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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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종산재, 쌍림면 월막리 국밭 소재.JPG

 종산재, 쌍림면 월막리 국밭 소재

 

 

◉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본관은 한산(韓山)이고 자는 경문(景文)이며 호는 대산(大山)이다. 이태화(李泰和)와 밀암(密庵) 이재(李栽)의 따님인 재령이씨(載寧李氏)사이에서 숙종 36년(1711년) 안동시 일직면 망호리에서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슬기로워 문장과 학문을 일찍 성취하였다. 14세에 외조부 밀암(密庵) 이재(李栽)에게 수학하였다. 영조 11년(1735년) 진사시(進士試)와 증광시(增廣試)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외관직으로는 연일현감(延日縣監)·강령현감(康翎縣監) 등을 지냈다. 1739년 연원찰방(連原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이듬 해 9월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대석산(大夕山)아래에 대산서당(大山書堂)을 짓고 제자 교육과 학문 연구에 힘썼다. 대산(大山) 문하의 가장 탁월한 고족제자(高足弟子)로 ‘호문삼로(湖門三老)’라 불렸던 후산(后山) 이종수(李宗洙),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 동암(東巖) 유장원(柳長源) 등을 비롯하여 수백명의 이름난 선비들이 여기서 배출되었다. 영조 29년(1753년) 연일현감(延日縣監) 재임시 민폐를 제거하고 교육을 진흥하는 데 진력하였다. 그후 병조정랑(兵曹正郞)·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병조참지(兵曹參知)·예조참의(禮曹參議)를 역임하였다. 이황(李滉) 이후 기호학파(畿湖學派)에 비해 상대적으로 침체된 영남학파(嶺南學派)에서 이황(李滉)의 계승을 주창하고 일어나 이황(李滉)-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로 이어지는 중추적인 인물로서 ‘소퇴계(小退溪)’라고 추앙받았으며 남한조(南漢朝), 김종덕(金宗德), 류장원(柳長源) 등에게 전수하였다. 이재(李栽)의 문하에서는 김익한(金瀷漢), 권정택(權正宅), 김낙행(金樂行) 등과 교유하였다. 공은 이기설(理氣說)에 있어서 주리설(主理說)을 확립하였다. 대산(大山)은 리(理)는 무위(無爲 : 아무 일도 하지 않음)하여 힘이 없는 정지체(靜止體)가 아니요, 리(理) 자체로 발위(發爲)하고 운용할 수 있는 ‘활물(活物)’이라고 하여 이(理)의 운동성(運動性)을 인정하였다. 즉, 리(理)는 활물(活物)인데 비록 기(氣)를 타고 동정(動靜)하나 그 발휘운용(發揮運用)하는 오묘(奧妙)함은 바로 그 지극히 신묘한 작용(至神之用)일 뿐이다. 그러므로 ‘무위이위(無爲而爲)’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無爲)가 아니고 ‘부재이재(不宰而宰)’는 아무것고 없는 무주재(無主宰)가 아니다. 이에 반해 기(氣)는 이(理)가 동정(動靜)할 수 있도록 하는 바탕(資)이 된다고 보았다. 대산(大山) 이기설(理氣說)은 이(理)의 능동성(能動性)을 부정한 율곡(栗谷)의 주기설(主氣說)에 대한 비판의 성격을 갖는다.  대산(大山)의 학문적 흐름은 동생 이광정(李光靖)과 남한조(南漢朝)를 통해 유치명(柳致明)으로 이어지고, 이진상(李震相)에 이르러 유리론(唯理論)으로 전개되었으며,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곽종석(郭鍾錫)으로 계승되었다. 정조 5년(1781년) 향년 71세로 졸(卒)하였다. 묘소는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학가산(鶴駕山)의 사향(巳向) 언덕에 있다. 문집으로 『대산집(大山集)』이 있다. 저술로 『이기휘편(理氣彙編)』, 『사칠설(四七說)』, 『제양록(制養錄)』, 『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 『주자어절요(朱子語節要)』 등이 있다. 순조 16년(1816년) 이조참판(吏曹參判)에, 고종 19년(1882년)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追贈)되었다. 1910년 문경(文敬)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註釋) 유리론(唯理論)
일명 ‘이일분수설'(理一分殊說)’이다. 기정진(奇正眞)의 철학사상의 근거가 되는 이론으로 ‘이일분수'(理一分殊)’의 의미는 보편적인 근원적 일리(一理)가 참치부제(參差不齊 : 길고 짧고 들쭉날쭉하여 가지런하지 아니함)한 기(氣)의 제약을 받아 개별적인 분수지리(分殊之理)로 나타난다는 의미이다
