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주오씨(海州吳氏) 신령공파(新寧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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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해주오씨(海州吳氏) 신령공파(新寧公派)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시조(始祖)

 

해주오씨(海州吳氏)는 오인유(吳仁裕)를 시조로 모시고 있다. 서기 1401년에 사인공(舍人公) 선경공(先敬公)이 제작한 족도(族圖)의 도해(圖解)에 의하면 시조(始祖) 오인유(吳仁裕)는 고려 성종 3년(984년)에 고려로 들어와 해주(海州)에 정착하였으며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냈다. 세보고증자료(世譜考證資料)를 보면 그는 지절(志節), 덕망(德望), 학식(學識)을 고루 갖춘 송(宋)나라의 학사(學士)로 우리나라에 와서 성종 7년(988년) 시중(侍中) 이총섬(李寵暹), 남궁원청(南宮元淸), 이윤관(李允寬) 등과 함께 사직(社稷)・오묘(五廟)・국자감(國子監) 등의 창건(創建)을 주청(奏請)하여 성종 9년(990년) 사직(社稷)을, 그 이듬해에 태묘(太廟)와 국자감(國子監)의 건립을 보았다고 한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2) 분파(分派)

 

찬성공파(贊成公派), 벽성군파(碧城君派), 사복시정공파(司僕侍正公派), 양정공파(陽亭公派), 용강공파(龍岡公派), 영변공파(寧邊公派), 생원공파(生員公派), 모제공파(慕齊公派), 지군사공파(知郡事公派), 정무공파(貞武公派), 판관공파(判官公派), 사복시경공파(司僕侍卿公派), 신령공파(新寧公派), 추탄공파(楸灘公派), 월곡공파(月谷公派), 서하공파(西河公派), 학생공파(學生公派), 처사공파(處士公派), 증(贈) 판서공파(判書公派), 통사랑공파(通士郞公派), 만운공파(晩雲公派), 전서공파(典書公派), 행정공파(杏亭公派), 교위공파(校尉公派), 사인공파(舍人公派), 통덕랑공파(通德郞公派), 장춘공파(長春公派), 해성부원군파(海城府院君派), 판도정랑공파(版圖正郞公派), 징사공파(徵士公派) 시중공파(侍中公派) 등 31개파로 분파되었다.

 

(3) 해주오씨(海州吳氏) 추탄가문(楸灘家門)은 삼불후(三不朽)의 명문가(名門家)

 

① 삼불후(三不朽)는 언제까지나 없어지지 않는 세 가지를 뜻하는데 곧 입덕(立德), 입공(立功), 입언(立言)을 말한다. 
② 해주오씨(海州吳氏) 중 인조반정(仁祖反正)과 이괄(李适)의 난에 훈공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던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 공의 조카로서 병자호란 말엽 항복을 반대하여 청나라로 끌려간 삼학사(三學士) 중 한 분인 오달제(吳達濟), 공의 현손으로 영조 때 무신란(戊申亂)을 제압했으며 우의정(右議政)을 지낸 해은부원군(海恩府院君) 오명항(吳命恒) 등이 ‘덕업(德業)’, ‘충절(忠節)’, ‘훈공(勳功)’ 등 이른바 삼불후(三不朽)를 내세우며 명문가를 이끌었던 추탄가문(楸灘家門)의 인물이었다.
 
