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 해당된 기사를 공유합니다

기획/특집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본지는 조선시대 이후 고령출신 유학자(儒學者)를 각종 문헌의 근거에 따라 사승(師承) 관계를 고찰해 학맥(學脈)을 분류하고 학문 및 업적 등을 기술(記述)해 고령출신 유학자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하오니 애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모덕와 운수면 유리 139번지.jpg

모덕와(운수면 유리 139번지)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

 

본관은 광주(光州)이며 자는 과회(寡悔)이고 호는 소재(穌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이다. 활인서(活人署) 별제(別提) 노홍(盧鴻)과 예조참판(禮曹參判) 이자화(李自華)의 딸인 성주이씨(星州李氏)사이에서 중종 10년(1515년) 한양 남부 낙선방(樂善坊)에서 태어났다. 중종 26년(1531년) 당시 성리학자로 명망이 있었던 탄수(灘叟) 이연경(李延慶)의 따님과 결혼하여 그의 문인이 되었다. 중종 29년(1534년) 생원시(生員試), 진사시(進士試)에 장원으로 입격(入格)하였다. 27세 때인 중종 36년(1541년) 당대 명유(名儒)였던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에게 배우고 학문적 영향을 받았다. 중종 38년(1543년) 식년(式年)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한 이후 전적(典籍)·수찬(修撰)을 거쳐, 1544년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고 같은 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일으키자 이조좌랑(吏曹佐郞)의 직위에서 파직되어 명종 2년(1547년) 순천(順天)으로 유배되었다가 그 후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진도(珍島)로 이배(移配)되어 19년간 귀양살이를 하였다. 유배기간 동안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했고, 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주해(註解)하고 ‘마음(心)이 일신(一身)의 주재자(主宰者)’라는 자신의 새로운 학설을 포함시켰다.『대학장구(大學章句)』와『동몽수지(童蒙須知)』등을 주석(註釋)하였다. 성리학(性理學)에 불교의 선학(禪學)을 가미한 조선조 최초의 유학자이었다. 이 때문에 그는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등의 세찬 비판을 받았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걱정을 샀다. 그는 진도에서 유배생활 중 예법(禮法)으로부터 무지한 주민을 교화(敎化)시켜 야만적인 섬의 풍속을 바로잡기도 했다.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와 교리(校理)에 기용되고, 이어서 대사간(大司諫)·부제학(副提學)·대사헌(大司憲)·이조판서(吏曹判書)·대제학(大提學)·우의정(右議政)·좌의정(左議政)등을 지내고 선조 18년(1585년)에는 영의정(領議政)에 이르렀다. 1588년 영의정(領議政)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나, 이듬 해 10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己丑獄死)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는 온유하고 원만한 성격으로 인해 사림의 중망(重望)을 받았으며, 특히 선조의 지극한 존경과 은총을 받았다. 그는 시(詩)·문(文)·서예(書藝)에 능했으며, 경일(敬一) 공부에 주력할 것을 강조하고 도심미발(道心未發)·인심이발설(人心已發說)을 주장했다. 한편 양명학(陽明學)을 깊이 연구한 탓에 주자학자(朱子學者)들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승려인 휴정(休靜)·선수(善修) 등과의 교분을 통해 학문적으로 불교의 영향을 입기도 하였다. 그가 일찍이 옥당(玉堂)에 있으면서 경연(經筵)에서『서경(書經)』을 강론할 때에는 인심도심(人心道心)의 설명이 주자의 설명과 일치했으나, 진도로 유배되어 그 당시 들어온 나흠순(羅欽順)의『곤지기(困知記)』를 보고 난 후에는 이전의 학설을 변경하여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을 저술하였다. 체용(體用)의 체(體)는 형이상학적 세계의 본체적 존재를 뜻하고, 용(用)은 형이하학적 세계의 시각・청각・미각・후각 ・촉각의 오관(五官)으로 감지할 수 있는 자기 한정적 작용 및 현상을 뜻한다. “인심(人心)을 인욕(人慾)이라 하면 도심(道心)은 이발(已發)이라고 하는 것이 옳고 인심(人心)을 선악(善惡)이라고 하면 도심(道心)을 미발(未發)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고 해석하게 되었다. 즉 도덕적 양심인 도심(道心)은 체(體)이자 성(性)인 미발(未發)로, 항상 선(善)한 것이라고 보았고 육체적 욕망인 인심(人心)은 용(用)이자 정(情)인 이발(已發)로, 선악(善惡)을 겸하였기 때문에 도심(道心)은 잘 보존하고 인심(人心)은 잘 관찰하여 항상 선하게 되려고 노력하는 수양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선조 23년(1590년) 졸(卒)하였다. 저서로는『소재집(蘇齋集)』이 있다.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봉산서원(鳳山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며, 뒤에 문간(文簡)으로 고쳤다.