▲ 정관재(靜觀齋) 곽기(郭基 : 현풍, 1735년∼1775년)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초휘(初諱)는 후완(厚完)이며 자는 덕부(德夫)이고 호는 정관재(靜觀齋)이다. 기오헌(寄傲軒) 태주(泰柱)의 장남으로 영조 11년(1735년) 태어났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과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양문(兩門)에서 수학하였다. 일찍이 명회재(明悔齋) 김경중(金敬中)과 매우 친밀하게 교제하여 날로 서로 왕래하며 경적(經籍)의 깊은 이치를 토론하고 심성(心性)의 정미한 부분을 분석하여 부지런히 힘쓰고 게을리 하지 않아 두루 벗과 함께 강습하는 이익이 많았다. 이른 아침 짧은 시간에 오갈 수 있는 지역에 살았지만 저녁이 끝나도록 돌아갈 줄을 잊었으니, 그 금회(襟懷 : 마음속에 깊이 품고 있는 회포)가 꼭 부합하는 것이 과연 어떠하였겠는가. 대산속이주해(大山屬以註解)와 도산시집(陶山詩集)에 주해(註解)가 없는 것을 흠결(欠缺)로 여겨 일찍이 뜻을 두고 궁구(窮究)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였다. 영조 51년(1775년) 향년 41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상가곡(上伽谷) 5대조비 조씨 묘하 건좌(乾坐)에 있다. 배위는 태중(泰重)의 따님으로 장수황씨(長水黃氏)이다. 두와(蠹窩) 최흥벽(崔興璧)과 교유(交遊)하였으며 사후에 정관처사곽공행장(靜觀處士郭公行狀)을 그가 지었다. 공은 죽재공(竹齋公) 곽간(郭趕), 태허정(太墟亭) 곽홍지(郭弘址)와 함께 처음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 월암동에 있었던 월암사(月巖祠)에 제향(祭享)되었으나 1869년 월암사(月巖祠)가 훼철(毁撤)되자 1932년에 다시 세워 종산재(鍾山齋)로 개칭하여 이곳에서 제향(祭享)하고 있다.
▲ 봉강(鳳岡) 이진의(李震義 : 성주, 1737년∼졸년미상)
 본관은 성주(星州)이고 자는 동언(東彦)이고 호는 봉강(鳳岡)이다. 유생(儒生) 평한(平漢)과 의성김씨(義城金氏) 사이에서 영조 13년(1737년) 1월 2일 태어났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선생에게 수학(受學)하였다. 학문이 뛰어나고 넓었으며 학문을 연구하는 것이 곧고 발랐으며 고상(高尙)한 마음과 뜻을 임천(林泉)에 두었다. 유고(遺稿)가 있다. 졸년(卒年)은 미상(未詳)이다. 묘는 고령군 성산면 사부동 안산(案山) 갑좌(甲坐)에 있다. 묘갈명(墓碣銘)을 다곡(茶谷) 이기로(李基魯)과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이 지었다. 배위는 서우(瑞佑)의 딸인 성산이씨(星山李氏)이다.
▲ 두와(蠹窩) 최흥벽(崔興璧 : 경주, 1739년∼1812년)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자는 사교(士敎)이고 호는 두와(蠹窩)이다. 사석(師錫)과 재삼(在三)의 셋째 따님인 현풍곽씨(玄風郭氏) 사이에서 영조 15년(1739년) 8월 19일 달성군 해안(解顔 : 동촌)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헌걸차고 두 눈이 밝게 빛나니 보는 사람들이 평범한 아이가 아니라고 칭찬하였다. 11세에 칠계(漆溪 : 웇골)의 족형(族兄)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을 찾아가 수학하였으며 문리(文理)가 뛰어나 1년 이내에 통감(通鑑), 소학(小學),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등을 다 읽었다. 20세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에게 수학하였으며 후산(后山) 이종수(李宗洙),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 등 대학자와 교유하였다. 1762년 사도세자(思悼世子) 폐위(廢位) 및 참살사건(慘殺事件)이 발생하자 여러 날 통읍(慟泣)하며 학업을 폐하였다. 1770년 경상감영에서 반계(磻溪) 유형원(柳馨遠)의 저서 반계수록(磻溪隨錄)을 간행할 때 도내의 명유(名儒)들과 교정(校正)에 참여하였다. 정조 2년(1778년) 겨울 고령 미숭산(美崇山) 아래 공의 처족(妻族)이 있는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 국전(菊田)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정조 7년(1783년) 봄 아림동당시(娥林東堂試), 회시(會試)에서 실패하고 1정조 8년(1784년) 가을 대과(大科) 정시(庭試)에 응했으나 실패하자 모친의 만류로 과거 보기를 포기하였다. 주자(朱子)의 사창법(社倉法)을 의방(依倣 : 모방)하여 향약(鄕約)을 개설하여 실시했다. 공은 대학(大學), 중용(中庸), 심경(心經), 근사록(近思錄), 주서절요(朱書節要), 성리대전(性理大典) 등을 읽으면서 도학(道學)에 열중했다. 만년(晩年)에 고령에 우거(寓居)하면서 십수년간 문학을 창도(唱導)하였는데 문하에서 대소과 급제자가 7, 8명이나 되었다.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천옹(喘翁) 최흥립(崔興岦) 등과 교유하였다. 『심학연원초통절편(心學淵源抄通節編)』, 『삼충록(三忠錄)』, 『세한만록(歲寒謾錄)』, 『산중문답(山中問答)』, 『심학이편(心學邇編)』과 『두와문집(蠹窩文集)』 17권 8책을 저술하였으나 현재 문집만 전한다. 순조 12년(1812년) 1월 19일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쌍림면 용2리 반룡사 동쪽에 있다. 배위는 계후(季垕)의 따님인 고창오씨(高敞吳氏)이다.
