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악이씨(安岳李氏) 판서공파(判書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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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안악이씨(安岳李氏) 판서공파(判書公派)

본지는 ‘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를 격주로 기획 연재한다. 씨족연원(氏族淵源), 현조(顯祖), 고령입향(高靈入鄕) 내력 및 시기, 입향조(入鄕祖) 이 후 역대 인물 등을 문헌적 고증(考證)을 근거로 밝힘으로써 각 문중 고유의 씨족연원(氏族淵源), 열조(烈祖)들의 위업(偉業), 올곧은 정신 및 문화유산(文化遺産)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코자 하오니 관심 있는 문중들의 많은 참여를 바라며, 이번호에는 안악이씨(安岳李氏) 판서공파(判書公派)를 소개한다.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시조(始祖)
① 1982년 간행된 안악(양산) 대동보에 의하면 시조(始祖)를 ‘이극규(李極奎)’로 하여 선상계(先上系)를 기록하고 있다. 공(公)의 자는 월화(月華)이며 호는 창평(昌平)이고 시호는 충의공(忠義公)이다. 신라 문성왕 13년(851년)에 태어났다. 경문왕 9년(869년) 왕명으로 당나라에 유학(留學)하여 이부시랑(吏部侍郞)을 제수(除授)받고 환국(還國)하여 보니 신라의 국운(國運)이 다하여 양산대(楊山臺)를 지어 군비(軍備)를 쌓아 두고 고려 건국을 협조하며 모의하였다. 신라 경명왕 2년(918년)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도와 고려(高麗) 개국(開國)에 공헌하여 양악군(楊岳郡) 태수(太守)와 도독(都督)을 지내고 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으로 양산백(楊山伯)에 봉(封)해지고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를 하사받았으며 안악(安岳)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고 양산이씨(楊山李氏)로 사성(賜姓)되었다. 2세부터 9세까지 팔위분(八位分)은 실전(失傳)되었다.

 


② 2008. 10. 11.(토) 대전 뿌리공원에 세워진 안악이씨(安岳李氏) 조형물(造形物)의 비문에 의하면 “안악이씨(安岳李氏) 시조(始祖)는 이견(李堅) 이시다. 고려 공민왕 9년에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해 옴에 검교문하대승(檢校門下大丞) 상장군(上將軍)으로 출전하시어 함종(咸從)에서 순절(殉節)하시니 이를 대군(大軍)이 의분(義奮)하여 대승(大勝)을 거두니 안악군(安岳君)에 봉해졌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③ 양산원류록(楊山源流錄) 기록에 의하면 안악이씨(安岳李氏)는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衛滿朝鮮)의 우거왕(右渠王)이 장군 공손수(公孫遂)를 시켜 왕검성(王儉城)을 토평(討平) 할 때 부장(部將)으로 출전하여 공을 세우고 대장군(大將軍)에 올라 낙랑후(樂浪侯)에 봉해졌으며 낙랑태수(樂浪太守)로 한사군(漢四郡) 설치의 대명(大命)을 완수한 한(漢)나라 대장군(大將軍) ‘이진(李震)을 시조(始祖)로 하며, 송암(松巖) 이로(李魯)가 저술한 사성강목(四姓綱目)에는 ‘이견(李堅)’을 시조(始祖)로 하는 등 각파에 따라 의견이 분분(紛紛)하여 각파별 세보(世譜)에 따라 상계(上系)와 소목(昭穆)이 상이(相異)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1982년에 최초로 발행된 안악(양산)이씨 대동보(임술보)에는 각파별로 고증(考證)을 거쳐 씨족(氏族)의 대계(大系)를 바로잡았으므로 이하에서는 고려개국공신(高麗開國功臣) ‘이극규(李極奎)’를 시조(始祖)로 한 세계(世系)를 따라 인물을 기술(記述)하기로 한다.
④ 판전리사사(判典理司事) 계을(桂乙)은 고려(高麗) 말(末)에 국운(國運)이 기울고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자 망국(亡國)이 한(恨)을 품고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을 지켜 스스로 목숨을 끊자 그의 아들 안악감무(安岳監務) 신(晨) 일명(一名) 양소(陽昭)가 두문동(杜門洞) 산기슭에 아버지를 장사 지낸 뒤 그 묘 앞에서 자결(自決)하여 부자(父子) 충절(忠節)로 유명(有名)하였다. 그 후 조선 세종 때 와서 부자(夫子)의 충절(忠節)을 가상히 여겨 나라에서 이신(李晨)을 안악군(安岳君)으로 추봉(追封)하고 그 때까지 양산이씨(楊山李氏)로 써오던 관향(貫鄕)을 안악이씨(安岳李氏)로 고치게 하였다고 한다.

