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진이씨(碧珍李氏) 남계공파(枏溪公派)·동추공파(同樞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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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벽진이씨(碧珍李氏) 남계공파(枏溪公派)·동추공파(同樞公派)

본지는 ‘고령지역 세거성씨(世居姓氏) 연원(淵源)을 찾아서’를 격주로 기획 연재한다. 씨족연원(氏族淵源), 현조(顯祖), 고령입향(高靈入鄕) 내력 및 시기, 입향조(入鄕祖) 이 후 역대 인물 등을 문헌적 고증(考證)을 근거로 밝힘으로써 각 문중 고유의 씨족연원(氏族淵源), 열조(烈祖)들의 위업(偉業), 올곧은 정신 및 문화유산(文化遺産)을 이해하는 계기를 마련코자 하오니 관심 있는 문중들의 많은 참여를 바라며, 이번호에는 벽진이씨(碧珍李氏) 남계공파(枏溪公派)·동추공파(同樞公派)를 소개한다.

1. 씨족연원(氏族淵源)


(1) 벽진이씨(碧珍李氏) 시조(始祖) 이총언(李忩言)


① 고려사 열전 권제5에 수록된 이총언(李忩言)의 기록을 소개하면 “이총언(李悤言)은 사서(史書)에 세계(世系)가 전하지 않는다. 신라 말 벽진군(碧珍郡)을 지킬 때에 도적떼가 매우 많았는데, 이총언이 성을 견고하게 하고 굳게 지켜 백성들이 덕분에 편안하였다. 태조는 사람을 보내 같이 힘써 싸워서 재앙과 변란을 평정하자고 타일렀다. 이총언은 서신을 받고 매우 기뻐 아들 이영(李永)을 보내 군대를 이끌고 태조를 따라 정벌하게 하였다. 이영은 당시 18세였는데, 태조가 대광(大匡) 사도귀(思道貴)의 딸을 아내로 맞게 하였다. 이총언을 본읍(本邑) 장군(將軍)에 임명하였고, 이웃 읍(邑)의 정호(丁戶) 229호를 더 하사하였다. 또 충주(忠州)·원주(原州)·광주(廣州)·죽주(竹州)·제주(堤州) 창고의 곡식 2,200석과 소금 1,785석을 주었다. 또 손수 쓴 편지를 보내 쇠와 돌 같은 신의를 보이며 이르기를, “자손대에 이르기까지 이 마음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총언은 감격하여 병졸들을 단결시키고, 군량미를 쌓아놓고 대비하였다.〈이총언이 지키던〉고립된 성이 신라와 백제가 반드시 다투는 지역에 끼어 있었으므로, 홀연히 동남쪽에서〈태조를〉성원해줄 수 있었다. 태조 21년(938)에 죽었고, 나이는 81세였다. 아들은 이달행(李達行) 및 이영(李永)이다.”
② 태조가 삼한(三韓)을 통합하는 정토대업(征討大業)에 공을 세워 벼슬이 고려삼중대광개국원훈벽진장군(高麗三重大匡開國元勳碧珍將軍)에 이르렀다. 따라서 후손들이 벽진(碧珍)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 오고 있다. 벽진(碧珍)은 성주(星州)의 옛 이름이다.
③ 벽진이씨(碧珍李氏) 본원(本源)의 기록에 “성주의 이씨가 셋이 있으나 벽진장군(碧珍將軍)에서 나온 이씨가 가장 오래되었다”고 한다.
(2) 생육신(生六臣) 이맹전(李孟專)과 거유(巨儒) 이항로(李恒老)를 배출한 명문
①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죽은 사육신에 대비하여 목숨을 잃지 않고 살았지만 평생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살았던 사람을 생육신이라 하는데, 김시습(金時習)·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조려(趙旅)·성담수(成聃壽)·남효온(南孝溫)이다. 사육신이 절개로 생명을 바친 데 대하여 이들은 살아 있으면서 귀머거리나 소경인 체, 또는 방성통곡하거나 두문불출하며, 단종을 추모하였다.
② 거유(巨儒)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문하(門下)에서는 성리학(性理學)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배척하자는 위정척사(爲政斥邪)를 주장한 배일파(排日派)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을 비롯하여 유인석(柳麟錫)같은 창의호국(倡義護國)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3) 중파(中派) 기준 분파(分派)
① 산화공파(山花公派)에서 정헌공파(正獻公派)·판서공파(判書公派)·감무공파(監務公派)·참판공파(參判公派)·여은공파(麗隱公派)·도정공파(都正公派)로 분파하고
②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에서 전서공파(典書公派)·중랑장공파(中郞將公派)·평정공파(平靖公派)·감정공파(監正公派)로 분파하였으며
③ 금릉공파(金陵公派)에서 참판공파(參判公派)·사직공파(司直公派)·주부공파(主簿公派)·학생공파(學生公派)·첨지공파(僉知公派)·부사공파(府使公派)로 분파하고
④ 문정공파(文靖公派)에서 화수헌공파(花樹軒公派)·송암공파(松庵公派)·진조당공파(眞操堂公派)로 분파하였다. 따라서 소파(小派)기준으로는 96개 지파(支派) 이며 남계공파(枏溪公派)는 산화공파(山花公派)에서, 동추공파(同樞公派)는 문정공파(文靖公派)에서 분파하였다.


