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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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초명(初名)은 종도(鍾燾)이었으며 자는 기용(器容)이고 호는 만구(晩求)이다. 생부(生父) 능용(能容)과 생원(生員)을 지낸 이원(以元)의 따님인 광주이씨(廣州李氏) 사이에서 둘째아들로 헌종 3년(1837년) 고령군 다산면 상곡리에서 태어났다.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지낸 상곡(上谷) 전의이씨(全義李氏) 입향조(入鄕祖) 다포(茶圃) 이지화(李之華)의 9세손이다. 어릴 때 당숙(堂叔)인 현용(鉉容)에게 출계(出系)하였다. 학문이 조숙(早熟)하여 이미 14세에 회연서당(檜淵書院) 강회(講會)에 출입하여 질문과 토론으로 당시의 노장(老長) 유학자(儒學者)를 놀라게 하였다고 한다. 만구(晩求)의 학문의 연원은 가학(家學)에 의해 이루어 졌으며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학맥(學脈)과 연계되었다는 점이다. 생부 능용(能容)은 진사(進士)인 숙부 오려(吾廬) 재선(在)에게 배웠고 오려(吾廬)는 백부(伯父) 벽재(躄齋) 규운(奎運)에게 배웠으며 벽재(躄齋) 규운(奎運)은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인(門人)이었으며 이상정(李象靖)의 학맥을 이은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을 사숙(私塾)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금주(錦洲) 허채(許埰)가 지은 만구집(晩求集)에서 기록되어 있으며 장인(丈人)인 광산이씨(光山李氏) 소암(小庵) 종희(宗熙)는 이상정(李象靖)의 외증손(外曾孫)인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학풍을 이었던 점도 일정 부분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성재(性齋) 허전(許傳)의 문인(門人)으로 가르침을 받았다. 윤영선(尹榮善)이 우리나라 유현(儒賢)들의 연원(淵源)을 도표식(圖表式)으로 편저(編著)한 책인 조선유현연원도(朝鮮儒賢淵源圖)에 공은 허전(許傳)의 문인(門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은 영남학맥(嶺南學脈)의 정통적 이론을 심화한 마지막 성리학자(性理學者)이다. 유일(遺逸)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除授)받았지만 헛된 이름으로 임금을 속일 수 없다고 하여 부임하지 않았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이기설(理氣說)을 수용하였지만 이(理)와 기(氣)에 치우친 이론의 획일화(劃一化)에 반발(反撥)하는 개방적(開放的)인 태도를 보였으며 이(理)와 기(氣)의 조화(調和)와 공존(共存)을 강조하는 균형(均衡)잡힌 태도를 견지하였다. 이러한 그의 이기(理氣)에 대한 이론은 「사칠기발이승지변(四七氣發理乘之辨)」, 「이기선후주종편전설(理氣先後主從偏全說)」 등의 문장에 잘 나타나 있다.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 원장(院長)에 두차례나 천임(薦任)되는 등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으로 통달하여 일세(一世)의 사표(師表)로서 추앙(推仰)을 받았다. 또한 경상북도 고령군(高靈郡) 다산면(茶山面) 상곡(上谷) 마을에 서락서당(書洛書堂)을 만들고 200여명의 제자를 양성하였으며 당대의 선배 유학자인 고헌(顧軒) 정래석(鄭來錫), 사미헌(四未軒) 장복추(張福樞)는 공을 중(重)히 여겨 의지하지 않는 일이 없었으며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은 사표(師表)로 칭하였으며 임종(臨終)할 무렵 평생 한 번밖에 그를 만나지 못한 것을 탄식했으며 자제들에게 둿일을 만구(晩求)에게 맡기라고 유언(遺言)했다. 이러한 사실에서 그의 학문(學文)과 덕행(德行)이 매우 탁월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이종기(李種杞)의 사상적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성리사상(性理思想)의 특징은 가학적(家學的) 전통과 자신의 학문적 취향을 따라 정통적인 퇴계학파(退溪學派)의 입장을 견지하고 지나치게 이발(理發)‧기발(氣發)만을 강조하는 성리적 입장에서는 회의적이었으며 이기공존(理氣共存)의 입장을 강조했다. 둘째 예학사상의 특징은 예(禮)의 실행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상황논리(狀況論理)를 강조했다. 즉 실질과 현실의 측면을 중시하고 형식논리에 얽매이지 않았다. 셋째 불교(佛敎)와 서학(西學)에 관한 견해에 관해서는 불교(佛敎)에 관해서는 비교적 온건(穩健)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하였으나 서학(西學 : 천주교)에 대해서는 강경한 척사의식(斥邪意識)을 보였다. 공의 문인은 200여 명에 이르며 대표적인 인물은 수파(守坡) 안효제(安孝濟 : 의령), 금주(錦洲) 허채(許埰 : 김해), 성헌(省軒) 이병희(李炳熹 : 밀양),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 : 성주),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 : 창녕), 수봉(壽峯) 문박(文樸 : 대구) 등이 있다. 고종 39년(1902년) 음력 3월 28일 향년 66세로 고종(古終)하였다. 장례 때 모인 인파는 천 수백명이 되었고 묘소는 고령군 다산면 월성리 산 99번지(절두골) 술좌(戌坐)에 있다. 문인(門人) 눌재(訥齋) 김병린(金柄璘)이 묘갈명(墓碣銘)을, 족질(族姪) 이기로(李基魯)가 행장(行狀)을 지었다. 저서로는 사후(死後) 6년뒤에 발간된『만구집(晩求集)』이 있는데, 원집 10책과 속집(續集) 4책과 부록(附錄) 2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986년 영인본(影印本)으로 재간(再刊)되었다. 1950년 6·25전쟁을 거치면서 고종 29년(1892년)에 건립된 서락서당(西洛書堂)이 소실되고 모든 문적(文籍)이 불에 타 없어지자 1951년부터 16개 지역(고령, 성주, 대구달성, 칠곡, 김천, 영천, 청도, 창녕, 밀양, 의령, 합천, 초계, 창원, 칠원, 함안, 사천)에 있는 그의 후손과 문인 등 1,537명이 모금에 참여하여 고령군 다산면 상곡리 281-3에 서당 복원 작업이 이루어졌다. 2015년 10월 9일 한국국학진흥원(韓國國學振興院)에 소장되었던 만구(晩求) 이종기(李鍾杞) 선생의 문집 책판 413장이 ‘유교책판(儒敎冊版)’과 함께 제12차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저술로 문집 10책 17권이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의 편집 교정을 거쳐 1907년 발간되었고 1936년 속집 4책 8권이 이어서 부록 2책이 발간되었으며 1986년에 영인본으로 개간되었다. 시와 만사 335수, 서 399편, 잡저 13편과 묘갈명, 행장, 기, 서, 발 등이 실린 거질(巨帙 : 매우 많은 권수로 이루어진 책의 한 벌)로 손꼽히고 있다. 그의 향리에는 공이 강학(講學)하던 유택(幽宅)을 개조해서 옮긴 다산면 상곡리 281-3번지에 서락서당(西洛書堂)이 남아 있다. 현재 초취(初娶)는 종희(宗熙)의 따님인 광산이씨(光山李氏)이고 재취(再娶)는 교관(敎官)을 증직(贈職)받은 기인(基寅)의 따님인 밀양박씨(密陽朴氏)이다.


