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양진씨(驪陽陳氏) 매호공파(梅湖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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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여양진씨(驪陽陳氏) 매호공파(梅湖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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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양진씨 학강사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여양진씨(驪陽陳氏) 시조(始祖) 진총후(陳寵厚)
① 진씨선계(陳氏先系)를 상고(詳考)해보니 우(虞)나라 순(舜)임금의 34세손 휘(諱) 만(滿) 시호(諡號) 호공(胡公)께서 주(周)나라 도정(陶正) 알부(閼父)의 아들로서 주무왕(周武王)을 잘 섬기고 무왕(武王)이 그가 만든 좋은 그릇을 즐겨 사용한 까닭으로 자기 장녀(長女) 대희(大姬)를 호공(胡公)의 아내로 삼게하고 성(姓)을 규(嬀)로 하겠금 사성(賜姓)하여 진(陳)이란 땅의 제후(諸侯)로 봉(封)하여 순(舜), 우탕(禹湯) 셋임금을 공경하는 예를 갖추어 순(舜)임금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나라 이름을 진(陳)이라 하니 때는 주무왕(周武王) 11년(기원전 1111년) 4월이었다. 호공(胡公)의 53세손 민공월(湣公越)이 진(陳)나라를 초(楚)나라 혜왕(惠王)에게 망하고 기원전 478년 그 후손들이 제(齊)나라로 가서 나라이름 진(陳)을 성(姓)으로 하였으니 이것이 진씨(陳氏)의 최초(最初) 근원(根源)이 되었다. 동방진씨(東方陳氏)는 중국으로부터 고려시대 동래(東來)한 것으로 추정된다.
② 한편으로 여양진씨(驪陽陳氏)의 연원(沿源)은 중국 북송(北宋) 휘종(徵宗)때 복주인(福州人) 항(抗)의 46세손인 진수(陣琇)가 고려에 건너와서 여양현(驪陽縣) 덕양산(德陽山) 아래 정착세거(定着世居) 하셨다고 전하나 확증(確證)이 없다.
③ 다만 그 후손(後孫)인 총후(寵厚)공(公)께서 고려 예종(睿宗) 때 상장군(上將軍)겸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에 이르고, 인종(仁宗) 4년(1126년) 적신(賊臣) 이자겸(李資謙)의 난(亂)을 토벌(討伐)한 공(功)으로 여양군(驪陽君)에 봉(封)해져 사성(賜姓)을 받음으로 이분을 시조(始祖)로 모시고, 관향(貫鄕)을 여양(驪陽)으로 삼았다. 여양(驪陽)은 지금의 충청남도 홍성군(洪城郡) 장곡면(長谷面) 일대이다.

(2) 분파(分派)
시중공파(侍中公派), 어사공파(御史公派), 예빈경파(禮賓卿派), 매호공파(梅湖公派), 전농공파(典農公派) 등 대파(大派) 5개파로 분파(分派)되었다. 고령지역에 세거하고 있는 후손들은 모두 매호공파(梅湖公派) 후손 중 중파로는 전서공파(典書公派)와 소감공파(少監公派)에 속하고 소파(小派)로는 모헌공파(慕軒公派), 직장공파(直長公派)에 속한다.
