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고 온 오지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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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고 온 오지독

김상룡(수필가)

김상룡(수필가)

 

파트 현관문이 좀체 열리지 않는다. 지척에 혼자 사는 노모를 찾아뵙는 일이 가물에 씨 나듯이 하니 늘 죄지은 마음뿐. 며칠 사이 나는 비밀번호를 또 잊었다가 겨우 기억했다. 아들의 기척에 반가운 목소리가 베란다에서 들려온다. 옹기들을 무슨 보물단지 모시듯 정성스레 닦으시는 모습을 한두 번 봐 온 것도 아니지만 여전히 당신은 그 일을 할 때면 부처님의 얼굴이다.
엉거주춤 고된 허리를 세운 당신은 “그래도 이놈들은 끝까지 나하고 같이 가네!”라며 숨을 몰아쉰다. 장독을 닦는 일이 힘에 부치시는지 잠시 의자에 기댄 채 가을 초입의 바깥 풍경을 한참이나 들여다보신다.
“그걸 마 절에만 갖다 줘도 내가 이리 가슴이 안 아픈데 시상에 그게 혼자 외롭게 떨어져 갖고……. 할머니는 날 버리고 갔다고 얼매나 그랬겠노!” 넋두리처럼 말씀하시는 눈빛 속에는 옛집에 두고 온 그 오지독이 그리운 게다.
20여 년 전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앞산이 훤히 보이는 대명동 벽돌집은 잘 가꾼 잔디와 수목이 많았다. 계단을 올라가면 넓은 옥상에 수십 개의 장독이 엄마의 손길을 받으며 자리를 지켰다. 정들었던 그 집을 떠나는 날 아침 이사 트럭이 왔다. 어느 정도 꾸려지면서 마지막으로 옥상에 남아 있던 항아리를 실어야 했다. 유독 운두가 어른 허리께까지 닿는 큰 오지독 하나가 턱 버티고 앉아 작업 인부들을 곤혹스럽게 했다. 계단으로 옮기면 되겠거니 했는데 쉽지가 않았다.
식구들은 바짝바짝 애가 탔다. 할 수 없이 이사 올 주인에게 무료로 주는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그 독은 당신이 수십 년을 다니던 절에 헌납하려고 마음먹었던 모양이다. 절 살림에 큰 독이 없어 늘 아쉬워하는 걸 보아 오던 터라 이참에 희사하여 불자들의 간절한 불심이라도 담는 데 쓰이길 원했다. 그나마 중두리 독 두어 개는 일찌감치 절집에 전달해 주었던 터라 작은 위안이 된 모양이다. 또한 이사 들어올 집의 딸이 오지독의 매무새에 반해 제 것처럼 여기겠다고 하여 그나마 떠나 올 수 있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물건이라도 내 손 끝에 쓰던 연장이 천대받으면 내가 가슴이 아프다.”라는 소리에 어느 날 형님이 승용차로 모친을 모시고 옛날 살던 집으로 가셨다고 했다. 당신은 그 큰 독이 여태까지 잘 쓰고 있는지, 혹시나 한 번 볼 수나 있을까 하는 기대감에 찾아갔건만 옛집의 이층 옥상만 바라보다 돌아왔다고 했다. 그 집에 폐가 될까싶어 밤낮으로 보고 싶어 하던 독을 골목에서만 쳐다보고 왔을 당신의 마음이 어땠을까.
당신과 오지독의 인연은 다시 수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열한 살이나 많은 남편을 따라 어느 포구에 정착하면서부터다. 그곳은 오징어나 꽁치, 멸치 등이 많이 잡히는 곳이었다. 가끔 밍크고래라도 포획된 날이면 어판장은 북새통을 이루었다. 자연적으로 돈이 끓었다. 우스갯소리로 길 가던 개도 1원짜리 종이돈을 물고 다녔을 정도였다고 했다. 누구든 한 몫 벌기엔 좋았던 곳이다. 아버지는 공무원직을 사퇴하면서까지 한몫 벌어 보자고 뛰어들었다.
우선 빚을 내어 읍내 정미소를 인수했다. 짧은 밑천에 어떻게든 운영을 해야 했고 둘이서 억척같은 시간을 보냈다. 늘 잰걸음으로 넓은 공장을 오가며 일에 목숨 걸 듯 하시더니 사업은 규모가 커지면서 다른 업종을 겸할 만큼 발전했다. 서너 개의 사업체를 거느리다보니 식솔들이 불어났다. 오 남매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까지 먹어 치우는 먹거리도 보통이 아니었다.
당신은 그때부터 옹기들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사들인 옹기들이 작은 단지나 항아리를 제외하고라도 독만 대략 삼십 여개가 되었다고 한다. 혼자서 감당해야할 살림살이가 어느 정도였는지 집작이 될 만했다. 젓갈이나 곡물을 담아 숙성시키고 보관하기에도 좋았다. 또한 대식구가 일 년 동안 먹을 된장과 김장 김치를 담그려니 큰 독이 필요했던 모양이었다.