(註釋1) 사가독서(賜暇讀書)
 조선 세종 8년(1426년)에 유능한 젊은 문신(文臣)들을 뽑아 휴가를 주어, 독서당(讀書堂)에서 공부하게 한 일을 말하며 세조 때 이 제도를 없앴다가, 성종 24년(1493년)에 다시 복구하였고, 병자호란(丙子胡亂)을 당하여 없어졌다.


(註釋2) 양재역(良才驛) 벽서사건(壁書事件)
명종 2년(1547년) 9월 문정황후(文定王后)와 그 아래 이기(李芑) 등의 간신(奸臣)들이 국정(國政)을 농단(壟斷)하는 것을 비판하는 내용의 붉은 글씨 벽서(壁書)가 과천 양재역에 나붙은 사건으로 윤원형(尹元衡)을 탄핵한 바 있는 송인수(宋麟壽), 윤임(尹任) 집안과 혼인 관계에 있는 이약수(李若水)를 사사하고, 이언적(李彦迪)·정자(鄭磁)·노수신(盧守愼) 등 20여 명을 유배하였다. 윤원형(尹元衡) 일파가 대윤(大尹)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만들어낸 사건이다.


(註釋3) 경일(敬一) 공부
생각이나 헤아림을 중단한 상태에서 본래적인 마음을 보존하고 유지하는 공부

 

▲용담(龍潭) 박이장(朴而章 : 순천, 1547년∼1622년)


