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정씨(晋陽鄭氏) 월담공파(月潭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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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진양정씨(晋陽鄭氏) 월담공파(月潭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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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재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진양정씨(晋陽鄭氏) 상계연원(上系淵源)
①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자산(觜山) 진지촌(珍支村) 촌장(村長) 지백호(智伯虎)가 유리왕 9년(323년) 정씨(鄭氏) 성(姓)을 하사받아 정씨(鄭氏)의 도시조(都始祖)가 되었으며 태종무열왕 3년(656년) 감문왕(甘文王)으로 추봉(追封)되었다.
② 도시조(都始祖) 후대에 와서 진양정씨(晋陽鄭氏)의 본관(本貫) 및 분파(分派)가 이루어졌다고 하나 연대가 워낙 오래고 고증(考證)이 없음으로 계대(系代)를 상고(詳考)할 수 없다.
③ 따라서 진양정씨(晉陽鄭氏)는 동성동본(同姓同本)이면서도 각각 시조(始祖)를 달리하는 8개파가 있어 흔히 진양팔정(晉陽八鄭)이라고들 일컫는다.
(2) 진양정씨(晋陽鄭氏) 시조(始祖) 정자우(鄭子友)
호는 봉산(鳳山)이며 고려 태조(太祖) 정조호장(正朝戶長)을 지냈다. 호장(戶長)이란 고려 태조가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한 뒤 각 지방에서 세력을 펴고 있던 성주(城主)나 호족(豪族)들을 포섭하는 정책으로 그들에게 호장(戶長)이란 향직(鄕職)을 주어 그 지방을 자치적으로 다스리게 했던 제도였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진양정씨(晋陽鄭氏)는 당시 지방에서 크게 세력을 폈던 호족(豪族)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조호장(正朝戶長)은 고려 시대 지방 향리 가운데 향직(鄕職) 7품에 해당하는 ‘정조(正朝)’의 직위를 받은 호장(戶長)으로서 매년 정월 초하루에 도성의 궐문에 나아가서 임금에게 문안드리는 예식에 참여하는 향리(鄕吏)를 말한다. 정조(正朝)란 말은 원단(元旦) 즉 설날 아침을 뜻한다.
(3) 분파(分派)
백파(伯派)인 예의판서공파(禮儀判書公派), 중파(仲派)인 종부시승공파(宗簿寺丞公派), 계파(季派)인 전교부령공파(典校副令公派) 등 3파가 있으며 여기에서 갈라진 22개 소파(小派)가 있다.
(4) 일문삼강(一門三綱)을 실천한 충효가문(忠孝家門)
① 한 집안에서 삼강(三綱 : 忠ㆍ孝ㆍ烈) 즉 유교에서의 세가지 기본 강령(綱領)인 군위신강(君爲臣綱)∙부위자강(父爲子綱)∙부위부강(夫爲婦綱)을 모두 실천한 가문(家門)을 ‘일문삼강(一門三綱)’ 집안으로 부른다.
② 월담공(月潭公) 직계후손(直系後孫) 중에서 임진란(壬辰亂) 때 죽음을 무릅쓰고 충(忠)을 실천한 월담(月潭) 정사현(鄭師賢)의 손자 유례(有禮), 이례(以禮), 준례(遵禮), 상례(상禮)  등 네 분, 효(孝)를 실천한 분은 월담공(月潭公) 한 분, 열(烈)을 실천한 분은 정열부인(貞烈夫人) 창녕조씨(昌寧曺氏) 한 분을 배출하여 일문삼강(一門三綱)을 실천한 충효가문(忠孝家門)이다.
(4) 진양정씨(晉陽鄭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진양정씨는 73가구 173명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월담공파(月潭公派)후손들이 지산1,2리 월기(月磯), 본관2리 옥산, 개진면 반운리, 성산면 고탄리, 우곡면 사전리 등에 산거(散居)하면서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정신열(鄭臣烈)
호는 관정(官亭)이다. 성균학정(成均學正) 인순(仁順)의 아들로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영특하고 호방하여 굳은 신념으로 학업을 독실하게 하였으며 불교(佛敎)를 힘껏 배척하고 성리(性理)를 연구하여 당대 유학(儒學)의 종장(宗匠)이 되었으며 현종 때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치고 병부상서(兵部尙書)에 발탁되어 현종 1년 (1010년) 2차 거란의 침입으로 추정되는 거란(契丹)의 난에 전공(戰功)을 세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의 품계를 받고 진양부원군(晋陽府院君)에 봉군(封君)되었으며 시호는 은열(殷烈)이다. 후에 청계서원(淸溪書院)에 배향되었다. 공에 관한 사적(事蹟)은 아득히 세대가 멀고 세월이 흘러 고려사에 기록이 없고 다만 족보와 봉안문(奉安文)과 상향문(常享文)에 기록이 남아 있을 뿐이다. 진양정씨(晋陽鄭氏) 은열공파(殷烈公派) 파조(派祖)이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② 정진경(鄭晋卿)
검교(檢校) 감찰어사(監察御使) 현취(玄就)의 아들로 태어났다. 좌우위보승중랑장(左右衛保勝中郞將)을 지냈고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부(僉議府) 찬성사(贊成事)를 증직(贈職)받았다. 진양정씨(晋陽鄭氏) 은열공파(殷烈公派) 중시조(中始祖)가 되시며 배위 생몰년 및 묘소는 실전(失傳)이다.