▲ 벽재(躄齋) 이규운(李奎運 : 전의, 1739년∼1806년)
                                               
 본관은 전의(全義)이며 초명(初名)은 형(逈)이고 자는 향지(向之)이며 호는 벽재(躄齋)이다. 통덕랑(通德郞) 필신(弼臣)과 익진(益晋)의 따님인 평산신씨(平山申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영조 15년(1739년) 태어났다. 당숙(堂叔) 계신(桂臣)에게 출계(出系)하였다. 천품(天稟)이 침착하고 사람의 됨됨이가 가볍지 않았으며 학문(學文)이 넓고 심오하였다. 일찍부터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과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의 문하(門下)에서 배워 공경하며 따라야 할 줄 알았다. 그러나 공은 소시(少時)에는 질병이 많았고 장성하여서는 또 어버이를 위하여 과거공부에 뜻을 두게 되어 미처 따라 배우기를 청하지도 못했는데, 두 선생이 돌아가셨다. 공이 제문을 지었는데, 존경하며 우러르는 정성과 스스로 애도하는 뜻이 매우 절절(切切)하였다. 이윽고 속학(俗學 : 속되고 정도가 낮은 학문)에 치중해서는 안 되는 줄 알고는, 이에《심경(心經)》,《근사록(近思錄)》,《주자전서(朱子全書)》,《주자어류(朱子語類)》등의 책을 취하여 문을 닫고 읽으면서 의심나면 생각하고, 터득하면 기록하였다. 때때로 회병(晦屛) 신체인(申體仁), 지애(芝厓) 정위(鄭煒) 같은 벗들과 이기(理氣)와 지행(知行)의 설을 강론하며 분변(分辨)한 것이 매우 곡진(曲盡 : 간곡하게 정성을 다함)하고 통창(通敞 : 시원스럽게 환함)하였다. 당대의 명유(名儒) 지암(遲菴) 이동항(李東沆), 만각재(晩覺齋) 이동급(李東汲), 가곡(家谷) 장경목(張敬穆) 등과 교유하면서 가야산 포천에서 ‘구로회(九老會)’를 만들어 풍류(風流)를 즐겼고 박성수(朴聖洙) 등 제현(諸賢)과 이강(伊江)과 낙강(洛江)의 물이 합쳐지는 파산(巴山)의 절경에 이락서당(伊洛書堂)을 지어 왕래하면서 시문을 짓고 성리학을 강론하였다. 일찍이 가문의 쇠퇴함을 근심하여 문내에 기박(棋博 : 장기와 바둑)과 같은 오락들을 모두 물리치고 시문(詩文)과 성리(性理)의 이치(理致)로 자질(子姪)들을 가르쳐 문과 2명, 사마 3명을 포함하여 10여인을 성취(成就)시켰고 나중에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같은 큰 선비를 배출시킨 기틀을 마련하였으니 이로써 ‘다산이학(茶山理學)을 창시한 분’으로 일컬어진다. 행동(行動)이 지식(知識)을 따르지 못한다 하여 앉은뱅이와 같다고 여겨 ‘의벽설(醫躄說)’을 짓고 그 서재(書齋)의 당호(堂號)를 ‘벽재(躄齋)’라 하고 자호(自號)하였다. 정위(鄭煒)와 더불어 인성(人性)의 물성(物性)과 같고 다름을 논하기를 수천 마디 말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순조 6년(1806년) 향년 68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고령군 다산면 상곡촌 앞 건좌(乾坐)에 있다. 고종 20년(1883년) 현손 기로(基魯)와 5대손 명세(明世)가 그의 4권 2책의 시문집(詩文集)인 『벽재문집(躄齋文集)』을 편집, 간행하였다. 배위는 명화(命和)의 따님인 한산이씨(韓山李氏)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친족이다. 삼남(三男)을 두었으나 장남 재형(在衡)은 진사(進士)이고 차남 재숭(在嵩)은 순조 1년(1801년) 생원(生員) 장원(壯元)에 이어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급제한 후 양전량(兩銓郞 : 이조와 병조의 정랑과 좌랑)과 양사(兩司 :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을 지냈다. 삼남 재항(在恒)은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의 문인이다.