본관은 순천(順天)이고 자는 숙빈(叔彬)이며 호는 용담(龍潭)·도천(道川)이다. 승지(承旨)를 지낸 복재(復齋) 양좌(良佐)와 별좌(別坐) 은(垠)의 따님인 성산배씨(星山裵氏)사이에서 명종 2년(1547년) 합천군 야로면 남교리(藍橋里 : 말곡)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가학(家學)을 수업하였고, 23세인 선조 2년(1569년) 진주 덕산(德山)에 있는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다. 27세인 선조 6년(1573년)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을 찾아 뵙고 노수신이 지은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을 강론하였고 42세에는 노수신(盧守愼)을 찾아 뵙고 의례(儀禮)를 강론하는 등 사승(師承)관계를 지속하였다. 그리고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고제(高弟)인 동향(同鄕)의 거유(鉅儒) 내암(萊菴) 정인홍(鄭仁弘) 문하(門下)에서 수업(修業)을 하였으나 나중에는 정치적 노선을 달리하였으며 경학(經學)과 예학(禮學)에 관심이 많았다. 이때 스승을 좇았던 명사(名士)들은 합천 하혼(河渾), 문여(文勵), 박이립(朴而立), 조응인(曺應仁), 고령 김응성(金應成), 거창 유중룡(柳仲龍), 문위(文緯), 함양의 정경운(鄭慶雲), 노사상(盧士尙), 정온(鄭蘊) 등으로 이들은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고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경상우도의 구국의병활동(救國義兵活動)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선조(宣祖) 6년(1573년) 27세 때 계유(癸酉) 식년시(式年試)에서 생원(生員)과 진사(進士)에 모두 입격(入格)하였다. 선조 10년(1577년) 31세 때 영숭전(永崇殿) 참봉(參奉)에 제수되어 처음으로 관직에 나갔으며 주자서(朱子書)와 주역(周易)을 강독하여 ‘독서참봉(讀書參奉)’이라 일컬었다. 선조 16년(1583년) 부친을 모시고 고령군 쌍림면 용담리(龍潭里)로 옮겨가 살았다. 선조 19년(1586년) 별시 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1589년 43세 때 홍문관(弘文館) 수찬(修撰)·교리(校理) 등을 지내고 선조 24년(1591년) 하절사(賀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46세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문홍도(文弘道)와 같이 내암군단(萊菴軍團)에서 군량을 모아 마련하는 군량모판지임(軍糧募辦之任)을 맡았다. 임진왜란 때 김성일(金誠一)의 주청으로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크게 활약하였다. 군량모판(軍糧募辦 : 군량준비)차 진주부근에 이르러 주민의 신고로 인하여 진주판관(晋州判官) 김시민(金時敏)과 알력이 생기자 순찰사(巡察使) 김성일(金誠一)이 조정하여 합천, 고령의 사저(私儲 : 개인이 저축한 재물을 말함)를 맡게 된다. 그후 능력을 인정받아 김성일이 임금께 아뢰어 막하에서 경상도(慶尙道) 도사(都事)를 맡아 보면서 전라도에 파견되어 전라도사(全羅都事) 최철견(崔鐵堅)의 협조로 군량의 보급과 유랑민(流浪民) 구휼(救恤)에 최선을 다하였다. 선조 26년(1593년) 10월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지제교(知製敎), 1594년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지내고 이조좌랑(吏曹佐郞)에 이어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를 겸직하였다. 선조 28년(1595년) 이조정랑(吏曹正郞), 홍문관(弘文館) 부응교副應敎)를 거쳤다. 선조 34년(1601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 상의원정(尙衣院正)을 지내고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과 선무원종2등공신(宣武原從二等功臣)에 책록되고 호군(護軍)에 제수되었다. 이듬해 사헌부(司憲府) 집의(執義), 홍문관직제학 겸 시강원보덕(弘文館直提學兼侍講院輔德),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 경연(經筵) 참찬관(參贊官)을 역임하였다. 당시 유영경(柳永慶)파인 소북(小北)으로서 반대 세력을 비방, 탄핵하였다. 선조 36년(1603년) 동지사(冬至使) 부사(副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고, 선조 37년(1604년)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이조참판(吏曹參判)·홍문관(弘文館)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회재(晦齋)와 퇴계(退溪)를 비판한 사람을 신변(伸辨 : 억울함을 변명하여 호소함)하였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자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을 논계(論啓 : 신하가 임금의 잘못을 따져 아룀)하였다. 광해군 1년(1609년) 이듬해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이 되었고, 이어 병조참판(兵曹參判)과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를 거쳐 다시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이 되었다. 광해군 7년(1615년)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이를 반대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올렸다가 삭탈관직되어 청송 진보(眞寶)로 돌아갔다. 1617년 고령 용담리(龍潭里)로 돌아가 향약(鄕約)과 동규(洞規)를 지었고 매월 초하루마다 강회(講會)를 개최했다. 광해군 11년(1619년) 고령군 운수면 연봉촌(延鳳村)으로 옮겨 살았다. 향리의 사람들이 강학할 수 있는 집을 지어 주었는데 ‘모덕와(慕德窩)’라는 편액을 걸었다. 당시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편지를 보내어 ‘위국찬유(爲國贊猷) 향리모덕(鄕里慕德)’ 즉 ‘나라를 위하여 보좌하였으니, 향리에서 그 덕을 사모하네’ 라고 하며 편액에 의미를 부여하였다. 광해군 14년(1622년) 8월 26일 향년 76세로 초계(草溪)에서 졸(卒)하였는데 성주 위곡(蝟谷 : 현재 고령군 운수면 유리) 건진산(乾眞山) 묘좌(卯坐)에 있다. 1625년 대제학(大提學) 용주(龍洲) 조경(趙絅)이 행장(行狀)을 지었고 대제학(大提學) 백각(白閣) 강현(姜)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 숙종 4년(1678년) 사림들이 동강(東岡) 문정공(文貞公) 김우옹(金宇顒)을 봉향(奉享)하기위해 세운 성주의 청천서원(晴川書院)에 종향(從享)하였다. 그 후 자손들이 지금의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로 이거하여 부조묘(不祧廟)로 받들고 그 마을 앞에 정사(精舍)를 건립하여 이름을 ‘용담정사(龍潭精舍)’이라고 하였다. 저서는『관혼촬요(冠婚撮要)』,『정서절요(程書節要)』,『육경여해(六經蠡海)』,『상재만록(桑梓漫錄)』등이 있었으나 공의 서재인 모덕와(慕德窩)가 불타는 바람에 다 없어지고 말았으며 1911년 후손 인현(寅鉉), 윤현(允鉉) 등에 의해 간행된 용담집(龍潭集) 7권 3책이 전할 뿐이다.