(4) 최초의 그림 족보인 ‘해주오씨족도(海州吳氏族圖)’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낸 오광정(吳光廷)이 작성한 것을 아들 사인(舍人) 오선경(吳先敬)이 도사(圖寫 : 그림을 그리거나 서책을 베끼는 일)하여 태종 1년(1401년)에 완성하였다. 이 족도의 체제는 표제(表題), 족도(族圖), 발문(跋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표제인 해주오씨족도(海州吳氏族圖)는 원래의 명칭이 아니고 후대에 첨부된 것이다. 성종 7년(1476년)에 작성되어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족보로 평가되는 안동권씨(安東權氏) 성화보(成化譜)보다 75년 전에 작성되었으며 종(從)으로 후손들을 도식(圖式)한 초기 형태의 그림 족보로서 조선 초기 가족사(家族史)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5) 해주오씨(海州吳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 『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해주오씨(海州吳氏)는 85가구 269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처사(處士) 수문(遂文) 후손이 고령군 성산면 무계리에 집성촌(集姓村)을 이루며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오주예(吳周裔)
시조(始祖) 검교군기감(檢校軍器監) 인유(仁裕)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 개국 초부터 설치되어 있었던 왕실(王室) 재정(財政) 관서인 내고(內庫)의 내고부사(內庫府使)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② 오민정(吳民政)
 내고부사(內庫副使) 주예(周裔)의 아들로 고려 중엽 태어났다. 고려 시대에, 경적(經籍 : 경서)과 축문(祝文)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아인 비서성감(祕書省監)의 비서감(祕書監)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③ 오찰(吳札)
비서성감(祕書省監) 민정(民政)과 원외랑(員外郞) 채춘(蔡春)의 따님 사이에서 태어났다. 태자첨사(太子詹事)를 거쳐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증직(贈職)되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④ 오승(吳昇)
증(贈)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찰(札)과 원외랑(員外郞) 집규(執圭)의 따님인 수원최씨(水原崔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의탁(依託)할 곳이 없는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아주는 구휼기관(救恤機關)인 동대비원(東大悲院)의 녹사(綠事)를 거쳐 중정대부(中正大夫) 전객사령(典客司令)에 증직(贈職)되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⑤ 오효충(吳孝冲)
동대비원녹사(東大悲院錄事) 승(昇)과 예부시랑(禮部侍郞) 신우(信佑)의 따님인 경주김씨(慶州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토산물(土産物)을 임금이나 윗사람에게 바치기 위하여 곡류(穀類)를 관장하던 풍저창(豊儲倉)의 승(丞)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⑥ 오사렴(吳士廉)
풍저창승(豊儲倉丞) 효충(孝冲)과 도제고(都祭庫) 판관(判官) 밀(密)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기상관측 등을 관장하던 관서인 서운관(書雲觀) 부정(副正)을 지냈다고 하기도 하고 궁중의 가마·마필·목장 등을 관장한 관청인 사복시(司僕寺)의 경(卿)을 지냈다고 한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⑦ 오희보(吳希保)
서운관(書雲觀) 부정(副正) 사렴(士廉)과 낭장(郎將) 윤부(允富)의 따님인 순천김씨(順天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용양위시위사(龍驤衛侍衛司)의 좌령호군(左領護軍)을 지냈다. 해주오씨(海州吳氏) 용인(龍仁) 입향조(入鄕祖)이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2) 조선시대

 

