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포대첩, 병선 100여척으로 왜선 500여척 격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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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진포대첩, 병선 100여척으로 왜선 500여척 격침

최무선 장군(2)


▣진포 지역에는 다시 평화가 찾아와
우왕6년(1380년) 음력 8월 하순 농촌에서는 가을걷이가 끝날 무렵 진포(지금의 군산)로 쳐들어온 왜적의 병력수는 자세한 기록이 없으나 병선은 무려 500여 척이나 되는 조직적으로 편성된 강도선단이었다.
이들은 호남내륙평야에서 추수한 곡식을 노렸을 뿐만 아니라 개경으로 가는 세미와 조정에 바치는 공물이 진포의 진성창에 보관된 것 등을 약탈하기 위해 침입해 온 것이다.
왜적의 병선이 아무리 작다고 해도 500척이면 그 돛대와 깃발이 금강하구를 꽉 메우고 강물은 왜선으로 덮여 밧줄로 배와 배를 연결해 묶어놓고 일부 병력을 배치해 선단을 지키게 하고 약탈부대는 내륙 깊숙이 쳐들어가 우리 백성들이 1년 내내 피땀 흘려 추수한 쌀과 곡물을 마구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집에 불을 지르고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였다.
잡혀간 사람도 부지기수이고 시체는 산과 들을 덮을 정도의 참상이었다. 기록에는 두세 살 난 계집아이를 잡아서 머리를 깎고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고 물에 씻어 쌀, 술과 함께 천제의 제물로 바치는 끔찍한 만행을 일삼았다는 내용도 있다.
이때 전라감사로부터 장계(狀啓)를 받은 조정에서는 분기충천해 이번에야말로 철저히 응징해서 그들의 간담을 서늘케 해주자며 최무선이 만들어놓은 화포, 화통 등으로 무장한 함대를 동원키로 했다. 화통도감의 제조관인 최무선을 해도부원수로, 심덕부를 도원수로, 나세를 상원수로 삼아 병선 100척을 출전시켰다.
예성강 하구를 출발해 경기, 충청도 해안을 거쳐 진포 어귀에 당도한 고려함대는 진격을 멈추고 적정을 살폈다. 왜적의 배는 약 500여 척으로 뱃사이를 밧줄로 연결해놓고 경비병을 풀어 지키고 있었다. 그들은 설마 고려 수군에 화포와 같은 고성능 무기가 있을 줄은 짐작도 못하고 유유히 노략질한 쌀과 곡식을 배 안에 적재하느라고 부산스러웠다.
고려 수군이 왜선의 바로 앞까지 진격하자 놀라 그제야 전력을 다해 항전을 시도했으나 주동지휘관인 최무선의 공격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발포신호탄이 발사됐고, 삽시간에 왜선을 격침시켰다. 그들은 대부분 불에 타죽거나 물에 빠져죽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병선을 잃었다. 참으로 통쾌한 승리였다. 목숨을 건진 왜의 잔적들은 뭍으로 올라가 더욱 극성스럽게 노략질을 하며 전라도에서 경상도 쪽으로 쳐들어갔다가 먼저 내륙으로 간 왜적과 남원 운봉에서 합류했는데, 그해 9월 이성계의 황산대첩에서 대부분 잔적들이 섬멸된다.
이때 진포해전이 끝나고 왜적에게 사로잡혀갔던 백성 334명을 구해내기에 이른다.
진포해전에서 대승을 거두고 개경으로 개선한 장수들은 우왕으로부터 최무선, 나세, 심덕부 등 여러 원수에게는 금 50냥씩을, 비장인 정룡, 윤송, 최찰석 등에게는 은 50냥씩 하사됐다.
▣당대 학자인 권근이 진포대첩 승리 찬양 詩 남겨
이 싸움에서 세 명의 장군 가운데 으뜸은 당연히 최무선 장군임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에게는 순성익찬공신의 호를 내리고 광정대부 문하부사(正二品)란 벼슬을 제수했으며 얼마 뒤에는 중대광 영성부원군(永城府院君, 從一品)이란 작호가 주어졌다.
진포해전에서 고려군이 왜적을 소탕하는데 최무선의 공적이 지대했음을 단적으로 입증하고 있는 것은 당대의 대표적 시인이며 대학자였던 권근이 쓴 시에서 알 수 있다.