 

(2) 안악이씨(安岳李氏)의 개관(改貫) 및 이적(離籍)
영록대부(榮祿大夫) 밀직사지원사(密織司知院事) 이영진(李永進)은 충정왕의 이질(姨姪)이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처남(妻男)인 관계로 고려 왕조에 대한 충절(忠節)을 지키고 조선 건국에 협조하지 않고 반대하여 그 후손은 사방으로 분산되어 살면서 양산(楊山, 안악(安岳), 학성(鶴城), 산재(山峙) 등으로 개관(改貫)하여 오다가 그후 태안(泰安), 원주(原州), 가평(嘉平), 벽진(碧珍) 등으로 이적(離籍)하여 멸문지화(滅門之禍)를 피하면서 살아왔다. 도정공(都正公) 면(沔)의 6세손으로 음성현감(陰城縣監)을 지낸 이후경(李厚慶)이 광해군 초에  벽진(碧珍)으로 이관(移貫)하였던 것이 그 실례(實例)이다. 

(註釋1) 개관(改貫)
관향(貫鄕)을 바꿈
(註釋2) 이적(離籍)
호적(戶籍)에서 떼어 내는 일

 

(3) 분파(分派)
① 대파(大派)를 기준으로 하면 시중공파(侍中公派), 단계공파(丹桂公派), 참의공파(參議公派), 판서공파(判書公派),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등 5개파로 분파(分派)되었다.  
② 소파(小派)를 기준으로하면 군수공당한파(郡守公唐漢派), 무당공이수파(無憂堂公耳壽派), 죽림공운기파(竹林公雲起派), 죽헌공운장파(竹憲公雲長派), 진사공욱파(進士公郁派), 진사공침파(進士公沈派), 참봉공기파(參奉公奇派), 참봉공운행파(參奉公雲行派), 참봉공팽령파(參奉公彭齡派), 참봉공해파(參奉公瀣派), 참의공잠파(參議公潛派), 첨정공송령파(僉正公松齡派), 학생공맹파(學生公孟派), 학생공억정파(學生公億楨派), 학생공운승파(學生公雲勝派), 학생공응벽파(學生公應壁派), 학생공의파(學生公誼派), 호당공희순파(湖堂公希舜派) 등 18개파로 분파(分派)되었다.

