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나라 있는 줄만 알고 내 몸 있는 줄 몰랐노라”(1)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특집

“오직 나라 있는 줄만 알고 내 몸 있는 줄 몰랐노라”(1)

1. 김면 장군.JPG

 

2. 도암서원 전경-경상북도 유적 제76호(쌍림면 칠등리 소재).JPG

도암서원 전경-경상북도 유적 제76호(쌍림면 칠등리 소재)

 

3. 김면장군 어록비.JPG

 

4. 김면장군 묘소.JPG

‘尺知有國不知有身’ “오직 나라 있는 줄만 알고 내 몸 있는 줄 몰랐노라” 임진왜란 구국공신 송암(松菴) 김면(金沔) 장군이 남긴 말이다. 이 어록 속에는 나 개인은 없고 오직 나라만이 존재한다는 애국심의 혼이 서려있는 감동적인 문구다.

 

▣ 출생과 가계
김면(金沔)은 1541년(중종 36) 아버지 김세문(金世文)과 어머니 김해 김씨(金海金氏) 사이의 김면(金沔)·김자(金滋)·김회(金澮) 3형제 중 장남으로 고령군 개진면 양전동에서 태어났다.
송암의 아버지 김세문(金世文)은 경원도호부사(慶源都護府使)로 오랑케의 침입을 격퇴했으며, 사촌형 김수문(金秀文)과 함께 모두 장수의 재질이 있었다. 숙부(叔父) 김수문(金秀文)은 영원만호(永遠萬戶)로 여진족의 침입을 막았으며, 을묘왜변(乙卯倭變) 때 제주목사(濟州牧使)로서 왜적을 대파하여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올랐다. 그 후 평안병사(平安兵使)가 됐으며, 제승방략(制勝方略)을 창시했다.
외조부는 예빈시(禮賓寺) 판관(判官) 김중손(金仲孫)이다. 이후 송암은 전주 이씨(全州李氏)와 결혼했는데, 부인의 증조는 회원군(會原君) 이쟁(李錚)이며, 조부는 서성부정(瑞城副正) 이흡(李翕)이며, 아버지는 부호군(副護軍) 이황(李煌)이다. 외조부는 병조참판(兵曹參判) 경숙공(景肅公) 창녕(昌寧) 성운(成澐)이다.
그 후 재혼했는데, 부인은 역시 전주이씨(全州李氏)로서 조부는 연성수(涓城守)를 지낸 이수례(李守禮)였고, 아버지는 악림부수(岳林副守) 이건(李建)이다. 이처럼 김면의 사후에 자손이 번성하지 못해 김면의 내력이 후대에 잘 전해지지 못했다.
고령김씨는 고산파(高山派), 신녕파(新寧派), 충주파(忠州派), 노성장선파(魯城長善派), 김제파(金堤派), 공주합천달성파(公州陜川達城派), 양천파(陽川派), 순천공파(順天公派), 고령파(高靈派), 노성죽헌파(魯城竹軒派), 합천묘성파(陜川妙城派)로 나뉘어졌다.
김면은 초기에 지역적으로 가까운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문하에서 실천적인 성리학풍을 주로 배웠지만, 퇴계(退溪) 이황(李滉) 문인록(門人錄)에도 이름이 올라 있는 인물이다. 이것은 남인과 북인의 분파가 일어났던 시기에 경상우도에서 온건한 입장을 대변했던 고령과 성주 지역의 사림(士林)들의 성향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김면은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은거하며 지내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지금의 고령군 개진면 양전리에서 거창으로 가족을 피난시키는 한편 일가 및 가동(家僮) 등과 분연히 창의(倡義)하였다. 이후 남명의 제자이자 동문인 조종도(趙宗道)·곽준(郭逡)·문위(文偉) 등과도 경상도의 거창과 고령 등지에서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부대를 조직해 경상우도의 고령, 거창, 성주, 개령, 금산 등에서 활동하며 많은 전과를 거뒀다.