賀崔元帥茂宣破鎭浦倭船(하최원수무선파진포왜선)
진포해전에서 왜선을 격파한 최무선 원수를 축하하며
明公才略應時生 三十年倭一日平(명공재략응시생 삼십년왜일일평)
님의 재략이 때맞추어 태어나니 30년 왜구를 하루만에 평정했구려
水艦信風過鳥翼 火車催陳震雷聲(수함신풍과조익 화차최진진뢰성)
바람실은 군함은 나는새도 못따라가고 화차는 우렛소리 울리며 진을 재촉하네
周郞可笑徒焚葦 韓信寧誇暫渡罌(주랑가소도분위 한신영과잠도앵)
주유가 갈대숲에 불을 놓은 것이야 우스갯거리일 뿐이고
한신이 배다리를 만들어 건넜다는 이야기야 자랑거리나 될까보냐
豊烈自今傳萬世 凌煙圖畵冠諸卿(풍열자금전만세 능연도화관제경)
이제 공의업적은 만세에 전해지고 능연각에 초상화걸려 공경 가운데 으뜸일세
天誘公衷作火砲 樓船一戰掃凶徒(천유공충작화포 누선일전소흉도)
공의 화약무기 제조는 하늘의 도움이니
한 번의 바다 싸움에 흉포한 무리 쓸어버리네
漫空賊氣隨煙散 蓋世功名如日鋪(만공적기수연산 개세공명여일포)
하늘에 뻗치던 도적의 기세 연기와 함께 사라지고
세상을 덮은 공과 이름은 해와 더불어 영원하리
永誓豈惟期帶礪 專征應亦賜弓鈇(영서기유기대려 전정응역사궁부)
긴 맹세가 어찌 긴 세월까지 기다릴까
응당 군사의 대권을 맡게 되도다
宗徒慶賴邦家正 億萬蒼生命再蘇(종도경뢰방가정 억만창생명재소)
종묘사직은 경사롭고 안정을 찾았으니
억만 백성의 목숨이 다시 소생하였네
이와 같이 권근의 문집인 양촌집에 실려 있는 최무선의 찬양시는 후대에 회자되며 진포대첩 당시의 감동과 교훈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아들 최해산, 최무선 사후 비밀기록 넘겨받아 대(代)를 이은 공헌
최무선의 화약발명과 화약무기의 개발은 그 혼자만의 일생에 그치지 않고 그의 자손 대에까지 이어졌다.
그의 아들 최해산(崔海山, 1380~1443)은 아버지가 진포싸움에서 왜적을 물리친 그해에 세상에 태어났다. 1395년 4월 19일 아버지가 세상을 떠날 때 그의 나이가 겨우 15살이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아버지 최무선은 아내 이씨에게 아들이 크면 전해주라면서 화약 만드는 방법을 기록한 비밀스런 책을 남겼는데 이것을 받아 공부해서 최해산 역시 화약의 전문가가 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한참 뒤에야 태종의 명을 받아 관직에 나갈 수 있었으니 바로 아버지 최무선의 음덕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최해산은 1401년(태종1년) 군기시에 특채됐는데 바로 아버지 최무선이 만들었던 화통도감의 일을 맡은 셈이었다. 그 후 군기시의 주부를 거쳐 경기우도의 병기와 군함을 담당하는 별감으로 승진했다가 1409년에는 군기감승이 됐다. 특히 그는 화차를 만들어 1409년 10월 태종이 참관한 가운데 해온정에서 시험 발사를 주도했다. 그는 화포 개발 시험에 주동적 역할을 계속했는데 세종 6년(1424년) 12월에도 비슷한 실험을 주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최해산은 태종 원년에서부터 세종 10년까지 30년간 군기사(軍器司)에서 각종 육전용의 무기를 만들었다.
그의 아버지 최무선이 소형의 함재포를 중심으로 개발에 주력한 반면, 최해산은 북방의 기마병 침략군에 대응하기 위해 육전용의 화포와 탄류를 주로 개발했다. 이렇게 아버지 최무선과 아들 최해산에 의해 개발된 다양한 화약과 화포류는 훗날 이순신 함대를 통해 나라를 구하는 훌륭한 무기로 활용하게 된다.
그는 더러 잘못이 있다하여 탄핵을 받기도 했지만 불이익을 당하지 않았으며, 공조참판을 거쳐 1433년에는 좌군절제사로 도원수 최윤덕을 따라 북방정벌에 참여한 일도 있다.
최무선에게는 아들 해산  하나밖에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야사에 의하면 그의 장남은 최해산이 아니라 그의 형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해산이 태어나기 전 화약 실험 중에 폭발사고로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다고 기록돼 있다.
▣30년 왜적 소탕의 일등공신, 역사에 저평가된 아이러니
고려말 왜구 토벌에서 우왕2년(1376년) 최영 장군의 홍산대첩, 우왕6년(1380년) 8월의 최무선 장군의 진포대첩, 9월 이성계 장군의 황산대첩, 우왕9년(1383년) 정지 장군의 남해관음포대첩을 왜구격멸 4대첩이라고 일컫는다.
여기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의 관음포대첩의 기록과 내용도 약간 다르지만 석연치 못한 점이 발견된다. 고려사의 정지열전에는 화포를 쏴서 적선 17척을 불태웠다(發火 焚賊船17)는 기록은 있으나 최무선 장군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관음포대첩의주장은 정지장군이나 화포를 사용해 대첩을 거둔 것은 바로 포사격 지휘를 맡은 최무선 장군이기 때문이다.
최무선의 그 위대한 공적이 당시의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드려졌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우선 권근의 찬양시를 분석해보자. 첫 구절에 ‘명공재략응시생(明公才略應時生)’이라 함은 최무선의 재략이 아니었던들 30년간이나 시달려온 왜적을 소탕할 계책이 조야를 막론하고 아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참으로 때맞춰 출생했다고 한 것 같다. 바로 그 뒤 구절인 ‘삼십년왜일일평(三十年倭一日平)’은 30년 간 시달려온 왜구의 피해를 하루에 평정했다고 했다.