③ 정임덕(鄭任德)
초휘(初諱)는 인득(仁得)이다. 좌우위보승중랑장(左右衛保勝中郞將)을 지낸 진경(晋卿)의 아들로 태어났다. 지선주사(知善州事)를 거쳐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 배위는 진양강씨(晋陽姜氏)로 아버지는 봉정대부(奉正大夫)의 품계를 받고 전판교(典判校)를 지낸 거정(居正)이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④ 정손(鄭愻)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 임덕(任德)의 아들로 태어났다. 생원(生員)이다. 정유(鄭愈)와 정손(鄭愻)은 진주(晋州) 사람으로 지선주사(知善州事) 정임덕(鄭任德)의 아들이다. 고려사 열전 권제34 > 효우(孝友) > 정유(鄭愈)에 기록되어 그 효행(孝行) 사실을 소개하고자 한다. “ 공민왕(恭愍王) 21년(1372)에 동생 정손(鄭愻)과 함께 부친을 따라 하동군(河東郡)에 수자리하러 갔는데 왜구가 밤을 타서 갑자기 들이닥치자 여러 사람들이 모두 달아났다. 정임덕(鄭任德)이 병으로 말을 탈 수 없었기 때문에 정유(鄭愈)와 정손(鄭愻)이 부축하여 달아났다. 적이 추격해 오자 정유(鄭愈)가 말을 타고 활을 쏘아 여러 명을 사살하니 적이 감히 더 이상 따라오지 못하였다. 왜구 하나가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여 정임덕의 뺨을 찌르자 정손(鄭愻)이 자기 몸으로 막으면서 다시 4인을 베었고, 힘껏 싸워 이들을 물리쳤다. 정임덕(鄭任德)은 살아남았지만 정손(鄭愻)은 결국 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이 일이 왕에게 보고되자 정유(鄭愈)에게 종부시승(宗簿寺丞)을 제수하였다.”

(註釋) 수자리
‘무기를 가지고 국경이나 국가 등을 지키다’, 혹은 ‘경비병이 주둔하고 있는 병영’의 뜻을 가진다.

⑤ 정천익(鄭天益)
 호는 퇴헌(退軒)이다. 고려의 의조상서(儀曹尙書) 유(愈)의 아들로 태어났다. 공민왕 11년(1362년) 승보시(升補試 : 생원시)에 장원으로 입격하고 전객령(典客令)과 판사(判事)를 지내시고 판부사(判府事)에 이르러 치사(致仕)하였다. 사위 문익점(文益漸)이 원나라에 서장관(書狀官)으로 갔다가 귀국하면서 몰래 가져온 목화씨를 심어 3년간의 노력 끝에 재배법을 터득하여 종자를 널리 보급하였다. 또 씨를 뽑는 씨아(取子車)와 실을 뽑는 물레(繅絲車)를 모르던 차 때마침 집에 머물게 된 중국인 승려 홍원(弘願)에게 물어 이를 고안하여 목화를 직조(織造)의 원료로 쓰는 법을 열어놓았다. 진주 청계서원(淸溪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조선 태종 임금때 진양군(晋陽君)으로 봉하고 또 문충(文忠)이란 시호를 내렸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2) 조선시대
① 정충좌(鄭忠佐)
증(贈) 종부시승(宗簿寺承) 손(愻)과  삼사(三司) 좌윤(左尹) 만리(萬里)의 따님 진양하씨(晋陽河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종 15년(1415년)  행랑 조성 감역관(行廊造成監役官)을 거쳐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오르고 용강현령(龍崗縣令)을 지냈다. 배위는 숙인(淑人) 단양우씨(丹陽禹氏)로 그 부친은 봉익대부(奉翊大夫) 충주목사(忠州牧使) 하(夏)이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② 정경(鄭䪫)
용강현령(龍崗縣令) 충좌(忠佐)와 봉익대부(奉翊大夫) 충주목사(忠州牧使)를 지낸 하(夏)의 따님인 숙인(淑人) 단양우씨(丹陽禹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남행(南行)으로 중훈대부(中訓大夫)에 오르고 영광군수(靈光郡守)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③ 정원신(鄭元愼)