(4) 안악이씨(安岳李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 안악이씨(安岳李氏)의 거주 현황이 파악되지 않으나 10가구에 20여명이 사는 것으로 추정된다.
② 영남여지(嶺南輿誌) 고령현 성씨조(姓氏條)에 그 당시 고령현에 거주하는 이씨(李氏)의 본관(本貫)은 고령(高靈), 안악(安岳), 성주(星州), 재령(載寧) 등으로 파악된다. 참고적으로 성주지역을 관향(貫鄕)으로 쓰는 성주(星州), 성산(星山), 벽진(碧珍), 경산(京山), 광평(廣平), 가리(加利)  등 6개 이씨는 조선 정조 때 조정의 명령(朝令)으로 모든 공적(公的) 기록에 성주이씨(星州李氏)로 관향을 사용하였으므로 영남여지(嶺南輿誌) 고령현 성씨조(姓氏條)에 기록된 성주이씨(星州李氏)는 재지사족(在地士族)인 성산이씨(星山李氏)로 판단된다.
③ 종사랑(從仕郞) 교학훈도(敎學訓導) 이택(李澤)의 후손이 고령에 처음으로 입향하여 대가야읍 일량, 쌍림면 고곡2리 죽성리 등을 중심으로 세거하였으나 현재 후손들은 대가야읍 저전리에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이시명(李時命)
초휘(初諱)는 보림(寶林)이다. 조산대부(朝散大夫) 흥위위(興威衛) 보승장군(保勝將軍) 환영(煥榮)과 한림(翰林) 창서(彰瑞)의 따님인 진주강씨(晋州姜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판판도사사(判版圖司事)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② 이견(李堅)
영록대부(榮祿大夫) 밀직사지원사(密織司知院事) 영진(永進)과 일성부원군(日城府院君) 운관(云瓘)의 따님인 연일정씨(延日鄭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고려사에 의하면 “충정왕 1년(1349년) 동지밀직사사상의(同知密直司事商議)를 거쳐 충정왕 2년(1350년)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를 지냈다. 공민왕 9년(1360년)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당하여 공이 장군으로서 도원수(都元帥) 이방실(李芳實)과 함께 함종(咸從)에서 싸웠는데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신부(辛富)와 장군(將軍) 이견(李堅)이 전사하였다. 그러나 각 부대들이 힘껏 싸워 적군 20,000명을 죽이고 자칭 원수(元帥)인 심자(沈刺)·황지선(黃志善)을 사로잡으니 나머지 홍건적 10,000여 명이 증산현(甑山縣)으로 퇴각하여 수비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공은 영남제종지파조(嶺南諸宗之派祖)이다. 경남 의령군 궁류면 다현리 지동에 있는 일원제(一源齊)에 설단(設壇)하여 해마다 가을에 시향(時享)을 올리고 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③ 이정림(李挺林)
이견(李堅)의 아들로 태어났다. 황해도 안악지방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세거(定着世居) 하면서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봉선대부(奉善大夫)와 고려 때 빈객(賓客)·연향(宴享)을 맡아보던 관청인 전객시(典客寺)의 전객령(典客令)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④ 이의만(李義萬)
전객시(典客寺)의 전객령(典客令) 정림(挺林)의 아들로 태어났다. 다른 이름으로는 만(滿)이라고도 한다. 광정대부(匡靖大夫) 상호군(上護軍)을 거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를 지냈다. 고려 말 혼란기에 허물을 입고 회원(檜原) 즉 현재 창원(昌原)으로 귀양을 가서 그곳에서 생을 마치게 되니 후손들이 영남지방에 터를 잡아 살게 되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⑤ 이흥인(李興仁)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의만(義萬)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정순대부(正順大夫)로 천문(天文), 역수(易數), 측후(測候), 각루(刻漏) 등의 일을 맡아보던 관청인 서운관(書雲觀)의 서운관사(書雲觀事)를 지냈다. 지병마사(知兵馬使)의 관직에 재임 중 진주 만호, 구라, 밀성(密城)에 침범한 왜구를 격멸하고 큰 공을 세웠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2) 조선시대
① 이호(李灝)
서운관사(書雲觀事) 흥인(興仁)의 아들로 태어났다. 정헌대부(正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② 이면(李沔)
정헌대부(正憲大夫) 예조판서(禮曹判書) 호(灝)의 아들로 태어났다. 통정대부(通政大夫) 돈영부도정(敦寧府都正)과 간성군수(杆城郡守)를 역임하였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② 이맹분(李孟蕡)
간성군수(杆城郡守) 면(沔)의 아들로 태어났다. 창신교위(彰信校尉) 호분위중부사직(虎賁衛中部司直)을 거쳐 세조 5년(1460년) 거창현감(居昌縣監)을 지냈다. 합천에서 창녕(昌寧)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③ 이택(李澤)
자는 광우(光佑)이고 호는 운곡(雲谷)이다. 거창현감(居昌縣監) 맹분(孟蕡)과 원지(元之)의 따님인 공인(恭人)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종사랑(從仕郞) 교학훈도(敎學訓導)를 지냈다. 성종 재위기간(1470년∼1494년) 중 창녕에서 고령으로 이거한 안악이씨(安岳李氏) 고령 입향조(入鄕祖)이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교학훈도(敎學訓導) 택(澤)이 성종 재위기간(1470년∼1494년) 중 선고(先考) 거창현감(居昌縣監) 맹분(孟蕡)의 거주지이었던 창녕(昌寧)을 떠나 고령으로 입향(入鄕)하여 대가야읍 내곡1리 이동(梨洞), 신리, 저전리 및 쌍림면 고곡2리 죽성동(竹城洞) 등지에서 세거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2) 교학훈도(敎學訓導) 택(澤)의 6세손 안인(安仁)이 고령에서 부산광역시 기장군 기장읍  만화동(萬化洞)으로 이거(移居)하였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이수원(李秀元)
자는 공희(公喜)이다. 훈도(訓導) 택(澤)과 소치(紹致)의 따님인 의인(宜人) 진주하씨(晋州河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주와 명성이 충만(充滿)하여 14세 때 여덟 고을의 방백(方伯)이 불러서 재주를 시험하였다. 38세 때 졸(卒)하였다. 중종 2년(1507년)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에 입격(入格)하여 성균생원(成均生員)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② 이우일(李遇馹)
자는 운보(雲甫)이다. 처사(處士) 희설(希說)과 세호(世瑚)의 따님인 창녕성씨(昌寧成氏) 사이에서 선조 2년(1569년) 태어났다. 백부 희고(希皐)에게 입양(入養)되었다. 봉직랑(奉直郞) 수(守) 제용감(濟用監) 첨정(僉正)을 거쳐 절충장군(折衝將軍) 용양위(龍驤衛) 호군(護軍)을 지냈다. 효종 5년(1654년) 졸(卒)하였다.
③ 이기(李奇)
성균생원(成均生員) 수원(秀元)과 진주정씨(晋州鄭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종사랑(從仕郞) 참봉(參奉)을 지냈다. 집안 생활을 엄정하게 하였고 고향에 있을 때 풍속을 받들었다. 여러 차례 초시(初試)인 향시(鄕試)에는 선발되었으나 끝내 복시(覆試)에는 합격하지 못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註釋) 복시(覆試)
 조선 시대에, 과거에서 초시(初試)에 합격한 사람이 이차(二次)로 시험을 보던 일. 또는 그 시험을 말한다.

