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화 보급으로 의생활 개선과 산업발전 ‘혁혁한 공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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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면화 보급으로 의생활 개선과 산업발전 ‘혁혁한 공적’

인물평전
문익점 선생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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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익점 초상화

 

문익점(文益漸, 1331~1400) 선생의 본관은 남평(南平), 첫 이름은 익첨(益瞻),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이며, 강성현(江城縣:지금의 경남 산청)에서 출생, 부친은 보문관제학(寶文館提學) 충정공(忠貞公) 문숙선(文淑宣)이다.
1360년(공민왕9)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과 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지냈다.
문익점(文益漸)이 우리나라에 목화종자가 처음 들어온 때는 고려 공민왕 13년 갑진년(1364년)이다. 고려사와 조선 태조실록 등에 나타난 기록에 의하면 문익점(文益漸)은 강성현(江城縣, 지금의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에서 태어났다. 공민왕 12년 계묘년(1363년)에 좌정언(종6품)에 올라 계품사 좌시중 이공수 사신의 서장관(書狀官:사신을 수행하던 기록관)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때 목화 씨앗 10여 개를 비밀리에 붓대롱 속에 감추고 와서 번식시킨 인물이다.
그는 원래 진주 관할에 있는 지리산 언저리의 농사꾼 출신이었다. 이런 그가 12세 때부터 충청도 출신의 학식 높은 유학자(儒學者) 가정(稼亭) 이곡(李穀)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이후 그의 명망이 드높아 조정에서 특별히 벼슬을 주어 불러올렸다. 그 뒤 그는 원나라에서 실시하는 과거에도 합격했고, 조정에서 시행하는 문과에도 급제했다. 이 때 스승의 아들인 목은 이색(李穡)과 교유를 갖고 학문을 강론하였다. 30세 때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과 과거에 동반 급제했다. 그 이후 예문관(藝文館) 직강(直講), 태상박사(太常博士), 좌정언(左正言) 등 직을 역임했다.
문익점은 이 목화씨앗을 가지고 공민왕 13년 갑진년(1364년)에 진주에 도착해 그 반을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주어 심게 했다고 한다.
정천익은 이 씨앗을 단성면 배양마을에 심었으나 대부분 말라죽고 그 중 1개가 싹을 틔워 그 해 가을에 백여 개의 종자를 수확하게 됐다. 정천익은 해마다 목화종자를 늘려 공민왕 16년 정미년(1367년)에는 목화씨를 마을 전체에 나눠줘 재배하게 했다. 이 목화 재배가 전국으로 널리 퍼져나감에 따라 이 소식을 들은 우왕이 을묘년(1375년)에 문익점을 불러 전의주부 벼슬을 주어 복직시킨 것으로 알려졌다.
조선 성종의 명에 의해 편찬된〈동국통감〉과〈동국여지승람〉, 선조 때 편찬된〈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등을 보면 ‘문익점이 원나라에 갔다 돌아올 때 목면씨를 갖고 들어와 장인 정천익에게 맡겼고, 장인이 심어 3년 동안 성취시켜 드디어 크게 번식 시켰다.’라고 기록돼 있다. 또한 당시 문익점과 정천익은 각각 5개의 목화씨를 심었는데, 문익점이 심은 씨는 모두 죽고, 정천익이 심은 씨 하나에서만 싹이 나왔다고〈태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정천익이 문익점과 함께 목화를 처음 심어 번식시킨 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배양마을에는 문익점면화시배지(文益漸棉花始培地)가 사적 제108호로 지정돼 남아있다.
그런데 십 수 년 전부터 문익점 선생의 후손들과 정천익 후손들 사이에 목화재배지와 목화재배에 따른 공로문제를 두고 한 치의 양보 없는 다툼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 사적 108호 문화재 명칭을 ‘문익점면화시배지’가 아닌 ‘정천익 목면시배유지’로 해야 한다고 정씨 문중이 이의를 제기하자 문화재청은 ‘목면시배유지’로 명칭을 변경 공포했다. 이렇게 되자 문씨 문중은 구 명칭으로 다시 변경해 줄 것과 ‘목면시배유지’에 세워놓은 정천익 선생의 신도비를 철거해야 한다는 요구를 관계요로에 강하게 제기하고 있다.
이 다툼을 지켜보면서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 씨족관념이 얼마나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가를 엿볼 수 있다. 이 같은 관념이 지나치면 집단의기주의나 배타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고 세계화와 민주주의 발전에도 저해요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 같은 의식이 역사에 대한 가치판단을 흐리게 할 수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그래서 역사를 보는 판단규준이 바로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 규준은 무엇인가? 그것은 진실이며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자세가 필요하다.