중훈대부(中訓大夫) 영광군수(靈光郡守) 경(䪫)과 도염서(都染署)의 영(令)을 지낸 고간(高簡)의 따님인 고령박씨(高靈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성종 2년(1471) 신묘(辛卯) 별시(別試)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한성참군(漢城參軍)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연산군 5년(1499년)부터 참봉(參奉) 린(麟)이 선향지(先鄕地)인 진주(晋州) 가귀곡(佳貴谷, 加貴谷)에서 이거(移居)하여 고령현치(高靈縣治) 월기(月磯)에 처음으로 살기 시작하였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정린(鄭麟)
한성참군(漢城參軍) 원신(元愼)과 충순위(忠順衛)를 지낸 유온(柳蘊)의 따님인 숙인(淑人) 진양유씨(晋陽柳氏)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참봉(參奉)을 지냈다. 학문이 깊고 방정한 품행으로 향리(鄕里)에서 추앙(推仰)하고 존중하였다. 중종 11년(1516년) 졸(卒)하였다. 진양정씨 (晋陽鄭氏) 월담공파(月潭公派) 고령입향조(高靈入鄕祖)가 되신다. 생년(生졸年)은 미상(未詳)이다.
② 정사현(鄭師賢)
초휘(初諱)는 사현(思玄)이고 자는 희고(希古)이며 호는 월담(月潭)이다. 참봉(參奉) 린(麟)과 나주박씨(羅州朴氏) 어머니 사이에서 중종 3년(1508년) 태어 나셨다. 9세인 1516년 부친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면서 3년상을 끝마쳤는데 상례법도(喪禮法度)에 흐트러짐이 없었으며 효자로 칭송이 자자했다. 학문과 조행(操行 : 태도와 행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이질(姨姪)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준민(李俊民)이 천거하고 명종조에 왕이 직접 참봉(參奉)에 징사(徵仕)했으나 끝내 벼슬을 사양하였던 전형적인 산림처사(山林處士)이었다. 처남(妻男)인 남명(南冥) 선생의 문하(門下)에 드나들며 덕성(德性)을 교화(敎化)하고 훈육(訓育)하며 박재현(朴齋賢), 문익형(文益亨), 문익성(文益成), 정구(鄭逑)와 이희안(李希顔), 정삼우당(鄭三友堂), 주이락당(周二樂堂), 조목(趙穆), 황준량(黃俊良)과 도의교류하였다. 48세인 명종 10년(1555년) 졸(卒)하였다.  산림처사(山林處士)와 출천효자(出天孝子)로서 올곧은 삶을 살았던 공의 행적(行蹟)을 기리기 위하여 영연서원(靈淵書院)에 공을 배향(配享)하였으며 월담정선생유적비(月潭鄭先生遺蹟碑)와 월담정(月潭亭)의 원운(原韻) 시비(詩碑)를 건립하였다. 2015년 고령군은 대가야 문화누리 공연장 뒤편에 월담지(月潭池)와 월담정(月潭亭)을 복원하였다. 배위는 정열부인(貞烈夫人) 조씨(曺氏)로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를 지낸 언형(彦亨)의 따님이며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의 여동생으로 명종 19년(1564년) 정열(貞烈)의 첩지(帖紙)가 내려졌고 이로 인하여 정려각(旌閭閣)을 지었으나 임진왜란 때 병화(兵火)로 소실되었으나 후손들이 1869년 3월 정려각(旌閭閣)을 중건(重建)하였다.
⑥ 정유례(鄭有禮)
자는 이보(履甫)이다. 부장(部將) 서(序)와 현감(縣監) 세경(世卿)의 따님인 의인(宜人) 안동권씨(安東權氏) 어머니 사이에서 명종 10년(1555년) 태어났다. 임진왜란 때 창의토적(倡義討賊)한 전공(戰功)으로 봉정대부(奉正大夫) 제용감정(濟用監正)을 제수(除授)받았다. 임란호국영남충의단(壬亂護國嶺南忠義壇)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졸년(卒年)은 미상(未詳)이다.
