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천최씨(陽川崔氏) 선략장군파(宣略將軍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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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양천최씨(陽川崔氏) 선략장군파(宣略將軍派)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양천최씨(陽川崔氏) 시조(始祖) 최원(崔遠)
① 자는 인로(仁老)이며 고려 때 봉선대부(奉善大夫)·밀직부사(密直副使)를 지내고 훈공(勳功)으로 양천백(陽川伯)에 봉해졌다. 공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 양촌(陽村) 권근(權近) 등과 종유(從遊)하였다.
② 양천최씨(陽川崔氏)는 경주최씨(慶州崔氏) 최치원(崔致遠)을 중시조(中始祖)로하여 그 후손에서 분적(分籍)한 전주최씨(全州崔氏) 시조(始祖) 균(均)의 후손으로 파악된다.
(2) 본관지(本貫地) 연혁(沿革)
양천(陽川)은 경기도에 있는 지명(地名)으로 원래 고구려 때 재차파의현(齋次巴衣縣)이였으며 통일신라 경덕왕 때 공암현(孔巖縣)으로 고첬으며. 율진군(栗津郡)의 영현(領縣)이 되었다. 충선왕 2년(1310년) 양천현(陽川縣)으로 개칭(改稱)되어 현령(縣令)을 두었으며 조선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고종 3년(1896년) 경기도 양천군(陽川郡)으로 개편되었으나 1914년 경기도 김포군(金浦郡)에 흡수되었고 1979년 양천군(陽川郡) 관할이었던 양동면(陽東面)과 양서면(陽西面)이 서울특별시 양천구(陽川區)에 편입되었다.
(3) 분파(分派)
보령파(保寧派), 찰방공파(察訪公派), 현령공파(縣令公派), 감사공파(監司公派)
제학공파(提學公派), 명천부사공파(明川府使公派) 등 6개파로 분파(分派)되었다.
(4) 양천최씨(陽川崔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양천최씨(陽川崔氏)는 61가구 135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감사공파(監司公派) 후손 중 매헌파(梅軒派)는 쌍림면 하거1리, 산당 일원에 기옹공파(畸翁公派)는 쌍림면 하거1리, 귀원리, 대가야읍 일원에, 참판공파(參判公派)는 쌍림면 하거1리, 신곡리 등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최관(崔灌)
자는 무경(務敬)이다. 봉선대부(奉善大夫)·밀직부사(密直副使) 원(遠)과 우승선(右承宣) 정백(貞栢)의 따님인 야로송씨(冶爐宋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공민왕 때 절충장군(折衝將軍)을 거쳐 도만호(都萬戶)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② 최안보(崔安甫)
일휘(一諱)는 안청(安淸)이며 자는 우보(右甫)이다. 도만호(都萬戶) 관(灌)과 상서(尙書) 육(毓)의 따님인 경주이씨(慶州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산대부(朝散大夫)·종부부령(宗簿副令)을 지냈다. 사가정(四佳亭) 서거정(徐居正)과 같이 공부하였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2) 조선시대
① 최완(崔浣)
종부부령(宗簿副令) 안보(安甫)와 소윤(少尹) 문정공(文貞公) 위(褘)의 따님인 능성구씨(綾城具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종 24년(1442년) 왜인 38인이 4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개도(蓋島)로부터 나와서 이로도(伊老島)에 향하는 것을 여도천호(呂島千戶) 공이 뒤쫓아 나포(拿捕)하고 침략자(侵略者)로 오인(誤認)하고 죽여 세종 26년(1444년) 억울하게 참형(斬刑)되었다.
