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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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동래정씨 반암서당, 덕곡면 반성1리 원앞길9-3.JPG

동래정씨 반암서당(덕곡면 반성1리 원앞길9-3)

 

 

◉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본관은 재령(載寧)이고 자는 익승(翼昇)이며 호는 갈암(葛庵)이다. 참봉(參奉) 시명(時明)과 지평(持平)으로 추증(追贈)된 유학자 흥효(興孝)의 따님인  안동장씨(安東張氏) 의현당(宜賢堂) 장계향(張桂香)사이에서 인조 5년(1627년) 영덕군 창수면 인량동에서 태어났다. 이휘일(李徽逸)의 아우이다. 공의 학통(學統)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을 이어받았으나 학문은 외조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에게서 근본한 것이다. 이현일(李玄逸)의 학통은 아들 밀암(密庵) 이재(李裁)에게 전해지고 이재(李裁)의 학통은 외손인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에게 전해지고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학통은 손재(損齋) 남한조(南漢朝)로 이어져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에게 전해지고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학통은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에게로 이어져 갔다. 20대 초반에 초시(初試)에 2번 합격했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복시(覆試)를 단념하였다. 현종 7년(1666년)에는 영남 유생을 대표해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예설(朞年禮說 : 1년설)을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여기에서 그는 효종(孝宗)이 왕위를 계승하였으니 장남의 예로서 상복을 입어야 하는 것이 당연함을 지적하고, 서인(西人)들이 왕가(王家)와 사대부가(士大夫家)를 똑같이 보려 하는 것은 아니냐며 비판하였다. 이어 북인의 학통을 계승한 근기남인(近畿南人 : 서울, 경기지방의 남인)의 학설도 일부 비판, 송시열(宋時烈)·허목(許穆)·윤선도(尹善道) 등의 예설(禮說)도 부분 비판하는 〈복제소(服制疏)〉를 작성하면서 정치적 의견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현종 15년(1674년) 학행(學行)으로 영릉참봉(寧陵參奉)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이듬해 장악원주부(掌樂院主簿)·공조좌랑(工曹佐郞)·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1677년 공조좌랑(工曹佐郞)으로 관직에 나아가 숙종 6년(1680년) 남인(南人)이 대거 실각하여 정권에서 물러난 사건인 경신환국(庚申換局) 때까지 공조정랑(工曹正郞)·지평(持平) 등을 역임했으나, 근기남인(近畿南人)이 주도하는 정국운영에 대체로 소극적인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후 칩거하면서 숙종 14년(1688년)에 이이(李珥)의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을 비판한 《율곡사단칠정서변(栗谷四端七情書辨)》을 지어 이황(李滉)이 사단(四端)은 이(理)의 발현이고 칠정(七情)은 기(氣) 의 발현이라는 ‘리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옹호하고 이(理)는 최고의 존재 원리이나 형체(形體)도 없고 스스로 운동·변화하지 못하며, 형체도 있고 스스로 작용할 수 있는 기(氣)만 발한다는 이이(李珥)의 ‘기발이승설(氣發理乘說)’을 공격하였다. 숙종 15년(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남인이 다시 집권하면서 유현(儒賢)으로 천거되어 성균관(成均館) 사업(司業)을 비롯하여 이조참의(吏曹參議)·성균관(成均館) 좨주(祭主)·이조참판(吏曹參判)·대사헌(大司憲)·이조판서(吏曹判書)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1694년 4월 갑술환국(甲戌換局) 때 함경도로 유배되었다. 이듬해 조식(曺植)을 비롯한 선유(先儒)들의 학설을 비판한 『수주관규록(愁州管窺錄)』을 지었다. 1699년 방귀전리(放歸田里 : 벼슬을 삭탈하고 그의 시골로 내쫓는 가벼운 형벌)되었다. 숙종 29년(1703년) 여러 책에 산견(散見 : 여기저기에 보임)되는 이황(李滉)의 언행(言行)을 한 데 모은 편목(篇木 : 서책을 만든 목판)인 『퇴도선생언행통록편목(退陶先生言行通錄篇木)』을 만들었다. 숙종 30년(1704년) 졸(卒)하니 향년 78세이었다.  고종 8년(1871년) 문경(文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공은 퇴계학파(退溪學派)의 정통으로 인정받았음에도 그가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을 정면 비판하였기에, 당시의 집권당인 서인과 노론은 그를 경멸하였다. 사후(死後)에도 노론 치하에 박해를 받아 관직(官職)과 증직(贈職), 사후에 내린 시호(諡號)을 여러번 거두어 들이기 까지 했으며 문집(文集)을 간행했을 때 관할 수령을 파면시키고 수거하여 불살랐다. 관직과 시호가 모두 회복되었던 1909년(융희 3년) 이후에야 그의 학문이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저서로는 시문집 『갈암집(葛庵集)』과 중형 휘일(徽逸)과 함께 편찬한 『홍범연의(洪範衍義)』가 있다.