⑦ 정상례(鄭相禮)
자는 문보(文甫)이다. 부장(部將) 서(序)와 현감(縣監) 세경(世卿)의 따님인 의인(宜人) 안동권씨(安東權氏) 어머니 사이에서 명종 13년(1558년) 태어났다. 선조 22년(1589년) 기축(己丑) 증광시(增廣試) 무과(武科)에 급제한 후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때 5월 고령지역 최초 전투인 풍곡리(楓谷里) 전투 및 6월 제1차 무계전투(茂溪戰鬪)에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휘하의 고령대장(高靈代將)으로 참전하여 전공(戰功)을 세워 만호(萬戶)를 지냈으며 선조 38년(1605년) 선무원종삼등공신(宣武原從三等功臣)에 녹훈(錄勳)되었다. 임란호국영남충의단(壬亂護國嶺南忠義壇)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졸년(卒年)은 미상(未詳)이다.
⑧ 정이례(鄭以禮)
자는 경보(敬甫)이다. 유생(幼生) 하(厦)와 경주설씨(慶州薛氏)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면(金沔) 장군 휘하에서 고령 거주 김응성(金應聖)과 함께 고령지역의 의병(義兵)을 불러 모으는 역할을 하는 초모유사(招募有司)로 활약하였다. 그 후에 동생 준례(遵禮)와 함께 곽재우 진영의 각종 전투에 참전하여 활약하였다. 그 후에 동생 준례(遵禮)와 함께 곽재우 진영의 각종 전투에 참전하여 활약하였다. 선조 34년(1601년) 졸(卒)하였다. 임란호국영남충의단(壬亂護國嶺南忠義壇)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⑨ 정극례(鄭克禮)
자는 화보(和甫)이다. 유생(幼生) 하(厦)와 경주설씨(慶州薛氏) 사이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초모유사(招募有司) 형(兄) 정이례(鄭以禮)와 함께 김면(金沔) 장군 휘하에서 창의(倡義)하였으며 고령대장(高靈代將)이었던 종형(從兄) 정상례(鄭尙禮와 함께 무계전투(茂溪戰鬪)에 참전하여 전공(戰功)을 세워 장사랑(將仕郞)∙사재감(司宰監)의 참봉(參奉)을 지냈다. 임란호국영남충의단(壬亂護國嶺南忠義壇)에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⑩ 정재송(鄭載松)
초휘(初諱)는 담(橝)이며 자는 사경(士擎)이다. 사림(士林)의 영수(領袖)로 추앙(推仰)받았던 경흥(景興)의 둘째 아들로 인조 23년(1645년)에 태어났다. 숙종 28년(1702년) 4월 군정(軍丁)의 폐단(弊端)을 시정(是正)할 것을 요구하는 상소(上疏)를 올릴 때 유생을 대표하는 소두(疏頭)가 되었다. 졸년(卒年)은 미상(未詳)이다.
⑪ 정원섭(鄭元燮)
초휘는 중섭(重燮)이고 자는 치중(致重)이며 호는 과묵당(寡黙堂)이다. 유생(儒生) 훤(楦)과 성산이씨(星山李氏) 어머니 사이에서 현종 10년(1669년)에 태어났다. 단암(丹岩) 민진원(閔鎭遠)의 문인(門人)이다. 학문이 정밀하고 글씨가 뛰어났다. 숙종 3711년(17년)에 지방유림의 공의(公議)로 영연서원(靈淵書院)을 창설(創設)하였다. 영조 19년(1743년) 졸(卒)하였다.
⑫ 정만중(鄭萬中)
초휘(初諱)는 취망(就望)이고 자는 도일(道一)이며 호는 삼천(三川)이다.  반구암(反求巖) 광세(光世)와 어머니 포산곽씨(苞山郭氏) 사이에서 순조 22년(1822년) 태어났다.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를 스승으로 삼고 가르침을 받았으며 평생에 유교경전인 춘추(春秋)를 좋아하니 당시 사람들이 ‘정춘추(鄭春秋)’라고 불렀다. 고산(鼓山) 선생이 직접 삼천(三川)이라는 호(號)를 써서 주었다.
(2) 근∙현대 인물
① 정윤헌(鄭允憲) : 고령향교전교
② 정수진(鄭洙震) : 고령향교전교
③ 정수간(鄭洙艮) : 고령군 산림과장
④ 정수렬(鄭洙烈) : 경상북도교육청시설과장
⑤ 정우상(鄭宇相) : 성서우체국장
⑥ 정무상(鄭武相) : 고령군 쌍림.다산면장
⑦ 정우상(鄭祐相) : 대구광역시시설안전관리소장
⑧ 정진상(鄭秦相) : 고령군기술센터소장
⑨ 정준홍(鄭準弘) : 고령군보건소장
⑩ 정직상(鄭直相) : 대구 남산4동 마을금고이사장
⑪ 정정현(鄭珽鉉) : 진양정씨 월담공파 종친회 회장

 

 

자료제공 : 후손 정무상(鄭武相)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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