(4) 벽진이씨(碧珍李氏) 관내 세거(世居) 현황


①『2000년 인구주택총조사 성씨 및 본관보고서』에 의하면 고령군 관내에 벽진이씨(碧珍李氏)는 36가구 140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② 남계공파(枏溪公派) 후손은 쌍림면 용2리에, 동추공파(同樞公派) 후손은 성산면 대흥리에 세거하고 있다.

 

2. 현조(顯祖)


(1) 고려시대


① 이극송(李克松)
부호장(副戶長) 시회(時會)의 아들로 신종 5년(1202년) 성주 가리현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백운(白雲) 이상국(李相國) 규보(奎報) 문하에서 수업하여 유학 경전과 이학(理學)에 정통하더니 고종 23년(1236년) 병신방(丙申榜) 을과(乙科)에 급제한 후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판삼사(判三司) 겸지사관(兼知史官)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를 역임하였다. 청백(淸白)하고 강직(剛直)하였으므로 왕(王)은 그를 가리켜, “한옥(寒玉 : 차가운 옥)같은 정자(貞資 : 곧은 자태)와 추수(秋水 : 가을 강물처럼 맑은 정신)같은 정신(精神)을 지녔다”고 격찬(激讚)하여 빙옥(氷玉)이란 호(號)를 내렸으며 원종 15년(1274년) 졸(卒)하였다. 의성(義城)의 봉강사(鳳岡祠), 성주(星州)의 빙옥재(氷玉齋)에 제향(祭享)하고 있다.
② 이견간(李堅幹)
일휘(一諱 : 본이름 밖에 따로 부르는 이름)는 정란(廷蘭)이며 자는 직경(直卿)이고 호는 국헌(菊軒)이다. 고려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등 3대의 조정에 걸쳐 벼슬이 통헌대부(通憲大夫)·민부상서(民部尙書)·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홍문관사(弘文館事)에 이르렀다. 충숙왕 4년(1317년) 정월에 원나라 사신으로 가서 상주객관(常州客館 : 현재 강소성 무진)에서 숙박하면서 두견새 우는 소리를 듣고 읊은 유명한 두우시(杜宇詩)가 전하며 홈실마을의 유래도 이 때에 생겨 이를 소개하고자 한다.
“奉使關東聞杜鵑 사신 가다가 관동에서 두견새 울음을 듣고
旅館挑殘一盞燈 객관에서 꺼진 등에 불 댕기니 한 점의 불뿐인데
使華風味澹於僧 꽃바람을 쐬게 하니 중보다 더 얌전히 너울거린다.
隔窓杜宇終宵聽 창밖에 두견새 밤이 다하도록 울어 예니
啼在山花第幾層 두견새 울음 산화(山花) 속에 쏟아지는 꽃잎들 몇 겹이나 쌓일꼬”