(註釋) 구로회(九老會)
시문(詩文)에 뛰어난 옛 친구들이라는 뜻으로, 백거이(白居易)가 만년에 형부 상서(刑部尙書)로 치사(致仕)하고 나서는 향산거사(香山居士)라 자칭하고, 여덟 원로들과 함께 구로회(九老會)를 결성하여 매양 서로 왕래하면서 풍류를 즐겼던 데서 유래한 말이다.
◉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본관은 진주(晋州)이고 자는 사앙(士仰)이며 호는 입재(立齋)·무적옹(無適翁)이다. 인모(仁模)와 진사(進士) 익귀(益龜)의 따님인 부림홍씨(缶林洪氏) 사이에서 영조 4년(1798년) 함창(咸昌) 율리(栗里)(현재 문경시 영순면) 외가에서 태어났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6대손이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학문은 손자 무첨재(無添齋) 정도응(鄭道應)에게 전수되고 정석교(鄭錫僑)에게 이어지며 다시 정주원(鄭胄源)으로 이어져 아들 정의모(鄭義模), 정예모(鄭禮模) 등이 발분(發奮)하여 학문을 조카인 입재(立齋)에게 가학(家學)을 전수하여 300년에 걸치는 가학연원(家學淵源)이 펼쳐졌다. 40세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인이 되었다. 문학과 행의(行誼)로 정조 13년(1789년) 광릉참봉(光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정조가 재상(宰相) 채제공(蔡濟恭)에게 정종로(鄭宗魯)의 인품을 물었을 때 채제공(蔡濟恭)은 정종로(鄭宗魯)를 “경학과 문장이 융성하여 영남 제일의 인물이다.”라고 칭송하였다. 이에 의금부(義禁府) 도사(都事)로 특진되었고, 1796년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 1797년 강령현감(康翎縣監)·함창현감(咸昌縣監)에 제수되었다. 벼슬을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간 뒤에도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과 장령(掌令) 등의 직함이 내려오기도 하였다. 그의 사상은 주리론자(主理論者)와 주기론자(主氣論者)를 절충(折衷)하였다. 리기론(理氣論)에서는 리(理)를 주(主)로 하고 심론(心論)에서는 기(氣)를 주(主)로 한 까닭이다. 즉 리기론(理氣論)에서 먼저 ‘리선기후(理先氣後)’를 주장하여 대개 일원으로부터 말하면 천하의 리(理)는 먼저 리(理)가 있고 기(氣)가 뒤에 있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다. 「이강기약설(理强氣弱說)」에서 형체(形體)가 없고 작위(作爲)가 없는 리(理)는 약(弱)하며, 형체(形體)가 있고 작위(作爲)가 있는 기(氣)는 강(强)하다고 보는 주기론적(主氣論的) 입장을 거부하였고, 기(氣)가 리(理)를 이기는 일은 잠시뿐이고 리(理)가 기(氣)를 이기는 것은 영원한 것이라 하여, 기(氣)의 주재(主宰)인 리(理)의 강(强)함을 지적하고 주리론적(主理論的)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이기심성설(理氣心性說)」에서도 사람의 마음은 리(理)와 기(氣)가 결합해 이루어진 것이라 하고, 리(理)가 마음을 주재한다고 밝혀 주리론적(主理論的) 입장을 관철하였다. 순조 16년(1816년) 향년 79세로 졸(卒)하였다. 묘소는 상주시 외서면 관현리에 있다. 그의 문하에서 이원조(李源祚)·강엄(康儼) 등의 많은 제자가 배출되었다. 저서로는 문집인『입재집(立齋集)』50권과『소대명신언행록(昭大名臣言行錄)』 등이 있다. 상주시 외서면 우산리에 있는 우산서원(愚山書院)에 제향되었다. 그는 성리학자(性理學者)이며 예학(禮學)의 대가(大家)이었다.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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