② 최사우(崔斯友)
여도천호(呂島千戶) 완(浣)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선 제6대 왕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폐위되자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 사육신(死六臣)이 주동이 되어 복위(復位)를 시도했던 거사인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에 성균관(成均館) 생원(生員)으로 가담하여 세조 2년(1456년) 순절(殉節)하였다. 정조 15년(1791년) 복권(復權), 사면(赦免)되어 단종에게 충절을 받친 신하들의 위패가 모셔진 영월의 장릉배식단(莊陵配食壇)의 별단(別壇)에 배향(配享)되었던 사육신(死六臣)에 버금가는 충신(忠臣)이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으로 순절(殉節)한 성균관(成均館) 생원(生員) 최사우(崔斯友)의 손자이며 처사(處士) 득형(得泂)의 아들인 선략장군(宣略將軍) 최적(崔績)이 외갓집이 있었던 진주 덕산(德山)에서 세조 2년(1456년)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의 화(禍)를 피하기 위하여 처향(妻鄕)인 고령군 쌍림면 하거리 학동(鶴洞)에 처음 들어왔다(始入).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최자호(崔自浩)
선략장군(宣略將軍 적(績)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조선시대 무신의 종5품 하계의 품계인 창신교위(彰信校尉)를 지냈다.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이다.
② 최자경(崔自涇)
선략장군(宣略將軍)을 지낸 적(績)의 삼남이다. 조선시대 정육품(正六品) 동반(東班) 문관(文官)에게 주던 품계(品階)인 승훈랑(承訓郞)을 지냈고 조선 시대 지방에 파견하던 임시 벼슬로서 주로 전곡(田穀)의 손실을 조사하고 민정(民政)을 살피는 일을 맡았던 경차관(敬差官)을 역임하였다.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이다.
③ 최세평(崔世平)
진용교위(進勇校尉) 사맹(司猛)을 지낸 자청(自淸)의 장남이다. 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를 지냈다.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이다.
④ 최세창(崔世昌)
승훈랑(承訓郞) 경차관(敬差官)을 지낸 자경(自涇)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연산군 7년(1501년) 식년시(式年)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이다.
⑤ 최위현(崔渭賢)
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를 지낸 세평(世平)과 선략장군(宣略將軍)을 지낸 인우(仁雨)의 따님인 의인(宜人) 성주여씨(星州呂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냈다. 생몰년(生沒年)은 미상(未詳)이다.
⑥ 최필손(崔弼孫)
유학(幼學) 세명(世明)과 참군(參軍)을 지낸 중광(重光)의 딸인 의인(宜人) 강진안씨(康津安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문장이 뛰어나 음사(蔭仕)로 참봉(參奉)을 거쳐 도사(都事)를 지냈다.
⑦ 최옥(崔沃)
자는 옥지(沃之)이며 참봉(參奉)을 지낸 세영(世英)과 청주한씨(淸州韓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중종 14년(1519년)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이다.
⑧ 최원(崔源)
자는 도종(道宗)이고 호는 학곡(鶴谷)이다.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지낸 위현(渭賢)과 처정(處貞)의 따님인 의인(宜人) 파평윤씨(坡平尹氏) 사이에서 중종 5년(1510년) 태어났다. 이학(理學)에 밝았으며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문하에 유학하여 그의 제자들과 더불어 도의(道義)로써 사귀었다. 부모님의 병이 깊었을 때 살피려 상분(嘗糞)하기도 했으며 상을 당하여 여묘(廬墓)에서 지낼 때 그의 효성에 감복한 호랑이가 매일 밤 여묘(廬墓)옆에서 지켜주었다고 한다. 효행(孝行)으로 천거(薦擧)되어 호군(護軍)에 제수(除授)되었다. 이학(理學)에 정통하여 세상 사람들이 추앙(推仰)하고 따랐다. 명종 18년(1563년) 졸(卒)하였다.