이참에 단골 옹기점 주인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오지그릇으로 된 독 중 제일 큰 거로 두 개를 주문했다. 큰 독 하나에 들어가는 물의 양이 어림잡아 큰 동이로 서른 두 명 정도가 되었다니 크기가 상상된다. 포항 오천가마에서 만들어진다는 독 두 개가 마침내 옹기점에 도착한 날, 당신은 한걸음에 달려갔다. 무엇보다 독으ㅟ 운두가 높고 중배가 부른 모양이 넉넉하고 온순했다. 게다가 독 두껑을 올려 덮어 보니 뚜껑 둘레면이 중배 가장자리 면과 빈틈없이 잘 맞아 좀체 미끄러지지 않았다. 손잡이 전도 독의 무게를 충분히 견딜 수 있을 만큼 견고해 보였다. 어찌나 마음에 들었던지 당신은 큰 독을 머리에 이고 단숨에 집까지 뛰어왔다고 했다.
당신은 오지독을 사 오던 날을 잊을 수가 없다고 했다. 남편이 독을 보더니 당장 무르고 오란다. 무슨 일인가 해서 그 이유를 물어보니, 그릇이란 일단 깨지지 않고 오래 써야 하는데 독은 깨지기 쉬우니 안 된다는 것이었다. 흙으로 빚은 옹기가 미세한 공기구멍으로 숨을 쉬어야 하는 이유와 숙성이나 발효를 거쳐야 하는 음식들은 오지그릇으로 된 독에 보관해야 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하도 어이없이 멀뚱히쳐다보던 남편을 향해 처음으로 한마디 쏘아붙였다고.
“세상에 아무리 남자라도 거철(그토록) 숨 막히는 소리 하능교! 안 깨지는 무쇠 솥에 장 담글까요 ” 반란이었다. 엄격한 남편이라 말 한마디조차건네기 어려웠던 사람한테 기세등등하게 말 했다는 게 도무지 믿기질 않았다고. 시집살이 고운 때를 벗어날 때가 됐다는 은연중 과시였는지도 모를 일이었다고. 여태 남편은 어린 당신을 골짜기 농사꾼의 철없는 딸로만 업신여겨 오던 터였다. 그 일로 독선적인 남편을 잠시라도 탓할 수 있어서 속으로 어찌나 고소하고 시원했던지 지금도 그날 저녁을 떠올리면 저절로 웃음이 터져 나온다고 하신다.
당신은 일 년 중 정월 초순 말날이면 어김없이 장을 담근다. 큰 독에 남아 있던 묵은 장을 퍼내고 다시금 새 장으로 채우신다. 그렇게 장독간은 오로지 당신의 쉼을 위한 곳이 되어 갔다. 오 남매들은 자라서 군대에 가거나 대처로 유학을 떠났다. 아들딸들이 도회지에 나가 자취 생활이라도 하게 되면 가잔 먼저 된장과 간장을 퍼 담아주셨다. 큰아들이 입대하던 날에도 퍼질러 앉아 울었던 곳도 장독 뒤에서다. 원칙주의자로 평생을 사시다가 뇌졸중으로 십 수 년을 누워 계시던 남편을 떠나보내던 날도 당신은 오지독 뒤에서 숨어 우셨으리라.
당신의 장맛을 익혀 가며 자란 자식들도 모두 결혼을 했다. 대를 이어 태어난 손자 손녀들 또한 당신과 오지독이 품어 낸 장맛에 길들여졌다.
당신이 남편을 따라 어느 바닷가로 들어오고 다시 대구 대명동의 앞산 밑에 흘러와 살 때까지 오십여 년을 동고동락해 왔으니 둘은 한 배를 탄 운명이나 다름없었다. 그 독은 우리 가족사의 산 증인이었다. 자식들도 오지독을 처음 사던 날의 당신 나이보다 더 먹어 흰머리가 무색하다. 번창했던 사업도 세월에 밀려 사라졌다. 호기 좋게 부리던 장졸 같은 독들도 이래저래 하나둘씩 버려야 했다. 자식처럼 품었던 그 많은 독을 빼앗기듯 현실에 내어 주어야 하는 아픔을 어찌 삭여 나갔을까
당신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소파에서 졸고 있다. 손등 위로 파리한 핏줄들이 살아 온 삶만큼 고단해 보인다. 하루에 수십 번도 오지독을 닦고 어루만졌을 꺼칠한 손바닥이었다. 이내 일어나 베란다로 나가신다. “인자 내가 잊으려고 한다. 자꾸 잊으려고 애쓰고 있다. 이제는 그 집이 그 아이 고향이 아니것나.” 저무는 오후의 햇살만큼이나 당신도 몇 개의 작은 독들을 바라보며 함께해 온 날들을 반추하시는지 눈빛이 처연하다. 처연하다 못해 화석 같은 그리움이다.  

 
 
작가 프로필
‘윤영의 문학공간’ 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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