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충렬∙충선∙충숙∙충혜 4대에 걸쳐 왕 보필한 충직한 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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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고려 충렬∙충선∙충숙∙충혜 4대에 걸쳐 왕 보필한 충직한 신하

인물평전
매운당 이조년 선생(1)

이조년 존영2.JPG

이조년 존영

 

 

다정가(多情歌)
이화월백삼경천(梨花月白三更川)
제혈성성원두견(啼血聲聲怨杜鵑)
진각다정원시병(儘覺多情原是病)
불관인사불성면(不關人事不成眠)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다정(多情)도 병(病)인양 하여 잠못들어 하노라
매운당 이조년(李兆年) 선생이 지은 다정가(多情歌, 梨花操라 하기도 한다)다. 만인이 좋아하는 시조로서 오늘날 전하는 고시조 가운데 자주 애송되는 고려시대 시조 중 최고의 걸작이다. 다정가를 현대어로 풀이하면,
새하얀 배꽃에 달빛은 부서지고
밤은 깊어 은하수도 자정을 넘었는데
가지 끝에 매달린 연모의 마음
두견새가 어찌 알리오만
미음속 연모의 정도 병이런가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네
흐드러지게 핀 배꽃과 부서지는 달빛, 그리고 두견새 울음소리, 시각과 청각이 기막히게 어우러져 아름다운 정서를 자아내고 있다.
이 시조는 충혜왕에 대한 이조년의 지극한 충성심의 발로에서 나온 것으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은거하면서 우의법(寓意法)을 써서 이 시조를 지었다고 한다. 우수에 젖어있는 매운당 자신은 청초 결백한 ‘배꽃’의 모습에, ‘은한이 삼경’은 왕을 둘러싼 간신배들이 날뛰는 궁궐에 비유했으며, ‘일지춘심’은 충혜왕에 대한 충성심을, ‘자규’는 바로 왕을 비유했다.
정치와 사회가 문란했던 당시 고향으로 물러나 나라를 생각했을 만년의 심경을 읊은 것이다. 정치를 떠나 은거한 그였기에 생각도 많고 회한도 많았으리라. 일지춘심을 그 누가 알까. 두견새라도 알기나 할까.
이 시조는 고려시대 시조 가운데 표현기법이나 정서면에서 문학성이 가장 빼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시조의 성격은 평시조, 서정시, 다정가이고 표현은 의인법, 직유법, 시각과 청각적 심상의 조화, 백색 이미지이다. 그리고 주제는 배꽃과 달과 은하수, 두견새의 소리가 조화되어 봄밤의 애상적인 정서가 담겨 있다. 그 시각과 청각의 의미로 조화된, 지향할 수 없는  봄밤의 서정이 시적 자아를 잠 못들게 하고 있다. 자신의 충정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에서의 봄밤, 잠 못들 수밖에 없다. 다정다감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잠에 들 수 있으랴.
 