⑨ 최여설(崔汝契)
자는 순보(舜輔)이며 호는 매헌(梅軒)이다. 호군(護軍)을 지낸 학곡(鶴谷) 원(源)과 현감(縣監)을 지낸 홍(洪)의 딸인 숙부인(淑夫人) 남평문씨(南平文氏) 사이에 오남으로 명종 6년(1551년) 태어났다. 13세 때 부모(父母)의 상사(喪事)를 당(當)하여 몹시 야윌 만큼 부모(父母)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고 여묘(廬墓)살이를 하였다. 어려서 낙천(洛川) 배신(裵紳)을 스승으로 삼았으나 성장해서는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았다. 유일(遺逸)로 장사랑(將仕郞) 훈도(訓導)에 제수(除授)되었다. 임진난(壬辰亂)을 당하자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진영(陣營)의 창의(倡義)에 동참하여 각종 전투에 참전하여 전공(戰功)을 세웠으며 선조 29년(1596년) 3월 3일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의 지시로 전국 70곳의 의병장 등 485명이 대구 공산성에서 모여서 왜군이 재침(再侵)할 경우 관군(官軍)과 각 지역의 성씨를 대표하는 문중의 의병(義兵)들이 협조하여 결사항전(決死抗戰)할 것을 다짐하였던 모임이 ‘1차 공산회맹(公山會盟)’이다. 고령출신 유양좌(兪良佐), 김응성(金應聖), 김성진(金聲振), 박원갑(朴元甲) 등과 함께 ‘1차 공산회맹(公山會盟)에 참여하였다. 또한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왜장 가토 기요마사에 맞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창녕(昌寧) 화왕산성(火旺山城)에 입성(入城)하여 방어하였다. 공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당하여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창의(倡義)하여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자세로 국난극복(國難克服)에 많은 공을 세웠지만 선조 37년(1604년) 6월과 선조 38년(1605년) 4월 2차례에 걸친 임진왜란 전공자(戰功者)에 대한 공신(功臣) 녹훈(錄勳)에 공이 참여하지 못함은 당파적(黨派的) 논공행상(論功行賞)에 기인한 것이다.
⑩ 최경명(崔景命)
일휘(一諱)는 천명(天命)이고 자는 성선(性善)이며 호는 미산(彌山)이다. 유학(幼學) 재화(載和)와 춘성(春成)의 따님인 경주이씨(慶州李氏) 사이에서 숙종 19년(1693년) 태어났다. 영조 4년(1728년) 일어난 무신난(戊申亂) 일명 이인좌(李麟佐)의 난에 군공(軍功)을 세워 군자감정(軍資監正)을 배수(拜受)받았으며 수직(壽職)으로 숭록대부(崇祿大夫) 좌참찬(左參贊)으로 품계가 올랐다. 순조 3년(1803년) 졸(卒)하였다.
⑪ 최호문(崔虎文)
초휘(初諱)는 우점(羽漸)이며 자는 성안(性安)이고 호는 송애(松厓)이다. 공조참판(工曹參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總管)에 증직(贈職)된 상원(尙遠)과 상회(尙會)의 따님인 증(贈) 정부인(貞夫人) 성주도씨(星州都氏)사이에서 정조 24년(1800년) 태어났다. 백부(伯父) 상준(尙峻)에게 출계(出系)하였다. 학양(鶴陽) 박경가(朴慶家)에게 수업(受業)하였으며 정종로(鄭宗魯)의 문인이다. 헌종 7년(1841년) 정시(庭試)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가 되었고, 다음해 저작(著作)·박사(博士) 등을 거쳐 1843년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예조좌랑(禮曹佐郞)·가례도감(嘉禮都監) 낭청(郎廳)을 지냈다. 그 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에는 과거(科擧)의 부조리(不條理)를 엄단할 것과 시험종목에 현실성이 없는 시(詩)·부(賦) 등을 없애고 경국지문(經國之文)을 위주로 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문교진흥(文敎振興)에 힘쓰자는「흥학소(興學疏)」와 당시의 정책적인 시폐(時弊)를 개혁하자는「시폐소(時弊疏)」를 올렸다. 봉화현감(奉化縣監)과 안동진관병마절제도위(安東鎭管兵馬節制都尉)로 재직시 선정을 베풀어 많은 치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심성론(心性論)에 있어서는 심(心)이 이미 생긴 뒤에 성(性)이 마음에 갖추어지게 되므로 심(心)이 성(性)보다 앞선다는 ‘심선성후설(心先性後說)’을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송애집(松厓集) 4권 2책이 있다. 철종 1년(1850년) 졸(卒)하였다.