▲ 만회(晩悔) 이병회(李柄回 : 광산, 1865년∼1927년)

 

본관은 광산(光山)이고 자는 응두(應斗)이고 호는 만회(晩悔)이다. 행은(杏隱) 호영(祜永)과 석유(錫裕)의 따님인 성주도씨(星州都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고종 2년(1865년) 7월 12일 고령군 성산면 고탄리(高呑里) 본제(本第)에서 태어났다. 젊었을 때에는 족조(族祖)인 소암(小菴) 이종희(李宗熙)에게 배우고 장성한 후에는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선생을 따르시어 학문은 정통을 계승하고 의리를 실천해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으며 선행(善行)은 흐르는 물과 같이하고 비리(非理)는 용서하지 않았다. 말세(末世)를 만나 고향에 은거(隱居)함에 부모를 봉양(奉養)하고 조상의 제사를 모시며 치산(治山)에도 유의해 철따라 농사를 지으시고 검소절약(儉素節約)을 솔선해 이웃의 모범이 됐다. 장년기에는 유림사회(儒林社會)에서 융숭(隆崇)한 학덕(學德)과 탁월한 경륜(經綸)으로 각종 행사에 선도적(先導的)인 역할을 해 신망(信望)이 두터웠다. 1919년 파리세계평화회의(巴里世界平和會議)에 우리 민족의 자주 독립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리고자 작성한 독립청원서(獨立請願書)인 ‘한국유림송파리평화회서(韓國儒林送巴里平和會書)’에 123번째로 서명해 조국광복(祖國光復)을 위한 민족의 역량(力量)을 하나로 모으는데 적극 동참했다. 간암(艮庵) 박돈(朴燉), 어산(於山) 김희록(金熙祿),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 병산(甁山) 김영학(金永學), 백괴(百愧) 우하구(禹夏九), 이고(二顧) 최우동(崔羽東) 등 당대의 지사(志士) 명류(名流)들과 우국(憂國)의 정(情)을 나누었다. 그후 일경(日警)에 검거돼 5, 6개월간 물을 씌우고 몽둥이로 실신(失身)케 한 후 또 사람을 거꾸로 매달아 물고문을 하는 등 온갖 고초(苦楚)를 겪었으며 심한 악형(惡刑)으로 얻은 불치(不治)의 병으로 1927년 9월 20일 향년 63세에 서거(逝去)했다. 묘는 고령군 성산면 기족(旗族) 후산등(後山嶝) 계좌(癸坐)에 있다. 정부는 고인(故人)의 공훈(功勳)을 기려 2009년 8월 15일에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追敍)했다. 2013년 12월 22일 ‘애국지사(愛國志士) 만회(晩悔) 광산(光山) 이선생(李先生) 추모비(追慕碑) 건립추진위원회(建立推進委員會)’에서는 공의 독립운동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성금을 모아 고령군 성산면 삼대리 113-1번지에 소재한 사망정(四望亭) 앞에 ‘애국지사(愛國志士) 만회(晩悔) 광산이선생(光山李先生) 추모비(追慕碑)’ 건립했다.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진성(眞城) 이완재(李完栽)가 근찬(謹撰)하고 영남대학교 명예교수 부림(缶林) 홍우흠(洪瑀欽)이 근서(謹書)했다. 배위는 세동(世東)의 따님인 단양우씨(丹陽禹氏)이다.