 

(註釋1) 기사환국(己巳換局)
숙종 15년(1689년) 남인(南人)이 희빈장씨(禧嬪張氏)의 소생(所生)인 원자(元子) 정호(定號) 세자 책봉 문제로 서인(西人)을 몰아내고 재집권한 사건을 말한다.

 

(註釋2) 갑술환국(甲戌換局)
숙종 20년(1694년) 서인들이 전개하던 폐비(廢妃) 민씨(閔氏) 즉 인현왕후(仁顯王后) 복위(伏爲) 운동을 반대하던 남인이 화를 입어 권력에서 물러나고 서인이 집권한 사건을 말한다.

 

(註釋3)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
만물의 본질적 존재인 이(理)와 만물의 현상적 존재인 기(氣)가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었다고 주장하는 이론을 말한다.

 

▲ 지분당(知分堂) 곽식(郭遈 : 현풍, 1655년∼1713년)

 

 본관은 현풍(玄風)이고 자는 건숙(健叔)이며 호는 졸옹(拙翁) 또는 지분당(知分堂)이다. 현종(顯宗) 1년(1660년)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한 송담(松潭) 수진(壽)과 독오당(獨梧堂) 협(峽)의 따님 창원황씨(昌原黃氏) 사이에서 효종 6년(1655년) 1월 23일 고령군 쌍림면 송림리에서 태어났다. 송담(松潭) 수진(壽)은 고령 매림서원(梅林書院)에 배향된 매헌(梅軒) 곽수강(郭壽岡)의 동생이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선생과 외조부(外祖父) 독오당(獨梧堂) 황협(黃峽) 선생으로부터 수학(修學)하여 학문과 도덕이 높았다. 학문을 서로 높게 보고 숭상하면서 교유(交遊)하였던 사람은 당대의 명유(名儒)이었던 경암(敬庵) 문동도(文東道), 일암(一庵) 신몽삼(辛夢參), 퇴계학의 적통을 계승한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셋째 아들인 밀암(密菴) 이재(李栽), 곡천(谷川) 김상정(金尙鼎) 등 제현(諸賢)이었으므로 공이 심오한 학문과 웅대한 문장을 갖춘 대유(大儒)임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1930년 의령의 유지들이 발간한 ‘의춘지(宜春誌)’에 향인(鄕人)이 “충효출천(忠孝出天), 학문저세(學問著世) 즉 충효를 천성으로 타고 났으며 학문이 세상에 드러났다”라고 평했다는 기록이 있다. 공의 병이 극심하였는데 숙종(肅宗)의 환후(患候)도 극심한 것을 알고 벽에 큰 글씨로 쓰기를, “夢魂猶戀闕(몽귀유연궐) 夜夜繞西天(야야요서천) 즉 넋은 꿈속에서도 대궐을 사모하여 밤마다 서쪽 하늘을 맴도네.” 라고 하고 숙종 39년(1713년) 12월 21일에 향년 59세로 졸(卒)하였다. 묘는 의령군 동면 정곡리 동마산상(東馬山上) 유혈(乳血) 임좌(壬坐)이다. 묘지명(墓誌銘)은 가선대부(嘉善大夫) 예조참판(禮曹參判) 오광운(吳光運)이 지었다. 문집(文集)은 있으나 아직 간행(刊行)하지 않았다. 공은 후사(後嗣)가 없어 생원(生員) 유(逌)의 아들 만한(萬翰)을 후사(後嗣)로 삼았다. 성호(星湖) 이익(李翼) 선생이 공자왈(孔子曰) “不知其父(부지기부)면 見其子(견기자)하라” 즉 공자가 말하기를, “아비를 모르면 그 자식을 보라.” 하였는데, 만한(萬翰) 씨로 인해서 거의 이 말을 믿을 수 있게 되어 마침내 행록을 간추려서 행장을 짓는다고 하였으며 공의 행장(行狀)은 성호선생전집권지육십육(星湖先生全集卷之六十六)에 ‘졸옹곽씨행장(拙翁郭公行狀)’이란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 월계(月溪) 곽유(郭逌: 현풍, 1655년∼1704년)