▣ 이조년 가문-명현거유, 문원(文苑) 주도한 인물 많아
이조년(1269~1343)은 고려후기의 문신이며 우애와 충직의 인물이다.
성주(星州)이씨의 중시조인 이장경(李長庚)의 다섯째 아들이다. 다섯 형제들의 이름을 보면, 첫째는 이백년(李百年), 둘째는 이천년(李千年), 셋째는 이만년(李萬年), 넷째는 이억년(李億年), 그리고 다섯째가 이조년(李兆年)으로 5형제 모두 이름이 특이하다. 이조년의 자는 원로(元老), 호는 매운당(梅雲堂) 또는 백화헌(百花軒),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성주이씨의 시조(始祖)는 신라 경순왕의 명신 이순유(李純由)이다.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여 망국의 한을 남기게 되자 이순유는 마의태자(麻衣太子)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나라를 구하려 하였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충절을 지켜 이름마저 극신(克臣)이라 고치고 성주읍 경산리에 은둔하였다.
이에 고려 태조는 이순유의 절의에 감복, “극신은 나의 신하는 아니지만 나의 백성임에는 틀림없다.”하여 호장(戶長:고려시대 행정 전담)을 삼았다.
그의 12세손 이장경이 호장을 지내면서 덕망이 높았고, 손자 이승경(李承慶)이 원나라에 가서 벼슬할 때 공이 많아 원나라 황제가 그의 할아버지 이장경을 농서군공(隴西君公)에 추봉했다.
그로인해 처음에는 농서이씨라 했으나 그 후 성주목으로 승격함에 따라 본관을 성주(星州)로 했다. 그가 바로 성주이씨(星州李氏)의 중시조이며, 다섯 아들 중 막내가 이조년이다.
신라 때 성주는 본피현이라 했으며, 그 후 성산군, 벽진군으로 바뀌다 고려 태조 23년(서기 940년)에 경산부(京山府)로 승격했다. 이 때 경산부 수령으로 부임한 정윤의가 이조년의 사람 됨됨이를 보고 사위로 삼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조년 선생의 가문에는 고려말에 이름을 떨쳤던 명현거유(名賢巨儒)가 많았을 뿐만 아니라 초은·도은 두 분은 문원(文苑)을 주도하였다. 초은(樵隱) 이인복(李仁復)은 이조년의 손자이며 송대유학(宋代儒學)의 태두인 백이정(白頤正)의 문하생이다. 1326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검교시중(檢校侍中)에 이르렀다. 문집으로 『초은집(樵隱集)』이 전한다.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은 고려말의 시인, 대학자이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특히 시문(詩文)에 이름이 높았다. 여말삼은(麗末三隱) 또는 고려삼은이라 함은 고려의 세 충신을 말하며, 흔히 삼은이라 부른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 야은(冶隱) 길재(吉再) 이 세 사람을 칭하지만 길재 대신 도은 이숭인을 넣기도 한다. 이숭인은 이장경의 장남인 이백년의 증손이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포은 정몽주와 정치적 노선을 같이 하였다가 정도전(鄭道傳)의 심복 황거정(黃居正)에 의해 유배지에서 살해당했다. 문집으로『도은집(陶隱集)』이 전한다.
형재(亨齋) 이직(李稷)은 이조년의 증손이며, 이인민(李仁敏)의 아들이다. 1377년 문과에 급제하여 1392년 개국공신으로 성산군(星山君)에 봉해졌으며, 여러 관직을 거쳐 세종 때는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그의 대표적인 시조 ‘까마귀 검다하고 백로야 웃지마라… 로 시작하는 『오로시(烏鷺時)』가 유명하다. 문집으로 형재시집(亨齋詩集)이 전한다.
고려말에 이름을 떨쳤던 인복(仁復), 인민(仁敏), 인임(仁任)의 3형제는 이조년의 손자요, 조선개국공신에 영의정을 지낸 이목(李穆)은 인민의 아들이다.
 
 

2. 매국정, 운수면 대평로 236-20.JPG

매국정(운수면 대평리 897번지)

 