① 오중로(吳重老)
용양위시위사(龍驤衛侍衛司) 좌령호군(左領護軍) 희보(希保)와 사정(司正) 민(敏)의 따님인 원평서씨(原平徐氏) 사이에서 태종 13년(1413년) 태어났다. 통사랑(通仕郎) 괴산교도(槐山敎導)를 지냈다. 문종 2년(1452년) 졸(卒)하였다. 
② 오계선(吳繼善)
통사랑(通仕郎) 괴산교도(槐山敎導) 중로(重老)와 좌영호군(左領護軍) 의문(疑問)의 따님인 밀양박씨(密陽朴氏) 사이에서 세종 21년(1439년) 태어났다. 처음 참봉(參奉)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북평관제검(北平館提檢)을 거쳐 어모장군(禦侮將軍) 행(行) 용양위(龍驤衛) 부사과(副司果)를 지냈다. 문장(文章)으로 세인의  추앙을 받았다. 사부(詞賦 : 한시)가 뭇 사람의 입으로 전파되었다. 성종 25년(1494년) 졸(卒)하였다.
③ 오옥정(吳玉貞)
자는 정지(貞之)이고 용양위(龍驤衛) 부사과(副司果) 계선(繼善)의 아들로 태어났다. 저화(楮貨 : 닥나무로 만든 지폐)의 제조 및 지방 노비의 공포(貢布) 따위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 관청인 사섬시(司贍寺) 주부(主簿)를 거쳐 석성현감(石城縣監)을 역임하였다. 증손자 오윤겸(吳允謙)이 영의정(領議政)에 제수(除授)됨으로써 귀(貴)하게 되어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판서(吏曹判書) 겸(兼)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管)에 증직(贈職)되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④ 오경순(吳景醇)
석성현감(石城縣監) 옥정(玉貞)과 참의(參議) 소(訴)의 따님인 증(贈) 정부인(貞夫人) 연안김씨(延安金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중직대부(中直大夫) 신령현감(新寧縣監)을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인조 때 영의정(領議政)에 올랐던 추탄(楸灘) 오윤겸(吳允謙)은 공의 동생 오경민(吳景閔)의 손자이므로 공에게는 종손 (從孫)이 된다.
⑤ 오세검(吳世儉)
자는 언약(彦約)이다. 신령현감(新寧縣監) 경순(景醇)과 진사(進士) 수도(守道) 따님인 숙인(淑人) 평해손씨(平海孫氏) 사이에서 명종 6년(1551년) 태어났다. 선교랑(宣敎郞)을 지냈다. 광해군 3년(1611년) 졸(卒)하였다. 승정원(承政院) 우승지(右承旨)를 증직(贈職)받았다.
⑥ 오윤길(吳允吉)
자는 군실(君實)이며 증(贈) 승정원(承政院) 우승지(右承旨) 세검(世儉)과 부장(部將) 양례(陽禮)의 따님 함안조씨(咸安趙氏) 사이에서 선조 15년(1582년) 태어났다. 절충장군(折衝將軍)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내고 인조 14년(1636년) 졸(卒)하였다.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⑦ 오도람(吳道覽)
초휘(初諱)는 봉현(鳳賢)이며 자는 서윤(瑞允)이고 호는 삼손(三遜)이다. 처사(處士) 달량(達亮)과 득일(得一)의 따님 진주하씨(晋州河氏) 사이에서 인조 17년(1639년) 태어났다. 여절교위(勵節校尉) 수(守) 훈련원(訓練院) 첨정(僉正)을 지냈다. 병자호란 때 온 가족을 이끌고 남쪽인 성주군 독용(禿用) 산중(山中)으로 들어갔다. 호(號)를 삼손(三遜)이라 한 것은 징성(徵聲 : 명예를 버림), 회적(晦迹 : 종적을 감춤), 둔세(遁世 : 속세에서 도피함)의 뜻이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여절교위(勵節校尉) 수(守) 훈련원(訓練院) 첨정(僉正) 오도람(吳道覽)의 셋째 아들인 수문(遂文)이 숙종 재위기간인 1700년대 초반 성주에서 고령군 성산면 무계리에 입향(入鄕)한 것으로 추정된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오언백(吳彦伯)
통정대부(通政大夫) 명복(命復)과 철원(喆元)의 따님 숙부인(淑夫人) 김해김씨(金海金氏)사이에서 태어났다. 주부(主簿)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② 오성근(吳聖根)
자는 성집(性執)이다. 처사(處士) 재영(在泳)과 유형(惟衡)의 따님 안동권씨(安東權氏) 사이에서 고종 2년(1865년) 태어났다. 고종 32년(1895년) 을미개혁(乙未改革) 때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의 회의체를 폐지하고 이를 대체한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을 지냈다. 1942년 졸(卒)하였다.
③ 오시환(吳時煥)
자는 자중(子仲)이다. 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 성근(聖根)과 김해김씨(金海金氏) 사이에서 고종 19년(1882년) 태어났다. 조선 시대 왕명을 받들어 죄인을 추국(推鞫 : 중죄인의 심문)하던 의금부(義禁府)의 도사(都事)를 지냈다. 1942년 졸(卒)하였다.

 

(2) 근∙현대 인물

 

① 오규황(吳圭晃) : 교장, 경상북도 교육청 장학관
② 오규욱(吳圭昱) : 고령 인수당약국
③ 오규병(吳圭昺) : 교장, 경상북도 교육청 장학관
④ 오순자(吳純子) : 교장
⑤ 오판룡(吳判龍) : 영남일보 편집국장
⑥ 오규홍(吳圭洪) : 농수산부 농정자문위원
⑦ 오규복(吳圭福) : 경일수의과병원장
⑧ 오휘웅(吳輝雄) : 부이사관, 대구시청 위생과장
⑨ 오규화(吳圭化) : 한국스카우트경북연맹 사무국장, 불교연맹 부연맹장, 해주오씨대구경북대동종친회 사무국장
⑩ 오경석(吳敬錫) : 대구지방법원판사, 법무법인 천마 변호사 해주오씨대구경북대동종친회장
⑪ 오규준(吳圭俊) : 미국L.A대표 평화통일자문위원
⑫ 오규실(吳圭實) : 수의학박사, 대구 수성대학교 교수
⑬ 오천석(吳天錫) : 의학박사, 한일안과 병원장
⑭ 오규인(吳圭寅) : 행정사무관, 대구 수성구청 시지1동장
⑮ 오상석(吳相錫) : 대구광역시 중구 의회 의장
⑯ 오규천(吳圭千) : 의학박사, 오준영치과병원장         
⑰ 오규천(吳圭天) : 공학박사, 두산ENC㈜대표
⑱ 오세협(吳世協) : 공학박사, 한국과학표준연구원 연구사
⑲ 오경석(吳京錫) : 의학박사, 닥터오성형외과병원장
⑳ 오원석(吳元錫) : 수의학박사, 오원석황금수의과병원장
㉑ 오해석(吳海錫) : 공학박사, 삼성전자근무

 

자료제공 : 후손 오규화(吳圭化)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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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주오씨 이로재(성산면 무계1길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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