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이씨(固城李氏) 사암공파(思巖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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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고성이씨(固城李氏) 사암공파(思巖公派)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고성이씨(固城李氏) 시조(始祖) 이황(李璜)
① ‘순흥안씨(順興安氏) 추원록(追遠錄)’에 의하면 시조(始祖) 이황(李璜)은 고려 덕종 때 사람으로 생원(生員)에 급제한 후 벼슬을 하지 않고 계시다가 그 후에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으며 만성보(萬姓譜)에는 철령군(鐵嶺君)이란 봉호(封號)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註釋) 철령(鐵嶺)
철령(鐵嶺)은 현 고성(固城)의 옛날 지명이다.
② ‘고려사(高麗史)’에 고성이씨(固城李氏) 시조(始祖) 이황(李璜)과 관련하여 아래와 같은 기록 2건이 있어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 고려사 5권-세가(世家) 5권-덕종(德宗) 2년 1월
• 덕종 2년(1033년) 좌우위맹교위(左右衛猛校尉) 오행(吳幸), 이황(李璜), 신선립(申先立) 등이 거란(契丹)의 군사 7인을 사로잡아 관직을 1급씩 하사하였다.
左右衛猛校尉吳幸[李璜]申先立等抄掠丹兵七人賜職一級
- 고려사 8권-세가(世家) 8권-문종(文宗) 17년 4월
• 문종 17년(1063년) 이황(李璜)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박희중(朴希仲)을 섭공부상서(攝工部尙書)로 임명하였다.
左右衛猛校尉吳幸·李璜·申先立等, 抄掠丹兵七人, 賜職一級.
③ ‘고성이씨(固城李氏) 명현열전(名賢列傳)’에 의하면 “전해 내려오는 바에 이르기를 중국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 이반(李槃)이라는 중서사인(中書舍人 : 의정부에서 실질적인 모든 사무를 맡아보던 관직)이 있었는데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우리나라를 침략할 때 이반(李槃)의 후손이 도호원수(都護元帥 : 군총사령관)이 되어 우리나라에 나왔다가 전쟁이 끝난 후에 그냥 머물러 살게 되었는데 그 후손이 곧 이반(李槃)의  24세손 이황(李璜)이라고 하여 고성이씨(固城李氏) 시조(始祖) 이황(李璜)이다.”라고 하나 확실한 근거가 없다.
(2) 본관유래(本貫由來)
① 시조(始祖) 이황(李璜)께서 고려 덕종 2년(1033년)에는 좌우위맹교위(左右衛猛校尉)로 거란병을 토벌함에 큰 공을 세웠으며 그 후 밀직부사(密直副使)가 되었고, 문종 17년(1063년) 호부상서(戶部尙書)로 제수(除授)되고 철령군(鐵嶺君)의 봉호(封號)를 받음으로써 철령(鐵嶺)고을(현재의 固城)이 고성이씨(固城李氏)의 관향(貫鄕)이 되었다.
② 철성(鐵城)도 고성(固城)의 옛이름이어서 ‘철성(鐵城)’을 관향(貫鄕)으로 하는 이씨(李氏)도 고성이씨(固城李氏)와 같은 뿌리이다.
(3) 연면(連綿) 5위(五位) 문자시호(文字諡號)를 받은 명문거족(名門巨族)
 고려조(高麗朝)에 있어서 7세 존비(尊庇)는 문희(文僖), 8세 우(瑀)는 문헌(文憲), 9세 암(嵒)은 문정(文貞), 10세 강(岡)은 문경(文敬)의 시호(諡號)를 잇달아  다섯 분 선조께서 시호(諡號)를 받음으로써 동방(東邦)의 명문거족(名門巨族)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4) 분파(分派)
 12세를 기준으로 안정공파(安靖公派), 둔재공파(鈍齋公派), 호군공파(護軍公派), 좌윤공파(左尹公派), 동추공파(同樞公派), 병사공파(兵使公派), 참판공파(參判公派), 사암공파(思菴公派), 도촌공파(桃村公派), 은암공파(隱菴公派) 등 10개파로 분파(分派)되었다.
