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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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

광산이씨경목당, 성산면운성로773-20.JPG

광산이씨 경목당(성산면 운성로 773-20)

 

 

▲ 최정진(崔廷鎭 : 경주, 1769년∼1817년)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자는 유서(儒瑞)이다. 두와(蠹窩) 최흥벽(崔興璧)과 계후(季垕)의 따님인 고창오씨(高敞吳氏) 사이에서 영조 45년(1769년)에 태어났다.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인이다. 정조 19년(1795년) 식년(式年)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고 순조 3년(1803년) 증광(增廣) 문과에 급제한 후 승정원(承政院)에 두었던 정칠품 관직으로 사초(史草) 기록이나 실록 편찬에도 참여했던 주서(注書)를 거쳐 사직령(社稷令)을 지냈다. 오선기(吳善基)의 시문집인 한계문집(寒溪文集)에 발문(跋文)을 썼다. 지애(芝厓) 정위(鄭煒)에 대한 제문(祭文)이 전하며『저암기(低庵記)』를 지었다. 순조 17년(1817년) 졸(卒)하였다.
▲ 기재(跂齋) 이재항(李在恒 : 전의, 1776년∼1830년)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자는 자상(子常)이고 호는 기재(跂齋)이다. 벽재(碧齋) 규운(奎運)과 명화(明和)의 따님인 한산이씨(韓山李氏) 사이에서 영조 52년(1776년) 태어났다.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인이다. 문집(文集)이 있다. 순조 30년(1830년)에 졸(卒)하였다. 묘는 다산면 벌지 밀동 불당곡 자좌(子坐)에 있다. 배위는 일릉(一)의 따님인 오천정씨(烏川鄭氏)이다.
▲ 향오(香塢) 최상원(崔尙遠 : 양천, 1780년∼1863년)
본관은 양천(陽川)이고 자는 경운(景雲)이며 호는 향오(香塢)이다. 부친은 증(贈) 호조참판(戶曹參判) 광악(光岳)과 영(坽)의 따님인 전주전씨(全州全氏) 사이에서 정조 4년(1780년)에 태어났다. 일찍이 송천(松泉) 박문국(朴文國)에게 배웠고 장성한 후에는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에게 수업(受業)하였다. 향오정사(香塢精舍)를 짓고 공부하고 자제들을 가르쳤다. 뒤에 아들 호문(虎文)이 문과에 급제한 후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봉화현감(奉化縣監)을 지내는 등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공조참판(工曹參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總管)에 증직(贈職)되었다. 태어나면서부터 자태가 남달랐으며 옛 풍도를 사모하여 배우기를 좋아하였다. 여러 제현(諸賢)들과 무리지어 빈흥재(賓興齋)를 창설(創設)하여 봄가을로 학문을 연구하였으며 향음주례(鄕飮酒禮)를 14회 행하였다. 상을 당해서는 극진히 예를 다하였고 철종 14년(1863년) 6월 1일 수(壽) 84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합천군 봉산면 막설봉(莫說峰) 적동(笛洞) 계좌(癸坐)에 있다.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이 묘도비명(墓道碑銘)을 짓고 뇌헌(磊軒) 정종호(鄭宗鎬)가 2권 1책의 향오문집(香塢文集) 서(序)를 썼다. 배위는 상회(尙會)의 따님인 증(贈) 정부인(貞夫人) 성주도씨(星州都氏)이다. 
▲ 송애(松厓) 최호문(崔虎文 : 양천, 1800년∼1850년) 
본관은 양천(陽川)이고 초휘(初諱)는 우점(羽漸)이며 자는 성안(性安)이고 호는 송애(松厓)이다. 공조참판(工曹參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副總管)에 증직(贈職)된 상원(尙遠)과 상회(尙會)의 따님인 증(贈) 정부인(貞夫人) 성주도씨(星州都氏)사이에서 정조 24년(1800년)에 태어났다. 백부(伯父) 상준(尙峻)에게 출계(出系)하였다. 학양(鶴陽) 박경가(朴慶家)에게 수업(受業)하였으며 정종로(鄭宗魯)의 문인이다. 헌종 7년(1841년) 정시(庭試)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가 되었고, 다음해 저작(著作)·박사(博士) 등을 거쳐 1843년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예조좌랑(禮曹佐郞)·가례도감(嘉禮都監) 낭청(郎廳)을 지냈다. 그 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에는 과거(科擧)의 부조리(不條理)를 엄단할 것과 시험종목에 현실성이 없는 시(詩)·부(賦) 등을 없애고 경국지문(經國之文 : 나라를 경영하는 문장)을 위주로 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문교진흥(文敎振興)에 힘쓰자는 「흥학소(興學疏)」와 당시의 정책적인 시폐(時弊)를 개혁하자는 「시폐소(時弊疏)」를 올렸다. 봉화현감(奉化縣監)과 안동진관병마절제도위(安東鎭管兵馬節制都尉)로 재직시에는 선정을 베풀어 많은 치적을 남기기도 하였다. 심성론(心性論)에 있어서는 심(心)이 이미 생긴 뒤에 성(性)이 마음에 갖추어지게 되므로 심(心)이 성(性)보다 앞선다는 ‘심선성후설(心先性後說)’을 주장하였다. 