이 시가 세상에 퍼져 널리 회자(膾炙)됨으로써 세상 사람들이 그 시의 끝구절에 나오는 말을 따서 공을 ‘산화(山花) 선생’이라 부르게 되었다. 원나라의 순황제(順皇帝)가 공의 학덕과 풍모에 감탄하여 그가 거주하는 지역을 묻자, 공이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의 산천을 그림으로 그려 황제에게 바쳤다. 그 그림이 바로 소거산수도(所居山水圖)이다. 황제가 그림을 보고 지형특성상  마을에 물이 모자라겠다며 “걸수산(乞水山)의 물을 나무 홈통으로 끌어 온다는 뜻”으로 ‘홈통 명(椧)’ 자를 써서 명곡(椧谷)이라 마을 이름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하여 당시 마을 이름 호음실(好音谷)이 홈실(椧谷)로 바뀌게 된 것이다. 선생은 행의(行誼)가 고결(高潔)하고 학문이 굉박(宏博)하여 중국의 주(周) 나라 예악(禮樂)에 밝고 당(唐)나라 풍조의 문장에 능하여 그 당시 따를 사람이 없었으며 사명(詞命 : 왕의 말과 명령)을 맡아보기 20년에 사대부(士大夫)들이 그의 문장이나 풍채를 모두 우러러 보았다.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원나라의 태학사(太學士) 주방(周肪)과 같이 춘추대의(春秋大義)를 강론할 때, 주방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번 절하며 말하기를 “선생은 천하의 큰 선비로 삼한(三韓)의 문화가 이런 경지에 이르렀을 줄은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하였다. 충숙왕 17년(1330년)에 졸(卒)하였다. 시호(諡號)는 문안(文安)이며 성주의 문곡서원(汶谷書院)과 밀양의 용안서원(龍安書院)에 제향되었다.
③ 이대(李玳)
 호는 묵재(齋)이며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 견간(堅幹)과 상호군(上護軍) 유전(有全)의 따님 수원공씨(水原貢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충숙왕 6년(1337년) 충청도(忠淸道) 존문사(存問使)가 되었으며 충혜왕 3년(1342년) 밀직상의(密直商議)로서 삼도순무사(三道巡撫使)가 되었다. 충혜왕 4년(1343년) 졸(卒)하니 벼슬은 봉익대부(奉翊大夫)·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동의회도감사(同議會都監事)·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에 이르렀다. 문곡서원(汶谷書院)에 배향되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④ 이군상(李君常)
 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 대(玳)와 민부의랑(民部議郞) 의(毅)의 따님인 행주은씨(幸州殷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공민왕 1년(1352년) 좌대언(左代言)에 제수되었다가 공민왕 2년(1353년) 조일신(趙日新)의 난(亂)으로 화를 당하여 참수(斬首)당하고 가산(家産)을 몰수(沒收)당하였으나 그 후에 신원(伸寃)되어 관직이 복구되었으며 조선조에 손자 건지(建之)가 서해2도에 경락사(經略使)로 공을 세워 귀(貴)하게 되어 가선대부(嘉善大夫)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⑤ 이희경(李希慶)
가선대부(嘉善大夫)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증직(贈職)된 군상(君常)과 신호위(神號衛) 대장군(大將軍) 천부(天富)의 따님인 나주나씨(羅州羅氏) 사이에서  차남으로 충혜왕 4년(1343년) 태어났다. 부친이 조일신(趙日新)의 무리로 화를 당하자 연좌(連坐)되어 봉졸(烽卒)로 유배되었으나 부친이 억울하게 지은 죄를 풀어줌에 따라 중현대부(中顯大夫)·비순위(備巡衛) 대호군(大護軍)에 이르렀다. 우왕 3년(1377년) 경상도(慶尙道)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로서 울주 가수원(加樹院)에서 왜구의 잔병에게 해를 입어 졸(卒)하였다. 조선조에 아들 건지(建之)가 귀(貴)하게 되어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되었다.
⑥ 이언(李彦)
호(號)는 소심헌(小心軒)이며 시호(諡號)는 충독(忠篤)이다. 봉상대부(奉尙大夫).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검교내시부사(檢校內侍府事)를 역임하고, 이태조(李太祖)를 도와 많은 공(功)을 세워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녹훈(錄勳)되었으며 강원. 전라감사(江原全羅監司)를 지냈고 후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贈職)되었다.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이다.