임진왜란 시기에 조선에 침입한 일본군은 세 길로 나누어 서울을 향해 거침없이 북상했다. 이때 경상우도가 중요했던 이유는 두 가지 측면이었다. 먼저 임진왜란 시기에 일본군은 이미 점령한 경상좌도를 기반으로 하여 경상우도를 점령하고 나아가 곡창지대인 호남을 차지하여 군량을 확보하려 했다. 다음으로 경상유도는 전쟁 지역의 북쪽으로 확대되면서 낙동강의 운송로 확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지역이었다. 때문에 경상우도 의병장들의 활동은 주로 낙동강 유역을 지켰는데, 이것이 임진왜란 시기에 경상우도 의병운동의 중요한 의의였다. 경상우도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의령의 곽재우(郭再祐), 고령의 김면(金沔), 합천의 정인홍(鄭仁弘)을 들 수 있다.
임진왜란 초기에 송암은 금산·개령에 있던 전라도로 진격하려는 일본군과 대치하여 우지(우척현)에 진을 치고 군율로 호령하여 군기가 정연하였다. 이때 진주목사 김시민(金時敏)과 지례(知禮)를 역습하여 대승해 합천군수에 임명되고, 의병대장의 칭호를 받아 의병부대를 통솔하였다. 1593년(선조 26) 1월에는 우도병마절도사(右道兵馬節度使)가 되어 경상우도의 군병을 동원하여 개령에 진을 쳤다.
당시 김면은 개산포전투와 무계전투 등 여러 차례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고, 금산의 진중(陣中)에서 선산의 일본군을 토벌할 계획을 세우던 중에 병을 얻어 순국했다. 송암의 사망 이후 초유사(招諭使)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연이은 사망으로 경상우도는 전력에 많은 손실을 입은 채 임진왜란을 극복해야 했다.
김면이 태어난 개진면 양전리에는 자연마을로 양전, 알터, 틀무실, 풍동골, 내동이었다. 양전이란 우거진 솔밭을 불태워 밭으로 개간하여 좋은 밭이 되었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틀무실은 ‘틀려먹었다’라는 의병장 김면 장군의 탄식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적의 첩자를 잡지 못한 아쉬움이 담긴 마을 이름이다. 또 송암정(松菴井)은 김면이 자신의 생가에 직접 파서 식수로 사용했다고 하는 우물이다. 지금도 마을 가운데 도로변 민가 옆에 있다. 송암정이 김면과 관련된 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생가 터가 이 부근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개진면 양전리는 고령김씨의 세거지로서 김씨의 지역적 기반이었던 지역이었으며, 김면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남아있다. 한편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얼마 전 송암의 부인은 전쟁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측하여 마을 사람들에게 박을 심도록 하였다. 이에 온 마을은 온통 박 천지가 되었다. 부인은 이후 박을 모은 다음 그것으로 모두 뒤웅박을 만들고, 뒤웅박에 송진을 시커멓게 칠하도록 하였다.
