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년, 문신·시인·문인·학자 특히 시문에 뛰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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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이조년, 문신·시인·문인·학자 특히 시문에 뛰어나

인물평전 / 매운당 이조년 선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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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년 묘소, 운수면 대평리 897(비봉포란형)

 

지난호에 이어

매운당 이조년(李兆年) 선생 재조명
‘고려사’에는 이조년에 대해 “그는 나면서부터 키가 작았으나 날쌔고 치밀하여 정신과 풍채가 빼어났다. 자랄수록 기품이 있고 의지가 굳은 데에다 특히 문장에 뛰어났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1294년(충렬왕 20)에 급제한 후 안남 서기 예빈 내급사, 협주 지주사 등을 거쳐 비서랑이 되었고, 순탄하게만 보였던 그의 관직 생활은 1306년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들어가면서부터 험난해지기 시작했다. 충렬왕이 아들 충선왕을 데리러 원나라로 갔을 때 왕유소(王惟紹), 송방영(宋邦英) 등이 충선왕을 모함해, 이간질 시키고 서흥후 전(琠)을 왕위에 앉히려 했다.
이때 이조년은 어느 쪽에도 가담하지 않고 충렬왕만을 보필했다. 충선왕이 왕위에 오르자 왕유소를 비롯한 모함자들은 모두 처형되고 충렬왕을 수행했다는 이유로 이조년 역시 귀양을 가게 되었다.
이조년은 서른아홉 살 나이로 관직에서 쫓겨난 그는 권력에 회의를 느끼고 유배 후 13년간 고향 고령 운수에서 은거했다. 그러면서도 단 한 번도 자신의 죄를 변명하지 않아 많은 사람들로부터 ‘대범한 군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 운수에 매운당(梅雲堂) 세우고 학문에 몰두
그는 고향에 매운당(梅雲堂)을 세우고 백 가지 화초를 심어 〈백화헌시(百花軒詩)〉를 지으며 일그러진 세상을 노래하고 학문에 몰두했다.
충숙왕이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을 때 심왕(瀋王) 고(暠)가 왕위를 넘보자 발분(發憤)하여 홀로 원나라에 가서 왕의 정직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충숙왕이 환국한 후 감찰장령·군부판서 등을 역임했다.
1327년 충숙왕이 원도(元都)에 있을 때 왕을 도운 공로로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로서 이등공신이 되었으며, 이어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승진했다. 이 때 충숙왕은 심왕당(瀋王黨)의 끊임없는 모략으로 왕위를 심왕에게 선양(禪讓)하려 하였으나 한종유(韓宗愈) 등과 함께 극력 반대하여 이를 저지시켰다.
충혜왕의 음탕함을 여러 번 간하였으나 받아드리지 않으므로 1341년 12월 성산군으로 사직을 청하였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6월 조적의 난 때 호종한 공로로 성근익찬경절공신(誠勤翊贊勁節功臣)에 녹권 되고 벽상(壁上)에 도형(圖形)되었다. 특히 시문에 뛰어났으며, 다정가(多情歌) 시조 한 수가 전한다.
다정가(多情歌)는 이조년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 뒤의 심정을 읊은 이 시조는 고려시대 시조 중에서 가장 문학성이 뛰어난 작품으로, 오늘날 전하는 고시조 가운데 자주 애송되는 작품이다. 그는 1343년 5월 세상을 떠났다.