(5) 고성이씨(高城李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고성이씨(高城李氏)는 28가구 7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사암공(思菴公) 지(墀)의 후손은 고령군 쌍림면 하거1리를 중심으로 관내에 산거(散居)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이존비(李尊庇)
자는 빈연(彬然)·지정(持正)이며 초명(初名)은 인성(仁成)이다. 승문학사(承文學士) 진(瑨)과 예부시랑(禮部侍郞) 경선(景瑄)의 따님인 염포백씨(藍浦白氏) 사이에서 고종 20년(1233년)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외삼촌 백문절(白文節 : 백이정)에게 글을 배워 문장과 예서(隷書)에 능하였으며, 문정공(文正公) 유경(柳璥)의 문하에서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와 함께 수학하여 유학에 밝았다. 고종 38년(1251년)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고 원종 1년(1260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내시(內侍)에 입적(入籍)되었으며, 이어 비서교서랑(秘書校書郎)·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호부(戶部)·병부(兵部)·이부(吏部)의 시랑(侍郞) 등을 역임하였다. 충렬왕 1년(1275년) 상서우승(尙書右丞)·예빈경(禮賓卿)을 거쳐 좌승지(左承旨)에 올랐으며, 이 때 필도치(必闍赤)의 일원이 되었다. 충렬왕 5년(1279년) 밀직부사(密直副使)로서 장군 정인경(鄭仁卿)과 함께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원나라에 사신으로 행차하였으며, 충렬왕 6년(1280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세자원빈(世子元賓)에 오르고, 충렬왕 8년(1282년)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최백륜(崔伯倫) 등 32명에게 급제(及第)를 내려주었다. 충렬왕 10년(1284년) 감찰대부(監察大夫)에 오르고 충렬왕 13년(1287년)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어 여몽군(麗蒙軍)의 일본정벌을 위한 병량(兵糧) 및 군선(軍船)의 조달을 담당하였다. 동판밀직사사(同判密直司事)에 이르러 충렬왕 13년(1287년) 졸(卒)하였다.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 익조공신(翊祚功臣)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증직(贈職)되었고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註釋) 필도치(必闍赤)
고종 12년(1225년)에 최이(崔怡)가 자신의 사제(私第)에 정방(政房)을 두고 문사(文士)를 뽑아 들여 임원을 삼아 관리의 인사(人事)를 처리하게 하였는데 이들을 필도치(必闍赤)라고 하였다.
② 이암(李嵒)
자는 고운(古雲)이고 호는 행촌(杏村)이며 초휘(初諱)는 군해(君侅)이다. 철원군(鐵原君) 우(瑀)와 판삼사사(判三司事) 지량(之亮)의 따님 함양군부인(咸陽郡夫人) 함양박씨(咸陽朴氏) 사이에서 충렬왕 23년(1297년) 태어났다. 충선왕 5년(1313년) 문과에 급제한 후 비성교감(祕省校勘)을 거쳐 도관정랑(都官正郎)이 되었다. 충혜왕 초 밀직대언(密直代言) 겸 감찰집의(監察執義)에 올랐다. 1332년 충숙왕이 복위하자 전왕(前王)인 충혜왕에게 총애(寵愛)를 받은 신하를 패행(嬖幸)라 하여 곤장을 맞고 섬으로 유배되었다(杖流海島). 1340년 충혜왕의 복위로 돌아와 지신사(知申事)·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정당문학(政堂文學)·첨의평리(僉議評理) 등을 역임하였다. 충목왕이 즉위하면서 찬성사(贊成事)로 제수되어 정방제조(政房提調)가 되었다. 공민왕 초 철원군(鐵原君)에 봉해졌으나 사직하고 청평산(淸平山)에 들어갔다가 공민왕 7년(1358년)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에 제수되었다. 공민왕 10년(1361년) 홍건적(紅巾敵)이 개경에 쳐들어오자 왕을 따라 남행(南行)했고 이듬해 3월 좌정승(左政丞)에서 사퇴하였다. 1363년 왕이 안동으로 피난할 때 호종(扈從)한 공로로 1등공신으로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추성수의동덕찬화익조공신(推誠守義同德贊化翊祚功臣)이라는 호가 하사되었다. 글씨에 뛰어나 동국(東國)의 조자앙(趙子昻)으로 불렸으며, 특히 예서(隸書)와 초서(草書)에 능했다. 필법(筆法)은 조맹부(趙孟頫)와 대적할 만하며 지금도 문수원장경비(文殊院藏經碑)에 글씨가 남아 있다. 그림으로는 묵죽(墨竹)에 뛰어났다. 소전거사(素佺居士)로부터 전수받은 고서적등을 근거로『단군세기(檀君世記)』를 쓰고 공민왕 13년(1364년) 졸(卒)하였다. 우왕 때 충정왕(忠定王)의 묘정(廟廷)에 배향(配享)되는 체협공신(禘祫功臣)이 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註釋) 체협공신(禘祫功臣)
체협(禘祫)이란 조상의 영혼을 합하여 제사지내는 것을 말하며 체협공신(禘祫功臣)이란 임금의 조상을 합하여 제사를 지낼 때 함께 제사지내는 대표적인 공신을 말한다.