 
(3) 여양진씨(驪陽陳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여양진씨(驪陽陳氏)는 67가구 175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모헌공(慕軒公) 선(宣)의 후손 중 범래(範來)의 후손은 내곡 1리, 쌍림면 평지리, 춘래(春來)의 후손은 덕곡면 가륜리에 세거하고 있으며 직장공(直長公) 석경(錫卿)의 후손 중 지손(智孫)의 후손은 우곡면 답곡리 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高麗)
① 진준(陳俊)
고려시대 경군(京軍)인 이군육위(二軍六衛) 중 육위(六衛)의 두번째 군단(軍團)인 신호위(神虎衛)의 대장군(大將軍)을 지낸 총후(寵厚)의 아들로 태어났다. 용력(勇力)이 있어 병졸에서 시작하여 장군이 되었다. 고려사 열전에 의하면 의종 24년(1170년) 9월 정중부(鄭仲夫)가 이의방(李義方) 등과 함께 의종을 폐위하고 명종을 옹립(擁立)하였고 무신정변(武臣政變) 때 죽임당한 문신(文臣)들의 집을 헐어버리고자 하니, 공(公)이 그것을 그만두게 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무리가 미워하고 원망한 사람은 이복기(李復基)와 한뢰(韓賴) 등 4, 5인이었다. 지금 무고한 사람들을 죽인 것도 이미 과한데, 만약 그들의 집마저 모두 헐어버리면 그들의 처자식들은 어디에 의지하여 살겠는가ㅈ”라고 하였다. 공의 덕을 힘입어서 안전하게 살아 남은 사람이 많았다.  명종 2년(1172년) 동북면병마사 행영 겸 중군병마사(東北面兵馬使 行營 兼 中軍兵馬使)를 거쳐 명종 4년(1174년) 참지정사(叅知政事)·명종 5년(1175년)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냈고 조위총(趙位寵)의 정변(政變) 진압에 원수(元帥) 윤인첨(尹鱗瞻)과 함께 좌군병마사(左軍兵馬使)로 참전(參戰)하여 공을 세웠고 판병부사(判兵部事)를 지냈다. 명종 9년(1179년) 졸(卒)하였다. 성품이 소박하고 강직하여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고 왕도 또한 그를 중히 여겼다.
② 진광순(陳光恂)
판병부사(判兵部事) 준(俊)의 아들로 태어났다. 임신보(1994년)에는 휘(諱)가 광순(光純)으로 기록되어 있으나『등과록전편(登科錄前編)』에는 휘(諱)가 광순(光恂)으로 기록되어 있다. 명종 8년(1178년) 무술방(戊戌榜) 을과(乙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으며 대장군(大將軍)을 역임하였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③ 진식(陳湜)
병부상서(兵部尙書) 광수(光脩)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명종 20년(1190년) 경술방(庚戌榜) 문과에 급제한 후 고종 13년(1226년) 서경(西京) 사람 조영수(趙永綏)가 개경을 공격하려고 모의하자 전 대정(隊正) 김국인(金國仁)이 그 모의사실을 알고 고발하자, 유수(留守)로 재임 중인 공이 곧바로 군대를 출동시켜 모두 잡아 참수(斬首)하고 그 일족들을 멸하였다. 고종 14년(1227년) 우복야(右僕射) 한림학사(翰林學士)를 거쳐 고종 15년(1228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어사대부(御史大夫)에 제수(除授)되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④ 진온(陳溫)
자는 대방(大邦)이고 호는 죽헌(竹軒)이다. 병부상서(兵部尙書) 광수(光脩)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강종 2년(1213년) 계유방(癸酉榜) 문과에 급제한 후 벼슬이 한림학사(翰林學士)·예빈경(禮賓卿)에 이르고 지공주사(知公州事)로 나갔다가 지나주목(知羅州牧)으로 옮겨 북문내(北門內)에 살았고 이후 후손들이 여양진씨(驪陽陳氏)에서 분적(分籍)하여 나주(羅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음에 따라 나주진씨(羅州陳氏)의 시조(始祖)가 되었다. 문장으로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유집(遺集)이 모두 산질(散帙) 되었으나 동문선(東文選)에 춘(春)·하(夏)·추(秋)·동(冬)의 사시사(四時詞)가 전한다. 춘하추동 사계절의 정취를 차례로 읊은 것으로,〈춘(春)〉과〈추(秋)〉가 여러 시선집(詩選集)에 거듭 뽑혀 있다. 진화(陳澕)의『매호유고(梅湖遺稿)』부록에도「예빈경공시(禮賓卿公詩)」라는 제목 아래에 약전(略傳)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⑤ 진화(陳澕)