 

◉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본관은 진주(晉州)이고 자는 경임(景任)이며 호는 우복(愚伏)이다. 좌찬성(左贊成) 여관(汝寬)과 이결(李潔)의 따님인 합천이씨(陜川李氏)사이에서 명종 18년(1563년)에 상주군 청리면 율리에서 태어났다. 8세에 이미 소학(小學)의 이치를 깨달은 문재(文才)이었다. 18세에 상주목사(尙州牧使)로 내려온 유성룡(柳成龍)을 찾아뵙고 제자가 되었다. 선조 15년(1582년)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고 선조 19년(1586년)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로 초임(初任)되고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이조좌랑(吏曹佐郞)·시강원문학(侍講院文學)·이조정랑(吏曹正郞)을 역임하였다. 이조정랑(吏曹正郞)에 있을 때에는 인사(人事) 행정(行政)이 공정하여 현사(賢邪 : 어진 사람과 부정한 사람)를 엄선해서 임용·퇴출했다. 정여립(鄭汝立)의 모반(謀叛)으로 일어난 동인(東人)과 서인(西人)간의 정쟁인 기축사화(己丑士禍)로 파직되어 낙향하여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병하고 군량을 모아서 원수를 갚고 적을 토벌하는 일인 복수토적(復警討賊)에 용약분투(踊躍奮鬪 : 뛰어서 있는 힘을 다하여 싸움)하였다. 선조 31년(1598년) 경상감사(慶尙監司)로 재직 시 임진왜란의 여독(餘毒)으로 피폐(疲弊)해진 민심(民心)을 수습하고 백성들의 풍습(風習) 교화(敎化)에 힘써 도내가 점차로 안정을 찾게 되었다. 선조 33년(1600년) 영해부사(寧海府使)를 사직하고 향으로 돌아와 마을에 ‘존애원(存愛院)’이란 의료기관을 세워 사람들의 병을 무료로 진료하였고 상주지방의 교육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도남서원(道南書院)을 창건(創建)하고 오현(五賢)을 종사(從祀)하였다. 선조 40년(1670년) 대구부사(大邱府使) 때 정구(鄭逑), 여대로(呂大老) 등과 연명으로 도동서원(道東書院) 중건계획의 사발통문(沙鉢通文)을 보내 오늘의 도동서원이 있게 하였다. 1608년 광해군이 즉위하여 교서를 내려 구언(求言)하자, 무려 1만여자에 이르는 상소문을 올렸는데 이것이 천고(千古)에 유명한 ‘무신소(戊申疏)’이며 사치의 풍습을 경계하고 인물의 전형(銓衡)을 공정히 하며 학문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광해군 1년(1609년) 동지사(冬至使)로 뽑혀 명나라에 가서 연간 3천근의 화약(火藥) 매입을 6천근으로 사와 국방사업에 공헌했다. 광해군 2년(1610년) 전라감사(全羅監司)에 제수되었으나 이듬해 8월 정인홍(鄭仁弘) 일당의 사간원(司諫院) 탄핵으로 해직되어 향리에 칩거(蟄居)하면서『주자대전(朱子大全)』중에서 긴요한 부분의 글만을 뽑아 엮은『주문작해(朱文酌海)』를 저술하였다. 광해군 3년(1611년) 3월 정인홍(鄭仁弘)의 ‘회퇴변척(晦退辨斥)을 비판하자 서울로 압송(押送)되는 등 세 번의 옥고(獄苦)를 치루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 후 재등용되어 대사헌(大司憲)·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형조판서(刑曹判書)·예조판서(禮曹判書)·이조판서(吏曹判書)·대제학(大提學) 등의 관직을 거쳤다. 공의 학문은 이황(李滉)의 학통을 계승하였으나 장현광(張顯光)과 같이 리기설(理氣說)에 있어서 이황(李滉)에 반대하고 “발현(發顯)하는 것은 기(氣)이고 발현하는 소이(所以 : 까닭)은 리(理)이다”라고 주장하는 이이(李珥)에게 찬동(贊同)하였다. 당시 율곡(栗谷)의 뒤를 이어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스승으로 존숭(尊崇)을 받던 논산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과 교유했는데, 그들의 교유는 참 지식인의 소통(疏通)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으며 그의 제자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을 사위로 삼아 퇴계학(退溪學)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주자(朱子)를 흠모하고 존경하였으며, 주서(朱書)를 편람하고 정독(精讀)하여 후진 교육이나 조의(朝議)·경연(經筵)에서 진강(進講)할 때 항상 주서(朱書)에 근거를 두었다. 경전(經典)에 밝았으며, 특히 예학(禮學)에 조예(造詣)가 깊었다. 예학(禮學)의 대가(大家)이었던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 “우복(愚伏)의 시장(諡狀 : 임금에게 시호를 내리도록 건의할 때 생존시 행적을 적은 글)에서 예학(禮學)이 퇴계(退溪)보다 낫다”고 극찬하였다. 제자로는 전명룡(全命龍)·신석번(申碩蕃)·강진룡(姜震龍)·황뉴(黃紐)·홍호(洪鎬) 등이 있다. 저서로는『우복집(愚伏集)』·『상례참고(喪禮參考)』가 있다. 인조 11년(1633년)에 졸(卒)하였다.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고,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註釋) 회퇴변척(晦退辨斥)
 광해군 2년(1610년)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제자였던 내암(萊菴) 정인홍(鄭仁弘)이 5현(五賢)의 문묘종사(文廟從祀) 결정에 불만을 품고 광해군 3년(1611년) 상소를 올려 5현 가운데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분별(分別)하여 배척한 것을 말하며 이로 인하여 정인홍(鄭仁弘)은 성균관 유생(儒生)들의 비난과 저항을 받아 청금록(靑衿錄 : 유생들의 인적사항을 기록한 명부)에서 이름이 삭제되었다.