 

▲ 매사(梅史) 오인순(吳寅淳 : 고창, 1866년∼1905년)

 

본관은 고창(高敞)이며 자는 주용(周用)이고 호는 매사(梅史)이다. 경당(敬堂) 응철(應轍)과 한기(漢基)의 따님인 순천박씨(順天朴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고종3년(1866년) 1월 1일에 태어났다. 일찍이 과거공부에 힘썼으며 자못 이름이 알려지자 스스로 깨닫고 제자가 스승을 처음으로 볼 때에 폐백(幣帛)을 가지고 가서 경의(敬意)를 표하는 의식인 집지(執贄)를 하고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평생 기강(紀綱)·명분(名分)·예의(禮儀)·검약(儉約) 네가지를 생활의 신조로 삼고 생활했다. 특히 효성이 지극하고 예절이 탁월하여 주위의 칭송을 받기도 했으며, 평생 학문과 후진양성에 힘써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고을 선비들은 공의 매우 착한 행실과 학문을 독실(篤實)히 하는 것을 공경하였다. 그 후 이름이 드러나자 고을에서 조정에 상소를 올려 마침내 능묘참봉(陵墓參奉)을 제수(除授)받았다. 모친이 병환에 있음에 손가락을 잘라 소생(甦生)케 하였고 꿩고기를 원함에 꿩을 잡을 것을 염원하였더니 꿩이 부엌에 날아 들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효성에 감응(感應)한 것이라고 하였다. 부모상을 당하여 3년상을 치르면서 눈물로 지냈다. 1905년 6월 2일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송림 산막곡(山幕谷) 종숙부영(從叔父塋) 하록(下麓) 건좌(乾坐)에 있으며 쌍분(雙墳)이며 효암(曉庵) 이중철(李中轍)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유고(遺稿)인 『매사문집(梅史文集)』은 2권 1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책은 1931년 이기로(李基魯)가 편찬했으며 권두에 송준필(宋浚弼)의 서문이 있고, 권말에 이기로(李基魯)·정지순(鄭之純)의 발문이 있다. 스승 이종기(李種杞)와 성리(性理)의 이치를 토론한 왕복 서한이 수록되어 있으며 여기에는 명덕(明德)·이기(理氣)·성품(性品)·사단(四端)·태극(太極)·인심(人心) 등의 상호관계와 그 작용에 대한 저자의 질의와 이종기의 응답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말기 영남 성리학의 한 편린(片鱗)을 엿볼 수 있다. 배위는 승룡(升龍)의 따님인 창원황씨(昌原黃氏)이다.

 