(2) 조선시대


① 이신지(李愼之)
가선대부(嘉善大夫)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증직(贈職)된 군상(君常)과 신호위(神號衛) 대장군(大將軍) 천부(天富)의 따님인 나주나씨(羅州羅氏) 사이에서  사남으로 태어났다.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을 지내고 아들 명겸(鳴謙)이 감사(監司)를 지내는 등 귀(貴)하게 되어 자헌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다. 성주 명곡(椧谷)에서 창녕 합산(合山)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생몰년(生沒年) 미상(未詳)이다.
② 이호겸(李好謙)
증(贈) 이조참판(吏曹參判) 신지(愼之)와 처사 옹(雍)의 따님인 안동권씨(安東權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통훈대부(通訓大夫)·흥해군수(興海郡守)를 지냈다. 선정(善政)을 하였으며 청백(淸白)으로 명성이 드러났다. 손자 장곤(長坤)이 의정부(議政府) 우찬성(右贊成)이 올라 귀(貴)하게 되어 자헌대부(資憲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증직되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③ 이승언(李承彦)
자는 사웅(士雄)이고 호는 동원(東園)이다. 흥해군수(興海郡守) 호겸(好謙)과 종묘령(宗廟令) 진언(眞言)의 따님인 고령박씨(高靈朴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다. 성종 3년(1472년) 생원시(生員試)에서 장원(壯元)을 하고 진사시(進士試)에서 2등으로 입격(入格)하였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등과 도의지교(道義之交)하였으며 벼슬은 한성참군(漢城參軍)에 이르렀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④ 이장성(李長城)
한성참군(漢城參軍) 승언(承彦)과 이조참판(吏曹參判) 래(徠)의 따님인 전주이씨(全州李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중종 때 조산대부(朝散大夫)·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을 거쳐 운봉현감(雲峰縣監)을 지냈다. 운봉현감(雲峰縣監) 재임 중 선정(善政)을 베풀어 거사비(去思碑 : 선정비)가 세워졌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⑤ 이수남(李水南)
자는 중일(仲一)이며 운봉현감(雲峰縣監) 장성(長城)과 현감(縣監) 윤형(允亨)의 따님인 진양정씨(晋陽鄭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중종 29년(1534년) 갑오(甲午) 진사시(進士試)에 입격하였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⑥ 이중무(李重茂)
자는 회부(晦敷)이고 호는 남계(枏溪)이다. 장사랑 진(縉)과 참봉(參奉) 양좌(良佐)의 따님인 순천박씨(順天朴氏) 사이에서 선조 1년(1568년) 태어났다. 선교랑(宣敎郞)을 지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처남(妻男)인 광산이씨(光山李氏) 육일헌(六一軒) 이홍량(李弘量)이고 이중무(李重茂)의 배위가 육일헌(六一軒) 이홍량(李弘量)의 따님이므로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공의 처고모부가 된다. 일찍부터 과업(科業 : 과거를 보는 데 필요한 학업)을 멀리하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던 중 임진왜란을 당하여 고향 의령을 떠나 합천 숭산의 외가로 피란하여서 외삼촌 박이문(朴而文)과 박이장(朴而章) 형제에게 학문을 익히다가 사양(泗陽)에서 강학하고 있던 한강(寒岡) 정구(鄭逑)를 찾아가 그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굉필(金宏弼)이 소요(逍遙 : 거닐던)하던 합천군 가야면 매안리에 소재한 한훤당(寒喧堂) 구지(舊址)인 지동암(志同巖)에 소학당(小學堂)을 짓고 내제(內弟 : 손아래 처남)들과 같이 학문을 강마하면서 김굉필의 유풍(遺風)을 사숙(私淑)하였다. 굳센 선비의 기개와 청아한 지조가 있어 광해군 9년(1617년) ‘살제폐모(殺弟廢母)’의 변이 있자 분연히 소(疏)를 올려 이의 부당함을 간하였다. 정조 4년(1780년) 합천 가야면 숭산에 소재한 회산서원(會山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남계문집(枏溪文集)』4권이 있다.
(註釋 ) 살제폐모(殺弟廢母)
형제를 죽이고 모친을 폐함을 뜻한다. 즉 광해군이 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모친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시킨 사건을 말한다.