호는 매호(梅湖)이다. 병부상서(兵部尙書) 광수(光脩)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있었고 명종이 신하들에게「소상팔경(瀟湘八景)」시를 짓도록 하였을 때에 어린 나이로 장편을 지어 이인로(李仁老)와 더불어 절창((絕唱 : 뛰어나게 잘 지은시)이라는 평을 받았다. 신종 1년(1198년) 진사시(進士試)에 장원(壯元)하고 신종 3년(1200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같는 해 내시(內侍)에 보직(補職)되었다. 희종 5년(1209년) 국자감(國子監) 학정(學正)으로 전직(轉職)하였으며 강종 1년(1212년) 제과시험(制科試驗)에 참여하여 조서(詔書)를 짓는 일을 맡아보았다. 1213년에는 설화(舌禍)로 벼슬에서 물러났다가 다시 한림원(翰林院)에 들어갔다. 고종 2년(1215년)에  최충헌(崔忠獻)이 관기시(觀碁詩 : 바둑 두는 것을 보면서 지은 시) 40여운(韻)을 시험하였는데, 이규보(李奎報)가 수석을 차지하고 공은 차석이었다.「한림별곡(翰林別曲)」제1장에서 “이정언 진한림 쌍운주필(李正言 陳翰林 雙韻走筆)”이라고 하였다. 즉 이정언(李正言)은 정언(正言) 벼슬을 한 이규보(李奎報), 진한림(陳翰林)은 한림(翰林) 벼슬을 한 진화(陳澕)를 말하는데 이 두 분은 쌍운(雙韻)으로 운자(韻字)를 짝지어 빨리 내리 써서 짓는 시에 능하였다고 한다. 공의 시는 현재 59수가 전하고 있다. 그의 시에 대한 평가는 ‘청신(淸新)’·‘청려(淸麗)’ 등의 평어(評語 : 평하는 말)로 일관(一貫)되어 있다. 서장관(書狀官)으로 금나라에 다녀온 뒤에 옥당(玉堂)으로 옮겨 지제고(知制誥)를 겸직하였다. 정언(正言)에서 보궐(補闕)을 거쳐 우사간(右司諫)이 되어 지공주사(知公州事)에 보직되었다가 재직 중에 졸(卒)하였다. 용인시 처인구 남사면 원안리 산 38번지에 있는 공의 묘소는 ‘용인시 향토유적 제31호’로 지정되어 있다.

(2) 조선시대
① 진중성(陳仲誠)
개성윤(開城尹) 사언(斯彦)과 대사헌(大司憲) 정집(貞執)의 따님인 평택임씨(平澤林氏) 사이에 공민왕 10년(1361년) 태어났다. 가선대부(嘉善大夫) 겸(兼) 형조참판(刑曹參判)을 지냈다. 태조 15년(1415년) 졸(卒)하였다.
② 진치중(陳致中)
형조참판(刑曹參判) 중성(仲誠)과 판사재감(判事宰監) 유원(有源)의 따님인 정부인(貞夫人) 전주최씨(全州崔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지인(知印)으로 정난원종공신(靖難原從功臣) 3등에 녹훈(錄勳)되었다. 봉렬대부(奉列大夫) 광양현감(光陽縣監)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③ 진유번(陳有蕃)
자는 자저(子著)이고 호는 북계(北溪)이다. 전농사사(典農寺事) 적(的)과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양혜공(襄惠공) 달생(達生)의 따님인 창녕성씨(昌寧成氏) 사이에서 태종 6년(1406년) 태어났다. 문음(門蔭)으로 태안군사(泰安郡事)를 지냈으며 단종 3년(1455년) 세조의 왕위찬탈을 반대하여 상왕(上王)인 단종을 복위시킬 것을 모의하였던 단종복위운동(端宗復位運動)이 무산(霧散)되자 공은 성삼문(成三問)과 외종(外從 : 고모의 자녀)인 관계로 평안북도 벽동으로 유배(流配)되고 이듬해 교수형(絞首刑)에 처해지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 당하였다. 사육신(死六臣)이 신원(伸寃 : 가슴에 맺힌 원한을 풀어 버림)될 때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고 정조 15년(1791년) 영월 장릉(莊陵) 배식단(配食壇) 별단(別壇)에 배향(配享)되었다.
④ 진유(陳猷)
자는 백략(伯略)이다. 봉렬대부(奉列大夫) 광양현감(光陽縣監) 치중(致中)과 지평(持平) 의손(義孫)의 따님인 영인(令人) 함양박씨(咸陽朴氏) 사이에서 세종 19년(1437년) 태어났다. 봉렬대부(奉列大夫) 산음현감(山陰縣監)을 지냈다. 백성을 다스림에 청렴하고 검약함을 숭상하여 고을을 떠나온 뒤에 명환(名宦 : 중요한 자리에 있는 벼슬)으로 읍지(邑誌)에 기록되고 백성들이 그리워하는 마음을 품었다. 졸년(卒年)은 미상(未詳)이다.