3. 이조년 신도비.JPG

신도비
 
▣ 충렬왕부터 4대에 걸쳐 왕을 보필한 직간신의 大문장가
고려가 급속도로 원나라 속국으로 전락하고 있었던 당시 충렬, 충선, 충숙, 충혜왕 4대에 걸쳐 왕을 보필했던 직간신의 이조년은 참으로 한평생을 착잡하고도 회한에 찬 삶을 살았을 것이다. 어쩌면 다가올 고려의 운명을 직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정당문학, 예문관대제학을 지낸 뛰어난 대학자였음에도 다정가(多情歌) 한수로 그의 시재(詩才)를 전부 헤아릴 수 없음이 아쉽기만 하다.
1306년 충렬왕은 충선왕의 환국을 지지하고 충선왕을 폐하기 위해 원나라에 갔다. 당시 원나라는 왕권 다툼에 여념이 없었다. 충렬왕의 셋째 아들 충선왕은 왕권을 되찾기 위해 그곳에서 나름대로의 충선왕이 지지하고 있던 원나라 무종이 차기왕으로 유력시 되자 충선왕을 폐하기 위해 갔던 충렬왕은 외려 충선왕에 의해 왕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1308년 충렬왕이 죽자 충선왕이 다시 왕위에 올랐다.
이조년은 이 때 비서승으로 충렬왕을 따라 원나라에 갔던 인물이다. 그는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충렬왕을 성실히 보필했다. 그러나 부자간 왕권 다툼으로 인해 유배길에 올라야만 했다. 1306년 비서승 때 왕유소(王惟紹) 등이 충렬왕 부자를 이간시키고 서흥후(瑞興侯) 전(琠)을 충렬왕의 후계로 삼으려 하자 어느 파에도 가담하지 않고 최진(崔晉)과 함께 충렬왕을 보필하였으나 이에 연루되어 누명을 쓰고 귀양 가게 된 것이다.
키가 작은 편인 이조년 선생은 성품이 치밀하고 용감하였으며, 의지가 굳세고 심지가 대담하였을 뿐만 아니라 매사에 엄격하여서 임금에게 거리낌 없는 직간을 서슴치 않았다고 한다. 임금께 대제학으로서 충성스런 간언을 하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벼슬을 내어놓고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왔다. 유배 후 13년 간 고향 운수에 은거 했으나 한 번도 자신의 무죄를 왕께 호소하지 않았다.
퇴계 이황은 이조년 선생을 가리켜 “그는 난세에 태어나서 수많은 변고와 험난을 겪으면서도 혼미한 임금을 받들어 지조가 금석 같았고, 충직한 깊이가 후세에 우뚝하여 고려 500년 역사의 제1인자”라고 찬양하였다.
그리고 조선 중기 정치가요, 성리학 완성자인 이이 율곡(1536~1584)은 “나도 이조년의 문하라 이르게 해다오.”라는 유언을 남겼다는 설도 있다.
이조년 선생이 향리인 성주로 돌아와 머물면서 청빈하고 고독한 심경을 읊은 시조 한 수가 바로 다정가(多情歌)이다.
충숙왕은 3년간이나 원나라에 억류되어 있었다. 심양왕 왕고가 왕위 찬탈을 음모하자 이조년은 홀로 원나라에 들어가 원 조정에다 그 부당함을 상소하여 이를 저지시켰다.
충혜왕은 패륜이었다. 부왕의 후비, 수비 권씨와 숙공휘령공주를 잇달아 강간했다. 수비 권씨는 수치심을 이기지 못해 자결했고, 숙공휘령공주는 이 사실을 원 왕실에 알렸다. 이 사건은 훗날 충혜왕의 폐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충혜왕의 폐륜과 학정은 계속되었고, 악행을 보고 받은 원나라 순제는 그를 압송하여 게양현으로 유배시키기에 이르렀다.
순제는 “그대 왕정은 남의 윗사람으로서 백성들의 고혈을 긁어 먹은 것이 너무 심하였으니 비록 그대의 피를 온 천하의 개에게 먹인다 해도 오히려 부족하다. 그러나 내가 사람 죽이기를 즐겨하지 않기 때문에 게양으로 귀양 보내는 것이니 그대는 나를 원망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귀양 가던 도중에 죽었다. 그 소식을 들은 백성들은 슬퍼하기는커녕 기뻐서 날뛰기까지 했다고 한다.
원나라에서 이조년이 숙위할 때의 일이다. 충혜왕은 하루하루 방탕한 생활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조년이 왕께 간곡한 장계의 말을 올리자 왕이 담을 넘어 도망을 쳤다고 한다. 이조년은 이렇게 충직한 신하였다. 여러 번 충혜왕의 학정을 간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이듬해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조년은 1294년(충렬왕20년) 향공진사로 문과에 급제하여 안남서기에 보직되고 예빈내급사를 거쳐 지협주사·비서랑 등을 지냈다.
1330년 충혜왕이 즉위하자 장령이 되었고 그 뒤 여러 번 충혜왕을 따라 원나라를 내왕했다. 1339년 충혜왕이 복위하자 그 이듬해 정당문학에 승진하였고 예문관대제학이 되었다.
뜻이 확고하고 할 말을 하는 강직한 성품이었으며, 이런 성품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오해와 많은 배척을 받기도 했다. 역임한 관직마다 많은 명성과 공적이 있었으며, 공민왕 때 성산군에 추증되었고 충혜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다음에 계속) 
주간고령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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