 

3. 고령(高靈) 입향(入鄕)


(1) 남계공파(枏溪公派) 이중무(李重茂)의 후손은 공의 7세손 지흥(之興)이 1800년경 합천 초계에서 쌍림면 용2리에 입향하였다.
(2) 송암(松菴) 이두남(李斗南)이 1500년대 초반 의성군 가음면 가산리에서 고령군 성산면 대흥리로 입향하였으나 장증손(長曾孫) 희증(希曾)은 다시 성주군 초전면 어산리로 이거(移居)하였고 차증손(次曾孫) 희민(希閔) 즉 동추공파(同樞公派) 후손은 계속하여 이곳에서 세거하고 있다.

 

4. 입향조 이후 역대 주요인물


(1) 조선시대


① 이두남(李斗南)
 자는 자망(子望)이고 호는 송암(松菴)이다. 신령현감(新寧縣監) 고(考)와 연안이씨(延安李氏) 사이에서 성종 4년(1473년) 태어났다. 벼슬은 통훈대부(通訓大夫)·인제군수(麟蹄郡守)를 지냈는데 치적(治績)이 많아 선정(善政)을 기리는 애향비(愛鄕碑)가 있다. 중종 28년(1533년) 졸(卒)하였다.
② 이흡(李翕)
자는 합우(合羽)이고 호는 가현재(嘉峴齋)이다. 인제군수(麟蹄郡守) 두남(斗南)과 현감 윤희(胤禧)의 따님인 청도김씨(淸道金氏) 사이에서 중종 4년(1509년) 태어났다. 동주(東洲) 성제원(成悌元)의 문하에서 수업하고 일천(逸薦)으로 참봉(參奉)·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에 제수(除授)되었으나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선조 4년(1571년) 졸(卒)하였다.
(註釋 ) 일천(逸薦)
유림에서 학식과 덕망이 있는 선비를 추천하여 관직에 나가게 하는 제도를 말한다.

③ 이희증(李希曾)
 자는 흠성(欽聖)이고 호는 봉와(鳳窩)이다.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된 응양(應良)과 청평군(淸平君) 참덕(參德)의 따님인 청주한씨(淸州韓氏) 사이에서 태아났다. 군자감(軍資監) 주부(主簿)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④ 이희민(李希閔)
 자는 곡성(谷聖)이고 호는 남강정(南江亭)이다. 수직(壽職)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생졸년(生卒年) 미상(未詳)이다.

 

자료제공 : 후손 이춘언(李春彦)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편집국장 최종동(崔鍾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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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학당(합천군 가야면 매안리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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