⑤ 진복명(陳福命)
자는 기수(期叟)이고 호는 만포자(晩圃者)이다. 산음현감(山陰縣監) 유(猷)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충석(忠碩)의 따님인 영인(令人) 해주정씨(海州鄭氏)사이에서 태어났다. 중종 2년(1507년) 증광(增廣)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연산군 때 혼미(昏迷)한 조정을 피하여 해빈(海濱)으로 종적을 감추고 텃밭에 채마를 부치고 시부(詩賦)를 읊조리면서 스스로 즐겼다. 만경(萬頃)에 처음 살았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⑥ 진선(陳宣)
자는 학이(學而)이고 호는 모헌(慕軒)이다. 진사(進士) 복명(福命)과 판관(判官) 진(璡)의 따님 장수황씨(長水黃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중종 34년(1539년) 헌릉참봉(獻陵參奉)에 제수(除授)되었다. 모헌공파(慕軒公派) 파조(派祖)이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⑦ 진극원(陳克元)
자는 경여(敬汝)이고 호는 월와(月窩)이다. 헌릉참봉(獻陵參奉) 선(宣)과 장사랑(將仕郞) 형복(亨復)의 따님인 한산이씨(韓山李氏) 사이에서 중종 29년(1534년) 태어났다.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에게 학업을 청하고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의 문하에 종유(從遊)하여 문학이 세상에 드러났으나 벼슬살이에 나아가지 않고 오직 위기지학(爲己之學)을 강구(講究)하였다. 선조 2년(1569년) 부친상을 당하고 거듭하여 모친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6년간 하였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을 당하여 탁계(濯溪) 전치원(全治源), 설학(雪壑) 이대기 李大期) 등 의병장(義兵將)과 의병을 일으켜 적을 방어하면서 근심을 하다가 병을 얻어 선조 238년(1595년) 졸(卒)하였다. 고을과 도에서 천거하여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증직(贈職)받았다. 문집이 있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처사 범래(範來)가 1600년대 초반 합천군 가야면에서 대가야읍 내곡1리로 입향(入鄕)한 후 후손들이 내곡1리, 쌍림면 평지리 등에 세거하였다.
(2) 통덕랑(通德郞) 아록(迓祿)이 1600년대 초반 풍덕(豊德)에서 후동(後洞) 현재 포2리에 입향한 후 후손들이 답곡리, 연리 등에 산재(散在)하여 세거하였다.
(3) 처사(處士) 섬(暹)이 1600년대 중반 합천에서 덕곡면 가륜리에 입향하여 세거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진후한(陳後漢)
자는 성지(聖之)이며 일휘(一諱) 우한(遇漢)이다. 통덕랑(通德郞) 아록(迓祿)과 진사(進士) 수정(守貞)의 따님인 창녕성씨(昌寧成氏) 사이에서 현종 5년(1664년) 태어났다. 원릉참봉(元陵參奉)을 지냈다. 고령군 대가야읍 내곡1리 속칭 안일량에 처음 시거(始居)하였다. 졸년(卒年)은 미상(未詳)이다.
② 진주병(陣周炳)
자는 내홍(乃弘)이다. 처사 석용(錫龍)과 유홍(有洪)의 따님인 달성서씨(達城徐氏) 사이에서 헌종 3년(1837년) 태어났다. 숭선전(崇善展) 참봉(參奉)을 지냈다. 1922년(卒)하였다.
③ 진병홍(陳炳鴻)
자는 치능(致能)이고 호는 송강(松岡)이다. 처사(處士) 필규(弼奎)와 석조(錫祚)의 따님인 밀양손씨(密陽孫氏) 사이에서 고종 4년(1867년) 태어났다.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지냈다. 1912년 졸(卒)하였다.
(2) 근∙현대 인물
현달(顯達)한 인물이 파악되지 않아 생략한다.

 

 

자료제공 : 후손 진판개(陳判介)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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