⑫ 최우문(崔宇文)
초휘(初諱)는 횡(澋)이며 자는 사홍(士洪)이고 호는 송고(松皐)이다.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겸(兼)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를 증직(贈職) 받은 상붕(相鵬)의 차남으로 순조 15년(1815년) 태어났다. 학양(鶴陽) 박경가(朴慶家)에게 수업(受業)하였으며 고종 31년(1894년)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한 후 광무 6년(1902년) 칙명(勅命)에 의거 통정대부(通政大夫)에서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陞品)되었으며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도덕과 문장이 뛰어나 향중(鄕中)에서 추중(推重)하였다. 향중(鄕中) 8문중이 수계(修稧)하여 남중유계(南中儒稧)라 하였으나 해방후 빈흥재유계(賓興齋儒稧)로 개칭(改稱)하였다. 1903년 졸(卒)하였다.
⑫ 최인석(崔寅錫)
초휘(初諱)는 창석(昌錫)이고 자는 주백(周伯)이며 호는 요암(饒庵)이다.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학서(鶴棲) 승태(升泰)와 지우(志愚)의 따님인 공인(恭人) 밀양변씨(密陽卞氏) 사이에서 철종 8년(1857년) 태어났다. 6세부터 수강(受講)하였으나 증조부 향오공(香塢公) 상원(尙遠)이 교독(敎督)하지 않아도 자력(自力)으로 학문에 힘써 날로 진취(進取)하였다. 당대의 명석(名碩) 농산(農山) 장승택(張升澤),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등에게 다소(多少) 유교경전에 관한 경의(經義)를 강질(講質)하기도 하였다. 1905년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선생을 찾아가 뵙고 고금(古今)의 현인(賢人)과 성인(聖人)들의 출처지의(出處之義) 즉 나아가 벼슬하는 일과 머물러 집에 있는 일에 관한 의리(義理)와 국가치란지도(國家治亂之道) 즉 국가의 혼란을 다스리는 방법에 관하여 논하였는데 공이 해법을 명쾌하게 제시하자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선생이 탄복(歎服)하며 크게 칭찬(稱讚)하였다. 1902년 학곡(鶴谷) 최원(崔遠)과 매헌(梅軒) 최여설(崔汝契) 선조(先祖)를 현창(顯彰)하기 위해서 학매정(鶴梅亭)을 세웠으며 1922년 사림(士林)의 공의(公議)로 송애재(松厓齋)에서 강학계(講學契)를 만들여 경전을 강송(講誦)하고 시를 지어 읊기도 하였다. 조부 송애(松厓) 호문(虎文)의 유고(遺稿)를 모아 송애문집(松厓文集)을 발간하였다. 1923년 졸(卒)하였다.
(2) 근∙현대 인물
① 최홍석 : 고령향교 전교
② 최순각 : 대구국시 입격, 대구지방∙고등법원 판관원
③ 최순호 : 건영그룹회장
④ 최민동 : 체육학 박사
⑤ 최영조 : 경산시장
⑥ 최재곤 : 문학박사, 안동대 교수
⑦ 최동황 : 행정학박사, 청와대 경호부장
⑧ 최병호 : 경제학박사, 부산대 기획처장
⑨ 최성연 : 공학박사, 미국 나사(NASA : 미국항공우주국) 근무
⑩ 최보곤 : 공학박사, 미국 코넬대 교수
⑪ 최남채 : 삼성SMD 상무이사
⑫ 최병섭 : 한국수자원공사 본부장
⑬ 최병현 : 경북경찰청 총경
⑭ 최병진 : 부산은행 부행장
⑮ 최병화 : 부산시청 서기관
⑯ 최병호 : 경북도청 법무과장
⑰ 최순고 : 국무총리실 사무관
⑱ 최병준 : 한국전력 경남지사장
⑲ 최홍석 : 대한변리사 42회 합격, 변리사
⑳ 최병순 : 대구시 달서구의원
 
자료제공 : 후손 최창곤(崔昌坤)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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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매정(쌍림면 학동길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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