 

▲ 남고(南皐) 박응형(朴應衡 : 고령, 1605년∼1658년)


 본관은 고령(高靈)이며 자는 첨백(詹伯)이고 호는 남고(南皐)이다. 매헌(梅軒) 창선(昌先)과 응교(應敎) 광윤(光胤)의 따님인 경주이씨(慶州李氏) 사이에서 선조 38년(1605년) 태어났다.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학문이 정수(精粹)하고 행의(行誼)가 고결했다. 164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남한산성(南漢山城)이 적에게 항복하자 용문산(龍門山)에 들어가 두문자정(杜門自靖 : 세상과 인연을 끊고 조용히 지냄)하며, 그 심정을 담은「충분시(忠憤詩)」를 지었고, 명나라가 망한 후에도 숭정력(崇禎曆)과 숭정연호(崇禎年號)를 쓰며 스스로 숭정처사(崇禎處士)라 하였으며 숭정유민(崇禎遺民)으로 살았다. 조부 박정번(朴廷璠)의 절의정신(節義精神)을 계승(繼承)하고 소학(小學)을 통한 춘추대의(春秋大義)를 실천하였으며 오계(梧溪) 조정립(曺挺立)과 완정(浣亭) 이언영(李彦英) 등 의리지향적(義理志向的) 인물과의 교유를 통하여 초지일관(初志一貫) 의리에 입각한 삶을 살았다. 효종 9년(1658년) 11월 21일 졸(卒)하였다. 문집(文集)으로는 시대를 마음 아파하고 그릇된 세도(世道)에 대하여 비분강개(悲憤慷慨)하는 심정을 담고 있는『남고집(南皐集)』6권이 있다.


(註釋) 춘추대의(春秋大義)
허목(許穆)에 의하면 “춘추대의(春秋大義)는 임금을 높이고 신하를 낮게 하며 인의(仁義)를 귀(貴)히 하고 거짓된 힘을 천(賤)하게 여기며 중국을 존엄(尊嚴)시하고 이적(夷狄 : 오랑캐)을 물리치는데 있다”고 하여 춘추(春秋) 정신의 골자(骨子)를 파악하고 있다.

 

 

구독 후원 하기






모바일 버전으로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