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이 시인이 되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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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이 시인이 되다(2)

万 折(文筆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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万 折(文筆家)

 

지난호에 이어

사면을 두고 여야가 모두가 찬반의 백가쟁명이다. 여당은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탄핵 자체가 잘못 됐다는 의원이 있는 야당이 더 문제다. ‘탄핵 부정(否定)’이 나오는가 하면 ‘부끄러운 조상도 내 조상’도 나오고, 특히 소장층에서는 ‘옛 보수 회귀’와 왜 ‘우리가 먼저 꺼내냐’도 나왔다. 소장층의 원칙론과 패기는 인정하지만, 결론은 빼앗긴 정권 찾는 데에 방점을 찍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려면 야권 단일후보가 핵심이다. 좀 대국(大局)을 보라. 우후죽순, 자칭타칭의 잠용(潛龍)들의 분란은 자멸임을 명심하라! 한두 번 겪었는가?
편향성 논란을 불렀던 선관위가 이제 철(?)이 드는지 선거법 고치자고 뒷북친다. 지금 봐도 그런 노골적 편향은 없었다. 건전한 상식으로는 이해하기도 어렵다. 말하기도 민망한 까마득한 옛날 악명 높은 자유당이 떠오른다. 당시 한 장관은, 공무원은 대통령 위해 충성 다 해야 한다고 전국 순회도 했으며, 동 직원이 야당 후보자 집 앞에 쓰레기 몰래 버리고 경범죄 해당 여부 가린다며 연행했다가 후보 등록 시간 지나서 풀어줬던 것 말이다.
나라의 상징인 광화문은 왜 포크레인이 활개 도수체조를 하나. 광장 개선하겠다고? 차선 줄이는 공사가 무슨 개선이냐. 단체장 유고일 때 그 대행은 업무대행이지 ‘권력 대행’은 아니지 않는가. 처음 계획이 있었을 때 서울시와 중앙정부가 엇박자를 내더니 기어이 강행하고 있다.
50여 년을 가벼운 사고는 있었지만 정상 운행이었는데 난데없는 지하철 내진(耐震) 공사는 왜 하나. 가뜩이나 적자가 쌓여만 간다는 공기업인데, 자식들에게 그 빚도 떠넘기려 하는가 말이다. 아마도 지하철 내진을 탈원전과 연계하겠다는, 고도의 연막작전이거나 아니면 성동격서(聲東擊西) 작전인 듯하다. 고차원 방정식(?)임이 분명하다.
나는 탈원전의 비판을, 메아리도 없는 빈 하늘에다 대고 숱하게 했다. 또 신문이 그러도록 부추긴다. 미국 두 연구 기관이, 버리던 핵연료봉을 다시 쓸 수 있어 ‘원전은 지속 가능한 에너지가 입증’됐다고 했으며, 우리 원자력계 석학인 황일순 교수는, ‘우리 원자력 기술은 세계 최고인데 탈원전을 하려는 것은 자살 하려는 것’이라는 격한 비판도 했다.
기차는 떠났지만 또 헛소리라도 또 한 번 하고 싶다. 왜 그렇게 탈원전에 국력을 소진하는가 말이다. ‘끼리끼리 공청회’는 말고 전 국민에게 물어 보는 공청회를 다시 하라! 선거 공약이 무슨 대명률이 아닌 이상 ‘국가 백년대계’의 방향타를 바꿀 줄도 알아야 한다. 가상 영화 한 편 보고 한 결정이 얼마나 가벼웠는지도 다시 돌아보라는 말이다. 공약도 현실과 괴리(乖離)가 너무 크면 바꾸는 것도 국가 영도자의 요체(要諦)요 사명이다. 민주공화국 영도자는 성역은 아니다. 이 ‘3등 잡글쟁이’가 읍소(泣訴)한다.
‘4·27선언 3주년’이라고 “남북 대화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했다. ‘로미오와 줄리에트?’ ‘일편단심 민들레···’? 남북도 북미도 냉갈령인데 이를 어쩌나.
‘특채는 관용’이라는 전교조. 그들만의 ‘불공정 리그’인가, 밀어주고 끌어주고···. 교수(조국)들만 ‘품앗이’하는 줄 알았더니 전교조도 하네. 가장 공정한 척하는 전교조, 민노총만이 월권 탈법 전문인 줄 알았더니 전교조도 다르지 않네. 누구의 독한 질책처럼 산업은 민노총이 망치고, 교육은 전교조가 망친다고 하더니 그게 정설이 되려나?
난세에는 영웅이 난다더니 이 난국(?)에는 시인이 나왔다. ‘시여, 시여, 님이여 진심으로 사과···’. 하다하다 참···, 역겹다는 말밖에 할 게 없다. ‘진심으로 사과?’ 국어사전을 고쳐 써야겠다. 다시 말해 ‘사과’의 의미를 적어도 “속 보이는 위선적 언행”으로, 또는 “궁할 때 위기 탈출용으로 쓰는 말”로 바꿔야겠다는 말이다. 얼마나 가식적이면 내 이런 가상도 하겠는가.
가장 숭엄해야 할 현충원에 가서 그 무슨 망발이냐. 다선(多選)이 부끄럽다. 잔칫집에 가서 조문시(弔文詩) 쓴 모양새다. 그도 무릎 꿇기 ‘적당한 곳’이라 기획(?)을 했고 누가 봐도 작심을 한 사과임이 분명한데, ‘순간의 해프닝’이니 괜찮다고 비호하는 무리도 있다. 삶은 소대가리가 또 웃겠다.  
 
* 사외(社外) 기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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