 

▣ 문익점은 산업혁명의 주역


문익점은 원나라에 사신을 받들고 갔던 그해(1363년) 12월에 원나라가 임명한 새 왕 덕흥군이 원나라 군사 1만 명을 이끌고 고려 공민왕을 축출하기 위해 고려를 침공했다가 패퇴당하는 일이 일어났는데, 문익점은 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고 하는 설이 있는가 하면 덕흥군을 따르라는 원나라 황제의 명을 거역하다가 운남성으로 유배되어 거기서 3년을 보내다가 돌아왔다는 설도 있다.
우리 역사에서 그의 이름은 어느 혁명가나 문인보다도 찬연히 빛나고 있다. 그 까닭은 말할 것도 없이 목화를 재배·보급해 이 땅에 의류혁명과 산업혁명을 일으켰기 때문이다.
이 큰 공적 때문에 문익점 선생의 학문, 충절, 경륜(經綸), 효성 등이 거의 다 파묻혔다고 후손들은 안타까워한다. 또 선생에 관한 문헌이 많이 없다. 그 원인은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될 것이다. 당시는 고려왕조 말기로 북쪽에서는 홍건적(紅巾賊) 침입이 끊이지 않았고, 남쪽에서는 왜구(倭寇)의 침범이 빈번하여 방화 약탈을 일삼았다. 후손들에 의하면, 선생이 작고한 지 26년 뒤 종가에 화재가 나서 문적이 많이 타버렸다는 것이다.
또 200년 후 임진왜란(壬辰倭亂)이라는 참혹한 전란에 선생의 고향 단성(丹城) 지방의 피해가 너무 커서 문헌이 많이 없어진 것도 한 이유이다.
당시 목화는 베 짜는 기술과 함께 온 나라에 빠르게 전파되어 삼베나 모시로 떨었던 서민들도 솜옷과 솜이불로 따뜻한 겨울을 보낼 수 있었다. 의생활을 비롯해 생활 문화의 혁명과 경제적으로는 목화재배와 농한기의 길쌈으로 농가경제의 혁명과 대일 수출로 외화획득에도 큰 몫을 했다.
당시 원나라에서는 화약과 함께 목화의 외국 유출을 엄격하게 막고 있었다. 양질의 옷감 원료가 외국에 보급되면 경제적인 부(富)를 이룩해서 원나라에 맞서게 되리라고 생각했고, 원나라에서는 높은 값을 받고 무명옷감을 팔수 없기 때문이었다. 문익점은 고려 사람들이 여기에 관심을 두지 않을 때 죽음을 무릅쓰고 씨앗을 몰래 가져왔다.