 

 본관은 현풍(玄風)이며 자는 숙도(叔道), 호는 월계(月溪)이다. 아버지는 성균생원(成均生員)을 지내고 매림서원(梅林書院)에 배향된 매헌(梅軒) 수강(壽岡)과 충의위(忠義衛)를 지낸 육(毓)의 따님인 동래정씨(東萊鄭氏) 사이에서 효종 6년(1655년)에 차남으로 태어났다. 공은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문하에서 학문을 하였으며, 숙종 16년(1690년)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다. 평소 부모를 모시는 데 정성을 다하였고, 부모가 병이 들어 위급하자 손가락을 베어 그 피를 먹여 소생(甦生)하게 하였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서는 예법(禮法)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엄격하게 지켜 향리의 유림(儒林)에서 추중(推重)하였다. 숙종 28년(1702년) 고령향교(高靈鄕校)를 이건(移建)하여 건립하는 데 많은 공헌(貢獻)을 하였으며, 향교의 뜰에 손수 행자목(杏子木 : 은행나무)을 심었다. 숙종 30년(1704년) 8월 12일 졸(卒)하였다.

 

▲ 한와와(閑臥窩) 박세정(朴世貞 : 고령, 1667년∼1732년)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사길(士吉) 호는 한와와(閒臥窩)이다. 연풍현감(延豊縣監)을 지낸 망지(望之)의 셋째 아들로 현종 8년(1667년)에 태어났으나 응항(應恒)의 승사손(承嗣孫)으로 출계(出系)하였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선생에게 예기(禮記)를 수강(受講)하였다. 향시(鄕試)에는 여러 번 입격(入格)하였으나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위기학(爲己學 : 자기를 위하는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만년(晩年)에는 향리(鄕里)에 한와와(閒臥窩)라는 서실(書室)을 짓고 강학(講學)에 힘썼으며 예학(禮學)에 정통하여 사림(士林)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영조 8년(1732년) 7월 6일 향년 66세로 졸(卒)하였다. 시문집(詩文集) 3권 1책의 『한와와문집(閒臥窩文集)』이 전한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행장(行狀)을 지었다.

 

(註釋) 승사손(承嗣孫)
아버지의 대(代)가 끊겼다면 손자의 항렬을 가진 사람이 조부모의 제사를 지낼 경우를 일러 “승사(承祀)”라고 하며, 그 제사를 받들고 대(代)까지 이어가는 손자를 일러 “승사손(承祀孫)”이라고 한다.

 

▲ 관란(觀瀾) 이기석(李基錫 : 성산, 1670년∼1752년)

 

 본관은 성산(星山)이며 자는 여삼(汝三)이고 호는 관란(觀瀾)이다. 현종 1년(1660년) 진사(進士)에 입격(入格)한 옥천(玉川) 익화(翊華)와 현령을 지낸 중립(仲岦)의 따님인 분성허씨(盆城許氏) 사이에서 현종 11년(1670년) 태어났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 부호군(副護軍)을 지내고 은거(隱居)하면서 학문을 닦고 행의(行義)가 순실(淳實)하였다. 영조 28년(1752년) 졸(卒)하였다.