이미 전술한 바와 같이 그 뒤에도 몇 번의 왜구토벌의 싸움이 있었다. 그러나 권근은 최무선의 공은 당시 어느 누구보다도 더 위대하고 중요하다고 봤다. “최무선의 공이 너무 위대해 만세에 이르도록 전해질 것이며, 세상을 덮은 공은 햇빛과 같이 온 누리에 퍼질 것”이라 했다. “고려 공신들의 초상화를 능연각에 걸어서 현창 기념하는데 그 중에서도 최무선의 초상화가 다른 공경대부보다도 으뜸”이라고 했다. 그리고 “공신의 집안은 영구히 단절시키지 않는다는 약속인 영원한 서약을 어찌 기대하지 않겠는가?”라고 한 것을 보면 고려의 충신, 훈신, 영웅들이 많지만 권근은 최무선 장군이 이들을 다 능가하는 공적이라고 찬양한 것이다.
세종실록의 세종12년 4월 초에 병조참의 박안신(뒤에 이조판서로 예문관대재학을 겸임)의 상소문에는 정지, 최무선, 나세 등의 이름이 오르고 있으며 우리 측은 병선 100척으로 출격했는데 적은 수가 많고 아군은 수가 적어서 형세가 불리했으나 화포를 쏘아 적을 대패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역사는 승자의 전유물이었던가, 조선조 고려사 편찬 때 조선건국의 전말을 합리화하는 방향에서 엮었다고 하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으리라.
경북 성주군 수륜면 남은리(법산) 영천최씨 집성촌에 거주하고 있는 후손들은 “정사에서 최무선의 기록을 빼버리거나, 있어도 간략하게 해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한 내용을 왜곡하도록 만들어 놓았다.”며, “태조와 태종은 최무선의 재주와 기술, 그 공적이 아까워 벼슬은 내렸지만 자기 왕조 창건에 동조하지 않는 것이 서운해 가장 중요한 그의 공훈 기록을 사서에 올리는 것을 소홀히 한 것 같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 뒤에도 역대 왕과 종신, 사가들의 푸대접은 이어진바, 그들의 정의감이나 양심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성계로부터 조선왕조 창건에 가담 종용 및 벼슬 유혹 받다
이성계가 고려조를 전복하고 조선왕조를 창건하기 위한 혁명을 모의하는 과정에서 최무선에게 가담할 것을 종용했다. 그가 만든 화약과 화약무기를 쓰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장래 큰 벼슬을 약속하며 돈으로 유혹했으나 최무선은 단호히 거절했다. 뿐만 아니라 조선 건국 후 이태조가 최무선에게 벼슬하기를 요청했으나 이 또한 거절했다.
이태조가 두 차례나 간청한 것에 대해 최무선은 “나는 다만 고려조와 나와 같은 땅에 살고 있는 겨레 형제들을 위해 외세의 침략과 약탈로부터 수호하기 위해 쓰일 화약이나 화약무기를 만들뿐이며 돈이나 벼슬을 하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니 그만 헤아려주십시오”라며 겸손하게 거절했다.
또 “이 화약과 화약무기는 어느 개인의 영달이나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없고 사용돼서도 안 된다.”고 말해 혁명세력들을 놀라게 했다. 이때 이성계의 휘하 장수 한 사람이 “저 사람이 우리의 기밀을 알게 됐으니 혹 누설시킬 우려가 있으므로 처치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으나 이성계가 이를 막았다는 일화가 있다.
최무선은 고려말 정치가 문란하고 백성은 왜적의 침탈에 시달리고 있을 때 하늘이 내린 수호천사였다. 30여 년간 시달려 왔던 왜적을 몰아낸 그는 백성에게는 호국의 별과 같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성계 혁명파에 가담하지 않았다하여 그들의 질시를 사게 됨으로써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의 열전에서 빠져버렸다. 뿐만 아니라 명신록이나 명현전에서 조차 그의 공훈을 깎아버리거나 무시해버렸음이 통탄할 일이다.
그의 업적에 비해 미미한 인물까지 명신록에 올라있는데 최무선만 푸대접을 당한 것이다. 심지어 현대에 와서도 1994년 고려숭의회에서 발간한 여말충의열전에서 조차 최무선의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참으로 통탄스러운 대목이다.
현대 사학자들조차 최무선의 업적을 잘 모른다는 무지가 안타까울뿐더러 한편으로 위대한 선조의 공헌을 부각시키지 못한 장군의 후손들 책임 또한 크다고 하겠다.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과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기록이 자세치 않으면 근거 외 의미를 상실한다. 여기서도 편파적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여말 4대첩 중 최영의 홍산대첩과 최무선의 진포대첩에 대한 기록은 찾아볼 수 없는 반면, 이성계의 황산대첩과 정지 장군의 관음포대첩은 크게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최무선의 화약과 화포 발명이 없었던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군을 크게 무찌를 수 있었을까 미루어 짐작해 볼 일이다.
주간고령 기획팀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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