이때 부인은 무쇠로 만든 뒤웅박은 따로 간수하고, 박으로 만든 뒤웅박은 각 집안마다 사람 수만큼 나누어 주며 간직하라고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왜적이 들어오자, 부인은 마을 사람들을 동원하여 감추어 둔 무쇠 뒤웅박을 꺼내어 왜적이 올만한 길가에다 늘어놓았다. 왜적이 양전동을 지나다가 마을 주변에 늘어놓은 무쇠 뒤웅박을 보고, 이상히 여겨 들어보았으나 들 수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무쇠 뒤웅박으로 보이는 박으로 만든 가벼운 뒤웅박을 쓰고 왜적들에게 북을 치며 고함을 지르자, 왜적들이 크게 놀라 돌아갔다고 한다.
김면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과거를 준비하지 않고 한강(寒岡) 정구(鄭逑) 등 여러 사람들과 더불어 절친한 벗이 되었다. 군자(君子)의 고을에서 사숙(私淑)하여 몸을 다스리어 성리학을 강독하고 닦아서 제자를 가르치는 것을 임무로 삼으니, 배우는 자들이 그 문하에 줄지어 모여들었다.
1591년 4월 칠동정사(七洞精舍)에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개최하였는데, 동강(東岡), 한강(寒岡), 대암(大庵, 朴惺), 모계(茅溪, 文緯) 등이 참석하였다. 한편 김면은 임진왜란 발생 시 향청(鄕廳)에 연락을 취하였으며, 뒤에 김면군에 합류한 이득춘(李得春)이 고령향안(高靈鄕案)을 작성하였고, 김면이 모병의 과정에서 기병유사(起兵有司)로 각 지역의 사림을 임용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김면은 처음에 효렴(孝廉)으로 천거(薦擧)되어 참봉(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한참 있다가 유일(遺逸)로서 발탁되어 공조좌랑(工曹佐郞)에 임명되자 대궐에 나아가서 감사를 표한 다음에 바로 고향에 돌아가 조용하게 고향을 지키면서 세상에 출세할 생각을 다시 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면의 집안은 경제적으로 넉넉한 집안이었으며, 김면 가문이 혼인을 한 집안은 경상우도의 명문가문이었다. 김면 가문의 통혼관계를 살펴보면, 김씨(선산, 김해, 광주, 경주), 이씨(전주, 전의, 완산, 성주, 성산, 강양, 양산), 박씨(고령, 밀양, 죽산), 정씨(초계, 연일), 노씨(교하, 가수), 창녕성씨(昌寧成氏), 창녕조씨(昌寧曺氏) 등이다.
이처럼 김면 가문은 낙동강 좌우를 중심한 재지사족들과 중첩적인 혼인관계를 맺었다.
구체적으로 김면 가문의 경우 경제적 기반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김면의 증조 김장생(金莊生)이 소유했던 재산을 자손에게 상속한 분재기가 남아있다. 이를 분석하면 전체 노비가 약 90여 구, 토지가 300여 두락에 이른다고 한다. 임진왜란 발생 초기에 김면이 가족을 안음으로 제종(諸從)과 서제(庶弟) 등을 피신시킬 때 노비, 초노(樵奴) 15명을 딸려 보냈다는 기록에서 보면 김면의 가세는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기반과 토대 위에서 김면은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의병을 일으켜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김면이 갑자기 병이 나서 3월 11일에 진중(陣中)에서 죽자 , 군민들이 애통해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곽준(郭䞭), 문위(文偉), 정유명(鄭惟明), 성팽년(成彭年) 등이 함께 염습(殮襲)을 참관하여 고령의 칠동(七洞)에 있는 선영(先塋) 아래에 장사지냈다.