③ 이강(李岡)
자는 사비(思卑)이고 초휘는 강(綱)이며 호는 평재(平齋)이다.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 암(嵒)과 우대언(右代言) 승서(承緖)의 따님 남양홍씨(南陽洪氏) 사이에서 충숙왕 복위 2년(1333년)에 태어났다. 문음(門蔭)으로 복두점(幞頭店) 녹사(綠事)가 되었고 충목왕 3년(1347년) 문과에 급제한 후 원송수(元松壽)의 추천으로 지신사(知申事)가 된 뒤 공민왕 10년(1361년) 이부낭중(吏部郎中)의 직에 있으면서 왕으로부터 “그대는 전선(銓選 : 인사행정)에 참여하여 대간(臺諫)으로서 직무를 소홀히 한 자를 쫓아내고 현명한 인재로 초야(草野)에 묻혀있는 자를 올리라. 부모의 상(喪)을 마친 자들도 또한 모름지기 발탁(拔擢)하여 등용하라.”라는 말을 듣고 엄격하게 관리를 등용하였다. 공민왕 16년(1367년) 밀직부사(密直副使)를 거쳐 공민왕 17년(1368년)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올랐으며 동년에 36세라는 젊은 나이로 졸(卒)하자 국왕이 깊이 애도하고 부의(賻儀)를 후(厚)하게 내려주었다. 그리고 추밀(樞密)은 전례(典例)상 시호(諡號)를 받을 수 없지만, 특별히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상기 내용은 고려사 권64, 권75 등에 기록되어 있다. 공은 당시 대표적인 학자인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함께 학문을 강론하고 연구하여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註釋) 문음(門蔭)
고려•조선 시대 관리 선발 제도의 하나로 선조나 친척이 국가에 큰 공을 세웠거나 고관직(高官職)을 얻으면 후손이 일정한 벼슬을 얻게 하는 제도를 말한다
(2) 조선시대
① 이원(李原)
자는 차산(次山)이고 호는 용헌(容軒)이다. 밀직제학(密直提學) 강(岡)과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연준(延俊)의 따님 진한국부인(辰韓國夫人) 청주곽씨(淸州郭氏) 사이에서 공민왕 17년(1368년) 태어났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이다. 우왕 8년(1382년)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고 우왕 11년(1385년) 문과에 급제한 후 사복시승(司僕寺丞)을 거쳐 예조(禮曹)와 병조(兵曹)의 시랑(侍郞)·좌랑(佐郞) 등을 지냈다. 1392년 조선이 개국되자 지평(持平)·시사(侍史)·중승(中丞)을 역임하였다. 정종 2년(1400년) 좌승지(左承旨) 때 이방원(李芳遠)이 동복형인 이방간(李芳幹)의 난을 평정하고 왕위에 오르는 데 협력한 공으로 태종 1년(1401년)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策錄)되고 철성군(鐵城君)에 봉작(封爵)되고 대사헌(大司憲)에 제수(除授)되었다. 태종 2년(1402년) 경기좌우도도관찰출척사(京畿左右道都觀察黜陟使)가 되었고, 1403년 승추부제학(承樞府提學)으로 있으면서 고명부사(誥命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후 서북면도순문찰리사(西北面都巡問察理使)·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판의용순금사사(判義勇巡禁司事)·대사헌(大司憲) 등을 역임하였다. 태종 8년(1408년)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이어서 예조판서(禮曹判書)·병조판서(兵曹判書) 등을 거쳐 태종 18년(1418년) 우의정(右議政), 세종 3년(1421년) 좌의정(左議政)으로 승진했다. 세종 11년(1429년) 유배지 여산(礪山)에서 졸(卒)하였다. 시호는 양헌(襄憲)이다. 태종 때 청백리(淸白吏)로 녹선(錄選)되었다. 저서로는『용헌집(容軒集)』·『철성연방집(鐵城聯芳集)』이 있다.