▣ 형제투금(兄弟投金)의 설화, 황금보다 빛나는 형제애
고려 공민왕 때의 일이다.
두 형제가 길에서 황금 두 덩이를 우연히 발견, 하나는 형이 갖고 다른 하나는 동생이 나누어 가지게 되었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던 중 느닷없이 동생이 물속으로 황금을 던져버렸다. 형이 깜짝 놀라, 왜 그랬냐고 묻자 동생이 답하기를 황금을 본 순간, 형의 황금도 탐하려는 마음이 생겨서 강에 던져버렸다는 것이다. 이 말에 형도 감동하여, 형 역시 황금을 물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바로 이조년과 그의 형 이억년이라고 전해지는데, 형제간의 아름다운 우애를 다룬 얘기를 고교 한문 교과서에 실었던 전설로 전하는 ‘형제투금(兄弟投金, 투금탄이라고도 한다)’이다. 이 형제가 황금을 던진 곳은 구암공원의 한 연못이라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0 양천현(陽川縣) 산천 공암진(孔巖津) 편에 전한다.
공암진 터는 현재 서울시 강서구 가양2동 구암공원(일명 허준 공원, 구암은 동의보감의 허준 선생의 호)의 한 연못이데, 그 안내문에도 이 이야기는 자세히 소개되고 있다. 이 일화는 ‘고려사절요’, ‘고려사열전’, ‘양천읍지’, ‘동국여지승람’ 등에 실려 있다.
고려말에 개성유수(현 서울시장격)를 지냈던 이억년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경남 함양군으로 낙향할 때, 그 동생 이조년이 한강나루건너까지 배웅해 주다가 일어난 일이다.
조선후기의 문신 황덕길(1750~1827)의 시문집 『하려집(下廬集)』에 의하면 이 이야기는「성주이씨 가승(星州李氏 家乘)」에 이조년·이억년 형제의 이야기로 기록하고 있다고 전한다. 5형제 모두가 문과에 급제했으며 이 중에 천년, 만년, 조년이 출중하였는데, 이조년 선생이 가장 빼어났다고 한다. 그들 일가의 이름은 당대에 떨쳤을 뿐만 아니라 형제들 간의 우애도 남달랐다고 한다. 더욱이 백, 천, 만, 억, 조라는 5형제의 특이한 이름으로도 화제가 되기에 충분했다.
이들 5형제의 관직을 보면, 밀직지사 이백년, 참지정사 이천년, 낭장 이만년, 참찬 이억년, 그리고 정당문학 이조년이다.
‘투금탄’ 설화가 전해 내려오는 곳은 지금의 서울시 강서구 공암진 나루터다. 옛날에는 이곳 탑산에 큰 구멍이 뚫린 바위가 있어 이곳의 지명을 공암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공암 나루터는 한양과 강화를 잇는 중간위치로서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강화, 고양, 김포 쪽으로 가는 사람들이 많이 찾았다고 한다. 아쉽게도 현재는 대부분 육지가 되어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지만, 대신 가양동 일대에 공암진 나루길이라는 길과 공원을 조성했다.
▣ 한강공원에 ‘투금탄 설화’ 재현 조형물 설치
서울시 한강사업본부에서는 2015년 투금탄 설화 재현 조형물 설치를 위해 공모를 통해 2016년 설치했다.
방화대교 남단 강서한강공원 가족 피크닉장 인근에 높이 15m, 폭 10m 규모의 조형물인 이조년·이억년 형제의 모습과 배 조형물을 재현했다.
하지만 2020년 여름 장마 때 54일이라는 역대 최장기간 장마와 9년만의 한강 본류 홍수주의보 발효로 조형물이 장기간 침수·파손되어 안타깝게도 조형물이 유실되고 현재는 투금탄을 설명하기 위한 안내표지판과 목재 데크만이 덩그런히 남아있다.
서울시 한강사업본부에 의하면, 유실 파손된 조형물을 새롭게 설치하는 방안을 논의했으나 처음보다 더 많은 대규모 예산이 소요되고, 인근에 생태공원 등이 조성돼 있어 인공적인 시설물인 조형물을 설치하여 유해물질 발생 등이 생길 우려가 있어 재설치는 어렵다고 알려왔다.
▣ 이조년 선생이 남긴 유일한 詩 ‘百花軒詩’
본관이 성주(星州)인 이조년 선생은 성주읍 용산리에서 태어나 자랐고, 특히 시문이 뛰어났다고 한다. 묘소와 재실은 고령군 운수면 대평리 897번지에 있다.