저서로는『송애집(松厓集)』4권 2책이 있다. 철종 1년(1850년) 4월 3일 향년 51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합천군 북쪽 미숭산 상봉(上峰) 정부인(貞夫人) 성주도씨(星州都氏) 묘하(墓下) 자좌(子坐)에 있다. 농산(農山) 장승택(張升澤)이 묘지명(墓誌銘)을 짓고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가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철종 8년(1857년) 학동(鶴洞) 입구에 공의 유업(遺業)을 기리는 ‘조선 고 통훈대부행사헌부지평 송애 최공 유허비명 병서(朝鮮 故 通訓大夫行司憲府持平 松厓 崔公 遺墟碑銘 幷序)’로 시작되는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졌다. 배위는 수철(守鐵)의 따님인 현풍곽씨(玄風郭氏)이다.
◉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자는 성백(誠伯)이며 호는 정재(定齋)이다. 진사(進士) 회문(晦文)과 홍문관(弘文館) 부교리(副校理) 완(埦)의 따님인 한산이씨(韓山李氏) 사이에서 정조 1년(1777년) 안동시 일직면 소호리 외가에서 태어났다. 소퇴계(小退溪)라고 불리는 이상정(李象靖)의 외증손이다.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인 남한조(南漢朝)·유범휴(柳範休)·정종로(鄭宗魯)·이우(李瑀) 등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순조 5년(1805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순조 6년(1806년)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에 보직된 후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문학(文學) 등을 거쳐 순조 31년(1831년) 전라도(全羅道) 장시도사掌試都事)가 되었다. 1832년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에 발탁되었고, 헌종 1년(1835년) 우부승지(右副承旨)가 되었고 헌종 5년(1839년) 초산부사(楚山府使)로 있을 때에는 진정(賑政)에 힘쓰고 환곡(還穀)·전결(田結)의 폐단을 교정하는 등 여러 가지 치적을 쌓아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을 지었다. 1846년 9월 고산정사(高山精舍)에 수백 명의 유생을 불러 모아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였고, 이때 인(仁)·의(義)·예(禮)·지(智)에 대해 강론하였다. 그리고 1856년 11월 호계서원(虎溪書院)에서 수백 명의 유생들이 운집한 가운데 대규모 학술 모임을 개최했다. 이듬해 5월에는 공의 학덕을 기리는 만우정(晩愚亭)이 세워졌다. 이곳에서는 주로 이황(李滉)과 이상정(李象靖)의 학문에 대한 활발한 학술 토론이 이루어졌다. 그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은 학자들은 19세기 후반 영남에서 전개된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과 의병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김도화(金道和)와 권세연(權世淵)은 1895년 을미의병 때 의병대장으로 활동하였고, 김흥락(金興洛)과 유지호(柳止鎬)는 배후에서 의병 운동을 지원하고 있었다. 헌종 13년(1847년) 대사간(大司諫)이 되었고 한성좌윤(漢城左尹)·병조참판(兵曹參判) 등을 역임하였다. 철종 6년(1855년) 장헌세자(莊獻世子 : 사도세자)의 추존(追尊)을 청하는 만인소(萬人疏)에 참여하였으나 대사간(大司諫) 박내만(朴來萬)의 탄핵을 받고 상원(祥原)에 유배되었다. 이어서 지도(智島)에 안치되었다가 그 해에 석방되었다. 이를 계기로 영남 내 그의 학문적․정치적 위상은 더욱 확고해졌고, 자연스럽게 류치명(柳致明)을 따르는 문인집단이 형성되었고 철종 8년(1857년) 뇌암(雷巖)의 만우재(晩愚齋)에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성리설(性理說)에 있어서는 이상정(李象靖)의 학설을 계승하여 이(理)를 활물(活物)로 보고 리(理)의 자발적 동정(動靜)에 의해 기(氣)가 동정(動靜)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리(理)는 능동능정(能動能靜)하는 신용(神用 : 신묘한 기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리(理)의 자발적 동정(動靜)으로부터 음양오행(陰陽五行)의 기(氣)가 나오며, 리(理)가 우주의 무체적(無體的)인 실재(實在)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에 있어서는 기발이승(氣發理乘)을 주장한 이이(李珥)의 학설을 공격하였다.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은 이황(李滉) → 김성일(金誠一) → 장흥효(張興孝) → 이현일(李玄逸) → 이재(李栽) → 이상정(李象靖)으로 이어지는 학통을 계승하였으며,이진상(李震相)·류종교(柳宗喬)·이돈우(李敦禹)·권영하(權泳夏)·이석영(李錫永)·김흥락(金興洛) 등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다. 저서 및 편서로는 『정재문집(定齋文集)』·『예의총화(禮疑叢話)』·『가례집해(家禮輯解)』·『학기장구(學記章句)』·『상변통고(常變通攷)』·『주절휘요(朱節彙要)』·『대학동자문(大學童子問)』·『태극도해(太極圖解)』·『대산실기(大山實記)』·『지구문인왕복소장(知舊門人往復疏章)』 등이 있다. 고종 22년(1855년) 만년에 문인들이 안동시 임하면 사의동 뇌암(雷巖)에 건축한 만우재(晩愚齋)에서 학문들을 지도했다. 철종 11년(1860년)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가 되고, 철종 12년(1861년) 수(壽) 85세로 졸(卒)하였다. 묘소는 안동시 임동면 수곡동 구수산에 있다. 사후에 관(棺)의 줄을 잡은 선비가 9백 명이었다고 한다.