▣ 임진왜란 시기의 활동
임진왜란 시기에 김면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송암은 임진왜란 때 직접 의병을 창의하여 여러 차례 전투에 직접 참가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이를 통해서 일본군이 곡창 전라도 침입을 방어할 수 있었다.
디음으로 김면은 임진왜란 시기에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경상우도의 의병을 통괄하면서 의병의 전력을 가다듬었다.

▣ 중요 전투
1592년(선조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여러 진들이 모조리 무너지자, 영남지방 대부분이 온전하고 무사한 땅이 없을 지경이었다. 공이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정의를 부르짖고, 조종도(趙宗道), 곽준(郭䞭), 문위(文偉) 등과 더불어 거창, 고령 사이에서 군사를 규합한 다음에 군사와 군량미를 조달하고 모집하니, 멀고 가까운 곳에서 사람들이 다투어 그에게 달려왔다. 김면이 군사를 모우는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임진년 4월 19일 드디어 의병을 옛 마을에서 모으니, 촌락이 온통 비어 형세가 소집하기 어려웠다. 22일 즉각 가동(家僮)들을 모아 혹은 창을 들고 혹은 몽둥이를 가지고 나선 건장한 장정이 79인이요, 여러 종질이 15인이라. 경내에 발문하여 약속을 정하다.
2. (전략) 먼저 가동 700여 인을 통솔하여 기병하니 원근에서 다투어 응모하여 왔다. 고령에 적병이 이르니 김면은 고령이 잔소하다고 하여 드디어 거창으로 달려갔다. 그때 거창의 선비와 백성이 약간의 군사를 모아 가지고 있다가 김면에게 붙었다. 곽준, 문위, 박정번, 유중용 등으로서 참모로 삼고, 박성으로서 군량을 모으게 하였다. 4~5일 동안에 군사 2,000여 명을 모았다.
3. 5월11일 김면은 고령으로부터 가동과 같은 마을 사람 20여 인을 거느리고서 응모하였고, 그 군의 동·서·남면의 군사를 모았다. 즉시 거창에 다다라 곽준, 문위, 김회 등과 더불어 여러 고을에 통문하고 기병유사를 정하였다.
위의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5월 11일 정식 기병하여 거창으로 달려가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과 합쳐서 2,000여 명으로 성군(成軍 )하였으며, 효율적인 기병을 위해 각 지역에 기병유사(起兵有司)를 두었다. 이후 전개된 주요 전투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나서 제일 먼저 김면이 고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후 거창으로가기 전 4월 말에서 5월 초 연강(沿江)에서 한차례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개산포대첩은 6월 9~10일에 의병장 송암이 노고산성(老姑山城)과 무계리산성(茂溪里山城)에 의병을 집결시켜 왜군의 낙동강 운행에 일대 타격을 가한 전투이다. 임진왜란 때 경상도 지역으로 진출한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기 이끄는 왜적은 낙동강 수운 확보 계획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개령현에 주둔하면서, 5월 19일에 부장인 무라카미 가게치카(村上景親)로 하여금 무계를 지키게 했다.
고령에서 의병을 일으킨 의병장 김면은 이때 거창에 머물고 있다가 고령이 위험에 직면하자 6월 6~7일 경 군사를 이끌고 고령으로 들어와 9일과 10일에 개산포에서 왜적과 전투를 벌였다. 김면은 전투에서 얻은 보화를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에게 보내어 행재소(行在所)에 전하도록 했다.

▣ 무계전투
무계전투는 경상도의 왜적은 성주와 개령에 주둔하고 낙동강을 주요 보급로 및 교통로로 이용하면서 호남으로 들어가고자 했기 때문에 낙동강에 그들의 왕래가 빈번했다.
무계지역을 확보한 김면의 의병군이 6월 18일 경 낙동강을 통과하던 왜선두 척을 발견해 공격한 것이 무계전투이다.
6월에 조정(朝廷)에서 전공을 인정해 김면을 합천 군수(陜川郡守)에 임명했으며, 9월에 공을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임명했다가 곧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승진시켜 포상(褒賞)했다.
7월 29일에서 8월 1일에는 지금까지의 방어적 매복 작전에서 규모 있는 공격적 작전으로 전환한 지례전투를 벌였는데, 지례 관사에 모인 적을 회공(火攻)으로 모두 태워 죽인 전투였다.
8월 19일에서 20일에는 김면과 내암 정인홍(鄭仁弘)의 군단이 무계와 현풍의 지원이 끊긴 성주의 일본군을 공격한 성주전투를 벌였는데, 피해를 입기도 했다. 9월 중순에는 김면이 진주목사 김시민과 연합하여 지례의 사랑암에서 전투를 벌였다.
11월에 임금이 김면의 위망(威望)이 가장 드러났다고 하여 공에게 의병대장(義兵大將)의 칭호를 내리고, 1도(道)의 군사를 통솔하게 했다. 교지(敎旨)가 이르자, 공이 진중(陣中)으로 맞아드려 왕명(王命)에 절하고 통곡(痛哭)하니, 온 군사가 감동하였다. 이때에 호남의 의병대장 최경회(崔慶會)가 종사관(從事官) 문홍헌(文弘獻) 등과 더불어 거창(居昌)에 진(陣)을 쳤다. 호서(湖西)의 여러 의병장들도 또한 가까운 지경에 있었으므로 공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그들을 맞이하여 개령(開寧)에 주둔한 왜적을 함께 소탕할 것을 모의했다. 최경회가 1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모이고 여러 소장(小將)들도 모두 이르렀으므로 약속을 이미 정했으나 마침 군교(軍校)가 전투할 시기를 잘못 잡아서 큰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 <다음에 계속>
참고문헌, 김면장군후원회 발행, ‘임진란 구국공신 의병도 대장 김면 장군’에서 발췌
주간고령 기획팀

 

구독 후원 하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