 

목화시배지-경남산청군단성면사월리배양마을.JPG

목화시배지-경남산청군단성면사월리배양마을

 

면화시배사적비-경남산청군단성면사월리배양마.JPG

면화시배사적비-경남산청군단성면사월리배양마

 

 

▣ ‘백성에게 옷을 입힌 공(衣服生民之功)’을 이룩했다는 칭송 얻어


당시 고려 사람들은 양잠을 해 얻은 명주나 모시로 만든 저포, 삼을 길러 만든 삼베, 그리고 가죽옷 따위를 입었다. 그러나 명주는 만들기가 힘들고, 모시옷감과 삼베는 겨울에 입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백성에게 옷을 입힌 공(衣服生民之功)’을 이룩했다는 칭송을 얻은 것이다.
문익점이 목화를 보급했고, 장인 정천익의 노력으로 전국에 널리 퍼졌다. 문익점의 손자인 문래(文萊)는 실 만드는 기계를 만들어 보급해서 그 기계의 명칭이 그의 이름을 딴 ‘물래’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또 손자인 문영(文英)이 맨 처음 베를 짰다고 해서 목면이 문영베에서 ‘무명베’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문익점의 장인과 손자들이 모두 큰 공로자인 셈이다. 그러나 문익점은 조선조 건국에 반대했다고 해서 푸대접을 받았고, 자손들까지도 어렵게 살았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 있다가 10여년이 지난 뒤인 58세 때 다시 조정에 불려갔는데, 병으로 사양하다가 부득이 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우문관제학(右文館提學) 동지서연사(同知書筵事)에 임명됐다.
이 때 이성계 일파인 조준이 개인의 토지 소유를 반대하고 나섰다. 국가의 재정을 충실히 쌓기 위해 모든 토지는 공전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문익점은 이를 반대하다가 조정에서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그는 다시 고향땅에 돌아와 삼우당(三憂堂)을 짓고 자신의 호로 삼았다. 삼우는 ‘나라가 떨치지 못하고, 유교의 학문이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자신의 도가 서지 못하는 세 가지를 근심한다’는 뜻이다. 그는 삼우당에서 학문을 익히고 도를 닦으며 지냈다.
그가 고향에 돌아온 지 3년 만에 고려는 완전히 망하고 새로운 이씨 왕조가 들어섰다. 그는 이 소식을 듣고 통곡하다가 병이 들었다고 한다. 이성계는 사람을 보내 그를 두 번이나 불렀지만 끝내 거절하고 조용히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 고려조 신하로 충절 끝까지 지켜


그는 동료인 이색·정몽주 등과 같은 길을 걸으며 지조를 지켰다. 신흥 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유혹이 있었지만 끝내 거절하고 조용한 삶으로 마감한 것이다. 그가 다른 마음만 먹었더라면 조선조 조정에서 큰 자리를 얻어 떵떵거리며 살았을 것이다.
그가 죽은 뒤에는 제사도 제대로 받들지 못해 외손이 봉사(奉祀)할 정도로 탄압을 받았지만, 세종 때에는 그의 목면 보급의 공이 인정되어 영의정에 추증(나라에서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 그 관위를 높여 줌)되었고 사당도 세워졌다. 그래서 오늘날 그의 고향 단성 언저리에는 묘소와 사당, 그리고 목화시배지(始培地) 같은 유적들이 보존되어 있고, 목화박물관을 만들어 우리나라 의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게 했다. 목면시배유지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목화를 재배한 곳이며, 비가 그곳에 세워진 것이다.
그야말로 문익점은 어느 누구보다도 국부를 가져온 경세가(세상을 다스려 나갈 경륜과 자질이 있는 사람)로 추앙받아야 할 것이다. 목화를 재배·보급한 그의 공로는 실로 어느 위대한 정치가나 학자보다 뛰어났다. 그는 백성을 위해 목화를 심었는데, 뒤에 조선이 망할 때에는 이 목화 때문에 고통을 받아야 했다.
무명(면포)은 조선시대 쌀과 함께 국가 조세인 군포(軍布)로 내기도 했고, 목화 재배는 농가에서는 가장 높은 소득의 부업이 되었다. 또 여행할 때 무명필을 들고 다니면서 밥값과 술값을 계산해 돈처럼 사용하기도 했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삼정이 문란해지면서 군포 문제가 가장 큰 폐단으로 지적되었다.
한편 일제는 처음에는 영국에서 기계로 짠 양목(洋木)을 대량으로 농촌에 풀어 목화 생산을 마비시켰고, 후기에는 일본 방직공장에서 짠 광목(廣木)을 식민지 조선에 팔아 농촌경제를 파탄으로 몰아갔다.