(註釋1)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
조선 후기 성리학(性理學)을 기반으로 서학(西學)의 전래와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한 위기의식에서 나타난 사상으로, 위정척사(衛正斥邪)는 정학(正學)인 성리학(性理學)을 지키고 이단(異端)과 사학(邪學)을 물리친다는 뜻이다. 1860년대에 이항로(李恒老), 기정진(奇正鎭) 등에 의해 체계화되었으며, 김평묵(金平)·유중교(柳重敎)·이진상(李震相)·최익현(崔益鉉)·유인석(柳麟錫) 등이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 묵암(默菴) 이정운(李楨運 : 광산, 1800년∼1855년)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는 익여(翼汝)이며 호는 묵암(默菴)이다. 처사(處士) 치인(致仁)과 필수(必壽)의 따님인 성주도씨(星州都氏) 사이에서 정조 24년(1800년) 태어났다.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 문하(門下)에서 수업하였으며 효우학행(孝友學行)이 유학자들에게 이름이 드러났으며 문집(文集)이 있다. 견책(譴責)을 받아 초산(楚山)에 있을 때 병구완을 3년간 하였으며 공이 몸소 약을 지어 주는 등 지극 정성으로 섬겼다. 철종 6년(1855년) 졸(卒)하였으며 묘는 성산면 기족동 청룡오령(靑龍烏嶺) 간좌(艮坐)에 있다. 배위는 기도(器道)의 따님인 청도김씨(淸道金氏)이다. 
▲ 소암(小菴) 이종희(李宗熙 : 광산, 1812년∼1872년)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는 맹실(孟實)이며 호는 소암(小菴)이다. 처사(處士) 엽운(燁運)과 창환(昌煥)의 따님인 서산정씨(瑞山鄭氏) 사이에서 순조 12년(1812년)에 태어났다.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 문하(門下)에서 수업하였으며 동문제현(同門諸賢)들이 모두 추켜세워 자랑하였다. 실천이 독실했으며 명성이 유림 사이에서 자자하였으며 유고(遺稿)가 있다. 만구(晩求) 이종기(李鍾杞)의 빙장(聘丈)이다. 고종 9년(1872년) 졸(卒)하였으며 묘는 선고(先考)묘 왼쪽 경좌(庚坐)에 있다. 배위는 능형(能亨)의 따님인 야성송씨(冶城宋氏)이다.
▲ 우재(愚齋) 박종원(朴鍾源 : 고령, 1821년∼1848년)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초휘(初諱)는 우원(雨源)이고 자는 숙응(肅凝)이고 호는 우재(愚齋)이다. 학양(鶴陽) 경가(慶家)와 계보(啓譜)의 딸인 벽진이씨(碧珍李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순조 21년(1821년) 태어났다.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에게 사사(師事)받았다. 헌종 14년(1848년)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였다. 헌종 14년(1848년) 향년 28세로 요절(夭折)하였다. 묘는 합천현 북 두무산 동록(東麓) 장등(長嶝) 계좌(癸坐)에 있다. 배위는 인규(仁奎)의 딸인 의성김씨(義城金氏)이다.
▲ 평와(坪窩) 이심학(李心學 : 광산, 1828년∼1890년)
본관은 광산(光山)이며 자는 기응(氣應)이며 호는 평와(坪窩)이다. 처사(處士) 주영(柱榮)과 홍원(弘圓)의 따님인 순천박씨(順天朴氏) 사이에서 순종 28년(1828년) 태어났다. 어려서 특이한 자질이 있어 여러 아이들과 장난치며 놀 때에도 바르고 큰 기상이 있었다. 자라서는 뜻을 돈독히하고 열성(熱誠)으로 학문을 닦아 실행하고 집안의 교훈을 전수(傳受)받았다. 만구(晩求) 이종기(李鍾杞)와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으며 섭재(攝齋)하였다.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 문하(門下)에서 수업하였으며 선생이 보자마자 칭찬하고 인정하였다. 유고(遺稿)가 있다. 고종 27년(1890년) 졸(卒)하였으며 묘는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산22번지에 있다. 초취(初娶)는 의로(儀魯)의 따님인 창녕성씨(昌寧成氏)이며 재취(再娶)는 형규(馨奎)의 따님인 서흥김씨(瑞興金氏)이다.
(註釋) 섭재(攝齋)
공경스레 예를 표하기 위하여 당(堂)에 오를 적에 옷자락을 가지런히 잡아 살짝 들어 올리는 것을 말한다.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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