고려 태조 23년(서기9401년) 지금의 성주가 경산부로 승격할 당시 고령군이 경산부에 속했다. 따라서 운라산(云羅山)을 비롯한 흑수(黑水) 등 고령군 운수면이 당시의 행정구역상 지금의 성주인 경산부에 속했다. 이곳에서 이조년 선생이 13년간이나 은거했다.
이조년 선생을 기리는 매국정(梅菊亭) 재실에는 이조년 선생의 존영이 있고, 백화원 마당에는 신도비와 다정가, 투금탄 비석 등이 세워져 있으며 매년 음력 2월 성주이씨 후손들이 향사를 지내고 있다.
선생의 묘소는 재실에서 약 1km 지점에 있으며, 풍수가들의 말에 의하면 천하의 명당이라고 한다.
이조년 선생은 생존 시 자신의 집에다 백화헌(百花軒)이라는 현판을 붙였는데, ‘백가지 꽃이 만발한 집’이라는 뜻이라 한다.
이조년 선생이 남긴 유일한 詩 『百花軒詩』는 아래와 같다.
위보재화경막가(爲報栽花更莫加)
수영어백불수과(數盈於百不須過)
설매상국청표외(雪梅霜菊淸標外)
랑자부홍야민다(浪紫浮紅也忟多)
이꽃 저꽃 주섬주섬 심을 것 있나
백화헌에 백화를 피워야 맛인가
눈 속에는 매화꽃 서리치면 국화꽃
울긋불긋 여느 꽃 부질없느니
▣ 이조년 선생 추모 「전국백일장」 매년 고령군에서 개최
고령군에서는 문열공 매운당 이조년 선생을 추모하고 후세들에게 문학적 소양을 진작시키기 위해 「전국백일장」을 매년 개최한다. 참가대상은 전국 초·중·고·대학·일반으로 구분한다.
이 행사의 주최·주관은 고령문화원, 한국문인협회 고령군지부, 주부독서회이고, 고령교육지원청, 성주이씨 문열공종회, 한국문화원연합회에서 후원한다.
올해로 13회째인 이조년 선생 추모 전국 백일장은 1회부터 11회까지는 매년 4월 대가야체험축제 기간에 성황리에 개최했다. 그러나 2020년인 지난해부터는 코로나19 여파로 공모전을 통해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11회인 2019년도까지 부문별은 시, 시조 산문 등 전국에서 참가 인원을 보면, 대학·일반부는 11명, 고등부 119명, 중학부 37명, 초등부 41명으로 총 308명이 참가했다.
지난해인 2020년 제12회 공모전에는 대학『일반부 274명, 고등부 196명, 중학부 91명, 초등부 101명 등으로 참가 인원이 대폭 늘어났다.
연도별 글제로 2009년 제1회 대회, 가야금, 알, 왕릉, 숲 등이었고, 2010년 제2회 딸기, 장터, 배, 토기 등이었으며, 2011년 제3회 아버지, 길, 그릇, 바위 등이었다.
▣ 2020년 공모전에 662명 참가, 명실상부 전국대회로 부상
2012년 제4회대회 글제는 쇠(철), 휴지통, 의자, 국밥 이었고, 2013년 제5회 고향길, 구두, 휴대폰, 닭이었으며, 2014년 제6회 우물, 연필, 배꽃, 귀 등이었다. 2015년 제7회 대가야읍, 거울, 아침 등이었고, 2016년 제8회 바람개비, 고속도로, 로터리 등이었다, 2017년 제9회 손, 바람, 유리창 등이었고, 2018년 제10회 소리, 눈(eye), 고양이 등이고, 2019년 제11회는 얼굴, 시장, 우산이 글제였다.
공모전으로 치른 2020년 지난해 글제는 자유였는데 총 662명이 참가해 성황을 이뤘다.
제3회까지는 대상에 고령군수상이었지만 2012년 제4회부터는 훈격이 문화체육장관상으로 격상되었으며, 따라서 시상금도 대상 300만원에서 500만원으로 높아지게 되어 현재까지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2020년 제12회 지난해 대회결과 대상에 손은주(의성군)씨가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대학·일반부 장원에는 김순자(안동시)씨가 경상북도지시상을 각각 수상했다.

 

주간고령 기획팀

 

 

투금탄 설화 조형물, 지난해 장마에 유실되고 현재는 없다(사진, 서울시 한강사업본부 제공).JPG

투금탄 설화 조형물, 지난해 장마에 유실되고 현재는 없다(사진, 서울시 한강사업본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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