 

▣ 화학섬유 보급으로 밀려났지만 역사적·경제적 가치 인정해야


오늘날 화학섬유가 보급되어 무명은 다시 골방으로 밀려났지만 그 역사적·경제적 가치를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겨서는 안 될 것이다. 문익점과 정천익은 조선판 산업혁명을 일으킨 주역이었다.
최근에 문익점이 유배 간 사실과 목화씨를 붓두껍에 간직해 들여온 사실 따위를 두고 진실 공방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문익점이 목화를 처음 재배한 사실 자체가 진실이기 때문에 부질없는 논란거리는 없어야 될 것이다.
목면의 보급에 따른 공적에 대해서 일찍이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은, “한 집안으로 말미암아 고을이 혜택을 입게 되고, 한 고을로 말미암아 온 나라가 혜택을 입게 되었으며, 만세토록 천지와 더불어 무궁히 그 혜택이 끼칠 것이다. 그 깊고도 높은 공적을 무어라 이름할 수 없다.”라 하고, 후세에 ‘목면공(木綿公)’ 이라는 별칭을 얻었을 만큼 목면의 전래가 그의 생애에서 가장 빛나는 공적임을 말할 나위 없다고 했다.
한편 휘 익점 공에 대한 후대의 평가를 살펴보면, 그는 도학(道學)의 창명과 덕행 및 충절 때문으로도 당대 및 후세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인물로 평가되었다.
김종직(金宗直)을 비롯해서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조식(曺植), 이황(李滉), 송시열(宋時烈) 등 한 시대를 대표하는 유학자(儒學者)들이 한결같이 그가 끼친 ‘의피생민지공(衣被生民之功)’을 찬양하는 한편, 그의 도학과 덕행 충절을 더불어 칭송하는 시문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문익점의 공적은 후대에 이를수록 더욱 높은 평가를 받았다. 영조는 그의 후손에 대해서 거듭되는 특전을 내리면서 “우리나라가 3백 년 전 이래 의관문물(衣冠文物)이 빛나게 일신된 것은 실로 강성군(江城君) 문익점(文益漸)이 목면 씨를 가져옴에서 비롯된 것이니 공이 강성군 보다 클 수 없고 덕이 강성군 보다 훌륭할 수는 없다.”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 산청 도천서원(道川書院)


산청 도천서원(道川書院)은 삼우당(三憂堂) 문익점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지은 곳으로 조선 세조 7년(1461)에 세웠으며, 조선 정조 11년(1787) ‘도천서원(道川書院)’이라는 현판을 받았다.
1871년 서원이 훼철 당했고, 1891년 유림과 후손들이 정성을 모아 선생의 묘소 아래 노산정사(蘆山精舍)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오다가 1975년에 사당 삼우사(三憂祠)를 다시 지으면서 도천서원((道川書院)으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 동정의 역사


동정은 한복의 목이 닿는 부분에 덧붙이는 좁은 백색천의 테두리를 말한다. 동정을 달게 된 유래는 세종원년 기해년 강성군 문익점의 목면으로 인하여 이룩된 산업의 혁명과, 외화획득의 공로, 의류혁명의 위대한 공덕을 이 세상에 영원히 기념하는 뜻으로 세종임금이 특별히 만조백관을 모아 조야에서 명하기를 “이 나라 백성이면 남자든 여자든 옷을 입는 것은 문익점 선생의 공덕인고로 동정을 달아 기리도록 하라”고 했다. 그리고 색깔 있는 동정을 달지 못하게 하고 흰 동정만 달게 한 것은 문익점 선생의 사후였기 때문에 영원히 상복을 입는다는 뜻이라고 했다.


주간고령 기획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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