▲ 운석당(雲石堂) 박재근(朴在根 : 밀양, 1870년∼1955년)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진근(瑨根)으로 개명(改名)하였으며 자는 영언(韺彦)이고 호는 운석당(雲石堂)이다. 유학(幼學) 종항(宗恒)과 석관(錫寬)의 따님인 창녕조씨(昌寧曺氏) 사이에서 고종 7년(1870년) 1월 6일 태어났다. 일찍이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문하에서 수업한 후 온릉참봉(溫陵參奉)에 제수되어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21번지 소재 조선 제11대 중종왕비 단경왕후(端敬王后)신씨(愼氏)의 능(陵)을 관리하다가 1910년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맞이하자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 등과 대한독립(大韓獨立)을 모의(謀議)하였으며 1919년 3월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제출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한국 유림 대표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당시 유림에서는 거국적인 3·1독립선언서의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유학자들이 불참하게 된 것을 통분하고 한국의 독립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는 요지의 장서를 직접 파리강화회의에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1919년 경남 거창(居昌)의 유생 곽종석(郭鍾錫), 경북 성주(星州)의 장석영(張錫英), 충남 홍성(洪城)의 김복한(金福漢) 등이 주축이 되어 파리장서를 작성, 김창숙(金昌淑)이 이를 소지하고 상해(上海)로 갔다. 이때 박재근은 2,674자의 장문에 곽종석(郭鍾錫)·김복한(金福漢)·김창숙(金昌淑) 등과 함께 137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 그후 달성군 현풍면에서 영업 중이던 약국의 문을 닫고 조랑말을 타고 고령, 성주, 서울 등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가산(家産)을 탕진(蕩盡)하였다. 1955년 5월 26일 향년 85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성산면 용소리 원당촌 뒤편 선고(先考) 좌편(左便) 건좌(乾坐)에 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追敍)하였다. 『행로난(行路亂)』 등 한시집(漢詩集), 각종 의서(醫書),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에게 보낸 장문의 서한문, 대구 한시(漢詩) 백일장(白日場)에서 장원(壯元)한 한시 등 20여점이 유고(遺稿)로 전한다. 초취(初娶)는 헌규(憲珪)의 따님인 이천서씨(利川徐氏)이고 재취(再娶)는 재운(在運)의 따님인 진주하씨(晋州河氏)이다.

 

▲ 화계거사(花溪居士) 이호봉(李鎬鳳 : 여주, 1871년∼1911년)

 

본관은 여주(驪州)이며 자는 윤문(允文)이고 호는 율원(栗源) 또는 화계거사(花溪居士)이다. 장능참봉(莊陵參奉)을 지낸 색은(穡隱) 육민(堉敏)과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진영(鎭瑩)의 딸인 경주최씨(慶州崔氏) 사이에서 고종 8년(1871년) 음력 6월 16일 태어났다. 유년기에는 합천인(陜川人) 농헌(聾軒) 이경벽(李慶壁)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소년기부터 성년이 될 때까지는 주문팔현(洲門八賢) 중 한 분이었던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에게 배웠으며 1890년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가 일시적으로 거처(居處)했던 대가야읍 관동(館洞)으로 찾아가서 속수지례(束脩之禮)를 올리고 수학(受學)하였다. 공의 초휘(初諱)는 봉석(鳳錫)이며 자는 사문(士文)으로 호는 율원(栗源)이었는데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선생께서 개명(改名)하시기를 이름을 호봉(鎬鳳)으로 자는 윤문(允文)으로 호는 화계(花溪)라 고쳐 지어 주었다. 그후 동문수학(同門受學)한 금주(錦洲) 허채(許埰), 주당(籀堂) 박해령(朴海齡), 눌재(訥齋) 김병린(金柄璘), 간암(艮庵) 박돈(朴燉)의 뒤를 따라 서락서당(西洛書堂)에서 강독(講讀)하였으며 재강(霽岡) 이면순(李勉淳), 해음(海陰) 박기열(朴璣烈), 회천(晦川) 송홍래(宋鴻來), 성와(省窩) 이인재(李寅梓), 다곡(茶谷) 이기로(李基魯), 근재(近齊) 정지순(鄭之純) 등 당대 지역의 거유(巨儒)들과 도의지교(道義之敎)를 맺었다. 1902년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선생께서 돌아가신 후 10년 동안을 제사날인 음력 3월 28일에는 반드시 제물(祭物)과 제문(祭文)을 가지고 제사에 참여하였다. 1908년(戊申年)에는 삼종제(三從第) 소백공(小白公) 호인(鎬仁)과 더불어 구목재(九睦齋)를 세워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1910년(庚戌年) 한일합방(韓日合邦) 후에는 두문불출(杜門不出)하시고 예의(禮儀)와 덕(德)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사랑하였으나 갑작스러운 병으로 1911년 음력 4월 10일 향년 41세로 졸(卒)하였다. 배위는 시화(時華)의 따님 성산이씨(星山李氏)이고 묘는 고령군 대가야읍 중화 1리 화갑 진전곡산(榛田谷山) 해좌(亥坐)이다. 성암(誠菴) 노근용(盧根容)이 묘갈명(墓碣銘)을 짓고 시헌(是軒) 이성훈(李星勳)이 묘지(墓誌)를 지었다. 유고(遺稿)로 『화계문집(花溪文集)』 6권이 있었으나 병난(兵亂)으로 소실되었다.


(註釋) 속수지례(束脩之禮)
묶은 육포(肉脯)의 예절이라는 말로, 스승을 처음 만나 가르침을 청할 때 작은 선물을 함으로써 예절을 갖춘다는 뜻이다.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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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락서당(다산면 상곡4길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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