② 이지(李墀)
자는 승경(升卿)이며 호는 사암(思菴)이다. 철성부원군(鐵城府院君) 좌의정(左議政) 원(原)과 전리판사(典理判事) 금(錦)의 따님 진한국부인(辰韓國夫人) 양천허씨(陽川許氏) 사이에서 일곱 번째 아들로 세종 2년(1420년) 태어났다. 문종 1년(1451년) 선조의 숨은 음덕(蔭德)으로 경희전(景禧殿) 직장(直長)에 보직(補職)되었다가 세조 1년(1455년)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정난원종공신(靖難原從功臣)에 책록(策錄)되었고 세조 3년(1457년) 문과에 급제한 후 세조 5년(1459년) 직예문관(直藝文館)를 지내고 그 후에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안변도호부사(安邊都護府使) 등을 역임하였다. 세조 12년(1467년)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진무(鎭撫)에 제수(除授)되었다. 성종 3년(1472년) 군왕을 잘 보좌하여 선정(善政)을 베푼 공으로 좌리원종공신(佐理原從功臣)에 녹훈(綠勳)되고 괴산군수(槐山郡守)·원주목사(原州牧使)·광주목사(廣州牧使) 등을 지냈으며 성종 16년(1485년) 돈영부(敦寧府) 부정(副正)이 되었다. 성종 17년(1486년) 졸(卒)하였다. 아들 육(陸)이 참판(參判)을 지내는 등 귀(貴)하게 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판(禮曹參判) 겸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에 추증(追贈)되었다.
(註釋1) 정난원종공신(靖難原從功臣)
단종 1년(1453년) 수양대군(후에 세조)이 황보인(皇甫仁), 김종서(金宗瑞) 등 원로대신(元老大臣)과 안평대군(安平大君)을 제거하고 정권을 찬탈한 계유정난(癸酉靖難)에서 공을 세운 이들을 포상하기 위하여 내린 공신(功臣) 훈호(勳號)이다.
③ 이육(李陸)
자는 방옹(放翁)이며 호는 청파거사(靑坡居士) 또는 부휴자(浮休子)이다. 돈영부(敦寧府) 부정(副正) 지(墀)와 정몽주(鄭夢周)의 증손녀이자 감찰(監察) 보(保)의 따님 정부인(貞夫人) 연일정씨(延日鄭氏) 사이에서 세종 20년(1438년) 태어났다. 세조 10년(1464년) 세조의 온양행차시(溫陽行次時) 별시(別試)에 장원하고 세조 14년(1468년) 당하관(堂下官) 이하의 문무관에게 10년마다 한번씩 보이는 과거인 문과 중시(重試)에 2등으로 급제하였다. 예종 1년(1469년)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에 제수되어 탄핵(彈劾)·감찰(監察) 등을 담당한 대관(臺官)으로 활약하였다. 성종 2년(1471년) 장예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를 거쳐 그 후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을 지냈다. 성종 7년(1476년)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지냈다가 성종 8년(1477년)에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를 거쳐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강원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예조참의(禮曹參議)·형조참판(刑曹參判)·병조참판(兵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성종 7년(1476년) 명나라 사신을 영접(迎接)할 때 도사(都司)로 파견되었으며 성종 22년(1491년)에  정조사(正朝使)가 되었으며, 성종 25년(1494년) 12월에 형조참판(刑曹參判)으로 부고사(訃告使)가 되어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연산군 2년(1496년) 대사헌(大司憲)·한성부(漢城府) 좌우윤(左右尹)을 거쳐 연산군 3년(1497년)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제수(除授)되었다. 성종실록(成宗實錄) 편수(編修)에 참여하였다. 연산군 4년(1498년) 졸(卒)하였다. 저서로는 『청파극담(靑坡劇談)』,『철성연방문집(鐵城聯芳文集)』 등이 있다.
④ 이교(李嶠)
자는 능운(淩雲)이며 병조참판(兵曹參判) 육(陸)과 현감(縣監) 수림(秀林)의 따님 정부인(貞夫人) 고령박씨(高靈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분순부위(奮順副尉)를 지냈으며 글을 잘하여 드러난 이름이 있었으나 중종 11년(1516년) 조졸(早卒)하였다.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증직(贈職)받았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처사(處士) 청계(聽溪) 장선(章善)이 1880년경 선향지(先鄕地) 고성군 하일면에서 쌍림면 신촌리 어은동(漁隱洞)으로 전거(轉居)하여 고성이씨 망족(望族)의 역사를 시작하였으나 아들 정근(庭根)이 성산배씨(星山裵氏) 찰방공파(察訪公派) 배은(裵垠)의 후손을 재취(再娶)로 맞이하자 처향(妻鄕)의 세거지(世居地)인 쌍림면 하거리로 전거(轉居)하여 5대째 세거(世居)하고 있다.
4. 입향조(入鄕祖) 이후 역대 주요인물
고령입향(高靈入鄕) 기간이 짧아 생략한다.
 

 

고성이씨 봉산재.jpg

고성이씨 봉산재(진주시 금곡면 죽곡리 732-1)

 

자료제공 : 후손 쌍림면 노인회
회장 성기(城基 : 족보명 鍾聿)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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