 

▲ 행은(杏隱) 정석유(鄭錫儒 : 동래, 1689년∼1756년)

 

 본관은 동래(東萊)이며 자는 중진(仲珍)이며 호는 행은(行隱)이다. 진사(進士)를 지낸 홍일(弘鎰)과 통제사(統制使)를 지낸 유(瀏)의 따님인 평산신씨(平山申氏) 사이에서 숙종 15년(1689년)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명민유재국(明敏有才局)’ 즉 명민(明敏 : 총명하고 민첩하다)하고 재국(才局 : 재주와 도량)이 있다고 일컬어졌다.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문인이다. 공의 꿈에 나타난 성주목사(星州牧使) 제말(諸沫)의 한(恨)을 소개하고자한다. “공이 급제(及第)에 오르기 전에, 본 고을의 자제들과 함께 공령(功令 : 문과의 과거를 보는 데 쓰는 여섯 가지의 문체)을 짓느라고 동헌(東軒)에 유숙(留宿 : 남의 집에서 묵음)하 지이헌(支軒)에서 잠이 들었는데 꿈에 관복 입은 거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나는 성주목사(星州牧使)로 있던 제말(諸沫)이오. 본래 고성(固城)사람인데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의 수령(守令), 방백(方伯 : 관찰사)들이 치열한 싸움으로 전사하거나 혹은 직책을 버리고 도망하여 왜군들이 무인지경으로 쳐 올라 올 때 나는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일으켜 의병대장으로서 곽재우(郭再祐)장군과 더불어 웅천(熊川), 의령(宜寧), 김해(金海), 현풍(玄風), 문경(聞慶) 등지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성주에 이르러 치안을 확보하고 있던 중 성주목사(星州牧使)가 되어 죽은 사람이오. 그 후 어찌된 영문인지 내 이름이 없어지고 또한 사기(史記)에도 빠지게 되었으니 이 어찌 탄식할 노릇이 아니겠소. 후일 통제사(統制使)가 된 정기룡(鄭起龍)도 나의 막하(幕下)에 있었던 사람이오”하며 시 한수를 읊었다.

山長雲共去(산장운공거) 저 산은 구름따라 한없이 뻗어가고
天逈月同孤(천형월동고) 아늑한 하늘가 달도 외로운데
寂寞星山館(적막성산관) 적막한 성산관에
幽魂有也無(유혼유야무) 의지할 곳 없는 이내 혼백

그리고는 “내 무덤이 칠원(漆原) 땅에 있는데 자손이 없어 돌보아주는 사람이 없고 잡초 속에서 허물어져가고 있소”하고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튿날 공이 간 밤의 일을 성주목사(星州牧使) 홍응용(洪應龍)에게 말하고 이 사실을 영조 18년(1742년)에 경상감사(慶尙監司) 정익하(鄭益河)에게 보고하였으며 칠원군수(漆原郡守) 어사적(魚史迪)에게 공문을 내어 제말(諸沫)의 봉분(封墳)을 수리해주고 제사를 드리게 하였고 정조 17년(1973년)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증직(贈職)되고 충의(忠毅)의 시호가 내렸으며 옥천(玉川)에 있는 충열사(忠烈祠)에 입향(入享)하게 했다. 이는 오로지 정석유(鄭錫儒)의 공(功)이라 하겠다. 영조 13년(1737년) 별시(別試) 문과(文科)에서 급제한 후 봉상시주부(奉常寺主簿)를 거쳐 양재찰방(良才察訪)과 경기가도사(京畿假都事)를 지내고 영조 23년(1747년)에 일본 통신사(通信使)의 제술관(製述官)에 선발되었다. 학행(學行)과 문장(文章)이 세상에 드러났다. 영조 32년(1756년) 9월 1일 향년 68세로 졸(卒)하였다. 저서에 『낙하집(洛下集)』, 『행은유고(杏隱遺稿)』, 『행은공일기록(杏隱公日記錄)』 등이 있다.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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