④ 이순(李淳)
처사(處士) 희설(希說)과 세호(世瑚)의 따님인 창녕성씨(昌寧成氏)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선무랑(宣務郞) 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⑤ 이준(李濬)
처사(處士) 희설(希說)과 세호(世瑚)의 따님인 창녕성씨(昌寧成氏) 사이에서 셋째 아들로 선조 7년(1574년) 태어났다. 절충장군(折衝將軍) 행(行) 용양위(龍驤衛) 호군(護軍)을 지냈다. 효종 7년(1656년) 졸(卒)하였다. 
⑥ 이정원(李挺元)
일휘(一諱)는 정훈(廷薰)이며 자는 형익(馨益)이고 호는 둔암(遯庵)이다. 제용감(濟用監) 첨정(僉正) 우일(遇馹)과 첨지(僉知) 응기(應麒)의 따님인 청주한씨(淸州韓氏) 사이에서 선조 39년(1606년) 태어났다. 당숙(堂叔)인 선교랑(宣敎郞) 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 이순(李淳)에게 입양(入養)되었다. 인조 26년(1648년) 식년시(式年試) 진사(進士)에 입격(入格)한 후 홍문관(弘文館) 부응교(副應敎) 지제교(知製敎) 겸(兼) 경연시강관(經筵侍講官) 춘추관(春秋館) 편수관(編修官)을 지냈다. 현종 13년(1672년) 졸(卒)하였다.

(註釋) 식년시(式年試)
 조선시대에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된 과거시험을 말하며 조선시대 과거제도로 정기시를 말한다. 12지 가운데 자(子) ·묘(卯) ·오(午) ·유(酉)가 드는 해를 식년(式年)이라고 칭하며, 3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이 해에 정기적으로 과거시험을 치렀다

⑦ 이엽(李燁)
자는 백화(伯華)이다. 성균진사(成均進士) 정훈(廷薰)과 절충장군(折衝將軍) 홍도(洪道)의 따님인 숙인(淑人) 하양허씨(河陽許氏) 사이에서 인조 11년(1633년) 태어났다. 숙종 3년(1677년)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에 입격(入格)한 후 성균생원(成均生員)이 되었다. 숙종 7년(1681년) 졸(卒)하였다.

(註釋) 증광시(增廣試)
조선시대 즉위경이나 30년 등극경과 같은 큰 경사가 있을 때 또는 작은 경사가 여러 개 겹쳤을 때 임시로 실시한 과거를 말한다.

⑧ 이혁(李爀)
성균진사(成均進士) 정훈(廷薰)과 절충장군(折衝將軍) 홍도(洪道)의 따님인 숙인(淑人) 하양허씨(河陽許氏) 사이에서 인조 15년(1637년) 태어났다.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졸년(卒年)은 미상(未詳)이다.

 

자료제공 : 후손 상일(相壹)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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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이씨 추원재(의령군 궁류면 다현리 지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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