과 고함을 쳐서 응원병이 사방에서 모이듯이 꾸미고 바람을 따라 빈배 십여 척을 띄워 적진에 가까워지게 했다.
적이 고각(鼓角)소리를 듣고 의아해 하다가 “이는 우리를 유인해 강을 건너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하여 회군하려는데 공이 갑자기 강을 건너서 분격하여 크게 격파하니 적이 서로 밟아 죽이기도 하여 그 시체가 삼십리에 가득했다. 공은 승세를 타고 무계(茂溪)에 진을 치니 얼마 되지 않아 적선이 강을 덮어왔는데 이는 정진(鼎津)의 분패를 갚으려 함이다.
공은 장좌에게 이르기를 :원컨대 제군은 한 번 죽음을 각오하라“하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는데 물에 빠져 죽은 적이 헤아릴 수 없이 매워서 강물이 흐르지 못했다. 이 싸움에서는 적이 실어가던 많은 재화를 얻었는데, 모두 방백(方伯)에게 보내어 행재소에 바치게 했다.
<다음에 계속>
참고문헌, 김면장군후원회 발행,
‘임진란 구국공신 의병도 대장 김면 장군’에서 발췌
주간고령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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